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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마태복음 3:16-4:11

by 【고동엽】 2021. 12. 9.

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

마태복음 3:16-4:11



오래간만에 우리 교회 성가대 찬양을 들으니까 참 너무 좋습니다. 지나간 안식년 첫 두 달을 보내고 돌아오면서 잠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제가 보고를 하겠습니다. 제가 한 일은 대체로 세 가지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7월 초에 있었던 유학생들의 축제 수련회인 코스타 모임을 위시해서 시애틀과 뱅쿠버 지역에 오래 전에 약속했던 두 차례의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두 주간 동안 제가 마침 결혼 25주년이 되어서 그 기념으로 알래스카와 캐나다 록키 등지를 여행하면서 모처럼 한 두 주간동안 온전히 휴식의 시간을 가지면서 문자그대로 아내를 기쁘시게 하는 안식년을 가졌습니다. 우리 목사들에게 조크가 하나 있는데, 목사들이 안식년을 갖게 되면 그것은 목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목사 부인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년이라고 부릅니다. 안식놈이 아니라 안식년입니다. 그리고 한 두 주간 동안은 모처럼 저희 집 아이들과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오래간만에 아빠 노릇을 좀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날 때 늘 아빠는 나빠는 아니지만 바빠 이런 말을 자주했는데, 아이들과 좋은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변함 없이 교회를 지키시면서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우리 김형준 목사님과 사역자 여러분, 제직 여러분, 또 교우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지난 두 달 동안 모처럼 이런 일상적 사역의 자리에서 잠시 떠나 있는 그 일탈의 시간을 가지면서 영적인 그리고 다소나마 정서적인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제 개인적인 QT시간이 좀더 활성화되어서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민감하게 들을 수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 제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은 QT 재료를 두 번 제가 바꾸었어요. 책자를 제가 일상적으로 하던 것이 아닌 다른 외국의 책자들을 가지고 QT를 했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그 짤막한 기간동안 똑같은 본문이 두 번 나오더라구요. 그리고 본문을 통해서 거의 비슷한 메시지를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보내면서도 여전히 제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었던 중요한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은 솔직히 저희 교회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막 이제 공사가 신봉리에 진행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주차장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또 아무래도 내년엔 우리가 성전 건축을 본당 Sanctuary에 대한 건축 시작을 해야 될 터인데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뭐 한 순간도 안식년이라고 하지만, 교회의 미래에 대한 생각들에게서 제가 자유할 수는 없었던 것이 아마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우리 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합니까? 뭐 이런 기도를 제 QT시간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차례에 걸쳐서 오늘 본문을 보여주시면서 저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네 미래의 사역보다도, 교회의 사역보다도 더 커다란 관심은 네가 어떤 내 앞에서 사람이 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교회가 뭐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네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느냐? 목사가 되느냐? 그것이 나의 더 커다란 관심이다' 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음성을 들었어요. '정말 네가 정말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기뻐하는 자가 될 수가 있느냐? 그러면 나머지 일은 내가 책임지지 않겠느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예수님의 공적 생애가 시작되면서 그가 요단강에서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침례를 받고 나오시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오시는 바로 그 순간 비둘기가 그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임하시고 또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나서 그 소리가 말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런 사건입니다. 자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음성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또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이런 놀라운 이 확인과 또 인정의 말씀. 자 이 말씀을 들었으면 이제 당연히 그 다음에 예측될 수 있는 사건은 뭘까요? 이제 그 예수님 앞에 신바람 나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 갈 것을 우리가 예측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 바로 직후에 하늘의 이 음성이 '너는 내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사건 직후에 마태복음 4장 1절에는 좀 이 사건의 전개가 이가 맞지 않는 메시지가 기록되고 있어요. 여러분 4장 1절을 다 같이 한번 읽어보세요. 4장 1절 다같이 시작.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신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이제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하겠다. 뭐 이런 것을 예측할 수 있는 당연한 대목에서 갑자기 그 좀 이 파격적인 사건의 맥을 깨는 흐름를 깨는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그분이 광야로 끌려 가셨다. 이렇게 메시지가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로 이 시점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사 마귀에게 이끌려 거기에서 시험을 받게 하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신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그것이 방금 전에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선포하셨던 그 음성과 이 광야의 시험이 무관하지 않다는 그러한 결론을 우리가 맺을 수수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3장과 4장이 서로 다른 장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3장과 4장을 연결시켜서 묵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제 QT시간에 이 3장과 4장이 같이 연결되면서 이 말씀은 새로운 빛으로 저 앞에 다가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선포 직후에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끌고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허용하고 있는 이 장면, 도대체 어떤 의도가 하나님께 있었을까요? 