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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9-28( 예배설교)

by 【고동엽】 2021. 12. 10.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장마가 시작돼서 여러분 사시는 가옥을 잘 체크하셔야겠습니다. 우리나라 집들 대부분이 기초가 많이 허물어져 있기 때문에 안전사고 당하지 않도록 꼭 좀 체크해주시기를 바라고, 또 비산동에 가신 공동체 지체 식구들 셋집이지만 주인의식 가지고 잘 체크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집에 물이 새서 2주 전에 공사를 했습니다. 주택조합에서 만든 집인데도 집이 엉성해서 비가 주룩주룩 새는 그런 상태입니다. 이번 장마철에 비 안 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주신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사장 가문에 엘리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사독계열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입니다. 뼈대 있는 집안 자손이었고 명문가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그가 예루살렘에서 만일에 정규교육을 받았다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또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장 80절에 보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 빈들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습니다. 세례요한이 빈들에 혼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있었다는 그 본문이 무엇인지, 뜻을 몰랐는데 1947년부터 1970년대까지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던 장소, 즉 1장 28절에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이 지점 부근에서 가까운 곳에 거대한 사막의 공동체 주거시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공동체 주거시설 용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공동체 구조물에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 필사본이 나왔습니다. 큰 물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작은 항아리가 많이 있습니다. 도자기가 많이 있었고 곡식 씨앗들이 발견되었고 주변에는 사해가 있고 좀 더 멀리에는 요단강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일까? 첫째 가설은 군 요새다, 둘째 가설은 도자기 공장이다, 셋째 가설은 수도공동체다, 그런데 그 지역이름이 쿰란 키르벳입니다. 그 지역은 사막에 풀이 없는 깨끗한 지역입니다. 쿰란이란 지역에서 똑같은 위도로 쭉 따라가면 요단강이 금방 나타나고 요단강 건너편에 헤롯 안티파스라고 하는 그 당시 분봉왕의 마케루스라고 하는 큰 산성요새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AD 70년과 90년 사이에 이스라엘 땅에 태어난 제사장 가문이면서 로마제국과 항쟁이 일어났을 때 항쟁군 사령관이었던 맛디아스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맛디아스 요세푸스는 갈릴리 항쟁 지도부 사령관이었어요. 로마제국과 맞싸울 때요. 맛디아스 요세푸스는 갈릴리 일대의 모든 애국적인 청년들을 총집결하여 로마제국 10연단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 사람이 체포되고 생포되어서 로마에 끌려가서 로마의 앞잡이가 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이 마지막으로 함락될 때 마이크를 들고 항복을 선무하는 선무공작장교가 됩니다. 그 사람이 쓴 대표적 책이 두 권 있습니다. <유대고대사> <유대전쟁사>입니다. <유대전쟁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사두개인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으로 특수한 종교집단을 소개했는데요. 에세네파라는 종교집단에 대해서 소개하고 그 에세네파가 광야에 나가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말이 나와요. 그런데 에세네파가 공동체 생활을 한 곳이 쿰란 지역인지는 몰라요. 다만 헤롯이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둬놓고 참수하여 사형을 시킨 그 장소가 마케루스라고 하는 바로 세례요한이 세례 준 베다니와 가까운 마케루스 요새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점을 이어볼까요? 누가복음 1장 80절에 나오는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이 ‘빈들’은 어디를 가리키느냐면 마케루스라는 그 요새에세 제일 가까운 요단강 근처 베다니에서 세례요한이 세례운동을 벌였어요. 세례요한이 세례운동을 벌이다가 헤롯의 학정을 고발했어요. 헤롯 분봉왕의 죄를 탄핵했어요. 