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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18(예배 설교)

by 【고동엽】 2021. 12. 10.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강조하는 게 아니고 욕망을 억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등종교는 욕망을 억제하는 종교입니다. 인류문명사에 긍정적 기여를 했던 종교들은 사랑을 강조하고 이타적인 선행을 강조합니다. 그다음에 절제를 강조합니다. 고등종교와 조폭들의 삶은 대척점을 이루는데 조폭들은 욕망을 극대화하는 삶입니다. 우리나라 고급 공무원들은 조폭들의 심리학적 기제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 마음대로 욕망을 투사하고 욕망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고급공무원들 국회의원들 많은 정치가들 사업가들은 사실상 그들이 양복을 입고 몸에 문신만 그리지 않았을 뿐 문신 빼고는 다 조폭입니다. 왜? 선글라스 끼는 것 같죠? 검은 선팅을 한 차를 타고 다닙니다. 무리지어 다니죠? 그다음 강남일대에 출몰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욕망의 무한긍정 삶의 심리학입니다. 고등종교는 심지어 천리교까지, 대순진리교, 이단들까지도 고등종교는 욕망억제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절대로 특징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 모든 고등종교와 철학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육체와 물질세계를 긍정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와 철학도 절대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겁니다. 물질과 육체가 가장 궁극적인 존재형태라고 보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육체성 물질성, 이런 물적인 피조세계는 벗어버려야 할 그 무엇, 잠시 머물다 가는 하나의 덧없는 것들로 우리는 보통 이해합니다. 그래서 종교적이라는 말을 육체성을 벗어버리려고 하는 사람, 속세를 등지려고 하고 육체적인 관계에서 떨어지려고 하는 것, religious 라고 하는 말이 그런 겁니다. 종교적인 것, 그런데 히브리종교 구약종교 기독교, 이것은 영이 궁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물질과 육체라고 보는 겁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피조물 인간과 궁극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영이신 하나님이 육체를 덧입고 있겠다는 결단을 했다는 건데 이것은 이 세상 어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도발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계를 물질과 육체로 만드시고 이 세계를 물질과 육체로 구현하시겠다고 결정하신 겁니다. 이것은 계시가 아니고선 도저히 인간 머릿속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아리안 족들의 그리스 철학, 아리안족의 철학은 그리스 철학과 인도철학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인도철학과 그리스철학으로 알려진 이 사상의 공통점은 육체경시, 물질경시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철학은 영혼은 불멸하지만 육체는 소멸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아리안 족들이 인도에 와서 만든 종교, 힌두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 화엄경도 똑같습니다. 육체는, 만상은 덧없다, 연속성이 없다, 그런 사상의 원조가 불교이고 힌두교이고 자이나교입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스철학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그리스철학 중 소크라테스가 바로 육체경시 사상의 첫 전파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평의원 투표에서 500명이 투료를 했는데 280 대 220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500명 중 250표를 얻으면 무죄판결이 됩니다. 무승부이기 때문에, 그런데 30표를 얻지 못하여 유죄평결을 받았습니다. 유죄평결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먼저 자기 죄의 역량이 얼마인가를 적어내는 게 나옵니다. 벌금 30만원을 자기 스스로 적었습니다. 멜렉투스라는 그 당시 지금으로 말하면 정치적실세의 모사꾼인 철학자가 280명의 시민투표자를 설득해서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사형판결을 받기 전 한달 동안 소크라테스가 수난사화를 엮어갑니다. 소크라테스의 수난사화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한 달 동안의 기록을 적은 대화편이 에우튀푸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입니다. 이것이 사복음서의 수난사화라고 말합니다. 파이돈이라는 책은 사형 당하기 전날 새벽부터 사약마시고 죽는 장면, 목이 굳어지는 장면, 이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이 약을 드십시오, 이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먹을 때 뻣뻣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한 잔 마십시다. 어? 아무렇지도 않는데? 