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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몸 없는 예배 없는 교회, 몸 없는 예배

by 【고동엽】 2021. 12. 10.
머리 없는 교회, 몸 없는 예배
-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와 예배 회복을 염두에 두고 -


이광호(조에성경신학연구원, Ph.D)




1. 서론


21세기의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일컬어지는 해체주의적 사조가 교회에도 그 영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처해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예배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교회의 실존적 의미를 상실한 현대의 위기 상황을 정확하게 직시하지 못한다면 결코 온전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 교회는 성경말씀과 역사적 건전한 교회의 신학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 십자가 표지가 있는 건물 아래 사람들이 모여 종교적 활동을 하면 그것만으로 온전한 교회인 것이 아니다. 모든 성숙한 교인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가 과연 산 교회인지 죽은 교회인지 살펴보아야 하며, 참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추구하는 장(場)이 될 수 없으며, 예배가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발산하는 시간일 수 없는 것이다.
상식적인 교인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속한 교회를 산 교회이며 참 교회라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부는 개인적인 성향이나 취향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신학에 기초한 객관적인 판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그것을 위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교회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징표는, 살아서 사고하는 머리에 몸이 온전히 붙어 있어야 하며 그 몸에 살이 차 있고 피가 정상적으로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죽은 시체일 따름이며 인간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죽은 시체를 방치하게 되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하듯 교회 역시 그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속한 교회가 생명있는 참된 교회라 생각하며 자신의 신앙이 옳다고 여길지라도 그에 대한 타당성 있는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점은 항상 냉철하게 살펴져야 한다.


우리가 현 시대 가운데 처한 교회를 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바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서 발견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그의 몸과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 시대 복음의 정도를 벗어난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교회 밖에서 찾으려 하며,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노동현장에 있다고 생각하며 가난한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 터에 존재하면서 세상과 사회 가운데서 활동하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과연 인간들이 생각하는 장소에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이 계시는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라는 점과 교회 공동체가 그의 몸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을 때 교회의 의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마지막 때가 되면 그리스도가 여기있다 저기있다 해도 믿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물론 그 가운데는 보다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겠지만 말이다.


2. 허물어져 가는 교회를 위한 신학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와 악한 세상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더러운 세상과 뒤섞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다수의 현대 신학자들은 교회와 세상을 본질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마치 잘못된 것인 양 주장한다. 그들은 성속 이원론 문제라는 논리로 교회와 세상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주의에 편승한 인본주의적 신학 사조에 의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해 가고 있다.1)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인간들에게 많은 가치 변화가 일어났으며 신학에 있어서도 그런 양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인간 이성의 활성화와 과학의 발달단계에서 잠시나마 낙관적 사고에 빠져있던 인간들에게 그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런 형편 가운데 형성된 소위 행동신학(Doing Theology)이라 일컬어지는 ‘땅의 신학’은 영원한 천상에 연관된 정통 신학을 이론적인 신학으로 몰아가기에 이른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적 사고에서 인권(人權) 중심의 신학으로 방향이 전환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현장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런 신학적 논리를 근간으로 하는 신학자들은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2) 사상을 앞세워, 인간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정황 가운데서 활동하는 ‘예수님의 상(像)’을 제공함으로써 이 세상에 적합한 그리스도를 창안해 내게 된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불균형으로 인해 신음하는 자들을 위한 남미의 해방신학, 정치적 문제로 인해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출하고자 하는 유럽의 정치신학, 단순히 피부색깔 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자들의 인권을 주장하는 흑인 신학, 무지한 채 억눌려 살아가는 자들을 구출하는 한국의 민중신학, 남성들에 의해 권익을 빼앗기고 신음하는 여성들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여성 신학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현대신학의 기저에는 인권을 배경으로 한 사회정의가 존재하고 있다. 성경을 기초로 한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을 잘못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들의 모든 정황을 잘못된 관점에서 메시아 사역과 연관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들은 메시아의 역할이 이 땅의 소외된 약자 계층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것인 양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지을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간 세상에 가득찬 불평등한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주님의 관심은 죄에 빠져 신음하는 자기 자녀들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영원토록 구출하는 것이다. 처음 사람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창3:15)을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였으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관심이 아니라 죄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위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분명한 담이 존재한다. 그 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며 아무나 함부로 넘나들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자신이 천국의 문임을 시사하시면서 그 문을 통하지 않고 담을 넘나드는 자는 강도와 도둑이라고 말씀하셨다(요10:1-18,참조). 오늘날 우리 시대에 교회의 담을 낮추거나 허물어 버리는 것은 교회를 강도나 도둑의 소굴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님의 몸된 교회와 그 밖의 세상은 양쪽으로 분명하게 구분짓는 담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시대에 경계해야 할 불건전한 신학 사상들 중에는 세속주의와 사회복음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교회와 세상의 벽을 허물고 영원한 진리 자체보다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그것은 결국 교회 공동체의 배타적 고유성3)과 교회의 본질적 기능인 예배를 약화시킨다. 그들은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현실적 정황에 종교적 색깔을 덧칠하게 함으로써 세속사회와 민족 및 국가의 현안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권익에 관심을 둔 그러한 신학은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 일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이기적이지 않으며 보편적인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세는 매우 인간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들은 주로 소외된 계층과 약자들을 위한 신학을 전개하며 자기가 속한 세속사회나 국가와 민족을 염두에 둠으로써 편협하지 않은 대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런 신학적 사고를 중심에 두게 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 예배 또한 인본주의화된 인간들의 종교 행위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예배 자체가 진리를 떠나 윤리화될 수 밖에 없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인간다운 면모를 갖춘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간이 되도록 강조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대어 인간의 의를 드러내게 하며, 교회는 교인들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주어진 ‘인생’을 살찌우는 종교적 인간이 되도록 격려하는 장이 되고 만다.