그러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빈들은 어디일까? 빈들은 바로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던 베다니에서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똑같은 위도로 쭉 따라오면 바로 쿰란이 됩니다. 쿰란에 본부를 두고 있던 공동체의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죠? 어떤 공동체? 에세네파 공동체의 일원이요. 에세네파 공동체 일원으로써 세례요한이 세례운동을 하다가 요단강 근처에서 세례를 집중적으로 줬죠? 요단강 근저에서 세례를 집중적으로 주다가 바로 그 요단강 근처에 큰 요새, 산성궁을 가지고 있던 헤롯이 동생 아내를 가로채고 동생을 죽음으로 내 몹니다. 바로 그 사건을 보고 세례요한이 그날 트위터에 글을 올립니다. 인간백정, 짐승만도 못한 왕, X롯 왕, 이 근처에 산다, 이 트위터가 바로 헤롯 중앙정보부로 올라간 겁니다. 그날 헤롯의 생일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헤롯의 생일잔치 판에 동생의 아내였던 아내가 헤롯의 아내가 돼서 요염하게 앉아 있는데, 헤롯의 아내, 즉 동생의 아내였던 여자의 딸이 칼춤을 잘 춥니다. 전국칼춤선수권자입니다. 너무나 황홀하게 칼춤을 추니까 말을 합니다. 네게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줄게, 어떤 소원을 들어줄까? 이 딸아이가 어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어떤 소원이면 좋을까요? 하니까 땅을? 돈을? 달러를? 금덩어리를? 물으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요한의 목을, 세례요한의 목을 선물로 달라 해라, 왜? 자기의 비행과 자기의 학정과 자기의 간음사건을 고발하는 세례요한을 죽이고 싶으니까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헤롯대왕이 세례요한을 존경합니다. 왕이 되기 전에 세례요한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헤롯집안은 세례요한의 집안과 가깝습니다. 역사에 의하면 세례요한의 모든 경비를 헤롯의 궁중에서 충당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만큼 헤롯집안과 세례요한은 가까운 겁니다. 세례요한을 존경하고 있는 왕입니다. 자기가 존경하는 왕을 자기의 새 정부가 되고, 새 왕비가 된 여인의 청을 들어서 목을 따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라는 희곡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헤롯의 번민,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 영적지도자, 민족적인 양심의 목을 베어야 하는 헤롯의 자아분열이 작품에 잘 나와 있어요. 세례요한이 왜 헤롯의 궁중까지 파급력을 가지는 설교를 했는가? 첫째 마케루스 산성요새와 궁과 세례를 주던 장소가 너무 가까웠다, 둘째 이 일대가 헤롯 안티파스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의 비리가 가장 많이 알려져서 여기서 선포해야만 가장 흉악한 죄인들의 양심이 진동할 것 같기 때문에 거기서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자기를 씻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다 모여들었습니다. 물에 들어갔습니다. 전부 다 세례요한 앞에서, 세례요한이 물을 끼얹은 게 아닙니다. 전부 다 요단강에 공동 잠수를 합니다. 이 공동잠수라는 말은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움튼다는 뜻입니다. 그 근거는 에스겔서 36장 25-26절에 나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새 언약으로 결속시키는 통과의례가 뭡니까? 총체적으로 물로 몸을 씻는 겁니다. 물로 몸을 총체적으로 씻는 이 과정을 세례자 요한이 주도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은 무엇이죠? 정확하게 말하면 침수자 또는 침례자라고 해야 합니다. 세례라는 말보다 더 가깝습니다. 세례는 씻는 걸 말하죠? 씻는 것보다 더 강한 침례, 옛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가 갱생한다, 이런 뜻입니다. 침례자 요한 또는 세례자 요한이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 파급은 양심에 진동을 일으켰고 씻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경지가 어떤 경지일까요? 씻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경지, 한 번 설교를 듣고는 도저히 자기가 불결함에 사로잡혀서 잠잘 수 없는, 양심에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기가 막힌 설교가 세례요한에게서 나온 겁니다. 세례요한은 어떻게 이런 설교가 가능했을까? 지금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만,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동할 때까지 빈들에서 초점 잡힌 말씀묵상과 기도와 흑암으로 켜켜이 싸여 있는 역사를 응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적합한 표현은 누가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티베리우스 가이사는 로마의 2대 황제입니다. 