선생님 한 번 더 마셔 주십시오, 어? 아무렇지도 않아, 선생님 한 번 더 마십시오, 어 몸이 굳어지네, 자고 싶다, 네 주무시면 끝입니다, 마지막 장면이 죽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자는 과정까지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데 제일 마지막에 몸이 굳어지고 졸린다며 죽는 장면인데, 육체를 벗어나는 설렘과 기대가 십자가의 죽음 장면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이 사상은 영혼의 불멸을 획득하기 위해서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는 일종의 탈혼적 엑스타시가 있습니다. 사약을 마실 때 곧 만나세, 이렇게 하면서 먹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영혼은 불멸하지만 육체는 덧없는 것들, 그래서 289회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몸은 우리를 욕정들과 욕망들 두려움들 그리고 온갖 화냄과 하도 많은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우게 되어서는 진실로 우리가 몸으로 인해서 속담 그대로 도무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지, 아닌 게 아니라 전쟁들과 불화들 싸움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 아닌 몸과 이로 인한 욕망들이지, 재물의 소유로 많은 전쟁들이 일어나지만 우리가 재물을 소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몸 때문이지. 우리는 일생동안 몸을 보살피다가 종노릇하고 있는 게야. 몸은 도저히 우리 철학적 사고과정에서 끼어들어선 안 돼. 소란과 혼란을 일으켜. 되도록 몸 없이 지내는 건 신과 같이 지내는 거야.’ 몸을 벗어나는 것이 신처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에테네 처소로 올라갑니다. 갔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죽는데, 짧은 기간 동안에 쏟아낸 말치고는 너무나 논리적이기 때문에 이 육체경시 사상이 이제 기독교에도 파고듭니다. 기독교에 파고든 플라톤 사상이, 육체 경시사상이 바울의 용어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영혼불멸적 기독교라는 이상한 기독교가 나오게 되었고, 육체를 경시하고 영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이런 종교, 이걸 divinization, 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신화, 신이 되려고 함, 이건 고대 사막수도사들의 이상이었습니다. 고대 사막수도사들은 신처럼 되기 위해서 먹지 않았습니다.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먹지 않고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신처럼 되는 하나의 지름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리아의 유명한 성자는 36년 동안 기도원에 올라가서 작은 약만 먹고 살았습니다. 먹지 않는 것이 신적인 존재입니다. 그다음 결혼하지 않는 것이 신적존재입니다. 그다음 인간의 오욕칠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신적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간 것입니까? 오욕칠정이 없는 곳 사막으로 갔습니다.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적게 먹었습니다. 왜? 육체를 보살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divinization, 신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정서 때문에, 그리스적 영향을 많이 받은 수도승일수록 결혼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용어 중에도 로마서 6-8장이 육체를 경시하거나 육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본문이 나오는데 이 본문 때문에 육체를 긍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기독교, 다시 말해서 서구기독교가 나왔습니다. 서구 기독교는 육체의 부정기독교입니다. 육체 부정 기독교의 가장 큰 폐해는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보고 육체노동을 하는 자를 신의 본질과 가장 멀어진 자라고 보는 정치사회학적 함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노동은 누가했습니까? 노예가 했습니다. 그러면 육체노동의 반대인 정신노동, 지식노동은 누가 했습니까? 신에게 가까운 신과 동일한 자들이 했습니다. 그게 바로 성직자들입니다. 이런 플라톤적 이원구조 때문에 뭐가 생겼어요?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늘 천대를 받았고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늘 후대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구조가 지금 기독교 안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런 기독교의 육체를 멸시하는 것은 그리스 사상과 플라톤 사상의 범 영향 안에 있는 서구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할 수 있지만, 로마서 6-8장에 나오는 육체에 대한 멸시사상도 육체를 부정하는 이런 표현들은 기독교 신학이 플라톤 사상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혼돈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차이를 알고, 히포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 11권, 14권, 15권에서 육체를 옹호하는 글을 쓰긴 씁니다. 