3. 교회와 교회의 존재 의의


(1)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는 ‘교회’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교회 바깥 사람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당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 단체들이 ‘교회’라는 명칭을 자기들에게 갖다 붙여 사용하는 것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온갖 잡다한 이단들도 마음대로 ‘교회’를 지칭하고 있으며, 이미 교회가 아닌 거짓 교회에 속한 무리들 역시 ‘교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그에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의존하여 교회를 정의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럼 없이 교회라 칭한다고 해서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다.4)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교훈하고 정의된 교회만이 참된 교회이다.
교회는 주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피로 값주고 사신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세력에 억눌려 신음하던 자기 백성을 구출하여 자신의 몸된 교회로 불러 모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들의 종교적 합의에 의해 설립될 수 있는 일반적인 종교 단체가 아니다. 역사속의 교회는 항상 앞선 시대의 온전한 교회를 상속해 가고 있다.
창세전에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총수와 창세 후 세상에서 구출된 성도들 곧 교회를 이루는 백성의 총수는 동일하다.5) 우주적 교회는 항상 이 원리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더불어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존재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시던 분이며, 지금은 천상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지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롬8:34).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어야 하며, 머리인 그리스도로 부터 분리되어 있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죽은 교회일 따름이다.
머리없는 교회가 과연 교회일 수 있는가? 교회의 존재 양태는 반드시 머리와 몸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즉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몸을 구성하고 있는 그의 백성이 하나로 엮어져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몸이 머리에 어설프게 붙어있거나 머리의 지시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몸이라면 죽어가는 사람이거나 비정상적인 인간이다. 이처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설프게 붙어있거나 그리스도의 뜻과 무관하게 활동하는 교회라면 죽어가는 교회이거나 비정상적인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 생명이 있는 교회는 인간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몸이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어서 그의 살을 중심으로 몸이 형성되어야 하며 그 가운데는 항상 거룩한 그리스도의 피가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이다. 머리에 붙어 있지 않으며 살이 없고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죽은 시체이듯이 그리스도의 살이 없고 피가 흐르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 죽은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제 공동체여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성도의 교제(fellowship)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찬을 통해 표현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말미암는 거룩한 유기적 교제(Holy Communion)여야 한다. 성찬을 통한 교제가 아니라면 성도들 간 아무리 좋은 우호관계를 가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종교적 의미 이상 별다른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존재하며 그 기능을 원활하게 할 경우에만 진정한 교회라 할 수 있는 것이다.6)
십자가가 세워진 건물 아래 매주 교인들이 모여 정기적인 집회를 하는 것 만으로 참 교회라 할 수 없다. 목사, 장로, 집사라 불리는 사람들이 주관이 되어 정기적으로 회집하는 단체라고 해서 교회가 아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고 예배 모임에서 목사가 웅변적인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교회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음악이 있고 찬송가를 열심히 부르는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이웃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교회인 것은 아니다. 연령별 부서활동이 활발하다고 해서 살아있는 교회일 수 없다. 주변의 이웃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사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을 해외에 많이 보내면 그것으로 좋은 교회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위에 열거된 모든 요건들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교회의 본질적인 표지가 결여되어 있다면 온전한 교회라 할 수 없으며 그런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 거짓교회일 따름이다.7) 진정한 교회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어야 한다. 그 선포된 말씀에 다른 모든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곧 교회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음을 확증짓게 된다.


