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개혁파 목사(reformed pastor, presbyterian pastor)란 무엇이고, 무엇이 어떤 이를 개혁파 목사가 되게 하는가? 특별히 신학을 처음 하는 이들은 대개 어떤 동기로 신학교와 교단을 선택하는가? 현실적으로는 특별히 개혁파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신학교에 오는 이들을 드물다고도 할 수 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다닌 교회가 장로교회이므로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겠다고 하고서,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의 신학교를 찾거나, 그런 여러 신학교들 가운데서 그중 나은 신학교가 어딘가를 물어 찾아 온 것일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릴 때 출석한 교회가 침례 교회이기 때문에 침례교 목사가 되겠다고 침례교 신학교를 찾거나, 어릴 때 출석하던 교회가 감리교회이므로 감리교 신학교를 찾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경험적으로 이는 우리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일반적으로 타당한 묘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은 과연 바른 것인가?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어떤 이가 어릴 때에 출석한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인 경우, 그가 주님을 섬기는 여러 방도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는 일과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로 자신을 주께 드리고자 할 때 그는 자연스럽게 천주교회의 신부가 되기 위해 천주교 신학교에 입학하기를 청원하려고 할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고자 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나타내 보일까? 문제를 좀더 극적으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정해 보기로 하자: “말씀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기를 원하는 생각을 갖게 된 어떤 프랑스의 젊은이가 1559년경에 스위스의 제네바에 이르러 칼빈에게 자신이 천주교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 심정을 토로하였을 때, 칼빈과 제네바의 목회자들(the company of pastors)이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 젊은이가 어릴 때부터 출석한 교회가 천주교회이므로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부가 되도록 허용했을까? 칼빈도 자신이 어릴 때부터 천주교회의 성직록을 받던 것을 말하면서 일단은 천주교의 충실한 사제가 된 후에 성경을 깊이 숙고하고 과연 어떤 그리스도인과 성직자가 될 것인지를 후에 선택하라고 했을까? 우리가 잘 예상하다시피, 칼빈과 제네바의 목회자들은 이런 식으로 권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젊은이를 연민에 가득찬 눈길로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그가 천주교의 미망에서 벗어나 복음에 대한 밝은 이해에 터해서 참된 복음의 사역자가 되도록 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면서 때로는 찬찬히, 때로는 파렐(G. Farel) 같이 격분한 태도로 그를 설득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예를 너무나 분파 의식적인 생각을 촉진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종교개혁 시대에는 그런 것이 가능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적인 시대, 모든 것의 해체를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도 그런 교파 의식을 부추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 이와 같은 정황이 오늘 우리의 주제를 설정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원주의적 시대에 우리는 왜 개혁파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 이에 대해서 의식적이고 깊이 있는 논의가 제시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저 상황에 따라 일을 하려는 이들이지,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개혁파 목사가 되려고 하는 이는 아닌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목회자들이 참으로 진지하게 이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한 후에, 또는 그 대답을 추구하면서 개혁파 목사의 역할을 감당하기 원하면서 이 질문을 제출하고 나름의 대답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왜 개혁파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
2-1. 개혁신학의 매력
우리가 개혁파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 자체의 매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개혁신학은 가장 성경적이려고 하며, 가장 공교회의 신조에 충실하려고 하는 신학이라고 생각된다.
첫째로, 개혁신학은 참으로 성경적인 신학이기를 추구하는 신학이다.