제가 로마서 몇 군데 읽어드릴 테니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6장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제가 어제 이 몸이 종노릇하는 과정을 직접 봤는데, 대화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를 타는데 갑자기 아주 날카로운 폭력적 언어가 들리더니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가 맞은 편 계단을 뛰어내려왔습니다. 그 앞에는 한 자매님이, 그 남자에게 폭력적 언어를 듣고 있는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순식간에 머리채를 끌고 가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욕을 하면서 그 여자를 막 쳤습니다. 때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때리는 장면을 보고 있고 피해가길래 저도 양진일 목사님을 만나 축구를 하러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일정을 훼손할 수는 없는데, 그런데 이 폭력적인 장면을 보고 저 자매님이 매를 맞고 있는데 그냥 가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약간 정색을 하면서 모자를 눌러 쓰고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제가 있는 것도 모르고 또 때렸습니다. 계속 따라갔습니다. 으슥한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물론요. 그런데 부부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보니까 내연관계 비슷했습니다. 폭력을 행하는데 그때 그 사람이 폭력적인 몸은 죄의 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몸이 그 사람에게 폭력적인 그 악한 폭력의 발길질을 가한 것은 다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인격의 중심인 인격과 자아입니다. 이때 죄의 몸이란 말은 다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아를 가리킵니다. 죄악된 자아를 가리킵니다. 이 몸이라는 단어, 쏘마라는 단어인데, 플라톤이 말한 우리 육체, 단백질적인 이걸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자아를 가리킵니다. 플라톤적인 육체가 아니라 인간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법으로 우리 몸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 죄의 몸이란 말은 단백질적인 유기합성물인 몸을 가리킬 때 쓰지 않고 죄악된 자아, 이런 뜻입니다. 이 죄악된 자아, 몸과 영혼을 합해서 영과 혼을 다 합해서 죄악된 자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똑같은 말이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이때 죽는다는 말은 우리 모두가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몸만 죽고 영은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 통째로 죽는 겁니다. 그다음에 6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이때도 몸은 우리의 죄악된 자아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이 7장 5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이때 육신은 우리가 죄악된 자아 속에 있는 그 몸, 똑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 똑같은 단어를 쓰지만 이 말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서 육체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통틀어 인격과 자아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진짜 육체를 가리키는 중립적 용어는 로마서 7장과 8장에 나옵니다. 7장 20-23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이때 지체라는 말이 중립적인 몸입니다. 이 말은 내가 죄악된 행동을 하면 내 육체도 죄악된 행동을 기억하고 있는 일종의 유기적 인격적인 존재로 봅니다. 이때 지체는 중립적인 몸입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도 중립적인 몸이 나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말도 우리 몸이 구속되는 것, 체포되는 것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때 이 몸도 중립적인 용어입니다. 성경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이 육체를 경시하고 부정하는 말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은 육체와 몸 자체가 그 자체가 모순이거나 그 자체가 욕망덩어리거나 그 자체가 죄악의 근원이라 보지 않고 우리의 타락한 자아와 인격적 중심, 영혼과 육체를 다 합하여 통째로 우리 존재가 하나님께 즉 죄를 지어서 멸망되어질 존재로 봤지, 내 육체만 벗고 나면 내 영혼의 순수, 내 인격의 순수한 그 에센스는 남아서 육체를 벗기만 하면 신처럼 될 가능성이 나한테 있다?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적타락설입니다. 