그것은 분명 이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그가 사랑하는 더 사랑하는 아들로 더 기뻐하는 자로 빚어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우리는 결론적으로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시험이었습니다. 아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번역할 때, 많은 영어 번역에서는 Temptation이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Temptation, 유혹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죠. 그러나 유명한 세계적인 성서학자였던 윌리암 바클레이는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에서 사용되었던 희랍어 단어인 '페이라제인'이라는 이 단어는 그 의미상으로 볼 때, Temptation이라는 유혹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은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차라리 Test라는 단어가 훨씬 더 그 의미상으로 타당하다고 바클레이는 지적합니다. Test, 이 Test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예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Test를 줄 때, 시험을 내 줄 때 그것은 학생들을 골탕을 먹인다든지 또 학생들을 파괴한다든지, 학생들을 좌절시킬 목적으로 시험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시험은 선생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실력을 알아차리고,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그 부족을 보완하고 보충할 때 그들은 더 성숙한 학생으로서 한 단계 Up Grade될 수 있는 삶의 성숙이 가능하게끔 할 수 있게 하게 하기 위해서 Test라는 것은 인생의 과정에서 반드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로 이런 시험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세 차례의 시험이죠. 세 차례의 시험. 세 가지 유형의 시험. 바로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떤 기대를, 그가 더욱 그의 더 사랑하는 자가 되고, 그의 더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기대가 예수님만을 위한 기대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그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갈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면서도 오늘 사랑하는 그의 아들과 딸들을 데리고 광야로 이끌고 가셔서 그 찬 바람 부는, 그 고독한, 그 굶주린 외로움의 광야 속에 저와 여러분을 두시고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의 폭풍우 속에서, 이 시험의 광야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야. 네가 나의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야!'라는 그런 음성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시험,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예요. 이 시험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저는 결론적으로 본질적으로 말하면, 한마디로 그것은 내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지금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이 순간 사탄은 마귀는 그의 결정적인 허점인 그리고 약점이었던 그의 배고픔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을 단순하게 배고픔의 시험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경제력에 대한 시험이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돌을 그가 명령하시기만 하면 돌을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돌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없겠어요.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이 시험의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시험이 돈이 없는 사람들만이 받는 물질의 시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돈을 사용하는, 혹은 물질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그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라는 Test예요. 내 욕심을 따라서, 내 뜻을 따라서, 내게 주어진 혹은 내가 원하는 그 물질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내가 이것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그런 선택의 시험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이것을 육신의 정욕의 Test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 이하에 보시면 '너희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이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너희가 만약 이 세상을 사랑하며 아버지의 사랑이 너희 속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거기서 첫째로 경계했던 것, 육신의 정욕 바로 그 Test를 예수님이 바로 이 광야에서 받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아니예요. 그의 제자들인 우리도 오늘 이 세상의 광야에서 동일한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물질을 사용할 때마다, 물질을 요구하고 물질을 원할 때마다, 우리는 이 시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인생의 광야에서 이 물질의 시험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날마다, 아니 오늘도 이 시험 앞에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물질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하되, 물질로부터 자유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의 광야를 여러분과 저는 걸어가고 있을까요? 아니, 그러잖아도 어렵고 궁핍한데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하고 사업을 한다면 내 사업 망하고, 나는 패가망신하는 것이 아니냐고 어떤 분은 항의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약속이 뭐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만약 우리가 정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인생과 내 물질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진다. 이게 성경의 약속이 아니예요.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시리라." 믿습니까 여러분?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지배를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의의 사람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내 인생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되어 내 물질을 사용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인생을 구한다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겠다. 이것이 약속이 아닙니까? 