로마의 두 번째 황제 티베리우스 가이사는 악한 황제의 대명사입니다. 티베리우스 가이사는 나쁜 사람, 이런 뜻입니다. 티베리우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안다면, 그런 사람이 15년째 왕이 됐다는 걸 안다면 이걸 알자마자 벌써 안 좋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티베리우스 가이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빨리 감 없이 읽는데 무식한 사람일수록 성경정독이 빠릅니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성경은 천천히 읽게 됩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그다음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때, 그다음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이 본디오 빌라도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사람들은 또, 와 갈수록 태산이다, 그다음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갈수록 태산이다, 그다음 헤롯이름이 네 번 나오면서 헤롯이름을 가진 녀석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4분의 1로 나누어서 4분의 1지역의 왕, 테트라아르크, 분봉왕이라고 번역된 말은 테트라는 4, 아르크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테트라아르크, 4분의 1지역의 왕들이 네 군데로 나누어서 분할 통치를 했습니다. 그다음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종교적 통치 경제적 각출, 그다음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제국으로 가는 징세, 로마제국의 첨탑 위에 티베리우스 가이사가 모든 독점과 배타와 탐욕의 화신들이 층층시하로 독점 배타 탐욕의 가치를 주창하는 그 티베리우스 가이사, 수리아총독, 유대총독, 4분의 1지역의 왕들, 대제사장들 그런 여섯 겹의 악마적 통치가 지배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그 말은 세례요한의 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세례요한, 그가 빈들에 있을 때 어떤 상태에 있을 때 말씀을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데 이 여섯 겹의 악마적 통치가 자아내는 그 답답함, 그 말할 수 없는 절망의 무게, 그 탄식을 온 몸으로 느낀 채 이 여섯 겹의 한계를 뚫고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이런 뜻입니다. 그런 고민이 깊다가, 그런 고민, 여섯 겹의 층층시하, 누가복음 3장 2절을 보면 그런 여섯 명의 통치자들을 묘사한 끝에, 빈들에 있는 세례요한이라는 말이 딱 나올 때 무엇을 가리키나요? 이건 문학적으로 약간만 훈련되면 알아요. 악한 여섯 명의 악한 통치자들과 이렇게 복합적으로 자아내는 그 말할 수 없는 답답함 속에서 하나님 말씀에 진동되었구나, 전율했구나, 그걸 알 수 있죠.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에 감응력을 키우려면 티베리우스 가이사부터 시작해서 분봉왕까지 이르는 층층시하의 통치 질서, 악한 권력질서의 폐해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알아야 한단 말이에요. 그래야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심해지고 하나님 말씀이 병거처럼 진동을 하고 세차게 온다는 말이에요. 세례요한은 어두운 역사의 도가니에서 나온 연단된 인물이에요. 어두운 역사는 무엇입니까? 인물을 키워내는 거예요. 어두운 역사, 다시 말해서 티베리우스 가이사, 4분의 1지역의 왕, 안나스와 가야바, 본디오 빌라도 총독 등 이 땅의 백성들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눈물과 아우성을 자아내는 그런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그들의 다스림을 온 몸으로 느껴볼 때 정말 멋진 세상에 대한 꿈이 일어납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불신검문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불신검문이라는 말은, 우리학교 다닐 때 독일 유학생이 맥스웰이라는 사람의 책을 가져오다가 안기부에 잡혀갔습니다. 안기부 공안수사대에서 칼 마르크스를 잡아내라고 하니까 맥스웰과 칼 마르크스를 구별하지 못해 잡아갔습니다. 그다음 윤흥길의 <완장>을 저는 가지고 있다가 잡혀갔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걸 가지고 있다가 잡혀갔습니다. 불신검문이라는 게 뭡니까? 가면 대개 경찰서에 가서 2박 3일간 유치장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보낸 20대에요. 그때는 양희은의 ‘긴 밤 지새우고’ 이 노래가 국민가요입니다. ‘아침이슬’은 찬송이 아닙니다. 그걸 부르면 서울대 온 아크로폴리스에 7천명의 대학생이 아침이슬을 부르자마자 26번부터 미대까지, 그 장광대열을 이룬 사람들이 보통 1만 명 정도가 신도림천을 떠나서 제2한강대교를 거쳐서 아현동으로 갑니다. 