이 전적타락설은 칼뱅의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칼뱅의 전적타락설을 믿어야함에도 영혼불멸설을 믿고 있고 육체는 죽지만 영은 불멸한다고 믿고 있는데, 불멸하지 않고 창조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제가 죽죠? 제가 죽는데 육체는 죽고 제 영은 어딘가에 가서 저장된다? 아닙니다! 육체의 그런 말들이 내 영이 저장돼 있다가, 이 말은 영혼이 순환한다는 그런 메타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영적인 내 몸과 마음이 죽었다가 완전히 재창조되는 것이지 내 영은 따로 있다가 내 육체만 새로 덧입는다? 아닙니다. 그럼 그것은 무엇입니까? 환생설입니다. 아니에요. 성경은 영혼불멸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혼과 육체가 다 죽고 썩어서 새로 창조되고 부활된다는 것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서론을 길게 말하는 까닭은 육체를 입고 사는 것 자체가 영적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지 절대로 죄악이거나 모순이 아닙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것이 모든 죄악과 사악한 모든 삶의 뿌리가 아닙니다. 절대로 뿌리가 아닙니다. 육체는 영의 궁극적인 존재형태입니다. 영은 육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막의 수도사처럼 육체를 입은 인간이 영이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체를 덧입기를 원하는 것, 천사가 육체를 덧입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성경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육체성은 너무 좋은 겁니다. 육체성이 왜 좋습니까? 육체적 악수를 해야 참 악수입니까? 정신만 악수를 해야 합니까? 여러분 광고할 때 양진일 목사님이 영적인 악수를 합시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 어떻게 합니까? 육체와 악수할 때 체온이 전달됩니다. 그렇죠? 부부가 우리 영적으로 입맞춤합시다, 이렇게 할 겁니까? 아닙니다. 부부는 진짜 입맞춤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밀하고도 철저한 진실한 의사소통이 일어나고 사랑이나 친교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배고픈 사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신령한 빵을 주노라, 하면서 빵 적힌 글을 줍니다. 그걸 먹고, 신령한 빵을 먹고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진짜 탄수화물 빵을 줘야 합니다. 탄수화물 빵이 내가 빵이라 적은 글자보다 더 궁극적인 빵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육체성을 매개하는 세상에 감히 들어오시기로 작정했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완성입니다. 창조의 완성은 이 피조세계를 지어 놓고 육신을 입고 들어오기로 원하는 거기가 창조의 완성, 하나님 아파트 입주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육체를 입고 들어오신 것이 하나님의 원래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죄를 속량하는 목적을 가지고 일어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볼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거 너무 어렵습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영접하려고 해야지 이걸 다 이해하려고 하면 큰일 납니다. 그냥 좋은 말인가 보다 하고 영접해야지 이걸 이해하려고 하면 다쳐요. 요한복음은 좀 어렵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뭡니까? 벌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믿어지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이게 믿어지면 구원받은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설명해서 납득돼서 머리가 좋아서 될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육체와 물질의 세계를 지으시고 그걸 영광으로 가득 채우길 원하셨는가 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 땅에 온 세상에 가득 차기를 원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차기를 원하는 그것이 하나님 천지 만물을 창조한 목적이기 때문에, 육체의 세계를 위해서 영광을 덧입은 아들이 오는 것, 그건 정상적인 겁니다.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가 지난 3주 동안 세 번에 걸쳐서,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 하나님 품속에 있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께 천지를 창조할 때 순종했던 그 하나님의 아들, 그 말씀이 육신,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난 이것도 엄청난 순종입니다. 빌립보서 2장 6-1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육체를 입고 태어난 것 자체도 또한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했던 그 순종과 똑같은 순종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들과 같이 나타나기로 결단한 이것도 하나님 아들의 순종이라는 것이죠?