이 때 성경적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종교 개혁 시기에 모든 개신교도들에 의해서 강조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와 특히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해서 강조된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의 원리에 충실하려고 한다는 의미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회는 구두 전승을 기록된 전승과 동일시하거나 더 높이는 천주교회의 신학적 입장에 반해서 성경만이 우리의 믿는 바와 삶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 권위임을 강조하였다. 이점에 있어서는 모든 개신 교회의 신학이 (그것이 개혁신학이든지, 루터파 신학이든지, 침례교 신학이든지, 성공회신학이든지, 감리교 신학이든지, 후의 오순절 교회의 신학이든지를 막론하고) 공동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구체적 신학함에 있어서 이 ‘오직 성경의 원리’에 과연 충실한 신학이 과연 어떤 신학인가를 우리는 깊이 물어야 한다. 개혁신학은 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그 어떤 신학보다 더 충실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함의된 것으로 또는 그와 함께 성경 전체(tota scriptura)의 원리에도 충실해 왔다. 이는 루터파의 일종의 정경 가운데서 정경(canon in the canon)을 찾는 태도에 대립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개혁신학은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신학이었다. 물론 이는 지금까지 나타난 개혁신학의 예들이 모든 점에서 자장 성경적이며,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충실했다는 말이 아님에 유의하라. 개혁신학이 추구하는 바가 그런 것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개혁신학 내에는 아직 성경의 원리에 충실하지 않거나 성경의 가르침 전체에 충실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인정에 기초해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개혁신학을 좀더 성경적인 방향, 즉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에만 근거하게 하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방향으로 고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된 신학이 항상 개혁되는 구체적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분위기 가운데서 이는 개혁신학이 성경의 궁극적 조화(harmony)를 추구한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성경 각 부분의 독특한 가르침에 유의하자는 운동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참으로 유의하자는 좋은 측면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각 부분의 가르침에 유의하면서 그 전체 사상의 통일성을 참으로는 인정하지 않은 채 성경 자체가 다양한 사상을 용인하고 있다는 식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태도인지를 우리는 심각하게 질문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각 부분의 독특한 가르침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 후에는 그 각 부분의 사상을 어떻게 조화로운 전체로 설명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것이 성경 계시의 역사적 진전을 살피는 성경신학적 과제이며, 이 모든 것에 터해서 작업하는 성경적 조직신학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궁극적 조화 문제에 무관심한 신학은 좋은 성경신학도 아니고, 성경적인 조직신학도 아닌 것이다.
둘째로, 개혁신학은 공교회의 신조에 가장 충실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공교회의 신조가 성경에 근거한 믿음의 내용을 표현해 보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개혁신학의 태도를 반영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사도신조와 325년의 니케아 신조,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그리고 451년의 칼시돈 신조 등의 공 교회의 신조가 말하는 바에 가장 충실해 보려고 하는 신학이다. 이는 이 신조들이 공교회의 신조들이기 때문이 아니고, 이 신조들이 표현하려고 하는 바가 성경의 가르침을 잘 표현해 보려고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두 번째 요점은 첫째 요점과 다르지 않은 것이며, 첫째 요점의 논리적 함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신조, 즉 우리의 믿는 내용을 정확히 규정하는 일을 중요시하는 개혁신학은 과거에 이런 신조 작성의 전통 위에 서서 개혁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성경에 근거해서 믿는 바를 정확히 표현해 보려는 노력에 앞장섰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제네바 요리 문답을 내어 사용한 것, 제 1 스위스 신조(Confessio Hevetica Prior, 1536),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용한 Confession de la Foy (1537), 프랑스 신앙고백서(Confessio Fidei Gallicana, 1559), 제 1 스코트 신조(The First Scotch Confession, 1560),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1561),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제 2 스위스 신조(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6), 제 2 스코트 신조(The Second Scotch Confession, 1581), 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the Synod of Dort, 1619),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The Westminster Standards, 1647) 등이 모두 이런 신앙의 내용을 분명히 하려는 노력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신학이 이렇게 가장 성경적이려고 하면서 공교회의 신조에 충실하려고 하였다는 하나의 예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개혁 교회의 이해를 다른 신학들의 이해와 비교할 때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과 신성이 한 인격 안에 있음을 성경에 따라서 그리고 과거의 정통 신학과 함께 잘 이해하면서, 개혁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과 연합한 후에도 그 성격이 도무지 변화하지 않으므로, 성육신 후에도 성자께서는 그 신성으로 그 신성이 가지고 있었던 우주적인 기능, 즉 온 우주를 유지하시며 다스리시는 섭리 사역을 계속해서 하고 계신다고 확언했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개혁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을 도무지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성 밖에서도(extra humanum) 역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혁파 신학자들을 조롱하면서, 이런 식의 “밖에서도”(extra)를 강조하는 개혁신학의 주장에 대해 그것을 “개혁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밖에서도”(extra-Calvinisticum)라고 조롱조(嘲弄調)로 표현한 일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밖에서”(extra-Calvinisticum)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는 이 말에 조롱조(嘲弄調)가 사라지고 개혁신학자들은 자랑스럽게 우리가 말하는 extra-Calvinisticum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이는 역시 칼빈 자신이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개혁신학의 입장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을 떠나지 아니하시면서, 동정녀의 태에서 태어나시고, 땅을 거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기를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늘에서 내려 오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계속해서 당신님이 처음부터 그리해 오셨던 것처럼 온 땅을 