내게 물질이 있든지 없든지, 중요한 것은 나는 정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것을 고백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물질의 욕심에서부터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참으로 자유한 인생이 될 때,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너는 정말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야. 우리는 얼마나 이 물질의 정욕에서부터 자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물질이 있든지 없든지, 혹은 내가 인생에서 경제적인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든지, 이 고난의 초점, 이 시험의 촛점이 내가 그것을 얻느냐 못 얻느냐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물질로부터 자유하여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내 인생의 중요한 초점을 맞추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느냐? 주께서는 오늘 광야에서 이 시험의 숙제를 들고 여러분 앞에, 그리고 저 앞에 다가오고 계신 것입니다. 이 한마디에 나를 향한 그분의 고백을 위해서, 우리가 그 분 앞에 정말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말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어떤 시험입니까? 잘 아시는 대로 그것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의 본질이 무얼까요? 본질이? 그것은 내가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만으로 살아가는 자가 될 것을 기대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박수를 구하고 싶은 끝없는, 끝없는 욕심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왜 나쁘다는 말이예요. 나쁜 것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정당한 노력을 통해서 그리고 정당한 행동을 통해서 그 결과로 받을 수 있는 박수는 그것은 당연한 격려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머지 우리가 인생의 장에서 쇼를 하기 시작할 때, 허영의 쇼를 하기 시작할 때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노출하지 못하고 인생에서 연극과 쇼를 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런 내 마음 속에 있는 숨어 있는 동기를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에서 경고한 이생의 자랑이라고 생각해요. 이생의 자랑의 본질, 헛된 자랑을 위해서 사람 앞에 Show Up하고 드러내고 그래서 좀 인정받고 박수 받는 인생, 아니 내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통해서 벌거벗은 자아의 모습을 통해서 내 진실성의 정체를 통해서 그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구하기 보다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머지 마음이 없는 것을 자기의 삶이 없는 것을 거짓 쇼를 통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허영의 쇼 말입니다. 제가 QT를 할 때 하나님은 내 안에 그런 유혹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저에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교회가 커가니까 큰 교회 목사라는 그런 인정 앞에 더 기쁨과 그리고 더 커다란 그런 마음의 위로를 삼았던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그런 허영의 동기를 주께서는 꿰뚫어 보시고 저에게 지적하셨어요. 그래서 나는 때로 네 명예를 꺾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넘어진 광야에서 이제 사람의 인정이나 사람의 박수보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고 일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서 저에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번째 시험. 그것은 네가 나한테 절하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의 본질이 뭡니까? 이 본질이 , 저는 결국 이 본질은 네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써 살아갈 수가 있느냐?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자로써 살 것을 기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뭐예요? 천하만국의 영광을 약속한 것입니다.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그랬어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8절에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보여주며,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장에서 지적한 “안목의 정욕” 입니다. 천하 만국의 영광을 다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너 한테 주겠다. 이 모든 영광을 너한테 주겠다. 그러나 전제가 있습니다. 전제가 있어요. 마귀의 유혹에는 중요한 전제가 숨어있습니다. 9절에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네가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의 의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그를 숭배하는 자, 그를 경배하는 자, 사탄을 숭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많은 경우, 이 같은 자기의 동기를, 혹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그의 미끼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사탄을 숭배하기를 원하십니까? 마귀를 숭배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요. 심지어는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펄펄 뛰며, “노(No)”라고 부인할 것입니다. 누가 마귀를 숭배하기를 원하겠어요! 그러나 그들에게 돈을 보여주십시오. 그들에게 출세를 보여주십시오. 혹은 그들에게 성공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성공 때문에 혹은 그 출세 때문에, 혹은 돈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그리고 양심을 타협하는 일을 너무나도 쉽게 자행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 우리가 만약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사탄을, 그리고 마귀를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경고예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시험을 들고 찾아오는 사탄. 천하 만국의 영광이라는
미끼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다가 오고있는 사탄을 향해서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섬기라.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분만을 경배하라 이 말예요. “Worship only The Lord, your God!. ” 오직 너의 주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하나님만을 경배하라. 우리가 네, 저 하나님만을 경배 할께요. 라고 저와 여러분이 결심한다면, 이 결심의 의미가 뭘까요. 그것은 내 인생의 장에서 다시는 우상숭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우상숭배가 뭐예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그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안보여요. 그것이 우상이예요.
