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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까지 안 가셔도 됩니다/마태복음 11:28-30

by 【고동엽】 2021. 12. 10.

병원까지 안 가셔도 됩니다
마태복음 11:28-30


저는 지금부터 오늘을 살고있는 현 대인들이 매우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한 질병의 증세를 묘사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확실히 정의할 수 없는 것입 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 키며 우리의 감성을 혼란시키며 우 리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 다. 이것은 우리의 기억력을 둔화 시킵니다. 사고력을 감퇴시킵니다. 삶의 효율성을 무너뜨리기도 합니 다. 이것은 우리의 두려움을 증폭시 킵니다. 슬픔을 가중시키고 불안을 증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를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으로 위험 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신 체의 메커니즘, 자기 방어현상에서 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고혈 압, 심장마비, 위궤양, 불면증, 알코 올중독 각종 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유형의 현대인들의 질병에 직접 혹은 간접 적으로 80%이상의 원인 제공을 하 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 매니지 (manage)되면 삶의 위대한 성취를 가능하게도 할 수가 있지만 잘못 매 니지(manage)되면 삶의 모든 성취 를 한꺼번에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 이 궁금하다. 그것이 스트레스입니 다. 그것이 바로 스트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소위 여가의 문화를 그동안 발전시켜 왔습니다. 각종 문 화활동,소위레크리에이션(recreation) , 인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취미 활동, 사교활동, 여행, 등산, 바캉스, 베케이션(vacation) 혹은 다양한 신 체적인 엑스사이즈(excise)프로그램 들, 이 모든 것은 필요한 것이고 그 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에, 치료에, 건강함에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만으로 인간은 근본적인 치유 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병원에 문을 노크하고 있습니다.
불란서의 한 유명한 정신과 진료실 에 한 남자가 우울증을 호소하기 위 해서 왔습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 테스트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간동안 같이 대화를 나눈 후 에 이런 처방으로서 이런 제안을 했 습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 불란서 에 아주 인기 있는 코메디 프로그램 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 일에만 몰 두하거나 일에 중독되지 마시구요. 요즈음 우리그리발디라는 유명한 연 극 배우가 있는데 그런 연극도 보시 고 그런 재미 있는 연극 속에서 한 번 빠져 보시면서 삶의 리듬을 좀 바꾸어 보시죠. 환자는 매우 무표정 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병원의 진료실을 빠져 내려가면 서 그는 이런 유명한 독백을 남겼다 고 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그리 발디가 나인걸요. 그 그리발디가 바 로 나 자신인걸요. 저는 병원의 존 재, 의사 선생님의 존재, 의약품의 존재를 결코 반대하는 사람이 아닙 니다. 의사 그리고 병원, 의료 이것 은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러나 보다 근본적인 정신 건강과 본 질적인 정신의 치유를 위해서 하나 님께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특별한 의사 한 분을 보내주셨습니 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 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 이라는 조그만 땅덩이에 가난과 그 리고 정치적인 여러 혼란 속에서 시 달리고 있었던, 소위 스트레스에 시 달리고 있었던 그 당시의 가난한 민 중들에게 이런 말씀을 증거하셨습니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여러분 내게로 오십시오. 나는 여러분들에 게 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것이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의 민중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 인들에게도 아직도 유효한 약속이라 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Good News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 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거리의 사람들, 여러분과 저 에게도 유효하지 못한 약속이라면 저는 오늘로 교회 문을 닫겠습니다. 목회를 해야 할 아무런 필요가 없습 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유효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 라고 말하고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 해서 교회는 존재합니다.
