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앞으로 이분들을 찬양대로 세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사들이 아마 찬양대를 겸하여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엄청 은혜 받았습니다. 박수는 치지 마세요. 왜냐하면 박수는 performance, 예술 공연에 대한 것이고 이건 예배니까 아멘 하면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박수를 쳐야 하는데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박수를 치기 보다는 아멘 하면서 감동어린 표정을 지으면 됩니다. 유월에 때 이른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집에 비새는 사람이 있습니까? 축대 잘 보시고 비명으로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비산동 어떻습니까? 집은 다 괜찮아요? 우리는 집에서 비가 새서 2주 전에 이미 고쳤습니다. 행간에 비가 주룩주룩 새는데 큰 세숫대야를 펼치고 물을 빼 냈습니다. 우리 모든 토목공학적 구조물들이 형편없습니다. 너무 거짓과 부조리가 난무하기 때문에 우리가 든든히 서 있다고 느끼는 집안 축대도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죄는 정직하지 못한 죄입니다. 대한민국이 가장 하나님께 징벌을 살 만한 죄는 특권층의 부정직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의 가장 원죄는 뭘까? 가진 자, 배운 자, 유력자가 행복을 독점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전파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세례요한의 자기 소명인 겁니다. 세례요한이 1장 23절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이 본문은 이사야의 글을 읽어야만 실감이 나기 때문에 이사야 글을 읽겠습니다. 이사야 40장 펴보시기 바랍니다. 1-3절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장소가 광야죠? 이사야 40장에서는, 그런데 마가복음 1장에서 시작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는 곳이 광야로, 줄단락이 잘못됐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광야에서가 in the wildness가 앞으로 간 겁니다. 70인역 번역과정에서는 번역이 약간 잘못된 겁니다. 그런데 외치는 자의 소리가 이르되 광야에서 길을 예비하라, 길을 예비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개가 똑같기 때문에 번역이 잘못됐다고 볼 수 없는 겁니다. 왜? 광야는 여호와의 목소리가 대변되는 장소임과 동시에 또 길도 예비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결국은 복음서의 번역은 틀린 번역이 아니라 용납될만한 free translation 자유형입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뜻을 4절에 갈 때까지 모릅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이 높낮이가 다른 산악지역과 계곡지역이 평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구나, 다시 말해서 높은 지역이 땅을 깎아서 계곡을 메울 때 평탄하게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그러니까 시급 4320원 받는 대학생들은 골짜기라고 볼 수 있고, 삼성전자 사장단이 받는 연봉 270억은 산이라고 볼 수 있고, 우리 교수들은 언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회의원 소득들을 정기 2년 마다 검사해보면 항상 올라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동산 값이 올라가기 때문에 자산 가치가 올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급 공무원 1,2급 공무원, 국토개발에 모든 정보를 다 가진 공무원들, 그 언저리 동창, 동문들 그 동문에 동문들 동문의 친척들의 47%가 다 강남의 땅을 다 독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강도떼들을 여의도에 뽑아 놓은 겁니다. 법적으로 강도떼들을 여의도에 뽑아 놓고 대검찰청 법원 언론 종교계, 적어도 7% 이내에 독점과 탐욕의 화신들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딱 쥐고 있는 것입니다. 7% 정도밖에 안 됩니다. 전부 다 해도, 7%의 탐욕과 독점의 화신들이 우리 5천년 역사를 지배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걸 외쳐서, 과연 외치는 목소리 하나 가지고 골짜기를 어떻게 돋울 수 있으며 산을 어떻게 낮출 수 있는가? 이게 가능한 일인가? 간디의 마지막 제자, 끝가지 간디를 찾았던 비누아 바베는 지주들을 찾아다니면서 수십만 평의 땅을 꾀어서 설득해서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무상분배를 했습니다. 그것도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택동은 중국농민들, 레닌은 러시아 농민들을 데리고 다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역사 안에서 혁명이 성공했다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역사 안에서 혁명이 성공했다는 것은 굉장히 깨닫는 바가 많습니다. 역사 안에서 혁명이 성공했다는 것은 지금 7%도 안 되는 소수의 탐욕과 배제와 독점의 화신들이 갖는 이 역사는 혁명적 개혁의지를 가진 백성들이 나타날 때까지는 절대로 개선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 네덜란드 대혁명, 중국혁명, 러시아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이 모든 혁명들은 전부 다 성공했죠? 이 혁명들이 성공했는데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거의 없었는데 하나님의 대의가 출렁거리는 해일처럼 민심을 싸고도니까 엄청난 역사의 반전이 일어났는데, 지금 우리가 47%나 되는 고급공무원 독점재벌들, 탐욕과 배제의 화신들의 땅을 빼앗아서 농민들한테 시급 4320원짜리 대학생들한테 주는 게 힘들어 보이죠? 