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건 중요합니다. 텐트를 치셨다, 장막을 치셨다, 이런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친히 장막을 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친히 임마누엘 해주신 역사를 대언해주는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출애굽기 40장 34-35절, 열왕기상 8장 11절에 보면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참,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참,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성막에 가득 차는 그 상태가 바로 뭡니까? 인간의 장막에 오셔서 하나님이 함께 사는 입주식입니다. 그런 구약적 울림을 전제하는 말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장막을 치셨는데, 그 육신을 입은 말씀도 알고 보니까 출애굽기 40장 34-35절에 나오는 그 영광, 열왕기상 8장 11절에 나오는 그런 영광 같은 영광이 가득 찼습니다. 그 가득 찬 영광을 프리즘 안에 통과시켜 보았더니 두 가지 빛깔이 나왔습니다. 그 빛깔의 이름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직접 거하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성막입니다. 구약백성 언약백성, 광야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을 따랐던 그 성막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차 있듯이 예수는 걸어 다니는 성막으로써 하나님 영광을 가득 차게 충만하게 거하게 하기 위해서 운반하고 다니는 성막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찼었을 때 그 여호와의 영광 성막이 은총과 진리를 대신했었듯이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의 빛을 발산하고 다녔었습니다.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은혜는 죄를 단순히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갱생과 재창조를 가져다주는 용서입니다. 제가 은혜 받았다는 말은 갱생되었다는 말입니다.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는 말은 뭐죠? 그 말씀 듣고 새 사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번 학기에 대학원 두 사람에게 은혜를 요청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탁 목사이고 한 사람은 정전도사인데, 탁목사의 편지입니다. 교수님 제가 이번 학기에 출석도 3,4번 정도 빠졌고요, 교수님의 과제물을 도저히 해낼 길이 없습니다, 저에게 F를 주십시오, 이것이 합당한 정의인줄 믿습니다, 교수님 강의를 들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기억하겠습니다, 제가 답변했습니다. 탁목사님은 F를 받기에는 너무 가혹합니다, B 마이너스를 드릴 테니까 또는 C플러스를 드릴 테니까 6월 29일까지 꼭 페이퍼를 내시기 바랍니다. 답장이 왔습니다. 도저히 담임 목사님이 시키는 일을 다 감당하다가는 쓸 수 없습니다. 1084페이지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거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이 22권을 합본해 놓은 책입니다. 그 책을 다 읽으려면, 그래서 제가 갱생의 은혜를 베푸는데 실패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F를 줘야 합니다. 또 한 사람은 정전도사라고 장신대에서 멀리 제 과목을 들으러 왔는데, 교수님 제가 6월 25일 4박 5일 동안 은성수도원에 경건훈련 들어갑니다, 모세오경 과제물을 제때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가 C 학점을 주시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학생이 너무 불쌍해서 B학점을 드릴 테니까 6월 30일까지 페이퍼를 쓰십시오, 했는데 아직까지 응답이 없습니다. 저는 그냥 심판하지 않고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갱생시켜서 이번학기에 그에게 F를 주지 않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그게 바로 은혜인데, 제가 F를 주면 뭡니까? 모세의 종교입니다. 당신은 F, failer, 타락의 종교, 저는 참 빛의 종교, 그를 재생하여 페이퍼를 시간 안에 쓰게 하여 학점을 줘야 하는데, 제가 한 사람이 F를 받아 모세적 종교의 저주를 뒤집어쓰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 수가 없는데, 한 사람은 뭐에요? 그럼 이제 제가 B학점을 받기로 하고 페이퍼를 쓰겠습니다, 시간 안에는 못 냈지만 그래도 페이퍼를 내겠습니다, 하면 은혜가 되는데, 은혜라는 말은 죄악된 경험으로 자기 존엄성을 파괴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당신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이것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하면 당신의 죄악된 모든 당신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쓰레기 경험들을 잊어버릴 수 있고 새 사람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을 만나자마자 내 자신을 망각할 정도로 새사람을 만들어주는 갱생의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는 겁니다. 