자, 이런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부 터 해방되어 진정한 안식, 진정한 자유, 진정한 행복의 처방은 있습니 까? 오늘 저는 여러분들을 예수 그 리스도의 처방 앞으로 인도합니다. 그 처방은 단순한 두 가집니다. 단 순하지만 근본적인 치유의 처방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처방은 내게로 오라는 말씀입 니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Come onto me.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 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는 인생이 짊어지고 다니는 수고하 고 무거운 짐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는 인 생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수고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나타 나는 것은 창세깁니다. 인간이 처음 인간이 죄를 범했을 때 그때 수고가 찾아 왔습니다. 범죄한 첫 번째 사 람 하와에게 이브에게 하나님을 이 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제부 터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자식을 낳는 것이 처벌이 아니예요. 수고가 처벌이었습니다.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 자매님이 아이를 낳으실 때 아주 유 쾌하게 기분좋게 지금부터 아이를 낳자 원, 투, 쓰리……그리고 유쾌하 게 출산을 했을지 모릅니다. 범죄한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할 것이라 이 수고 는 단순한 노동을 의미하는 말이 아 닙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말합니다.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귀 하게 평가합니다. 노동은 타락 전에 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 한 에덴의 동산 안에서 처음 사람들 은 경작하며 일하며 살도록 되어 있 었습니다. 노동이 잘못이 아니예요. 그러나 죄가 왔을 때 타락이 왔을 때 달라진 것은 뭐냐 하면 즐거워야 할 노동이 고통스러운 노동이 된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결과라 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토스토엡스키는 그의 작품 의 주인공의 입술을 빌려서 자주 이 런 말을 되풀이합니다. 죄인에게는 산다는 그 자체가 힘들고 버거운 일 이다 죄인에게는 산다는 그 자체가 힘들고 버거운 일이다. 따라서 죄문 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식은 없습 니다.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자 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죄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구 약의 이사야서를 읽어 보시면 이사 야라는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 그 메시야를 예언하면서 즉 예수가 오신다는 사실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할 것이다 질 고라는 말은 질병, 고통 이런 의미 들을 다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가 즉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가 우리의 질고, 우리의 질병, 우리의 고통을 짊어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 신 짊어지고 우리에게는 치유와 안 식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특정 종교를 과소평가할 의도 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이것은 저 의 체험이었기 때문에 제가 자주 간 증 삼아서 이 말을 되풀이 합니다. 20대 초에 저는 방황하고 있었습니 다. 앞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캄캄 한 어둠 속에서 저는 내적으로 잠들 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종종 죽음을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 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 저는 절을 자주 찾았고 참선을 하고 있었습니 다. 그 날도 불당에 가서 법당에 가 서 참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에 있는 부처님의 그 얼굴이 너무나 평 화스럽고 청정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순간 갑자기 그 순간 제 마음 속에서 이런 질문이 일어났어요. 저 평화스럽고 저 고요 한 저 법열의 청정한 얼굴의 부처님 이 나라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실 까? 방황하며 고통스러워 하며 이런 고민하고 있는 나라는 젊은이의 좌 절과 절망을 이해하실까? 그러면서 갑자기 그 순간 갑자기 그 순간 저 하고는 별로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 던 기독교,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도 예수 믿는 사람 그림자도 없었던 우 리집안, 따라서 기독교와 나와는 아 주 상관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기독 교의 예수의 그림자가 제 머리 속에 클로즈 업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 가에서 몸부림 치고 있는 예수, 편 안하지 못한 얼굴, 이지러진 얼굴, 절규하고 있는 목소리, 고통 당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예수가 갑자 기 생각나면서 제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 예 수라면 혹시 나를 이해할지 모르지. 나의 좌절을, 내 고통을, 내 방황을 이해할 지 모르지. 맞습니다. 그 분 은 이 땅에 오시사 짤막한 인생을 살면서 좌절과 배신과 고통과 오해 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의 절정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 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 리셨나이까 이렇게 죽으신 예수, 그 분은 나를 이해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 분은 나를 이해하셨습니다. 그리 고 내 마음 속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 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라는 인격이 내 마음 속에 찾아온 이래로 내 인 생을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 습니다. 그는 지금도 사람의 짐을 날마다 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예수 앞에 나 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이 유 중의 하나가 예수 믿는 것도 또 하나 내 인생의 짐을 더하는 것이라 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 니다. 종교를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 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저 는 종교가 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 다.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단순한 종교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라는 단어 는 성경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싫어하 셨습니다. 우리가 마태복음23장에 보시면 예수님 당시의 대표적인 종 교인 바리새 종교를 향해서 예수님 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 위 에 지워 주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 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여 내게로 오라 말씀 속에는 종교의 짐 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 을 지 모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 에게 종교를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 다.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목회를 하 면서 느끼는 것도 예수 만나지 못하 고 예수 체험하지 못하고 교회 생활 하면 교회 생활 하는 것도 짐이예 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 수님을 체험한 사람에게 교회 생활 은 자유의 표현의 한 장에 불과합니 다.