(2) 교회의 존재 위치는 어디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자기 백성을 창세전에 예정하셨으며 죄에 빠진 그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는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자기 백성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다.
교회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직 이 세상과 인간이 지어지기도 전인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고 계획된 바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기 백성의 무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종교 단체가 아니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에는 교회가 세상에 대한 구제와 사회의 변혁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들을 위한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니다.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해야 할 점은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지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교회의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전개된다. 부패한 인간은 결코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을 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범죄하여 사탄의 지배아래 놓인 인간으로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십자가를 통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그 뜻에 참여할 따름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피로 값주고 ‘교회’를 사셨다고 밝히고 있다(행20:28).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피흘림으로써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한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께 속한 특별한 무리이다. 이는 제자들에게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조화된다(마16:18).
그렇다면 교회는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가? 교회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까지 지상에 항시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성된 공동체는 영원하지만 세상과 대치관계에 놓여있는 교회는 지상에 연약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교회이지만 천상(天上)으로 부터 잠시도 분리되지 않는다. 이는 교회 이외의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이 천상과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사실과 비교된다. 사도바울이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지만 항상 천상에 연결되어 있으며 천상에 밀착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8)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상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는 그냥 단순히 땅위에 세워진 모습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땅에 존재하지만 천상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참여하고 있다. 지상에 있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부여된 가치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그 이유 와 연관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거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머리를 배척함으로써 이후에 있게 될 그의 몸된 교회를 동시에 배척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지금은 교회의 머리로서 천상에 계신 주님으로 부터 모든 가치가 확증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3) 교회의 통치자와 통치방편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상의 왕으로서 지상의 자기 교회를 통치하고 계신다. 그는 자기 자녀들이 악한 세상의 지배를 받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적인 가치 체계를 벗어나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삶을 살도록 요구하며 통치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통치하심으로써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가 하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부활 후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교회의 특별한 직분들을 통해 자신의 몸된 교회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이다.9) 즉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직분 제도라는 가시적 방편을 자신의 교회를 위한 통치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분은 하나님께서 몇몇 교인들에게 명예를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며 특정 직분자가 일반 교인들 위에 군림하도록 주신 것이 아니다.10)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단순히 대행하도록 소수의 사람들에게 종교적 권세를 주신 것도 아니다. 로마교회의 교황과 사제들은 직분이 주님의 일을 어느 정도 대행하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직분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이미 교회 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사실을 알고 그에 순종할 따름이다.
각 직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연관된다. 이는 그 분 홀로 진정한 교회의 통치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직분이 없으면 온전한 교회로서의 의미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교회에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이 있는 것은 인간들의 경험과 이성에 의한 판단을 허락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교회의 주인은 결코 인간들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직분자도 다른 직분자를 지배하지 못한다.11) 즉 목사가 장로나 집사를 지배하지 못하며, 장로가 목사나 집사를 지배하려 해서는 안된다. 또한 집사가 목사나 장로를 지배하지 못한다. 각 직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직분자를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보편 교회에 속한 참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독자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다양한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상호간 이웃 교회의 잘못을 말씀의 근거에 따라 올바르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직분자를 세우는 일은 지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들어 신실하게 행해야 할 일이지만, 모든 직분자들은 보편교회 가운데서 그 직분적 의미를 깨닫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또한 직분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직분을 맡은 개별 인간에게 일차적인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받아 맡긴 직분자의 ‘직분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직분을 맡은 개인의 직책에 앞서 직분자체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그 직분의 본질적 기능은 개체 교회의 종교적 활성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표지인 말씀선포, 성례의 시행, 권징사역을 교회 가운데 온전히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직분자의 타락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직분 자체의 타락이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직분자의 타락은 개인의 문제이면서 이웃 성도들에게 누룩을 퍼뜨리게 되지만, 직분의 타락은 교회 자체를 직접 허물어지게 한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개인 직분자들의 타락을 포함하고 있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직분 자체의 왜곡과 타락이다. 목사, 장로, 집사 직분이 제각기 다른 직분을 강압적으로 침해하거나 자신의 고유한 직분 사역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시대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직분자에게는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12) 사람들은 설교를 하며 권징을 행사하는 것이 마치 특정 직분자들에게 주어진 권한인 것 처럼 오해하는 자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결정은 개인 직분자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 자체에 맡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와 권징사역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분을 맡은 성도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이행해야 하는 일이다. 즉 올바른 말씀선포와 권징사역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인간들이 자의적 판단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설교와 권징을 시행하는 것은 직분을 악용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직분을 남용하거나 오용함으로써 불법을 행하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직분과 직분자들이 우주적 보편교회에 연결되어 있음과 그것을 통해 역사상 존재했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상속받아 후대에 상속해 주는 보편적 공동 직무를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상속’이라는 말 속에는 임의적 의미전환을 꾀할 수 없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으며 보편적 공동 직무란 역사상 모든 교회의 직분자들은 보편교회에 예속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모든 직분자들은 개교회주의를 넘어 주님의 뜻에 따라 직분적 실천을 행할 의무가 있다. 물론 그 의무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지 교회를 통한 실천적 순종이 따르게 된다.