은혜는 용서가 아닙니다. 은혜는 용서가 아니라 갱생입니다. 은혜 받았다는 말은 갱생되었다, 새 창조를 덧입었다는 뜻입니다. 전두환 씨가 은혜를 받으면 용서만 받고 2380억 정도의 추징금을 안 물어도 되는 것, 이것이 은혜 받은 게 아닙니다. 전두환 씨가 참된 은혜를 받으려면 잘못을 뉘우치고 2380억 꼬불쳤던 것을 내고 또 더 내야 합니다. 이게 은혜 받은 겁니다. 전두환 씨는 은혜 받은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은혜 받는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하느냐면 갱생과 회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삭개오가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뭡니까? 모든 토색한 것을 다 내어 놓았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각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의미로 은혜를 받기 원한다면 진짜 좋은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가, 즉 갱생까지 가는 새 창조에 이르는 그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 없이, 그 갱생 없이는 지옥에 떨어집니다. 영원한 형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잘못된 삶을 갱생시키는 힘입니다. <레 미제라블>이라는 1861년 작품이 있습니다. 19세기가 참 대단합니다. 1880년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나옵니다. 1861년에는 <레 미제라블>이 나오는데 그 소설의 큰 줄기는 인간갱생입니다. 인간갱생, 끊임없이 은혜 받아서 새 인간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레 미제라블>입니다. 그런데 1장 첫 부분에 미리엘 신부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 미리엘 신부는 젊은 날 난봉꾼으로 살았습니다. 난봉꾼으로 살던 미리엘 신부가 은혜 받아서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성직자가 된 미리엘 신부가 얼마나 갱생시키는 은혜의 빛을 많이 발산하는지, 너무 굶주려서 자기 누나의 아들 딸, 조카들을 위해서 빵가게의 유리창을 깨고 빵을 훔친 장발장이 19년을 살고 4번 탈옥합니다. 그런 불쌍하기 짝이 없는 장발장이라는 사람을 갱생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은혜를 베풉니다. 어떤 은혜를 베푸느냐면 이 장발장이 새 사람 되려고 애를 쓰다가 장발장을 파괴하려고 하는 자베르 형사가 끊임없이 장발장을 비난하고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 장발장이 미리엘 신부님의 은혜로 갱생되어서 한 지중해 도시에 가서 작은 도시에 가서 검은 유리 세공업을 일종의 중소기업 창업을 해서 큰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지방 해변도시를 완전히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시장으로 당선됐습니다. 그렇게 멋지게 살고 있는데 자베르 형사가 나타나서, 네가 아무리 새사람인 채 해도 너는 탈옥수에 불과해, 그를 고발해서 또 다시 재판에 갑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미리엘 신부가 쏘았던 끊임없는 은총의 햇빛이 자기를 파괴하고 세상을 향해서 파괴적인 범죄자로 살아가려는 충동을 끊임없이 억제하면서 계속 새 사람이 되게 만들어주고 새 사람이 되어 마침내 그 일생이 성자로 끝납니다. 그런데 소설 중간 중간마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만 오직 그를 알고 있었다’ 1800년대 소설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그렇게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 두 가지입니다. 은총의 빛을 한 번 비춰주면 갱생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악과 죄와 충동할 때 은혜를 선택하고 새사람 되는 결단이 계속 일어납니다. 너무 중요하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도 사람이 거듭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한 네 사람의 주인공이 거듭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노아의 세 아들과 똑같습니다. 보통 죄인들의 가정,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입니다. 그 중에서 조시마 장로라는 사람이 성자가 되는데 조시마 장로가 거듭나는 이야기가 앞부분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이 성자처럼 바뀐 조시마 장로가 얼마나 난봉꾼 혈기가 가득 찬 젊은 장교인지 모릅니다. 자기가 어떤 유부녀를 사랑하고 그 유부녀를 사랑하는 다른 남자, 어떤 멋있는 여자의 원래 애인이 나타나니까