신약성경에는 구약과 달리 이 우상의 정체를 말할 때, 우상 숭배의 교묘하고 간교한 그 정체를 지적하여 말할 때 가장 커다란 소리로 그리고 가장 크게 강조한 신약 성경이 강조하고 경계하는 우상 숭배는 골로새서에 보면 탐심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이니라. 그 탐심이 어떤 종류의 탐심이든지 간에 모든 탐심에는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네 여러분, 우상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은 피조물이예요. 우상은 창조주가 아니예요. 우상은 피조물예요. 우상은 만들어진 것이예요. 우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탐하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천하 만국의 영광. 그것은 대단해 보이지만, 매혹적이지만, 굉장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불과해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마귀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나님의 만드신 피조물의 영광에 우리의 시선을 두도록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천하만국의 영광이, 세상의 영광이, 세속적인 영광이 아무리 매혹적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마귀보다 크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하나님 홀로 나에게서, 우리에게서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시대에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 깊은 의미의 신앙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손에 대고 읽는 책 가운데 하나가 헨리 나우엔의 책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회 책방에도 헨리 나우엔의 여러 책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만,
이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버드와 예일 대학의 교수 였습니다. 그의 Career(경력)의 절정에서 그는 예일과 하버드 대학에 존경받는 교수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마 학문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이 세계 최고의 존경받는 상아탑의 교수가 된다면, 그것보다 더 커다란 명예는 없겠죠. 음. 어느날 1986년 8월 정확하게 1986년 8월, 그는 느닺없이 갑자기 하버드 대학에 교수직을 사표를 내고 떠나갑니다. 어디로 가냐 하면 캐나다 토론토의 그 교외에 있는 장애인 공동체인 데잇브레이크 컴뮤니티라는 장애인 몇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자기가 일종의 거기에 Chaplain, 사목 역할을 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떠나갑니다. 미친일이죠. 주변사람들이 볼 때에는 희한한 일입니다. 자기 Career의 절정,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고, 교수직에서 어느 한 날, 그는 미련없이 교수직 사표를 내고 그는 몇 사람의 장애인들을 섬기기 위해서 장애인 공동체 안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이 장애인 공동체에 가서 그가 첫번째로 쓴 책이 “The Return of Prodigal Son” –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입니다. 탕자의 귀환. 거기서 그는 자기가 탕자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부도덕한 생활 속에 빠져 있던 사람, 죄인만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탕자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허영을 찾아서, 욕망을 찾아서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찾아서 저 먼나라로 떠나갔던 자기는 탕자였다.그리고 자기는 외로워다고, 자기는 방황하고 있었다고 자기의 자아는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몇 사람의 장애인 공동체에서 장애인들을 섬기면서, 비로서 자기는 집에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고향에 돌아왔다, 자기의 참된 모습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탕자의 귀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서 그는 또 하나의 책을 써요. “아담” 이라는 책을 씁니다. “아담”.
이 아담은 그 장애인 공동체에 있었던 장애인 소년의 이름이예요. 장애인 한 사람, 환우의
이름이 아담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 아담을 섬겨주고, 아담의 발을 씻겨주고, 한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이 아담 안에서 새로운 아담을 발견합니다. 둘째 아담. 그는 이 아담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 순수한 영혼 속에서 사람들은 지체아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병신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 순결한 영혼을 섬겨주고, 그의 육체를 메말라 주면서 그를 도와주면서 그는 그 아담 안에 있었던 새로운 아담.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자기를 도와주는 헨리 나우엔 이 사목이, 이 신부가 너무 고마워서 이 아담이라는 사람이 더듬거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 나….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순간 그는 이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더듬거리는 말속에 고백되는 이 한 장애인의 음성 속에서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을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인류는 끊임없이 인생의 광야에서 이 시험들을 겪어 왔습니다. 육신의 정욕. 그리고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한 시험들을 겪어 왔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그것은 아담 때부터 그랬습니다. 아담 때부터. 마귀가 에덴의 동산에 찾아와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여주었을 때, 성경은 기록하기를 먹음직했고, 보아짐 했고, 그리고, 지혜스럽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이고, 보아짐 안목의 정욕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이 착각과 허영,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인류는 실패했습니다. 저도 실패했습니다. 여러분도 실패했습니다.
우리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삶의 진정한 주소를 현 주소를
잊어버리고, 그리고 춥고 외로운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둘째
아담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예요. 그는 광야의 이 시험에서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의 승리의 비밀이 뭘까요.