그게 우리 대학 때 일입니다. 그때는 ‘긴 밤 지새우고’를 부르면 왜 온 국민 온 국토가 하나가 됐습니까? 어둠의 역사가 주는 어둠의 부피와 질량이 똑같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티베리우스 가이사와 4분의 1지역의 분봉왕들, 안나스와 가야바와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권력의 담합을 통해서 철저하게 지배를 하지만 지금은 뭡니까?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전부 다 나일강에 집어 던지는 남성학살의 시대입니다. 용기 있게 저항하는 저항정신을 다 물에 빠뜨려 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대학생들은 시급 4320원을 받으면서도 데모할 때는 가지 않습니다. 시급 4320원 짜리 청춘을 보내면서 데모하지 못하는 불쌍한 대학생입니다. 이걸 뒤집고도 몇 번 뒤집어야 하는데 우리 50대 7080학번 대학생들이 그렇게 감옥가면서 그렇게 돌 맞아가면서 온 몸에 상처를 입어 가면서 이루었던 민주주의를 지금 젊은 대학생들은 투표율 22.4%로 보여줍니다. 20대 투표율은 22.4%, 60대 투표율은 70.4% 노인이 끌어가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생 청년들은 정말로 히브리 노예들이 채찍에 맞아서 자기 한 목숨을, 보십시오. 미꾸라지를 보면 모래 속에 숨죠? 자기가 미꾸라지인데 다 보이는데 숨어서 이 환난을 피하려고 하죠? 개인적으로 돌파하려고 합니다. 공동체로 돌파해야 합니다. 세례자요한은 티베리우스 가이사로부터 본봉왕으로부터 본디오 빌라도로부터 즉 여섯 겹의 악마적 통치질서가 자아내는 그 짙은 어둠을 온 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이사야를 폈습니다. 두루마리를 딱 펴자마자 이사야 40장이 딱 나타났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라고 선포하여라, 주의 수레, 왕의 수레가 지나가도록,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그 말씀을 보는 순간, 이사야 40장 1-6절을 보는 순간 세례요한 청년이, 세레요한은 서른 살 청년이었습니다.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 그 존재전체가 이사야 40장 1-6절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그는 걸어다니는 이사야 40장의 화신이 되어서 뚜벅뚜벅 걸어다녔습니다. 어떻게 높은 산을 낮출까요? 어떻게 깊은 계곡을 돋울까요? 하니까 에스겔 36장 25-26절이 떠올랐습니다. 맑은 물로 이스라엘 백성을 씻겨서, 출애굽기 24장 9절 11절 14절 15절에 있는 것처럼, 출애굽기 19장 11-15절에 있는 것처럼, 시내산 언약을 받을 때 백성들이 온 몸을 정결하게 하고 옷을 빨아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상태에 들어가듯이 그도 이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깨끗이 준비시켜라, 이것이 주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그래서 세례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운동을 펼쳤을 때 더러워졌다고 느꼈던 모든 불결함의 소유자들이 다 왔습니다. 그 불결함의 소유자들, 내가 너무 더러워졌다, 내가 너무 더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청량감 넘치는 메시지에 응답하면서 다 왔습니다. 전부 다 아멘으로 물에 깊이 다 잠수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거기 와서, 마태복음 3 6절입니다. 각자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각자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고백하는 그 자리에 왔습니다. 남들이 물에 빠져서 죄를 고백할 때 유대인들은 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 이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기 조상으로 믿는 강력한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종교지도자들은 정치권력을 나눠 가지면서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서 중간지배자로써 만족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괄호하고 로마의 학정체제를 그럭저럭 견뎌내면서 동족을 지배하는데 만족하는 현상유지 세력의 본거지가 예루살렘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괄호하고 중간지식인들, 나쁜 체제를 참이라고 가르치면서 그럭저럭 먹고 살면서 기생충 같은 지식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전 국민을 상대로 새 언약운동을 펼치느냐고 주장했습니다. 네가 누구길래, 구약성경에서 온 국민을 상대로 회개하라고 외칠 수 있는 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첫째 메시아 그리스도, 둘째 엘리야, 셋째 신명기 18장 15절에 나오는 모세를 닮은 그 전국민적 선지자, 네가 이 세사람 중에 한 사람인가? 