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할 일꾼들은 어디에?
마태복음 9:35-10:1
네, 금년 여름 우리 교회 여러 단기 사역, 선교 사역팀이 지구촌 도처에서 세계 도처에서 땀을 흘리며, 복음을 위해서 귀한 씨를 뿌리고 또 많은 열매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저도 지난 월요일 날 중국 베이징으로 북경으로 출발해서 토요일날 까지 우리 교회 중보 기도 사역팀 21명과 함께 중보 기도 사역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특별히 북경의 한인교회가 모이고 있는 한 호텔을 빌려서 이곳은 합법적으로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에 중국 여러 지역 특별히 중국의 아주 오지, 상황이 열악한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고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약 백여분을 초청해서 중보 기도 사역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아 , 저는 그분들 얼굴을 보고 만나는 것만으로도 제가 축복을 누렸습니다. 대부분 한 30시간, 40시간, 50시간씩 기차타고 오는데, 어떤 한 선교사 가족은 중국 신강성, 그 티벳하고 접경지역에서 기차타는데까지 버스타고 30시간, 그 다음에 기차를 타고 중국 북경까지 62시간을 왔데요. 믿어지십니까? 그러니까 92시간을, 92시간을 걸려서 이 세미나에 참석한 선교사님들이 계셨어요. 그분들을 만나고 격려해드리고, 함께 기도하고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함께 가슴을 드리고 기도하는 그런 아주 뜻있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거기다 저는 금요일날 저녁에 또 북경 지역의 교민들을 위한 일일 부흥회를 또한 갖기도 했습니다. 허나, 이 사역 세미나가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닙니다. 중보 기도라는 것은 항상 영적 전쟁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치열한 사탄의 방해가 또한 있었던 것을 경험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 뭐, 선교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다 보고해 들릴 수는 없습니다마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우리가 이 사역을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수요일날 12시에 우리가 끝나기로 되있었고, 그 날 저녁은 특별 집회가 본래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근데, 갑자기 예정에 없었던 그 호텔에 강택민씨가 주석이 오니까, 집회를 모이지 말라는 그런 또 소식이 들어와서 우리가 당황을 하고 그랬습니다. 결국 수요일날 저녁 집회는 취소 되었습니다마는 기도 사역 세미나는 끝까지 우리가 잘 진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그 때 오는지 몰라요. 전혀 우리는 예상없이 그런 일들을 또 경험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는 더욱 간절했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또 성령의 함께 하심을 경험했고, 또 짬짬히 우리는 여리고 작전으로 중국 베이징의 거리, 천안문과 많은 거리들을 우리가 걸으면서 이 땅을 하나님이 주장해 주시도록 그리고,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이 일어나도록 우리는 땅 밟기를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들을 함께 가졌습니다. 저는 한 주간동안 이 북경의 거리를 걸으면서 전 중국 갈 때마다 꼭 중국의 거리는 삼위 일체다라는 느낌이 들어요. 자동차, 자전거, 사람들. 셋이 아주 다 몰려 다니니까 함께 사이좋게 몰려 다니니까.