4. 교회의 본질적 기능


(1)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


교회의 본질적 임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이 교훈하고있는 진정한 예배에 대한 이해를 해야만 한다. 성경을 떠나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예배는 종교행위가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예배라면 인간들이 아무리 정성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기록을 통해 그런 예들을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 하신다. 말씀을 통해 허락하신 직분들로써 성령께서 성도들의 참된 예배를 도우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의 의미가 예배 가운데 실존적으로 살아있어서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주님께서 제정하신 직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예배와 직접 관련되기 때문이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주님의 백성은 천상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간들의 예배하는 종교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택함을 받아 그의 백성이 되어 예배하는 자리에 온전히 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모의 태중에 어린 아기가 있다면 그는 아직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태중의 아기는 사고능력이나 판단능력이 전혀 없으며 행위능력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중의 아기들은 종교적 인식과 의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태중의 성도들 역시 태중에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다.13)
즉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가 아직 태중에 있다 할지라도 그 어머니의 예배참여를 통해 다른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배의 일차적 의미는 성도의 결단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에서 발생하게 된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올바른 말씀선포와 성례의 시행이며, 성도들의 순종은 그 뒤에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참된 예배는 인간들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순종하며 드려지는 예배여야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2) 인간들의 종교행위로서 예배는 하나님께 유효한가?


예배는 개별 인간이나 집단의 자기 의도에 따라 매 주일마다 행해지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다. 그것이 설령 순수하고 좋은 의도를 가졌다할지라도 그것 자체로서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14) 하나님의 백성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순종하며 예배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개인의 종교적 취향이나 기분에 달려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인본적인 요소들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참된 예배는 주변의 분위기와 설교자의 복장이나 언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예배 자리에 모인 교인들을 설득하는 방편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지는 선포적 개념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그 선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말씀 선포여야 한다. 그것은 천상의 주님과 성령 하나님의 간섭 가운데 이루어지는 사역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설교자로 부터 깊은 감명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예배라 할 수 없다.
소위 찬양대가 수준 높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려주면 그것이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화려하게 치장된 예배당의 분위기가 진정한 예배를 위한 조력자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도리어 진정한 예배를 방해하는 역기능을 할 수 있다. 예배시간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달콤하고 감미로운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어떤 교인이 진지한 마음으로 감격스런 예배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그것 자체로서 훌륭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배는 결코 인간들의 종교심으로 말미암아 시도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듣기에 아름다운 음악이나 화려한 분위기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에는 인간들이 보고 듣기에 호소력 있는 윤리적 설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들의 언어로 점철된 언술은 스스로를 속이는 종교적 행위일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왁자지껄하여 흥이 나면 참된 예배인 것이 아니며, 종교적 행동 자체가 참된 예배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령 위에 열거된 모든 것들이 동시에 충족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지 않으면 나머지 것들이 아무리 좋게 느껴질지라도 올바른 예배가 아니다. 그런 자리에 기분 좋게 몇 시간씩 앉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프로그램이 준비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즐겁게 찬송가를 부르며 가슴 뿌듯한 감격을 누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참된 예배는 개인이나 집단의 감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 즉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하는 의미 없이 참된 예배가 가능한가?


예배의 의미는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천상에 계신 하나님으로 부터 발생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적 현존을 통해 드러난다.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직분의 기능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가운데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의미가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올바르게 존재해야 한다.15) 올바른 말씀선포, 성례의 시행, 권징사역이 목사, 장로, 집사 직분에 의해 보호됨으로써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져 가는 것이다.
예배의 가장 중심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 목사 직분을 맡은 형제가 그 말씀을 주님의 뜻에 따라 교회 앞에 선포하게 된다. 말씀 사역자인 목사는 자신의 종교적 의도를 관철시킬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선포할 수 없다.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 역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귀기울여 들어야 하는 것이다.
장로 직분을 맡은 형제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의 설교를 보호하는 의무와 그 설교를 감독하는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아직 어린 성도들이 달콤하고 감미로운 말을 듣기 원해 목사의 설교를 굽게 하려 할 때 그것을 방지함으로써 목사의 설교를 보호해야 하며,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설교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교회를 위해 신실한 감독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의 말이기 때문에 무조건 들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가르치는 것은 특정 직분자를 지나치게 세우는 우상 숭배적 행위이다.16)