가득 채우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칼빈의 말은 개혁신학에 잘 주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들릴 말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것이 칼빈의 말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이것이 어떤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 중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과 신성이 한 인격 안에 있는 것을 설명하는 중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개혁신학자들은 이런 이해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고, 양성 일인격(兩性一人格)을 주장하는 칼시돈 신조의 의도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일에 성육신하여 이 땅 위에 계시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으로도 이런 우주적 사역을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는 신성의 어떤 작용을 중단하신 것이요, 따라서 그렇게 되면 신성에 있어서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여 개혁신학자들은 루터파가 말하는 식의 속성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받아들일 수 없어 하면서, 지상 사역 기간에도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이며, 따라서 “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으므로”(finitum non capax infiniti), 유한한 인성 밖에서도 신성은 작용하고 있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도 신성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할 수 없으시므로 언제나 그것을 감추시지 아니하시고 때때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은 후에 루터파 신학에서 나온 케노시스 기독론이 논의될 수 있는 근거 자체를 없앨 수 있었다. 개혁신학에서는 케노시스 기독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는 논의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양성론에 대한 논의 가운데서 그 문제를 처리했었다고 할 수 있다.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을 하시는 동안에도 그의 인성이 죄를 제외하고서는 온전한 인성인 것과 같이 그의 신성도 항상 계속해서 온전한 신성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에 일치하는 것이며, 인성과 신성의 분리나 나뉘어짐, 그리고 변화와 혼동이 없이 한 인격 안에 있다고 선언한 칼시돈 신조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개혁신학은 그 초기부터 가장 성경적이려고 하고, 바로 그와 같은 관심에서 공교회의 신조에 충실해 보려고 한 것이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개혁신학의 큰 관심의 하나로 우리는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언약의 진전에 충실하려고 하는 성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개혁신학은 언약 신학(covenant theology)인 것이다. 이는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언약의 진전에 유의하는 성경신학적 작업을 하는 신학이라는 말도 되며, 또한 개혁신학의 독특한 해석학을 전제로 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약신학인 개혁신학은 처음부터, 즉 성경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훨씬 이전부터 성경신학적인 신학, 즉 특별 계시의 유기적 진전에 유의하는 신학이었으며, 세대주의 신학과 논쟁하기 훨씬 이전부터 독특한 성경 해석적 입장을 지닌 언약 신학적 해석의 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도 개혁신학은 참으로 성경적 신학이려는 점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성경의 계시 내용 전체에 유의할 때 이는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가장 충실한 신학,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결국 이루시려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개혁신학이야말로 신학의 원리(principia theologiae)에 가장 충실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에서는 존재의 원리(principium essendi)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외적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externum)로서 계시를, 그리고 내적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internum)로 신앙을 말하여 왔고, 이에 충실한 신학을 하려고 해 왔었다. 그리고 그런 신학은 주의 계시를 믿으며, 계시에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사고하는(think after God's thought) 신학인 것이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유비적(analogical)이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 선배 교수님, 선배 목사님들께서 계시 의존 사색(啓示依存思索)이라고 역술하셨거니와 이런 계시 의존 사색을 하는 계시 의존 신학(啓示依存神學)이 우리 개혁신학이 처음부터 추구해 온 신학인 것이다. 미국에서도 클라우니는 그의 선생님들과 선배들의 가르침에 충실하기를 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진리를 전달할 수 있게 하셨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도록’ 부르신다”고 말한다. 이렇게 개혁신학은 어제나 오늘이나, 서양에서나 우리 나라에서나 항상 계시 의존적인 신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께 충실한 신학, 계시를 성문화하여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특별 계시의 유일한 전달체요, 유일한 특별 계시인 성경에 충실한 신학, 그리고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관여하는 신앙의 신학을 하려고 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신학은, 적어도 개혁신학의 입장에서는, 신학이 아니고; 계시와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신학도 신학이 아니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인정하지 않는 신학도 신학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참된 개혁주의자 참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뵈온 이”이며, 개혁신학과 칼빈주의는 정상에 이른 기독교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벤자민 월필드의 말은 아주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전한 개혁신학은 가장 정상적인 신학, 가장 바른 신학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매력적인 개혁신학 때문에 우리는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이에 충실한 개혁파 목사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2-2. 개혁파 교회의 매력
둘째로, 우리가 개혁파 교회의 목사가 되고 싶고, 또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개혁파 교회 제도(church system)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성경은 교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일일이 다 지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마땅히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 그 근본 원리들은 분명히 제시한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 제도(church system)의 근본 원리를 말하면서 루이스 벌코프는 다음 네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1.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 안의 모든 권위의 원천이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권위를 그의 왕적인 말씀을 통하여 행사하신다.