네. 그런 거대한 물결, 거대한 물결을 바라보면서 제 마음속에 계속해서 떠올랐던 성경 구절 중에 하나가 마태복음 9장 3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보시고 수많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유리함이더라” 그 말씀이 계속 저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아, 오늘날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가 누구냐고 물어 보십시오. 그들은 정신적으로 리드(Lead)할 수 있는 지도자가 누구냐고 물어보세요. 아마 목자없는 양이라고 얘기하면 중국 사람들은 화를 낼지도 모르죠. 왜, 우리에게 목자가 없느냐? 아마 모택동이 우리들의 지도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을 지 모릅니다. 혹은 등소평이 우리의 지도자라고 혹은 강택민이 우리의 지도자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을 만나서 이렇게 얘기를 해 보면, 빙글 빙글 웃으면서 한 세사람이 똑 같은 얘기를 하더라구요. 우리 지도자요 모택동, 모택동에 관해서는 문화 혁명을 통해서 그들은 이미 모택동에 대한 마음을 비우고 떠나 갔습니다. 더 이상 등소평도 그들의 지도자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누가 지도자냐라고 그러니까 돈이 지도자례요. 돈이.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무너져가는 이 시점에 있어서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도 그들의 지도 이념은 되지 못합니다. 너도나도 중국 사람들이 지금은 단지 하나, 돈을 위해서 뛰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결코 줄 수 없는 정신적인 공허, 영적인 불안과 허무 때문에 헤메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이 선교사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얼마나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졌는지 알 수가 없어요. 뭐,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다 말씀해 드릴 수는 없지만서는, 중국의 지방의 한 시골에서는 한 마을 전체가 주님앞으로 막 돌아오는 그런 기적이, 기적적인 사역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들입니다. 내 몽고였던 지역에서는 한 마을 전체가 다 돌아와서, 온 마을이 다 크리스챤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디서 모이냐고 제가 물어 봤어요. 그랬더니, 동굴에서 모인데요. 동굴에서 한 2천명, 3천명이 한꺼번에 모이는 . 아니 그 공안이 보고 안 하느냐고 하니까, 공안까지도 보고 할 사람까지도 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크리스챤이 되는 그런 역사들이 일어났다고 . 그래서 제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 제가 사실은 가기로 예정되있었는데, 뭐, 상해쪽에서 태풍이 막 불어오고 그래서 비행기가 Cancel(취소)이 돼버렸어요. 사탄이 계속 막더라구요. 그러나 참 이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그들의 승리로운 간증,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흔히 한국 교회를 바라보면서, 한국 교회의 많은 부정적인 측면들에 관한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한국 교회의 지나치게 목사가 과잉 생산되고 있다. 신학교가 너무 많다. 저는 지금 열려오는 중국을 바라보면서, 또 조만간 북한도 열릴 터인데, 만약 중국이 열리면 저는 한국에 있는 현재 사역자를 다 보내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몽땅 다 중국에 보내도 오히려 더 부족할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중국이 열릴 때, 온전히 열릴 때, 우리에게 준비된 사람들이 있겠느냐? 그 땅에 가서 복음화를 위해서 정말, 복음의 씨를 뿌릴 수 있는 준비된 일꾼들이 있느냐? 이것이 우리가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은 희어져 추수하게된 세계의 추수터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꾼 주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이 시대의 일꾼, 그 일꾼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텍스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을 부르시고, 또 사람을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 하나님이 오늘 부르시고 쓰시고자 하는 일꾼들은 도대체 어떤 일꾼일까요.?
저는 첫째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임을 받아 이 시대 우리도 한번 쓰임을 받는 일꾼으로 살아가려면 첫째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본문의 36절을 읽도록하겠습니다. 본문의 3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이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다고요. 우리도 이 땅을 거닐고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곁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런 무리들을 볼 때, 여러분은 뭘 느끼십니까,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정치가들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표를 던질 수 있는 한 표로 사람들을 바라볼 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장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장사의 대상, 자기의 이익을 줄 수 있는 달러로 , 머리 하나 하나가 달러로 보일지도 몰라요. 아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 한사람이 작품의 대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 무리들을 보았을 때, 어떻게 보셨다구요. “목자없는 양과 같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고 있는 양들로 보았습니다. 저는 성경이 인간에 관한 여러가지 아름다운 묘사들을 변명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탁월한 묘사중에 하나가 있다면 “양”이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양과 같아서.