갑자기 권총대결을 불러내서 난동을 피운 인물입니다. 젊은 날, 그런데 이 사람이 점점 바뀌고, 마침내 카라마조프의 맏아들, 미차라는 사람이 다 바뀌어가는, 자꾸 바뀌어갑니다. 그런데 끊임없는 은총을 베푸는 사람이 조시마 장로, 조시마 장로의 분신이었던 막내아들, 알로샤, 계속 은총을 베풀고 끝까지 사랑을 베풀고 용서를 베풀고, 끝까지 화해를 베풉니다. 그게 갱생시키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무한 긍정의 시선으로 보고 무한 새 출발을 항상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부정적인 지혜와 쓰레기 같은 모든 나쁜 경험들을 다 잊어버리게 만들고 내가 나에 대해서 무한한 자존감을 회복하고 새 출발 하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의 특징은 갱생의 힘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끼친 사람은 무얼까요? 어제 이 사람이 나에게 실수했다고 그걸 기억하면서,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다 알고 있어, 이건 자베르 형사의 눈길입니다. 파괴적인 눈길입니다. 그런데 은혜 받은 사람은 어제 그 사람이 아무리 실수해도 정말로 연기할 필요 없이 정말로 악수하는 겁니다. 저도 목사님 하다 보면 꼭 교인 중에 목사님의 자베르 형사가 나타납니다. 나의 자꾸 나쁜 점만 보고 정말로 나의 모든 동기를 나쁘게만 해석하는 사람이 나타나요. 그런 사람 앞에는 다음 주일날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 금식을 해야 합니다. 원래, 하루 금식을 하고 하루 종일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만 악수가 나오지, 만일에 기도를 하루만 하지 않으면 나타나자마자 확 때립니다. 그 사람은 나의 죄악된 부분을 나의 가장 나쁜 부분만 보고 비판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진짜 악수가, 진정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악수가 가능하려면 축복기도를 많이 해줘야 합니다. 지금 양목사님도 교인이 적기 때문에 초기에는 미운 사람이 없지만 나중에는 삼일 금식기도 하게 만드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학생 중에도 다 좋은 학생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오해하는 사람이 있고요. 모든 좋은 인간관계도 내 인간성을 흔들고 나의 먹물 같은 죄를 생산하게 만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은총의 끊임없는 갱생의 힘을 우리가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족관계도 마찬가지고 모든 관계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제가 볼 때 인간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는 너무 좋은 사람만 있기 때문에 금식 기도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항상 매일 정식 식사하고 와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제가 볼 때는 참 목사에게는 반드시 금식기도하게 만드는 훌륭한, 우리를 성자로 만드는 가시 같은 교인이 반드시 몇 명씩 나타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유다와 마지막 식사 때까지 식사 하시면서 긴장어린 대화를 하지 않습니까? 팔라면 팔라, 예수님도 유다보고 그랬잖아요. 나중에 유다가 나가니까, 에이 저 자식 안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예수님도 그 말을 하시면 안 되는데 예수님 너무 속이 상하니까, 또 그걸 복음서 기자는 적어놓고 있어요. 그것 좀 빼 놓으면 누가 잡아먹나? 저 자식 안 태어났으면, 그것도 성경까지 인용하시네, 예수님은 사실상 유다 때문에 얼마나 속이 상하셨는지 몰라요. 외경에 보면 유다가 더 얄미운 짓을 많이 해요. 막달라 마리아와 오랫동안 포옹을 한다고 유다가 토를 답니다. 예수 오늘 막달라 마리아와 3분 이상 더 오래 포옹하다, 이게 유다가 하는 짓입니다. 그걸 막 트위터에 올립니다. 예수 특별히 마리아 편애하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과 유다 사이는 굉장히 뭐라 할까? 예수님을 약 올리는 존재였어요. 예수님은 마지막에 절대로, 복음서에서 제가 사본을 기록한다면 이걸 빼고 싶어요. 그놈 안 태어났으면 좋을 놈이다, 그런 기록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도 참 제자 사이에 예수님의 인간성에 먹물 같은 그런 검은 모습들을 자아내게 만드는 요소, 그런데 예수님은 은총의 갱생의 힘을 발산해서, 예수님과 유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다가 만일에 자살로 스스로 자기 생애를 마감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유다에게 찾아가셨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갔을 겁니다. 베드로를 찾아가신 예수님이 유다를 찾아갔을 거예요. 예수님 안에서는 갱생의 힘, 그래서 진리는 갱생된 사람이 진리 안에 즉 오늘 받은 기대에 머물 수 있는 계속된 힘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갱생을 시키긴 하는데 갱생을 시킨 그 사람을 계속 그 상태에 머물도록 끊임없는 힘을 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 안에 진리가 충만했어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본문에 나오죠? 충만한 데서 받았다는 말뜻은 하나님의 무한한 갱생의 힘은 인간의 어떤 죄악과 사악한 힘보다 더 크다는 뜻입니다. 이때 충만하다는 말은 로마서 5장 12-21절에 보면 나옵니다. 아담 인류가 가져온 불순종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가 가져온 순종의 양보다 적기 때문에 순종 부분이 불순종 부분보다 더 많기 때문에 잉여 부분이 있기 때문에 충만이 됩니다. 여러분 생각할 대 인간이 너무 탐욕적이기 때문에, 탐욕적인 사람들의 신문기사만 읽으면 우리 마음이 아라비아 사막처럼 타버려요. 여러분 나쁜 사람 기사를 절대로 많이 읽지는 말아야 합니다. 나쁜 사람들 기사를 많이 읽을수록 우리 마음은 힘들어집니다. 어떻게 해요?