3.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권세를 부여해 주셨다.
4.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의 구체적인 수행을 (회중들에 의해서 뽑혀진, chosen by popular vote) 대표적 기관들을(representative organs) 통해 하신다.
5. 교회의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의 치리 기관(the governing body) 안에 있다.
이 근본 원리를 생각하면, 교회에는 각 지교회(肢敎會)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잘 다스려야 하는 치리 기관(the governing body), 즉 후에 당회(堂會, 장로 교회의 the session 또는 개혁 교회의 the consistory)라고 불리운 기관에 있음이 분명하고, 이 당회의 회원들은 교회의 왕되신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서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온 교회의 회중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끔 가르치고, 인도하며,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때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왕적인 말씀에 따라야 하니,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왕적인 말씀을 수단으로 해서 그의 권세를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지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하나의 교회임을 인정하면서 ej 많은 이들의 지혜를 모으고, 주님에 뜻에 더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 교회의 보다 일반적인 (보편적인) 회의에 권세를 이전시키고, 그 모든 교회들이 하나의 교회임을 인정하면서 같이 진전해 나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제도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따라 주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직원들을 주의 뜻에 따라 회복시키고, 각 직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고유한 직임을 잘 수행하여 주의 교회를 잘 세워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문제를 대할 때 우리는 칼빈의 노력과 그의 생각을 반영하면서 스코틀랜드 교회를 개혁한 죤 낙스(John Knox)와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역시 같은 이상을 가지고 영국 교회를 개혁해 보려고 하던, 그래서 영국 청교도들 사이에서 장로교 제도의 아버지로 인정되기도 하는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53-1603)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550년 캠브리쥐 St. John's College의 scholar로 선임되었으나, 메리 여왕이 즉위하자(1553) 대학을 떠나 그녀가 죽기까지 돌아 올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사후에야 비로소 Trinity의 Minor Fellow가 되었으나, 엘리자베뜨 1세의 통치 초기에 신학적 논쟁으로 1565-1567년에 아일랜드로 갔다. 그러다 1569년에야 비로소 캐브리쥐의 레이디 마가렛 신학 교수로 임명되어 사도행전에 대해 강의하면서 교회의 제도를 사도 행전이 말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회복하기를 강조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주장 때문에 이년 뒤인 1570년에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1571년에는 fellowship 마저 박탈당하고, 결국은 제네바로 갈 수밖에 없었다. 1572년 11월에 죤 필드(John Field)와 토마스 윌콕스(Thomas Wilcox)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성찬에서 wafer-bread의 사용과 무릎 끓는 일, 그리고 천주교도를 참여시키는 일을 금하고, 영국 교회를 감독교회가 아닌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국회에 드리는 권고”(Admonition to the Parliament)와 관련하여, 카트라이트 자신이 “국회에 드리는 제 2 권고”(The Second Admonition to the Parliament)를 써서 오랜 논쟁을 낳게 하여, 결국 1573년 6월 11일에 내려진 이런 주장을 금하고 억압하는 왕의 포고에 의해 체포됨을 피하여 탈출한 그는 결국 1585년까지 본국에 돌아 올 수 없게 되었다. 후에 제임스 1 세가 즉위하자 그에게 드리는 소위 “천인의 상소”(the Millenary Petition, 1603)의 초잡는 일을 감당했으나, 그것을 가지고 왕을 알현할 햄프톤 코트 알현(The Hampton Court Conference) 때가 살아 있지 못하고 소천(所天)한 영국 장로교주의의 아버지인 카트라이트의 평생의 걸친 고난과 노력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결국 그는 교회는 그 제도까지도 성경이 말하는 제도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그것의 성취를 위해 그 모진 고생을 한 것이 아닌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는 온전한 개혁 교회가 있어 본적이 없었다는 것이 안스럽고 한스럽다.