그런데 혁명의 최초의 시초에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혁명의 발원지입니다. 혁명의 발원지, 외치는 자가 누구로부터 영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공급받아야 하느냐면 하늘법정 천상의전에 의해서 하달된 확신을 가져야만 외치는 자의 소리가 끊임이 없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외쳤습니다. 예레미야는 23년 동안 외쳤지만, 예레미야는 나라가 몰락하는 예언을 23년 동안 하고 나라가 몰락하는 예언이 23년 만에 성취되는 걸 보고 예레미야는 자폭하는 겁니다. 민족멸망을 예언하고 자기도 멸망한 겁니다. 너무 비운의 사나이죠? 저는 지금 계속 우리 민족의 근본 죄악은 불평등, 특권층의 탐욕, 배제와 독점 이런 것이라고 항상 외쳐왔습니다. 그리고 함경도는 종8품 종9품 이 정도의 무관 벼슬 외에는 한명도 나지 않았습니다. 임꺽정을 제가 이번 학기에 출퇴근하면서 다 읽었습니다. 이번 학기에 출퇴근하면서 2200원짜리 버스 위에서, 6호선 합정역 전철위에서, 751번 버스 세군데 갈아타면서 늘 아침마다 읽었는데 그 모두가 10권입니다. 48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입니다. 그걸 저는 메모까지 해가면서 다 읽었습니다. 논문 쓸 만큼 자세히 읽었습니다. 두 번씩 읽기도 했는데, 이 책의 핵심은 지금 양주 있죠? 양주. 임꺽정이가 파주 고양 임진나루 개성 경기도 이천 일대에 여러 성을 쌓아 놓고 평양감사가 올리는 진상품을 해주에서 다 빼앗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해주가 송악이 황해도 일대의 도적떼인데, 황해도가 왜 이렇게 많은 도적떼 후보자가 많나? 황해도가 왜 이렇게 도적떼가 많나? 소설의 중간에 나옵니다. 황해도에 도적떼가 많았던 이유는 두 가지다, 변방인데 군대 문제 하나하고 진상품이 너무 가혹하게 많습니다. 황해도는 경상남북도와 달리 물자는 없는데 너무 많이 노루를 잡아라, 녹용을 갖다 바쳐라, 계속 오는 겁니다. 임꺽정 소설의 핵심은 조광조에 대한 끊임없는 흠모입니다. 임꺽정은 명종 때, 1559년-1561년 사이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임꺽정 소설 핵심에 조광조가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조광조가 예수님입니다. 조광조가 누구입니까? 모든 조선 중앙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다 뿌리 뽑은 인물로 나옵니다. 그런데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죽었죠? 임꺽정 소설의 특징은 가진 자가 얼마나 끝가지 탐욕적이고 배제적인가, 배타적인가, 그리고 평안도, 함경도 사람을 얼마나 핍박하고 배제했는가? 이런 것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우리 민족의 근본 죄악은 탐욕, 배제, 배타, 독점입니다. 노무현은 이걸 극복하려고 했는데 실력이 너무 없는 채 대통령이 돼버렸습니다. 노무현은 그야말로 어떤 학자군도 없었습니다. 노무현이 친한 학자군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이 돼버린 겁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준비된 노무현적 가치를 학문으로 뒷받침할 학자 층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언론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뭡니까? 서울에 똬리를 뜬 모든 권력카르텔에 의해서 집중포화를 맞고 마침내 타살적 자살로 일생을 마무리합니다.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위로하라는 말뜻은, 나칸무 나칸무 이테르 아할르,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뜻은, 위로라는 말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응징과 신적보복이 들어갑니다. 응징과 신적보복이라는 말이 먼저 위로하라는 말 안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 그 본문을 빼 버립니다. 이사야 34장에 보면 신원의 해라는 말이 나오는데, 신원의 해라는 말을 빼 버립니다. 복수한다는 말을 예수님은 뺍니다. 예수님이 뺐는지 누가 뺐는지 모릅니다. 70인역이 뺐는지 몰라요. 다만 빠져있습니다. 복수라는 이 말은 로마제국의 권력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로마제국에 대한 항쟁의지를 고취시키기 때문에 뺐습니다. 그렇지만 위로하라는 말뜻은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위로하고 싶은데 지금 위로할만한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하나님은 천년을 두고 말씀하셔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소리치고 있는데,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소리치는 하나님의 마음에 영적감화를 받아서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서 광야로 나서서 백성을 위로하기 시작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사야가 위로하라고 천년 동안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하면서, 내가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겠습니다, 라고 딱 나타난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 말씀인 이사야를 깊이 연구하다가 한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싸고 있는 어둠을 깊이 분석했습니다. 이 땅의 아우성을 분석했습니다. 이 땅의 한숨 소리를 분석했습니다. 이 땅의 근본 모순이 무엇인가를 분석하다가 로마제국의 폭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지도자와 권력 엘리트들의 부패가 근본 모순인 것을 깨닫고 회개운동을 펼칩니다. 투쟁하지 않고 회개를 한 겁니다. 