세례요한입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점점 대답이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그러면 너는 도대체 누구길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누가복음 3장 1-6절을 읽어보면 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티베리우스 황제부터 시작해서 본디오 빌라도를 거쳐서 헤롯 분봉왕의 시스템, 이 전 세계체제에 나는 좌절하고 한이 맺혀서 하나님 말씀을 읽다가 이사야 40장에서 필이 꽂혀버린 사람이다, 나는 이사야 40장 메시지 두루마리를 삼킨 이래로 내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된 광야의 목소리가 되었다, 어쩔래? 이런 식으로 나왔습니다. 1장 23절에 나오는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이 말만 하면 벌써 이 사람들은 이사야 40장 1-6절을 안다는 것을 전제했기 때문에 짧게 지나갔습니다. 성경은 알고 읽으면 정말 감동이 많이 옵니다. 알고 읽으면 감동이 엄청 오는데 모르고 읽으면 감동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이 성경은 김영사로 말하면 8천 페이지입니다. 김영사 시스템으로 편집하면 성경 한 권이 8천 페이지 정도 나옵니다. 모세오경은 김영사 시스템으로 하면 1천 페이지가 나옵니다. 이걸 제대로 알고 읽으면 한 절 한절에 여러분도 굉장한 감동을 갖게 됩니다. 나는 이사야 40장 1-6절을 읽고 홱 돌아버린 사람이다, 어쩔래?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써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파송받은 사람이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우리시대에 세례요한적 인물이 나오려면 로마황제부터 시작해서 빌라도를 거쳐서 여섯겹의 악마적 통치질서가 자아내는 모순을 뼈저리게 경험해야 합니다. 일단 그 모순을 아는 사람이 예언자가 될 가능성이 비교적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 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책임적인 관여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역사에 대한 무한책임적인 관여, 하나님이 우리 역사에 대해서, 이 세계 역사에 대해서 무한책임이 있다는 걸 믿어야만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젊은 20대 청년 여러분,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사람답게 사는 일이 매우 힘든 시대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내가 이 시대의 거대한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린 지 열 다섯해가 되던 해,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총독으로 있을 때, 무자비가 철권 억압 통치 지배자가 계속 있는 이런 역사를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말씀으로 생명의 사상으로 광야에서 외쳐서 이런 악한 통치질서 기조를 허물어뜨리지 않으면 여러분 모두 다 피해자가 됩니다. 절대로 여러분께서 나는 삼성에 취직했으니 되었어, 나는 교수가 되었으니 되었어, 나는 정규직이라는 구원을 받았으니 되었어, 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정규직도 구원이 아니고 삼성도 구원이 아니고 어떤 직장도 지금은 구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제 후쿠시마 동북부 지방에서 핵 물질이 지금 나오는데 그 핵물질 먹은 고기 한 마리가 한국 동해에 있는 참치한테 잡아 먹혀서 그 참치가 남해에서 붙잡혀서 노량진 수산시장에 와서 김회권 목사가 먹고 드디어 방사능 물질에 오염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 고기들은 국적이 없기 때문에 이놈들이 어디서 잡힐지 모르고 어디서 식탁에 오를지 모릅니다. 체르노빌 방사능 낙진이 남극과 북극에 순록의 아침식사인 이끼에 가 있습니다. 순록은 그 방사능 이끼를 먹고 삽니다. 여러분 이 전세계는 생태학적 연관이 되기 때문에 지금 나 한목숨 살리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하고 생태학적 무한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정치생태학적입니다. 나쁜 지도자가 티베리우스 가이사가 세계 위에 통치자가 되면 저 밑에서는 아우성이 자동적으로 발사됩니다. 티베리우스 가이사는 아우성 발생 제조기입니다. 빌라도는 누구입니까? 눈물을 자아내는데 전문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런 정치학적 연관성 속에서 여러분이 그 기초를 허물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에 진실로 감흥하여 외쳐서 그 모든 악마적인 통치질서를 무효화시켜야합니다. 그 외칠 때 가장 좋은 외침은 뭡니까? 실천하면서 외치는 게 가장 좋은 외침이기 때문에 실천을 동반하여 말씀을 화육시켜서 말씀을 구원하여 뚜벅뚜벅 걸어다니는 이사야 40장 1-5절이 되어야 합니다. 걸어 다니는 이사야 두루마리가 되어야 합니다. 걸어 다니는 이사야 두루마리는 무엇이죠?