그러나 개혁 교회에서는 이런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그 의미가 상실되었던 교회 제도를 회복시켜 내었다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제도는 16-17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지만, 16세기와 17세기에 이 주장을 한 이들은 그것은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사도적 모델인 교회의 본래적 모습의 회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개신교도들인 루터파가 편의상 감독(bishops or superintendents)을 유지하고 있을 때, 신약에 ‘장로들’(πρεσβὐτεροι)이라는 말과 ‘감독들’(ἐπἰσκοποι)이라는 말이 동의어로 나타나는 것에(행 20:17f.; 빌 1:1; 딛 1:5, 7) 주목하고서, 2세기부터 고정화되기 시작한 주교제도보다는 좀더 신약적인 교회의 조직 형태에 따를 것을 주장하면서, 결국 장로교적 제도를 제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교 체제가 감독체제와 다른 것은 장로교회 안에는 오직 한 수준의 성직자가(only one level of clergy)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핫지의 말이 옳다. 또한 허순길도 “개혁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다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치 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 직원들의 복수성(plurality)과 평등성(parity)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로교회적 교회 체제를 회복하려는 노력과 관련하여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이전에 그 의미나 직분 자체가 사라져 버린 직분을 개혁 교회가 회복시킨 점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개혁 교회는 이 땅에서의 구속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신 주님께서 “목사들 즉 교사들”(τοὺς ποιμἐνες καὶ διδἀσκαλοι, 엡 4:11)을 세우셨다는 의미를 강조하며 목사직을 가르치는 직임으로 회복시켜내는 귀한 일을 감당하였다. 이 때 “목사들”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가 있고, 교사들 앞에는 정관사가 없으므로 목사와 교사를 하나로 보고 있다는 인상이 강조되며, 따라서 이 둘을 연결시키고 있는 “카이”(καὶ)는 중언법(重言法, hendiadys)으로 사용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벌코프도 에베소서 4:11의 “목사와 교사”라는 말은 “두 종류의 다른 직임들(two different classes of officers)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연관된 기능을 지닌 한 종류의 직임(one class having two related functions)을 구성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루렘은 아예 “목사-교사”(pastor-teacher)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까지 한다. 그러므로 이전에 천주교 신부가 하던 일을 이름만 바꾸어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직임을 성경에 맞게 회복시킨 것이다. 이 목사는 이제 더 이상 제사장[司祭, priest]로 불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런 사제 의식도 불식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교회 안에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οἱ κοπιώντες ἐν λὀγω καὶ διδασκαλἰᾳ)로서의(딤전 5:17) 목사의 본래적인 직무를 성실히 하도록 된 것이다. 이런 개혁파적인 이해에 의하면, 목사 자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나, 그가 감당하는 직임,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잘 가르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사제직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거스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직무를 개혁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런 용어를 유지하고 있는 교회들도 온전히 성경에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만인제사장주의를 강하게 말했던 루터를 따른다고 하는 루터파 교회 안에 사제(priest)라는 용어와 심지어는 아직도 감독(ἐπἰσκοπος, bishop)이라는 용어가 잔존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성공회 안에 그런 용어와 제도가 잔존해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보다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열망하기에 성공회 목사나 루터파 목사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개혁파 목사로서의 길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교사인 장로’(목사)직의 회복과 함께 개혁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전혀 자취도 없이 사라졌던 ‘목사가 아닌 장로들’(πρεσβὐτεροι)의 직분을 회복시켰다. 이에는 디모데 전서에서 시사되어 그 뒤로 발전된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와 다스리는 장로(ruling elder) 사이의 구별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신 교회라고 하면서도 오랫동안 이런 의미의 장로를 가지지 못했던 성공회의 목사들인 스팁스와 패커가 신약 성경이 말하는 장로, 즉 감독에 대해서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우리 시대에 그에 상당하는 것은 현재 평신도 지도자나 교회의 교구 위원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현재 우리의 제도가 목사에게 부과하고 있는 목회자의 책임을 충분히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목사와 함께 우리들의 장로에 해당하는 이들이 세워져서, 그들이 함께 목회자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개혁 교회의 모습과 같은 교회 제도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스팁스와 패커는 “사람들은 이것이 신약 성경의 패턴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경험으로 성숙한 발전에 이르도록 개인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고 믿으면서 믿음으로 이러한 모험을 할 목회자들을 보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공회에 속한 이들의 (그들이 속한 교회를 생각할 때) 이 과감한 주장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이 책의 번역자는 다음과 같은 역자 주를 붙이고 있다: “바로 이것을 제도적으로 잘 드러낸 것이 장로교회 제도이다. 