저는 목장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목장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목장 지배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제 이름이 목동이었습니다. 팔자가 목사죠. 제 이름이 목동이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뭐 말 , 소 , 뭐 양들하고 이렇게 뒹글면서 장난을 쳤던 그런 기억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양에 대해서 조금 알아요. 양이 아주 매우 특이한 그런 동물입니다. 보기에는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고 좋은 이미지를 가진 존재이지만 막상 같이 놀아보면 그렇게 좋은 면만 갖고 있지는 않아요. 우선 양에게는 방향 감각이 없어요. 방향 감각이 . 우리가 집에서 기르는 대부분의 애완용 동물들 밖에 갔다 놓으면 반드시 집을 찾아옵니다. 개도, 소도, 말도, 고양이도 다 찾아와요. 그러나 양을 갖다 놓으면 찾아오지 못해요.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방향 감각이 없어요.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여러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나란 존재가, 내 운명이, 내 인생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여러분 아세요?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양과 같다”, “우리는 양과 같다”. 또 양이란 동물은 길러보면 이 특성중에 하나가 아주 겁이 많습니다. 두려움이 많습니다. 자구책이 없어요.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가 전혀 없습니다. 어떤 동물들은 신체의 한 부분을 예리한 무기로 사용합니다. 예컨대, 자매들의 손톱, 이것도 무기중에 하나잖아요. 네, 우리가 무기가 많아요. 어떤 동물들은 자연의 색깔과 같은 보호색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양에게는 그런 보호책이 없어요. 두려움이 많구요.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양과 같아서” 우리가 다 폼잡고 당당하게 앉아 있지만, 병원가서 진찰 받아 보고, 의사 선생님이 좀 이상한데요. 암 같은데요. 한 순간, 내 삶이 내 존재가 무너져 내리도록 우리는 두려워 하고 연약해 하는 존재,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다 양과 같다. 또 양이 깨끗한 것 같죠. 그러나 아주 쉽게 더러움을 타요. 아주 쉽게 더러움을 타요.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보면 다 신사 숙녀같지마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환경속에 오염되고 세속화되기 쉬운 존재들 성경은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는 다 양과 같다. 이런 양의 문제, 양의 모든 문제들은 하나만 있으면 해결되잖아요. 그 해결이 뭡니까? 목자만 있으면 되요. 목자만 곁에 있으면 방향을 잡아주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고, 안내하고, 앞서가고, 또 목자만 곁에 있으면, 그들을 보호해 주고,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그 위험속에서 지켜주고 든든하게 만들어 주고 또 목자만 있으면 그 양을 깨끗이 씻어 줍니다. 근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 위해서 왔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이 주님의 눈에는 목자없는 양으로 보였던 것이예요. 목자없는 양들. 그 양들을 보았을 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은 어떻게 느끼셨다구요. 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더라. 민망히 여기 시더라. 여기서 민망하다는 단어은 영어로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가 쓰여집니다. Compassion. 두가지 단어가 결합된 것인데요. Com, Co라는 단어와passion이라는 단어가 결합된 것입니다. 함께 느낀다. 혹은 본래 단어가 함께 고통한다. 함께 고통한다. 예수님은 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보셨어요. 양의 방황이 자신의 방황이었습니다. 양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었고, 양의 눈물이 자신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방황, 그들의 두려움, 그들의 아픔, 그들의 좌절을 자기의 좌절처럼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셨다. 함께 느끼셨다. 이말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쓰실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꾼들 어떤 일꾼일까요? 바로 이런 주님의 마음. 이 주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겠어요.
저는 지난 주일 제가 설교하면서 헨리 나우엔의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 그가 쓴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책은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 일것입니다. “Wounded Healer” – 상처입은 치유자. 그는 이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거죠. 예수님이 상처입은 치유자다 이말입니다. 자신은 건강하고 전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접근해 간 것이 아니라, 그도 인간으로 오셔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또 강보에 싸인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 땅의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시면서 우리처럼 고통 당하시고, 아파하시고, 모든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셨기에 그분은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치유자, 상처입은 치유자. 그는 동시에 이 책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바로 그런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것입니다. 근데 이 책에보면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인용합니다. 어떤 랍비 하나가 우연히 예언자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랍비가 예언자 엘리야에게 묻습니다. 메시야은 언제 오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뜻밖에도 엉뚱한 대답을 하는 거예요. 무슨 대답을 하냐면 엘리야가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메시야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아니 어디 계신데요?” “아마 저기 성 바깥에 지금 사람들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 아 ~그래요. 내가 어떻게 메시아를 알아 볼 수가 있습니까?” 이 때 엘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말하기를 이렇게 말을 해요. “그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상처를 입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를 어 풀었다, 감았다, 자기 상처를 풀었다, 감았다 하면서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상처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두리번 거리며 도울자를 찾고 있는 분이 바로 그 분이 아마도 메시야일것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성경이 그리고, 그려지고 있는 메시아 상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고 있어요.