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높은 산을 깎아서 깊은 골짜기를 메우는 그런 평탄대로 객토작업, 이런 운동을 구현하여 걸어 다니는 이사야 40장 1-6절이 될 때 전국민적 파급효과가 오고 모든 사람들이 이사야 40장 1-6절을 구현하는 걸어 다니는 이사야 두루마리들을 볼 때, 불결함 때문에 청결의식 때문에 씻고 싶다는 사람들이 막 한강 주변으로 뛰어들 것이며, 그때 회개하여 모든 육체가 영광을 보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이 저 깊은 계곡에서 하나님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어떤 선과 진리도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이 깊은 해안처럼 인간의 존엄성 밑에서 삽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영광을 절대 못 봅니다.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나오는 윤수의 블루노트, 윤수가 쓴 범죄일기인 자기고백적인 그 노트를 보십시오. 그 노트에 나오는 범죄자의 발생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장발장, 배고파서 빵을 훔쳐야 하는 장발장이 느꼈던 무자비한 세상, 이런 것은 전부 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보지 못하는 깊은 골짜기입니다. 그럼 높은 산, 철마다 때마다 75홀짜리 72홀짜리 골프장을 전전하면서 인간의 아우성이 전혀 들리지 않는 곳에 사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상의 마천루적인 행복고도에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저 밑에 인간들이 아우성치는, 저 계곡 아래서 호빗족속들이 소리치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고 그 북극성, 하나님 보좌 옆에 섰다고 느끼는, 즉 내가 신적 영광에 도취되어 산다고 느끼는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영광에 도취돼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 높아서 하나님이 안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산에 밑둥이를 딱 잘라서 고도를 낮추면 그 밑둥이가 잘린 만큼 남은 많은 흙과 땅을 골짜기를 향해 갖다 퍼부어주면 평탄대로가 됩니다. 이런 평타대로가 될 때 모든 육체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는 시대가 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이 선포했던 운동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길을 예비한 운동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이번 학기에요. <임꺽정>을 출퇴근하면서, 자가용으로 출퇴근하지 않으니까 오는 큰 혜택은 책을 읽는 겁니다. 제 행복은 가장 먼저 파주출판단지에서 2200번을 타면 차를 운전할 때 보이지 않던 한강수변 생태계가 다 보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개풍군 북한군 초소가 보이고 쭉 내려가면 임꺽정이 달리던 임진나루가 보이고 재두루미가 나는 생태계가 다 보입니다. 너무 너무 멋집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저는 <임꺽정>을 읽습니다. 2200번 버스는 1800원짜리이기 때문에 진동이 없습니다. 분당과 서울역 다니느 버스보다는 안 좋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다음 6호선을 타고 또 저는 책을 읽습니다. 제가 탈 때 6호선은 대개 텅텅 비어 있어서 경쟁 없이도 인간 존엄성 위엄을 유지하면서 앉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 751번 버스를 타면 교목실 뒤에 딱 배달되는데, 항상 다 앉아갑니다. <임꺽정>이 1-10권짜리인데 보통 500페이지입니다. 5천 페이지 정도를 제가 읽은 겁니다. 그걸 읽으면서 임꺽정의 소설 내내 나오는, 임꺽정 소설의 구세주는 조정 정암 조광조입니다. 기묘사화를 다룹니다. 1559년-1961년에 임꺽정이 한 번은 거짓으로 체포되었고 한 번은 진짜 체포되었는데 1961년 명종 때 체포되었습니다. 임꺽정이 하던 일은 평양감사가 진상품을 가지고 조선 수도로 갈 때 해주 송악 청석골에서 그걸 가로채서 공동체를 이루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런데 왜 황해도 일대가 임꺽정의 본 동네가 됐습니까? 봉산탈춤할 때 그 봉산이 바로 임꺽정의 주무대이고, 파주 고양 회헌역 임진나루가 전부 다 임꺽정의 활동무대입니다. 소설에 보면 임꺽정이 이 동네도 다녔습니다. 이곳과 남산을 임꺽정이 많이 다녔고요. 임꺽정 소설 안의 메시아는 정암 조광조이며, 조광조는 청렴결벽의 유교적 자기절제의 화신입니다. 즉 조광조는 중앙공무원과 지방공무원의 비리를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단칼에 잘랐다가 모함을 받아 죽었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활하지 못한 예수님입니다. 조광조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이 소설을 지배합니다. 그 조광조에 대한 민중적 응답이 바로 양주의 백정 자손, 임꺽정입니다. 임꺽정이 하는 일, 해주에 엄청난 민심이 이반합니다. 왜 해주에서 이반 합니까? 