그러므로 그 제도를 가지지 않은 성공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고, 그 제도를 가진 교회에 속한 이들은 그 제도의 의미가 현실적으로 드러나게끔 작업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패턴에 따르는 제도와 그 정신을 가지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제도가 표현하려는 성경적 정신에 충실한 사람들이 그 정신에 따라서 성령님께 의존해서 교회를 잘 섬겨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회복된 제도를 가지고 있는 우리네 한국 장로 교회에서 교회다운 모습이 잘 드러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더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에 상응하는 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제도가 말하는 정신에 충실한 사람들인 것이다. 사람들이 성경과 성령에 의존해 가지 않게 되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가져도 참된 교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개혁 교회가 회복시켜 내어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집사직(the diaconate)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온전한 직분의 회복이 절실함을 느끼게 된다. 천주교회나 성공회, 그리고 그에 따라 감리교회도 집사직을 온전한 임직을 받기 이전의 얼마 동안(대개 1년 동안) 거쳐가는 직분, 즉 부제(副祭, 또는 감리교회의 deacon인 목사)로 여기는 것보다는 평생직으로서의 집사직에 대한 이해가 성경이 말하는 집사직에 가까운 것으로 보면서 개혁 교회에서는 성경이 직분으로 말하고 있는(빌 1:1, 딤전 3:8) 집사(διἀκονος)라는 직분을 회복시켰고, 그리하여 결국 개혁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라는 성경적인 직분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었다. 오늘날 제 2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천주교회와 1968년 람베트 회의 이후 성공회 내에서도 평생직으로서의 집사직에 대한 논의와 회복의 시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전에 개혁 교회가 성경에 근거해서 이룬 개혁의 방향을 향해 나아 오는 것으로 여겨져 환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시도가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이와 함께 이미 집사직을 회복시켜 상당히 많은 교우들이 집사직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교회에서는 과연 참으로 성경적인 집사직이 회복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과거 개혁파 교회는 성경에 분명히 장로들 외에 집사들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교회 안에서 불쌍히 여기는 일반적 사역(ministeriun misercordiae ordinari)인 교회의 모든 필요와 관련하여 기독교적 선의의 사역을 수행한 책무와 과업을 맡은이들이 집사들임을 천명하고, 집사직을 회복시키고 세워서 교회 안팎의 구제의 사역을 힘입게 감당하도록 했었다. 이렇게 회복된 집사직의 현저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는 곳이 제네바 교회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교회에서 집사들은 참으로 교회 안팎의 사회 복지적 문제를 감당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집사직이야 말로 교회의 diaconia의 한 측면을 잘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회 안에 집사직이 있느냐 없는냐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집사직이 사라진 교회에서는 이것이 회복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이 제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한국 감리교회 안에 집사인 목사 외에 소위 평신도 집사직이 나타나게 된 것, 심지어 장로직이 등장하게 된 것은 세계 감리교회를 향한 보다 성경적인 방향으로 교회의 제도를 고치도록 제안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한국의 다수파를 차지하는 장로교회가 한국 교계에 암묵리에 미친 좋은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집사직도 한국 장로 교회 내의 집사직과 같이 그저 형식적이고, 단순한 직임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 교회 안에 성경적이고, 개혁 교회가 회복시킨 정신에 따른 참된 집사직의 회복이 필요하다.
직임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는 데에는 이 직임의 회복 뿐 아니라, 사람들을 이 직임로 따로 구별하는 일에 있어서도 성경에 따른 방법을 회복시켜 가지고 있는 것이 개혁파 교회의 모습이다. 한 동안 교회는 잘못 발전된 감독 제도에 의해 감독이 지명하여 임명하는 방식으로 직원들을 구별하고, 그 임직식에서 손 얹는 일(안수)를 매우 강조하여 왔었다. 지금도 감독제를 가진 교회들은 이런 일을 매우 중시한다. 심지어 안수와 관련하여 사도적 계승을 말하는 교회와 그런 이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개혁파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세워 교회의 직원이 되게 하실 때, 그 자신이 느끼는 바 내적 소명을 교회 회중이 선출하는 방법의 외적 소명을 통해 인쳐 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직임에로 부르시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왔다. 그래서 개혁파 교회에서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를 세울 때에 무엇보다 먼저 개인의 내적 소명을 확인하고, 교회의 성도들이 이를 확인하여 주는 절차를 강조해 왔다. 목사의 경우에는 회중들의 다수 가결에 의한 청빙이 없으면 임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나,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목회자를 감독이나 인근 귀족들이 임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회중의 동의와 선출에 의해서 목사가 선임되도록 한 것이 바로 이런 교회의 공적인 부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로와 집사를 세울 때에도 회중들의 선출을 통해서 세우고, 그들에게 대해 일정한 훈련 기간을 가진 후에 임직식을 통해 그 직무에로 따로 구별되어 있음을 선언하는 의식을 하여 그 직무를 감당하게 한 것이다.