그 분에게도 상처가 있었어요. 십자가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는 배신이, 단절이, 고독이, 소외가 얼마나 아픈 상처인가를 이해하시는 분이예요. 십자가의 절정에서 그가 뱉어 놓으신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하나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이 단절과 고독과 배신과 상처를 이해하시는 바로 그 분. 허나 그러기에 여러분과 저를 이해할 수 있는 그 분. 그리고 우리를 정말 치료 할 수 있는 분. 그 분이 바로 상처입은 치유자 이십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시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묘사하면서, 그분에게 대 제사장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제사장 하는일이 뭐예요. 백성들의 아픔이나, 문제나, 어려움이나 고통을 대신 끌어 안고, 하나님앞에 나가서 하나님 이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해결자. 이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제사장이 아닙니까? 좋은 제사장은 뭐냐? 백성들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절실하게 같이 느끼는 사람. 그런데 성경은 히브리서 4장은 예수님에 대해서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 오늘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이런 말씀이 나와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이중 부정이죠.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느낀다. 이 대목에서 영어 번역에 보시면 Sympathize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Sympathic –같이 느낀다. 예수님은 더불어 느낀다. 그는 우리의 아픔을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좌절을 우리의 아픔을 느끼신다. 그래서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바로 그 분,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길 원한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볼 때 같이 아파할 수 있는 마음. 그들의 좌절 때문에 같이 좌절하고 그들의 낙심 때문에 같이 낙심하되, 그러나 동시에 그들을 버려둘 수 없는 마음으로 접근해가는 사람들, 내 상처도 있어요. 내 아픔도 있어요. 그러나 자기 아픔속에만 빠지지 않고, 그러나 내 아픔을 통해서 나보다 더한 아픔속에 주저앉아 있는 이웃들을 향해서 손을 펴칠 수 있는 사람들, 주님은 이런 일꾼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희어져 추수하게된 이 밭에 고통하고 있는 인류를 바라보시면서 주님은 오늘 이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 저는 오늘 우리 가운데서 이 시대 우리 한번 쓰임받기 위해서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심정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자.
두 번째는 예수님의 방법을 가진 자. 예수님의 방법을 가진 자. 우리가 35절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본문의 3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여기 보면 세 가지 아주 중요하게 강조된 동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단어가 어떤 단어예요. 어떤 단어가 나옵니까? 가르치시며, 또 전파하시며, 그 다음에는 고치셨다. 가르치시며 Teaching, 전파하시며 Preaching, 고치셨다 Healing. 이 세 가지 단어가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어요. 사역의 방법이었어요.
오늘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시대는 소위 정보 초고속도로의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Click 한 번만 하면 전세계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사고의 변혁이 사고의 틀이 변혁되기를 요청 받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 왔던 모든 일들에 대한 방법이 계속해서 달라지는 아마 그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저는 변하지 않을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해야 할 방법 가운데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임하신 이 놀라운 모본으로 보여주신 방법 이 세 가지예요.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방법이예요. 물론 가르치는 방법은 변화될 것입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새로운 시대에 따라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르치느냐? 어떻게 전파할 것이냐? 효율적으로 어떻게 더 빨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어떻게 깊이 있게 전파할 것이냐? 또 어떻게 고칠 것이냐?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짐을 어떻게 우리가 짊어지고 함께 우리가 그들을 도울 것인가라는 방법은 계속 바뀔 것입니다. 개발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구적 방법으로서의 원론적인 방법 우리가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 오실 때까지 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우리는 계속 전파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너희가 서로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우리 주변에 아파하고 마음이 병들고, 육체가 병들고 아파하고 있는 이웃들을 끊임없이 찾아가서 그들을 치료하는 일. 이게 주님의 방법이예요. 우리는 계속적으로 이 방법을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방법이 다 한 공통의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예요. 여러분 무엇을 우리가 가르쳐야 합니까? 우리가 가르칠게 뭐예요. 말씀이죠. 내 철학이 아니예요. 내 아이디어가 아니예요. 내 지혜가 아니예요. 우리의 아이디어, 우리의 철학, 우리의 생각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을 선포해야 할까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파하고, 병들고, 좌절하고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무엇으로 우리가 섬겨야 할까요? 무엇으로? 말씀으로. 왜요? 여러분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거듭나게 하신 구원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생명이라고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희망이라고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빛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빛이요, 구원이요 능력이신 하나님의 말씀, 이 말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전히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가르치고, 전하고, 그리고 이 말씀을 권고해서 사람들을 치료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이 말씀에 전문가가 될 수가 있느냐예요. 저는 이 말씀이 꼭 목사와 같은 목회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새로운 시대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처음부터 주님의 명령이었어요. 사탄은 목사들이나, 또 전문적인 선교사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를 속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예요.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일이예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예요.