소설 중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해주 땅은 경상도 전라도 보다 척박한데, 두 가지 큰 폐단 때문에 민중들이 전부 다 화적떼와 도적떼가 된다, 첫째 진상품의 요구가 너무 많아서 가렴주구를 많이 당합니다. 노루 잡아오라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노루가 없는데 황해도에 있던 노루가 전부 다 평안도로 가버리는데, 진상품 목록이 너무 가혹하여 살기 힘들다, 둘째 황해도 출신들이 군대를 가면 전부 다 압록강 일대로 가는데 너무 군역비리가 많아서 양민들은 전부 다 방위 공익 안전요원을 하고, 민중들은 전부 다 국경수비대에서 영하 20도를 견딥니다. 그러니 군대를 가느니 청석골로 가버리자, 그래서 도적떼가 점점 사람이 많아집니다. 박달산, 파주혐령, 강탄 유일레저 인가요? 거기가 바로 임꺽정이 한몫 하던 곳입니다. 여기서 바로 아우성치는 민중의 소리에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죽어버리고 아무도 해결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도적떼가 일어나는데 황해도에서 바로 도적떼가 집단적으로 출몰합니다. 왜? 민중의 모순이 극한 스블론과 납달리 땅이거든요. 그래서 임꺽정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역사를 바라 볼 때 티베리우스 가이사가 통치한 지 15년이 되었다는 말뜻이 무엇인지 일단 알아야 하고 그다음 그 밑에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 구레뇨가, 분봉왕 4분의 1지역의 왕들이 이렇게 다스릴 때 그 엄청난 통치자들의 무게가 저 밑바닥 민중들에게 어떤 하중을 강요하는지 알아야만 그때 그 한이 사무칠 때 진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80년대에 많이 부른 노래가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혀짤린 하나님입니다. 미칠 것 같은 이세상 주여 내 기도 들으소서, 복음성가이고요. 그다음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 이런 노래들은 역사의 어둠에 대해서 간절한 기도를 불러일으키고 숙명론의 연약함에 주저앉지 말게 만드는 노래입니다. 여러분 책임의식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 역사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우리는 거룩한 임꺽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냥 도적떼가 되면 안 되고 조광조 같은 청렴한 공무원이 일어나야 하고 임꺽정 같은 폭력적 도적떼가 아니라 이 땅에 대안 질서를 제공하는 세례요한적인 말씀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만으로 높은 산을 잘라서 객토하는, 간디의 마지막 제자였던 비노바 바베는 폭력으로 치닫는 간디 후계자들과는 달리 악한 지주들을 찾아다니면서 온건한 말씀으로 수십만 에이커의 땅을 할당 받았습니다. 그래서 무상분배를 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말씀으로 이 땅에서 독점과 배타와 탐욕의 가치를 주창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먼저 비노바 바베처럼 해야겠습니다. 일대일로 찾아가서 좋은 말 할 때 내 놓으십시오, 이렇게 하고 또 노량진 근처 한강부근에서 말씀을 전하고, 양심에 경악이 일어날만큼 굳세고 신령한 말씀을 전하여서 이 땅에 모든 육체가 하나님 영광을 보는 날까지 분투하는 우리가 되어야 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티베리우스 가이사가 로마황제가 된 지 15년째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티베리우스 가이사의 학정과 그 실정과 그 억압정치를 알기 때문에 벌써 가슴이 답답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 밑의 그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부하들과 그 중간통치자들이 쭉 세상을 지배할 때 아버지 하나님 저 밑바닥에서 사는 것 자체가 짐이 돼버린 불쌍한 백성들이 불쌍한 민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 이 땅이 조광조 시대처럼 임꺽정 시대처럼 너무나 비리가 많아서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알수 없고 누가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희생을 자처해야 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버지 하나님 절대로 이 어둠의 역사에 눌러 앉지 않게 해주시고 숙명론으로 좌절하지 않게 해주시고 떨쳐 일어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서 높은 산을 퍼다가 골짜기를 메우는 회개운동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회개운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걸어다니는 이사야 40장 말씀이 되게 도와주십시오. 말씀의 두루마리 되게 도와주시고 거룩한 폭풍을 자아내고 양심을 일깨우는 가향교회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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