투쟁운동을 펼치지 않고, 로마 항쟁을 외치지 않고 회개운동을 먼저 벌이는 것은 세례요한의 머릿속에는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든다는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체가 모여 있는 곳에 독수리 떼가 내려오듯이 이스라엘이 지금 시체 덩어리가 되어 있는 겁니다. 시체의 산이 되었습니다. 시체가 되어 영적으로 부패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없는 백성이 되자마자 로마제국이 독수리 문양의 군함을 끌고 군부대를 이끌고 로마제국이 이스라엘 백성을 철두철미하게 뜯어먹고 있는 겁니다. 그 뜯어먹는 로마제국의 독수리문양을 가진 로마군대의 깃발을 보면서 시체를 살리는 길이 로마 제국을 진짜 몰아내는 길임을 깨닫고 시체 살리는 운동을 하는데, 그 시체 살리는 운동이 무엇입니까? 영적수성운동이 바로 뭡니까? 회개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하는 일이 뭡니까?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도록 만들어질 지어다, 히브리 문장으로 헤시브 문장입니다. 헤시브 문장이란 Let that will right(?), that was right, Let으로 시작되는 3인칭 명령법이 히브리말로는 헤시브 그러니까 3인칭 명령법을 히브리 문법에서 헤시브 문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겁니다. 산마다 낮아질 지어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질지어다, 수동태니까, by us, 누구누구에게서 이런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누구에 의해서 이 말씀을 듣고 감화 받은 사람에 의하여,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지어다, 될 것이다가 아니죠. 미래예측이 아니라 되게 하라, 누구에 의하여? 이 말을 듣고 영적으로 감화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그러니까 여러분 세례요한은 먼저 말씀을 통하여, 외치는 자의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순종의 무리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여 이스라엘 민심의 한복판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순종의 파편들을 모으고 순종의 인재들을 모아서 거룩한 공동체를 모으려고 했던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고, 세례요한의 의도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감화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By Kingdom of God, Thy be hallowed,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라는 말뜻은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구별할 한 무리의 성도들 거룩한 무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에스겔서 36장 20-22절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이방인 가운데서 여호와의 더렵혀진 이름, 이름을 성별시킬 거룩한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자기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방인 중에서 더렵혀진 하나님 이름을 깨끗하게 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해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토 안으로 하나님의 통치 권역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벨론에서 가나안 본토로 돌아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회개운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던 이방인의 영토에서 영적인 하나님의 통치권역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면서 탐욕과 배제와 배타의 논리로 엄청난 험산 준령이 생기고 골짜기가 생긴 이 땅을 하나님의 왕의 수레가 지나갈 만큼 평탄한 대로를 만들어, 이 평탄대로를 만드는 사역이야말로 말씀사역이면서 그게 외치는 자의 소리 사역입니다. 이 사역을 외쳤는데, 이 사역을 시작했는데 여기에 다윗의 예언자, 유대인들이 이 말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이 일에 마음이 상했고 서기관들이 마음이 상했고 유대인들이 이 일에 왜 마음이 상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요한복음에 다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요한이 23절에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이 말을 인용할 때 무슨 말도 인용했느냐면 이사야 40장 4절 말씀도 한 걸로 봐야 합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이 말 때문에 유대인들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보냈습니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이 말에 괄호 합니다. 유대인들, 배타와 독점과 탐욕의 화신들이, 예루살렘에 괄호 합니다. 배타와 탐욕과 배제의 본거지에서, 제사장들 레위인들 괄호하고, 배타와 탐욕의 가치를 전파하고 유지시키는 중간지식인들을 중간관리자들을 하나님의 소리인,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이 말은 생물학적인 기원을 물은 게 아닙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엄청난 운동을 벌이고 있느냐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의 운동, 지금 제가 오랫동안 세례요한과 거의 같은 말을 외쳤지만 저를 아무도 체포하지 않는 이유는 쉽게 말해서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에요. 