이번에 중보기도 사역 세미나에 중국에서 모였던 선교사님 가운데 삼분의 이는 신학교 출신의 목사님들이나 목사로서 선교사가 된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삼분의 일 정도는 평신도 출신 분들이예요. 그분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위장하고 선교하고 있는 분들이었어요. 실제로 사업을 하세요. 위장이 아니라 사업도 하시면서, 그런데 제가 그분들을 만나면서 흥미 있는 하나의 소감이 있었어요. 가끔 가끔 강의 중간 쉬는 시간에 대화를 하게 되면, 보면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더 많은 간증을 하고 있어요. 더 많은 간증을…. 아, 하나님이 이분들을 효율적으로 쓰시는 구나. 선교의 현장에서 목사만 선교하는 게 아니예요. 목사가 오히려 선교를 못해요. 평신도들이 더 잘해요. 사실 선교학자들은 이런 시대를 예견하면서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이 시대에는 우리가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전세계 80%는 이미 문을 닫고 그와 같은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이 폐쇄된 군데 선교의 문이 닫혀 있는 지역에서도 그들은 의사를 요구하고, 간호사를 요구하고 Computer specialist를 요구합니다. 전문가들을 요구해요. Professional로서 전문가로서 들어가서 전문지역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그들에게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예요. 제가 이번에 선교사들을 만나서 그런 놀라운 기적 같은 간증들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흥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바로 이런 사람들이예요.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소원한다면 주안에 준비되기 원한다면 누구나 주 앞에 쓰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만 될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 시대에 무한하게 열려져 있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봐 보십시오. 여러분의 직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아니 저 해외의 시장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그 손짓을 보십시오. 우리가 만약 Tent Maker Mission에 이 전문인 선교 사역에 헌신할 수 있다면 저는 그때 비로소 세계 복음화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일꾼을 찾으시는 이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이 주님의 방법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느냐 말이죠. 교회에서 이 평신도 선교 대학을 개설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다가오는 새 시대 바로 이러한 삶의 장에서 사역의 장에서 구체적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비되기 위하여…. 여러분의 직업이 뭐래도 좋아요. 신학교 안가도 상관없어요. 신학교는 이런 전문적인 지식의 훈련을 사실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보다 실제적인 훈련을 통해서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장에 설 수 있도록 준비만 될 수가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기적처럼 쓰시는 놀라움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의 방법을…. 여러분 감리교 운동의 창설자인 존 웨슬리라는 이름을 기억하시죠? 요한 웨슬레가 한번은 그의 시대에 효과적인 세계복음화의 전략을 위해서 동료 지도자들과 모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토의되고 있었어요. 갑자기 웨슬레가 일어나더니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해요. "방법이요? 우리에게 방법이 있다면 단 한 가지의 방법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만약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죄만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100명만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금년이 지나가기 전에 이 세상을 뒤집어 놓겠습니다." 하나님 이 외에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죄를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 100명만 준다면 나는 이 해가 가기 전에 이 세상을 바꿔 놓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서 찾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방법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방법을 가진 자.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의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가진 자. 우리 10장 1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10장 1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때때로 저는 오늘 이 시대에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왜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제가 가장 깊이 고민하고 있는 그리고 기도하는 시간마다 주 앞에 묻고 있는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설교도 많아졌어요. 