종교를 짐으로 생각해서 자기 가정 의 종교를 버리고 어느 날 떠나갔던 그리고 인생의 긴 방황 끝에 돌아와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눈물겹 도록 아름다운 소설을 쓴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의 얘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신앙생활 을 했습니다. 틴에이저 시절에 신앙 을 떠나 갔습니다. 그의 나이 55세 가 되었을 때 그는 신앙론이란 글을 쓰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 오는 동안 내 인생의 최초의 15년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 했다. 안식을 알지 못하고 살아 왔다. 내가 18세 되던 나이 내 친구 는 나에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고 나는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 이 진리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종교 가족의 종교인 기 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 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 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종교 는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 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 아온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 는 다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바 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 은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 그 예수가 안식이고 그 예수가 자유의 대답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 분, 오늘 이 처방을 드립니다. 예수 앞에 오시기 바랍니다. 내게로 오라. 오늘 본문에는 두 번째 처방이 있어 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안식을 경 험하지 못하고 자유를 경험하지 못 한 사람들에게 주님을 두 번째 처방 을 주십니다. 그것은 내게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 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배우라.
어떤 사람들은 배우라 이 말만 들 어도 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엔조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배우라, 저같은 사람은 배우라. 사실 저도 공부를 그렇게 잘 했던 사람은 아니예요. 그래서 배우라 그러면 스트레스가 생겨요. 제가 워낙 특공대이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특공대는 특별히 공 부 못 하면서 대가리만 큰 사람을 특공대라고 합니다. 내게 배우라. 내 게 배우라. 그런데 내게 그냥 배우 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니까 더 스 트레스가 생겨요. 멍에를 메고. 혹시 우리가 이런 오해를 할까봐 다음 절 에서 예수님을 친절하게 이렇게 덧 붙이셨습니다. 30절에 내 멍에는 쉽 고 내 짐은 가벼운 것이야 나의 멍 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 희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내 멍에는 쉽다. 쉽다 란 단어는 사실은 더 정확하게 옮기면 내 멍에는 편리하다 잘 맞는 다 그런 뜻입니다. 잘 맞는다. 우리 가 양복점에 가면 우리 사이즈를 측 정합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난 다음에 가서 가봉을 합니다. 그리고 양복을 입게 됩니다. 첫 양복을 입 어볼 때 양복점의 주인이나 재단사 나 혹은 같이 오신 손님들이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목사님, 양복이 잘 맞으시네요.영어 로 fitting well. 잘 맞으시네요. 참 잘 맞으시네요. 그런데 그런 뜻이예 요.