만일에 제가 정말로 수십만 명이 가향교회에 모여들고 한강변에 와서 뛰어들자면 같이 뛰어들고 미친 척하며 세례요한처럼 한강에서 다 세례를 받으면 금방 저는 아마 이단 심문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불행히도 아무리 외쳐도 아직까지 너무 유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극히 저를 좋아하는 양진일, 백정우, 박규준 이 정도가지고 안 됩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와서 저를 위험에 빠뜨릴 만큼 엄청난 사람이 운집하면 저는 분명히 조사를 받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십 몇 년 했는데, 세례요한은 파괴력이 너무 컸습니다. 세례요한은 완전히 마다한 화살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해바닷가, 이스라엘 지도에서 사해 오른쪽 쿰란이라는 공동체에서 파송이 됐는데 쿰란이랑 사해 중간에 요단강이 있고, 쿰란에서 요단강을 건너면 바로 에론입니다. 에론 근처에 세례요한의 목을 땄던 헤롯 안티파스의 요새인 마케루스 요새가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어디서 목 베임을 당했느냐면 바로 자기가 세례를 주던 그 장소에서 가까운, 세례요한의 목을 땄던 헤롯 안티파스의 요새, 마케루스 요새에서 목을 땄다, 자세한 기록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케루스가 지금 세례운동을 하던 이 장소입니다. 지금 요르단에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전국민적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우리나라의 전국민적 회개운동을 펼친 사람이, 저보다 더 오랫동안 했고 수억의 돈을 날려서 회개하자고 외친 사람이 목민교회의 고영근 목사입니다. 그다음 김동엽 목사, 몇 사람이 훨씬 저보다 덜 유명한 사람들이 40년째 민족회개 운동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정규출판사에서 책을 안 내주기 때문에 자기 돈을 내서 자기가 이상하게 찍어서 계속 4천부씩 뿌리는데 국회의원 중에서 목민선교회의 회개하라는 책 안 받아본 사람이 없습니다. 김동엽 목사님과 고영근 목사님, 은성수도원의 엄두섭 목사님, 회개 오랫동안 외쳤습니다. 김홍전 목사님 최낙재 목사님 이런 사람들도 매우 섭섭하지만 회개를 외쳤습니다. 회개를 외친 예언자는 10명도 채 안 되지만, 정말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회개를 외치는데 이걸 절대로 전파하면 안 됩니다. 왜? 탐욕과 배제와 배타의 붉은 방백들이 우리의 모든 메시지를 바로 차단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도 지금 제가 공부한 것만큼은 유명하지 않습니다. 제가 바친 눈물만큼은 아직까지 절대로 제 진실이 다 알려지지 않은 상태, 거룩한 욕구불만이 저한테는 있습니다. 그 말은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알려지지 않고 그러나 가끔 제 책을 읽는 사람은 어디 갔다 나타나서 왜 이렇게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핀잔을 줍니다. 문제는 유명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메시지가 중간에 가면 방음벽에 의해서 차단돼버리고 전파가 안 된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그러나 잠잠한 하늘에 별처럼 이스라엘의 양심을 통렬하게 진동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에게 하는 말이, 너는 왜 골짜기를 메우려고 하고 산을 낮추려고 하느냐, 이것이 네 당대에 될 일이냐? 말로만 될 일이냐? 이렇게 시비를 걸어왔고, 네가 도대체 누구기에 이런 일을 하느냐, 이때 예수님 세례요한이 사역하던 이때 유대인들의 마음속, 민중 속에 앙망되는 세 인물이 차례차례 나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가장 앙망돼 왔습니다. 그리스도 BC 586년 이래로 400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가 없었죠? 예수님 때까지 이스라엘 나라가 없었습니다. 참다운 나라, 정통성 있는 이스라엘 남북 모두, 열두지파 모두를 걷어 모으는 왕이 없었습니다. 열두지파를 끌어 모으는 왕이 없었지만 열 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였던 북이스라엘 왕국은 다윗왕국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이미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거의 대부분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만이 유다 지파의 정통뿌리였던 다윗 왕에게 주셨던 약속을 믿었습니다. 유다지파가 다윗 왕에게 준 약속, 네 후손이 언젠가 끊어진 네 왕통을 이어 받고 전 세계로 흩어졌던 이산 이스라엘 난민들을 모을 것이며 다시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우뚝 서서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며 세계 만민이 시온성으로 몰려드는 날이 온다, 그날이 계시할 날이 이스라엘 다윗의 후손 이상왕 메시야다, 이런 약속을 믿고 있습니다. 그날만이 올 것을 계속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이란 말이 이스라엘을 대신했느냐면, 이런 다윗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거의 다 유대인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은 이제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이름은 사라지고 아셀지파, 바리엘의 딸 안나, 이런 사람도 예루살렘에 와서 메시아를 기다리죠? 열두 지파 중에서 이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믿는 사람이 전부 다 예루살렘 요소로 운집했기 때문에 사실상 열두 지파는 뭐라고 불려요? 유다지파의 약속인 다윗의 후손을 믿는 사람이 전부다 유대인이 됐어요. 