오늘 본문에 보시면 그 비밀은 딱 하나예요. 예수님이 시험에 직면하면서 두번씩 한결같이 인용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탄이 자기를 찾아올 때, 이 세상의 허영을 들고, 그리고 이 세상의 그 영광을 들고, 그를 찾아왔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두가지의 동일한 반복적인 강조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록되었으되” 말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7절에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고 다만 그를 섬길 지어다” 기록되었으되. 그가 이 광야의 시험에서 이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붙잡었던 것.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의 진정한 원리로 나의 삶의 좌우명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가 있다면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정말 살기로 결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사람들의 박수나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내 창조주 하나님 벌거벗은 것 같이 내 영혼의 동기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정만을 구하는 자로 주앞에 설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나를 숭배한다든지 사탄을 숭배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기로 주 앞에 결심할 수 있다면 지금도 여러분과 저는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고, 나의 기뻐하는 자야.
기도하십시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처럼 저와 여러분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헛되고 헛된 것을 찾아 인생의 광야를 헤매고 있었는지 광야는 고독한 것입니다. 광야는 굶주린 것입니다. 광야는 두려운 곳입니다. 광야는 불안한 곳입니다. 광야는 찬바람이 부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광야에서 저와 여러분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명예로 , 때로는 권력으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이 시험은 오직 한가지의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때로 이 시험에 우리가 넘어지지만, 때로 이 시험에 쓰러지지만, 어느날 주님 보시기에 내가 정말 그 분이 사랑하는 자고 기뻐하는 자로 설 수 있는 자로 주 앞에 서기 위해 하나님이 이 시험을 우리 인생의 광야에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 시험에 승리하십니까? 아니면 된지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하고 우리는 돌아다니십니까?내 영혼은 춥고 외로와 방황하는 탕자가 아닌지!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탕자는 내가 아닌지.저 바깥에 있는 예수 모르는 사람들만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알되 아버지의 품보다 세상에 있는 광야의 쾌락을 더 좋아했고, 그 광야의 만족과 광야의 박수 소리를 더 즐기던 내가 탕자가 아니였는지? 마침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흔들어 깨우고 나를 보시고 내가 주앞에 주님 기뻐하는 자로 세워지기 위하여 내게 다가오시는 그 주님! 그리고 채칙 때리시기도 하고, 사랑으로 나를 만져주시는 그 분. 그 분 앞에 주님 그래요. 다른 무엇보다도 제가 구할 것, 제가 바라 볼 것, 사모할 것,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분만을 구하게 하시고, 그분의 인정, 그분의 영광만을 구하게 하시되, 헛되고 헛된 것을 찾아 어리석게 방황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 당신만이 내 사랑의 전부가 되십니다. 내 구함의 전부가 되십니다.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저희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 안에 있었던 육신의 정욕, 내 안에 있었던 안목의 정욕, 내 안에 있었던 이생의 자랑,
하나님 그것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고, 내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고, 나는 방황하는 자였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주님 앞에 인정받는 자로 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수 없도록 우리의 삶. 나란 존재를 하나님 받아 주시고, 만져주시고,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다 일어나셔서 우리 사모합니다. 찬양하십시다.
“사모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뜻과 정성을 다해) 뜻과 정성을 다해 나의 하나님. 사모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나의 하나님. “
우리 아까 불렀던 주를 높일지라 우리 그 찬양 하나 더하시겠습니다. 주를 높일지라.
처음 불렀던 찬양 주를 높일지라.
“주를 높일지라,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주를 높일지라(힘차게)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예수님께. 주를 높일지라,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성령님께.
다시 한번 맘을 다해서 주를 높일지라
여호와 하나님 그 발등상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허밍하십시다 . 허밍. 음~~~~음

기도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교회 처음 나온 우리 딸을 위해서 우리 조성민 형제, 김민선
자매의 가정에 주신 김소희 세상태어난지 35일 된 아기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소희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오니 한 평생 하나님께
인정받는 딸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그가 걸어가는 인생이 의미있고 ,
아름답고, 또 하나님의 참사랑과 축복안에서 걸어가는 길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 딸을 위해서 기도하는 아빠와 엄마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주님의 사랑,주님의 교훈으로
이 딸을 귀하게 양육하여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하심이주를 경배하고 나아가는 지구촌의 모든 성도들 거칠고 때로는 고독하고 때로는 불안하고 두려운 인생의 광야, 그러나 이 광야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빚어 주님 앞에 사랑스럽고 기뻐할 만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시험의 그 손길. 때로는 그 손길이 아파도, 차가와도, 어려워도 이 채찍 속에 묻어 있은 주의 사랑을 발견하는 주 앞에 주님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결단하고 당신 앞에 삶을 드리며 나아가는 당신의 자녀들 주님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가 되도록 우리모두 축복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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