멍에가 쉽다는 말이 멍에가 잘 맞 는다. 멍에는 본래 소를 위해서 만 들어지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이 스라엘에도 농사가 있고 소가 있습 니다. 그리고 멍에를 만듭니다. 소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가 있 는가 하는 것은 멍에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소의 사이즈를 측량합니다. 그 다음 에 소의 사이즈에 따라서 멍에를 만 들어요. 종종 팔레스타인에서는 두 마리의 소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하나의 멍에를 구멍을 두 개 뚫어서 한 멍에 안에 두 개의 소를 함께 연 결시키기도 합니다. 그랬을 때 이 멍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 늘 이 말씀을 말씀하신 예수님, 예 수님의 어렸을 때의 아버지였던 요 셉은 목수였습니다. 목수. 전설에 의 하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얘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이 일하고 있던 목공소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 가 새겨져 있었을 지 모릅니다. 우 리 목공소에서 만드는 멍에는 잘 맞 습니다. 잘 맞습니다. 예수님은 이 멍에가 무엇인지 잘 아시는 분이예 요. 아버지를 도와서 일을 했던 경 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 니다. 내 멍에는 쉽다. 내 멍에는 잘 맞는다. 또 소가 두 마리가 함께 일 하게 될 때 참 중요한 것은 한 마리 의 다른 소가 빨리 리더를 결정한다 고 해요. 저는 소가 우둔한 줄 알았 어요. 저는 제 아내 함께 사는 제 아내, 여자가 성이 우 씹니다. 좀 신 경질 나면 성씨가 우씨기 때문에 그 렇다고 이해를 하려고 그럽니다. 그 래서 우씨라 그렇다. 소 우씨라 그 렇다. 제가 이렇게 제 아내를 종종 핍박을 합니다. 그런데 소가 그렇게 미련한 동물만은 아니라고 그래요. 두 마리가 함께 일하면 빨리 리더를 결정한대요. 빨리 리더를. 자, 그리 고 한 마리는 따라 갑니다. 자 두 마리의 소가 일할 때 편안한 멍에를 걸머지고 또 한 소 방향을 정확하게 하는 소를 따라 갈 때 두 사람이 함 께 일하는 두 사람이 아니라 두 마 리 소가 함께 일하는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목적지를 향해서 편안한 멍에를 지고 효과적으로 일하는 소. 소 중의 하나가 리더쉽을 쥐든 아니 면 주인이 뒤에서 이 두 마리의 소 를 리더하든. 여러분, 더군다나 이 소를 리더하는 그 주인이 편안한 분 일 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 일 때 그 분의 리더쉽을 따라서 목 적지를 향해서 편안한 멍에를 걸머 지고 밭을 갈며 일하는 소들은 얼마 나 행복할까요!
주님은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있 는 것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 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 음은 쉼을 얻을 것입니다. 내 멍에 는 쉽고 그리고 내 짐은 가벼울 것 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소들은 그 멍에를 결코 짐으로 생각하지 않습 니다. 그 멍에는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나를 돕는 도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마치 새들이 하늘 을 나르고 있는 새들이 날개를 부담 스러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 럼. 그 날개가 있어서 새들은 하늘 을 향해 비상할 수가 있습니다. 소 들은 멍에가 있어서 편리하게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분좋게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소들을 제대로 부릴 줄 아는 그런 지혜로운 주인은 결코 소들을 일 가운데로 일 중독환 자처럼 몰아넣지 않습니다. 적당한 휴식과 일에 리듬을 균형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쉬면서 일할 수 있도 록 도울 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멍 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 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쉼이란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서 다 시 일하기 위해서 쉰다 그런 뜻이예 요. 이것은 무한정한 휴식이 아니예 요. 무위도식의 휴식이 아닙니다. 동 양종교 속에 혹은 TM이란 명상이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를 어떤, 무기 력한 어떤 그 다른 일과 상관없이 휴식 그 자체에만 빠져들어가게 만 드는 그런 의미의 휴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그리 고 내가 성취해야 할 과제를 위해서 적당한 여유를 갖고 쉬게 하는 안식 이런 안식을 제공하면서 우리 인생 을 목표를 향해서 인도해 주시는 놀 라우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 스도 이신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 터의 전기를 읽고 있습니다.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가 종교적인 숱한 논쟁을 벌이고 또 캐톨릭에 정치적 인 프레셔(pressure)를 받고 그리고 언제 자기 목숨이 날아갈 지 모르는 생사의 갈림길의 긴장 속에서도 마 틴 루터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 버리 지 않았다. 이런 부분이 저에게 아 주 깊은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하던 동료 가운데 필립 멜랑크톤이란 사 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마틴 루터에 게 편지를 쓰면서 이번 주말에는 모 여서 섭리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가 토론을 벌입시다라는 편지를 보냈을 때 루터가 이런 답장을 보냈다고 합 니다. 멜랑크톤에게 섭리의 역할은 섭리자에게 맡기고 이번 주말에 자 네와 나는 낚시질이나 갑시다. 얼마 나 여유가 있어요. 그러자 멜랑크톤 이 깜짝 놀래갖고 아니 지금 이 위 험한 마당에 당신은 어떻게 그런 여 유를 가질 수가 있습니까? 물었습니 다. 다시 마틴 루터는 메모지로 답 변을 해 왔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여유일 뿐입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여유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히브리서12장2절과 3절이란 메모를 남겼어요.