그때부터 유대인이라는 말이 불리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대신에 유대인, 유대인은 뭡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다윗의 이상적 후손이 와서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끌어 모아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끌어 모으며 이스라엘의 국격을 전 세계에 높일 것이며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세계를 지배하시는 통치하시는 거소가 될 것이며 시온산은 세계만민의 순례지가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때부터 유대인으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열두지파가 유대인으로 불리는데, 다윗의 후손이 와서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끌어 모을 것이며 화해시킬 것이며 이스라엘 운명을 전 세계 속에 품격을 높일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다의 지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런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전부 다 유대인이 됩니다. 그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기존 종교권력들에 의해서 대표되는 종교권력을 그대로 수용하시고 세계를 무찌르고 로마제국을 물리쳐줄 강력한 군사적 이미지의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 이전에 엘리야가 와서 전 국민의 마음을 회복시켜서 메시야 시대의 돌입을 준비할 것으로 믿는 엘리야 대망론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 그다음 그 선지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신명기 18장 15절에 나오는 종말에 제2의 모세, 재림모세 같은 선지자가 와서 율법을 크게 가르칠 때가 올 것이다, 이 모세 같은 선지자가 사실상 다윗의 후손왕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북 이스라엘 왕국 사람들은 유다 왕실의 메시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메시아, 그 선지자를 믿었습니다. 그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북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믿고 있던 메시아가 바로 그 선지자입니다. 이 ‘그 선지자’라는 말은 수가성 여인의 입에서도 나오는 선지자입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은, 유다지파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왕 메시아인 그리스도를 믿었고, 북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은 그 선지자를 믿었습니다. 그 선지자는 모세를 닮은 선지자, 그다음에 이 선지자와 다윗의 후손 메시아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엘리야가 와야 한다는 설을 믿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그 선지자, 그리스도는 BC 586년부터 예수님 오실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 마음속에 북극성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을 기다리면서 존재해온 역사입니다. 그들이 올 것을 믿으면서 400년 동안을 보낸 겁니다. 여러분 400년 너무 길죠? 참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를 아시면, 가나안 히브리 노예가 400년 동안 이집트에 살았죠? 우리 분단체제가 400년까지 갈 수 있어요. 아주 무서운 것은 400년 동안 분단이 될 수 있어요. 이번에 70년 주기설로 해석이 안 되면 우리는 400년 장주기로 가는 거예요. 저는 70년 만에 될 줄 알고, 2015년에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2015년이 4년밖에 안 남았어요. 이때 김정일이 죽든지 누가 죽든지 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나는 거거든요. 우리가 이걸 미신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어림잡이 구원역사에 의하면 70년 장주기가 가장 큰 건데 이것보다 진짜 큰 것은 400년 만에 하나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엘리야, 그 선지자, 그리스도는 400년 동안 이스라엘의 흩어진 민심을 끌어 모으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입니다. 네가 이 세 사람 중에 누구냐? 대답하라, 하니 나는 이 세 사람 중 누구도 아니다, 나는 이사야 40장 3절에 나오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17장, 마태복음 11장 14절 두 군데서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세례요한이다, 결국은 그 선지자도 이 세례요한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그 선지자도 결국은 엘리야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그 오리라고 한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라고 주장했지만 세례요한 자신은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참 신비합니다. 세례요한은 감히 내가 그 엘리야다, 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라고 말함으로써 세례요한과 예수님 자신의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말라기 4장 4-6절이죠? 엘리야가 전국민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킨 후에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게 됩니다. 24-25절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이 세례라는 말은 에스겔서 36장 25-26절에 나옵니다.