인터넷 들어가서 Click하면 얼마든지 좋은 설교들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프로그램도 좋아졌어요. 성경연구도 많아졌어요. 카운슬링 프로그램도 많아졌어요. 그러나 이 세상은 더 어두워져 있고, 사람들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부딪쳐 오는 결론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능력의 결핍이라는 사실입니다. 능력의 결핍. 설교는 있지만 능력이 없어요. 능력이 없는 설교,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설교. Teaching은 있지만, 가르침은 있지만 능력이 없어요.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아요. 상담을 하고 말은 하고 떠들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서 도움을 받지 못해요. 능력이 없는 상담.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제자들을 이렇게 세상으로 내어 보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10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12제자들 보내셨을 때, 그들을 보내시면서 그냥 내 보내신 것이 아니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전도의 여정에서 그들이 순종하고 나가는 길에 있어서 아픈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그리고 어둠에 붙들려 있는 악한 영들에게 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제자들을 보내셨던 주님, 바로 그 주님, 그 동일하신 주님이 오늘 여러분의 주님이고, 나의 주님이고, 우리의 주님이라면, 저는 우리의 주님이 그 동일한 능력을 이 시대에 우리 가운데 부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에 만난 분 가운데서 한 분, 평신도 선교사인데, 제가 대학시절부터 알았던 친구예요. 그런데 제가 대학 시절 보았던 그 친구의 모습은 항상 수줍어하고 소극적이고, 항상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려했던 그런 스타일의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변했더라구요. 흥분해서 자기의 사역을 얘기해요. 하나님이 주신 그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이야기하더라구요. 아,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 구나. 믿을 수 없는 얘기예요. 황당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믿어지더라구요. 왜냐하면 저는 그의 얼굴에서 봤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를 쓰시고 있는 삶의 감격이 그 얼굴의 표정에 나타나고 있는 그 영광스런 모습을 제가 부정할 수가 없었어요. 주의 능력이 이 형제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제가 부정할 수 없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렇게 사람을 쓰시는 구나. 이렇게 사람을 쓰시는 구나. 자기가 안일한 직장을 박차고 중국에 갔지만, 그를 통해서 무려 한 성이, 한 커다란 성이 남한의 다섯 배쯤 되는 그 성이 지금 변하고 흔들리고 있는 그 감격을 말하고 있는 이 친구의 모습 속에는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표정과 그의 삶의 자세 속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그 세계 기독교사를 기술한 학자 가운데, 아주 지금까지도 평가되고 있는 학자 가운데 라토렛이라는 학자가 있어요. 이분이 1세기의 초대교회를 기록하면서 이 분이 이런 인상 깊은 글을 남겼습니다. "초대교회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바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스토리"라고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아무나 볼 수 있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삶의 이야기…. 그들에게는 지식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조직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후원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성령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역사의 기록을 최근에 다시 읽었을 때 저는 이 말씀이 거꾸로 이렇게 들렸어요.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프로그램도, 지식도, 조직도, 후원도 가지고 있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오늘 너무나 부요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차라리 우리가 열악한 삶의 상황 속에 있다면 그분만을 의지할 수 있을 터인데. 오늘 우리가 선교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기적같은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들을 때마다 제 마음속에 질문이 하나 있어요. 왜 그런 역사가 우리 주변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선교지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날까? 우리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래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부요함이 성령의 능력을 방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을 한 때가 있어요. 오죽하면 이런 Joke가 생겼어요.