예배의 중심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하며, 예배하는 모든 성도는 그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예배가 진정한 예배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연관되어야만 한다. 주님의 몸이 의미상 현존하지 않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그것이 없이는 결코 참된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성찬이 존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한 실존적 의미를 지닌다. 말씀에 의한 올바른 성찬의 의미가 없으면 진정한 예배가 구성될 수 없는 것이다. 예배 시간에 나누어지는 주님의 몸은 아무에게나 나누어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성찬으로 나누어지는 주님의 몸은 지극히 폐쇄적이다.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만 그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올바른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말씀사역과 연관된 장로직분을 맡은 형제들의 기본적인 신앙이 확립되는 것이 중요하다. 장로가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는 것은 단순히 가정방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심방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성찬에 참여하는 의미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 장로직분과 그들로 인한 심방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모든 성도들의 삶을 통해 민감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그들 가운데서 진정한 성찬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의미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성찬이란 진정한 성찬일 수 없다. 대형 교회에서 개개인 성도들의 삶은 커녕 서로 얼굴과 이름 조차 모르는 형편에서는 성도들의 삶이 상호 연결될 수 없다. 심지어는 예배 시간에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함께 성찬을 나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 교회 공동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아무런 의미 없는 형식만 취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도리어 교회의 교회됨을 헤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성찬이 진설되지 않고, 예배 가운데 올바른 성찬의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 모임은 인간들을 위한 단순한 종교적 집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5. 결론


신학자들은 우리시대의 교회를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데 신학적 도움을 줄 수 있다. 현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교회의 머리로서 온전한 기능을 하도록 용납하지 않고 있으며, 예배 가운데 주님의 몸이 그 의미를 다하도록 허락하지 않고 있다. 타락한 교회가 입으로는 주님의 이름을 되풀이 하지만 실상은 그 기능을 방해 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없으며 몸이 없는 인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머리를 통해 사물을 보고 들어 인식하게 되며 몸의 기능을 통해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속해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 역시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그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단순히 ‘교회’라는 이름만 가졌다고 해서 참 교회인 것은 아니다. 십자가를 높이 세운 훌륭한 교회당 건물을 가지고 있고, 설령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좋은 소문이 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진정한 교회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는 무엇이며, 진정한 예배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 인정되지 않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하지 않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적으로 중심이 되는 무리가 아니면 주님의 교회일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하는 의미가 없다면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달려 있는 몸으로서 주님께서 제정하신 직분들이 온전히 기능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교회는 예수님의 머리되심을 인정하며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 따라 자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속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직분에 의해 세워져 간다. 따라서 온전한 직분 수행이 없이는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져 갈 수없다.17) 목사, 장로, 집사 등 모든 직분자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온전히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직분의 전체적인 의미를 약화시키려 한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제정하신 직분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무시하는 자들은 자신의 감정적 진의와는 상관없이 교회를 파멸하려고 노력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18)


이와 함께 현대 교회가 지닌 가장 심각한 병폐는 참된 교회가 점차 허물어져가고 있으며 진정한 예배의 의미가 급격히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와 예배가, 하나님과 성경 중심에서 인간과 경험 중심화 되어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의 사역에 온전히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종교행위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됨으로써 교회의 본질을 떠나게 된 것이다.
현대의 잘못된 교회관을 가진 교인들은 교회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의 내부가 허물어져가는 현실적 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채 세상의 정의를 외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즉 부패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말씀의 정화 운동이 아니라 부정한 세상에 대한 인본적 정의 실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참된 교회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것을 본질적인 목적으로 한다. 그 방법은 성경에 계시된 주님의 뜻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예배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 의미상 성도들 간에 진지하게 임하게 되며 나누어질 때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시대의 대다수 교회들은 그 의미를 저버리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없는 상태에서 열성을 다함으로써 예배를 종교 행사화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각종 악기들을 갖추고 인간들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돋보이기 위해 온갖 노력들을 다 기울인다. 그러나 인간들의 종교적 취향에 맞추기 위해 마련된 모든 것들은 우상이다. 그것은 외견상 화려한 모습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몸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교회들은 머리이신 주님께 온전히 붙어 있음으로써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세속화에 흔들리지 않기 바란다. 그리고 예배시간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히 나누어지는 참된 예배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원한다. 오직 그것을 통해 주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에 소망을 두고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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