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에 대리하여 제2의 언약체결 사건을 주도하는 사람이 물로 사람을 씻깁니다. 여러분 기억납니까? 출애굽기 19장 11절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15절 ‘준비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고’ 14절 ‘백성을 성결하게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몸을 성결하게 하고 자기 옷을 빠는 이 일은 거대한 새언약체결식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서 36장 25-26에 새 언약이 체결될 때 물로 씻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물로 씻는 이 일을 세례요한이 주도하니까 에스겔서 36장 25-26에 예언하던 새 언약식이 시작된 걸 암시하니까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왜 씻기려고 하느냐, 우리를 씻겨서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것이냐, 그렇게 말합니다. 26절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이때 바로 예수님이 그 자리에 서 있던 걸로 상정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우리는 오늘 이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신적응징과 거룩한 평탄작업을 통하여 모든 육체가 하나님 영광을 보는 그 날을 하나님은 너무나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이사야 40장 5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왜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높은 산이 낮아져야 하는 이유는 뭐죠? 골짜기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 은총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겁니다. 그다음 저 높이 가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가 신적인 영광을 누리기 때문에 초월적인 하나님 영광을 기대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높이 올라간 자기 영광에 도취돼 있는, 시돈왕과 바벨론왕과 같은 그런 높은 자기도취적 영광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잘라지고 베임을 당하여 그 잘라지고 베임을 당한만큼이 골짜기로 떨어지면 골짜기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은총을 경험하면서 영광을 보게 되고, 자기영광의 도취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허영심에서 깨어나면 참 하나님 영광을 보게 되니까 모든 육체가 하나님 영광을 보게 되죠.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위로하라, 위로하라고 외치는데, 천년만년 간 하나님은 말씀 안에서 외쳐오는데 이 말씀에 반응하여, 예 제가 외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서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이 돼버립니다. 하나님을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이 되게 만들려면 불순종의 카르텔을 형성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 불순종하기로 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귀를 닫아 버리면 아무도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59장에 하나님 말씀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16절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이것 보십시오. 중재자가 없는 걸 너무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 말씀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둠에 켜켜이 싸여 있는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아우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골짜기 아래 떨어진 사람과 높은 산 위에서 자기 영광에 도취된 사람들의 동태를 잘 파악해서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영광에 목말라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다음 하나님 말씀을 읽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골똘하게 읽은 사람과 골짜기 아래 쳐진 사람들 아우성에 눈을 고정시키면서 저 거짓된 자기영광에 도취되어서 하나님 없이 사는 저 불쌍한 탐욕과 배제의 화신들을 다 익숙하게 아는, 이 두 세계를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감흥이 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20대 때 여러분이 왔어요? 네 제 인생을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데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감흥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의식과 말씀이 둘 다 중화가 될 때 예언자가 태어납니다. 