마크 트웨인이라는 유명한 크리스찬 Humorist가 한번 성지 순례를 했다가 우리 교회에서도 성지순례를 갑니다만, 갈릴리 바다에 갔는데, 그 배 타는데 너무나 많은 돈을 요구하니까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는 유명한 기록이 있어요. 뭐냐면 "나는 이제야 왜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걸어가셨는지 이해하겠다"고. 방법이 없으면 하나님의 의지하게 됩니다. 길이 없으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전도 행적을 보면 그의 삶에서 가장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을 때는 그가 가장 연약해 있었던 순간들이었어요. 사도행전에 바울 사도의 전도여행을 추적해 가다가 소위 아텐 전도와 고린도 전도는 놀라운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아테네! 인류의 지성의 도시, 바울은 준비하고 갔어요. 그리고 멋있는 설교를 했어요. 그러나 뜻밖에도 결과가 시원하지 않았어요. 바울은 아마 좌절했을 것입니다. 절망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자기의 설교가, 선교사역이 아테네에서는 실패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치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잠시 후에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고린도에 갔어요. 고린도에서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어요. 큰 부흥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그 비밀을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들 가운데 왔을 때에 나는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한 번 실패했던 바울은 더 이상 자긍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주저앉았습니다.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떨었습니다. 계속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이제는 다만 나의 전도함이 사람의 말과 아름다운 소리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은 그를 통해서 역사했습니다.
여러분 부족해도 괜찮아요. 연약해도 괜찮아요. 주님 의지하시면,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 의지하면 나를 쓰실 수 있는 하나님을 여러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쓰실 수가 있어요.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좀 바깥으로 많이 나갔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좋은 평신도 상은 어떤 상이었냐하면, 일주일 내내 교회 와서 살면서 교회 이일 저일 뭐 열심히 하는 사람들, 챙기는 사람들, 그러나 저는 새 시대의 크리스챤 평신도 상은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이 세상이 부르고 있어요. 중국이 부르고 있어요. 지금 개방되고 있는 북한이 부르고, 온 세상이 부르고 있어요. 교회 일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걱정 안 해도 잘 될 거예요. 좀 나가요. 할 일 많은 세상으로 나가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고 나가세요. 여러분은 흥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구나.
저는 중국이 깨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공식적이지만, 거의 공식화된 통계에 임 중국의 크리스챤은 거의 1억을 넘어서고 있어요. 이 거대한 대륙이 꿈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어요.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러나 오늘 이 명령에 순종해서 가야할 일군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가기 전에 여기서부터 연습해야 돼요. 여기서부터 전도 잘하고, 전도잔치 하면 열심히 전도하고, 그거부터 제대로 해야 돼요. 그리고 준비되면 하나님이 나를 쓰실 것입니다. 우리들을 쓰실 것입니다. 그때 나를 통해서 세상이 바뀌는 기적을 보는 사람들…. 이 추수할 일꾼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기도하십시다. 다 일어나서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찰스 피니라는 미국의 유명한 부흥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어느 날 미국의 시카고 거리에 왔다가 거리의 교차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지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그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곁에 있는 분이 "목사님 왜 그러세요?" 그는 그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우리는 하나님이 그 분을 쓰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잖아요. 어떻게 보십니까? 내 주변의 사람들을…. 나도 상처가 많아요. 나도 아픔도 많아요. 그러나 내 상처에 집중하고 있으면 인생은 그냥 내 상처와 싸우다가 끝나는 거예요. 나도 상처가 있지만 그러나 내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셨다면 더 깊은 더 예리한 상처 때문에 울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 우리 주변의 사람들, 내가 그들에게 목자 없이 방황하고, 예수님이 없이 방황하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갈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시고 나를 쓰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한 번 의미 있게 살고 싶어요. 무의미하게 그냥 내 일생의 상처 붙들고 몸부림치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쓰임을 받는 인생, 추수할 일꾼으로 쓰이는 인생, 하나님 원하시면 저를 쓰실 수가 있사오니,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복음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숱한 영혼들을 바라보며 그들 앞에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 되게 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한 평생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고 좌절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고 예수를 찾고 하나님을 찾고 있는 목마른 영혼들을 향해서 이 말씀을 갖고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온 세상 위하여 찬송가 268장 1절만 함께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받고 이 세상을 향해서 다시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과 하나님 아버지의 변함없는 그 사랑과 성령의 함께 하심과 교통케 하심이 오늘 이 말씀을 받고 삶의 장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든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함께 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복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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