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감동적인 사람의 이야기를 일단 많이 알고 나서 은총의 힘 아래서 부정적인 사람의 기사를 읽어야지, 부정적인 사람 기사만 너무 많이 알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때의 충만함은 아까 말했죠? 인간의 어떤 불순종과 죄악이 많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소진시킬 수 없고, 하나님의 그 하나님 되심을 흔들 수 없다, 어떤 패악과 반역과 불순종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갱생시키는 힘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힘과 하나님의 사랑하는 그 힘을 그 결단을 그 태도를 와해시킬 수 없다, 그게 충만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충만함, 그 충만한 데서 받았더니 갱생시키는 은혜가 계속 나왔습니다. 그런데 모세종교의 특징은 뭔지 압니까? 모세의 종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 저주를 하고 해결책이 저주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이게 모세의 종교입니다. 모세의 종교 특징은 율법 중에 하나만 어겨도 저주를 선언하고 저주 안에서 우리를 빼낼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의 참 종교는 무엇입니까? 최후심판으로 내동댕이쳐진 우리를 갱생시켜서 율법을 지킬 능력을 구비시켜줌으로써 모세의 종교의 요구를 뛰어넘는 사랑과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인류 모두가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인류 모두가 이 은혜로운 예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져야 하고 전파돼야 합니다. 기독교의 참된 위기는 무엇입니까? 교인 수가 줄어가는 게 위기가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엄청난 욕구를 가진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절대로 기독교는 위기가 아니고 교회는 위기가 아닙니다. 이렇게 멋진 하나님을 얼마나 인간들이 많이 찾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은혜로운 예수님을, 갱생의 예수님을 찾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위기나 불안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교회는 불황에 빠질 수 없습니다. 다만 제도종교가 윤리적 일탈과 도덕적 일탈을 하면 일부 교인들이 하나님 은총에 충분한 감화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빠져 나갑니다. 그러나 저는 교인들이 빠져나가더라도, 교회에 죄가 있고 우리 목사님이 나쁘더라도 내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나는 떠날 수 없습니다. 왜? 내 죄의 참혹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주변에 누가 잘못했다고 교회를 쉽게 떠날 수 없는 나는 속박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저는 떠나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위기 자체에 빠질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의 위기에 대한 응답이 기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위기에 빠질 수 없는 겁니다. 다만 기독교 일탈과 도덕적 타락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반성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은 인간이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 한 어떤 기독교도 위기 자체에 빠질 수 없는 겁니다. 가향공동체가, 우리교회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운동을 많이 함으로써 신화돼야 하겠습니다. 그리스 수도사나 이집트 수도사처럼 먹지 않고 결혼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신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는 즉, 허드렛일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육신을 통하여 말씀을 표현하는 실천된 기독교인이야 말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아들다운 영광이죠. 하나님의 아들다운 영광은 무엇이죠? 말씀을 육신으로 실천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다운 영광을 발산하는 것이죠. 누가요? 목사님이 일하는 것, 교황이 추기경이 육체노동자처럼 봉사를 일삼는 그런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영광을 발산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모든 육체적 허드렛일까지 포함하여 고개를 낮추고 몸을 낮추어서 그 낮춤 속에 영광을 은닉해놓는 것이 요한복음적인 하나님 나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듯이 우리도 육체로 우리 사랑을 표현하게 해 주시고, 굽혀진 몸으로 우리 진실을 표현하게 해주시고 주님 교회가 이 세상에 몸을 구부려서 종으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게 하시고, 사랑 때문에 몸을 구부리는 교회가 세상 만민들에게 은총을 매개하게 해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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