가향에서 탁월한 말씀의 종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가향에서 이 민족의 영혼을 울리고 말씀만으로 그 돋워진 마음으로 왔던, 높은 자고한 마음으로 왔던 사람이 가향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 한 번 듣고 쑥떡 그 높은 고도가 잘려서 바로 계곡 아래로 그 흙을 제공할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의 거룩한 도륙이 제단에 일어나기를 바라고, 제가 죽고 나서 앞으로 10년 후, 100년 후, 50년 후 이 가향에서 그런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위로하는 것은 신적보복과 평탄작업이 들어가기 때문에 반드시 사회갈등을 유발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사회갈등을 유발하고, 괄호하고 혁명까지도 포함하는 사회갈등이 유발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전한다는 이 일은 자기 목숨을 위험하게 하는 일로 너무나 힘듭니다. 그래서 <레 미제라블>을 보세요. 프랑스 대혁명이 철저한 제공을 했어요. 나폴레옹 쿠데타, 이 모든 것을 다 보고나서 쓴 소설이 <레 미제라블>입니다. <레 미제라블>의 핵심은 탐욕과 배제의 그 상층부, 피의 폭력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착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회개하고 끊임없이 수도사처럼 낮추어지는 길밖에 없다, 완만한 진보를 외칩니다. 그다음 또 하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부에 나오는, 그걸 꼭 읽어보세요. 조시마 장로가 유언으로 하는 러시아의 수도승을 읽어보면, 1881년 소설이거든요. 1917년 러시아 피의 혁명을 바라보고 러시아가 피의 혁명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러시아 수도승이 일어나서 불쌍한 노인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하는 장엄한 설교, 너무너무 눈물 나는 설교가 나옵니다. 러시아 수도승, 다 읽기 힘들면 이것은 꼭 읽으세요. 그걸 읽고도 눈물이 안 난다? 그건 인간도 아닙니다. 그다음 맑은 울림을 외치는 자가 전국적 파급 효과를 가져 온다, 저는 세례요한만큼 맑지 못합니다. 저는 자식도 키우면서 사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도전을 일으킬 만큼 많은 책을, 감화력을 끼치지 못했어요. 그러나 세례요한은, 누가복음 1장 80절입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즉, 빈들에서 하나님 말씀에 고도로 초점 잡힌 묵상을 하는 사람, 기도한 그 사람에게 훨씬 감응력이 큰 말씀이 위탁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평탄작업을 동원하기 때문에 이 백성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야 하고 막연하게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하면 안 되고,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진 사람들의 죄가 무엇인지, 높은 산들 위에 있는 거짓된 자기 영광에 도취된 사람의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회개할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것이 참 하나님 말씀입니다. 막연하게 이것저것 다 회개하라? 그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찬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골짜기 아래 굴러 떨어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마음이 뜨겁지만 헛된 자기 영광에 도취돼 사는, 그 높은 산 위에 사는, 비버리힐즈에 사는 헛된 자기 영광에 도취된 사람들, 그들도 하나님 영광을 보기 원하고, 그들도 높아진 고도와 그 자고한 마음을 낮추어서 뭐가 되기를 바랍니까? 골짜기 아래 흘려줌으로써 구원받는 것입니다. 높아진 산이 구원받는 길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사상이기도 합니다. 골짜기에 있는 흙을 퍼다 주는 겁니다. 그럴 때 참 인간이 되고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거룩한 영광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전부 다 높은 산이 아니고 전부 다 골짜기이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한테 길게 설교하면 안 됩니다. 아무튼 제가 이 설교를 언젠가는 강남에 가서 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9월 22일 대법원 신우회에 가게 됐는데 이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천 년간 만 년간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진 하나님의 백성들, 거짓된 높은 산봉우리에 살며 헛된 영광에 도취돼 사는 억조창생들을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는 날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대신할 예언자를 찾고 찾습니다. 그러나 응답하는 사람이 너무나 없습니다. 응답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서,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셔서 하나님 스스로 구원의 팔을 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가향에서 온 국민의 가슴 속에 특히 높은 산 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탐욕과 배제와 독점의 가치를 성육신 시키는 그 사람들 마음에 산이 뿌리째 뽑혀서 골짜기로 그 흙을 퍼다 날라주는 거룩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시고, 저희 가운데 이런 말씀 순종 운동이 물결치게 일어나게 해주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 종자로서의 목사와 설교 (0) | 2021.12.10 |
---|---|
요한복음 1:19-28( 예배설교) (0) | 2021.12.10 |
선천(先天) 안윤태 장로 기념 강의/안식일과 십계명 (김재진 교수 (0) | 2021.12.10 |
[김재진 목사] 살아계신 하나님 (0) | 2021.12.10 |
병원까지 안 가셔도 됩니다/마태복음 11:28-30 (0) | 2021.1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