히브리서12장2절을 아십니까? 믿음 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예 수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 자가를 견디고 부끄러움을 참으셨다 십자가 얼마나 스트레스예요? 나를 죽음에 몰아넣는 잔혹한 고문의 형 틀인 십자가,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 서도 십자가를 견디고 부끄러움과 수욕을 견딜 수 있었던 예수님의 내 적인 정신의 저력, 그것은 앞에 있 는 즐거움을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찾을 수가 있지. 십자가 건너편에 있는 그 영광의 내일, 그 즐거움의 미래를 바라보시면서 오늘의 십자가 를 견딜 수가 있었던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다음절에는 너희도 피곤하고 낙심치 않기 위하여 이 주 님을 생각하라 피곤하고 낙심치 않 기 위하여 이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 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십자가를 넘 어서 견디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나 와 함께 하신다면, 그 분이 내 인생 의 길을 인도하신다면 그것은 얼마 나 위대한 여유와 안식 속에서 걸어 갈 수 있는 인생의 모습이 될까요?
우리 교인들 중에도 많은 분들이 아는 것처럼 저는 노래를 잘 못 부 릅니다. 그러나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가사를 읊조립니 다. 가사의 은혜를 받으시라고 늘 말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종종 스트 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TV에서 유행가도 듣는 편입니다. 흘러간 옛 노래도 가끔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래들은 굉장히 마음 속에 와 닿는 그런 노래들이 있어요. 훨씬 지나간 노래라고 생각하지만 해바라기가 부 른 노래 가운데서 이런 노래를 듣고 저는 성령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그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 저리 둘러 보아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 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곧장 예 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 니다. 예수님말고 누가 나에게 이런 행복을 줄 수가 있었겠는가!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주 함께 간다면 좋겠네 내가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 이리 저리 둘러 보아도 제일 좋은 건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주님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오늘 오후 4시에는 시인과 촌장 하 덕규 형제가 와서 노래를 부르게 됩 니다. 이 하덕규 형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젊은 대학생들에 게 지하운동하는 조하문 이런 형제 들과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를 살아 가면서 저항의 시를 읊고 노래를 부 르면서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던 그 가 이 저항운동 속에서도 안식과 위 로를 얻지 못했던 이 형제가 예수 만나고 예수님 영접하고 그는 새로 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 예수 만나고 나서 그가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 가운데서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자유 자유 자유 껍질 속에 울고 있 었네 내 어린 영혼 껍질이 난지 내가 껍 질인지 모르고 자유 자유 자유 그를 만난 뒤 나는 알았다네 내가 애타게 찾고 있었던 것이 뭔지 그를 만난 뒤 나는 알았네 내가 목 마르게 찾았던 자유 자유 자유 이런 자유를 그리워 하십니까? 이런 행복 을 얻고 싶습니까? 이런 안식을 그 리워 하십니까? 우리에게 이런 자유 와 행복과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십 자가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 하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분, 그 리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 사 우리 곁에 다가오시면서 오늘 이 렇게 약속하시는 분 수고하고 무거 운 짐진 자여 내게로 오십시오. 내 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드리겠습니 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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