일단 이렇게 교회를 통한 외적 소명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언하는 과정은 첫째로, 그 회중들이 적임자를 잘 판단하여 선출하는 것을 개혁 교회에서는 강조하여 왔다. 그래서 (1) 디모데 전서 3장과 디도서에서 장로와 집사의 자격을 언급한 이유를 회중들이 이런 기준에 따라 적임자를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고, (2) 사도행전 6 장에서 일곱 사람을 세울 때, 사도들이 일정한 자격을 제시한 후에 그에 해당하는 이들을 교회로택하게 하여 세우고 임직하게 한 것을 중시하면서, 또한 (3)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 등지에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한(χειροτονἠσαντες)” 것을(행 14:23) 매우 중요하게 여겨 왔다. 여기서 “택했다”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인 “케이로토네오”(χειροτονἐω)는 어원적으로는 “손들을 들어 선택하다”(choose, elect by raising hands)는 뜻이라고들 해석한다. 물론 이를 “안수”(ἐπιθἐντες τὰς χείρας)와 동일시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그것은 별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이를 단순히 세웠다, 지명했다(appoint)로 보려는 시도들도 있으나, 이런 세움이 회중들로 하여금 손을 들어 표시함으로 회중의 뜻을 묻는 것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개혁 교회가 처음부터 강조해 온 것의 하나는 회중들이 성경의 원칙에 따라 적임자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잘 선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선출된 이들을 공식적으로 임직시키는 의식을 임직식(induction) 또는 장립식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식은 교회적인 의식으로 그 교회를 섬길 자들을 세워[將立] 그 직무를 위해 따로 구별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이 세우는 의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벌코프는 장로 교회에서는 이 때 안수하는 일을 선택적인 것(optional)으로도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서 박형룡 박사도 다음과 같이 말하여 개혁파적 임직식과 안수에 대한 개신교적의 의미를 확언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파는 안수는 단순히 후보자가 그 직임을 위하여 성별된다는 사실의 상징적 지시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것을 성경적 의식으로 또는 완전히 적당한 일로 보나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파적 제도에서 중요한 것은 회중들의 선출과 공적인 임직이지, 안수는 상징적인 것일 뿐이다.
이렇게 성경적인 직임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개혁 교회는 각 지교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을 분명히 수립하여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감독제의 교회들과는 달리) 교회 구조의 기초는 모든 성찬에 참여하는 회중이 선출한 각 지 교회의 당회에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회중 교회들과는 달리) 다른 교회들과는 그저 협의회적인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그래서 일정한 지역에 있는 교회들은 같은 노회(presbytery)를 구성하여 각 지교회(肢敎會)에 있는 권한을 파생적으로 부여하고, 또 같이 그 지역에 있는 교회를 돌아보기 위해서 왕되신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여 성경에 나온 분명한 예에 따라 목사를 임직시키는 일을 하고(딤전 4:14), 여러 가지 논의할 사안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일을 하는 것이다. 벌코프는 이점을 아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혁 교회들은 당회에 주어진 것 보다 더 높은 교회의 권세를 알지 아니한다(no higher kind of ecclesiastical power). 그러나 동시에 (노회나 총회의) 권위는 당회의 권위보다 그 정도에 있어서 더 크며, 그 범위에 있어서 더 넓다. 왜냐하면 (마치 한 사람의 사도에게서 보다는 12명의 사도들에게서 사도적 능력이 더 많이 대표되는 것과 같이) 큰 회의체들(major assemblies)에서는 당회에서 보다 교권(church power)이 더 많이(in greater measure) 대표되기 때문이다. 10개의 교회는 한 교회보다는 분명히 더 많은 권위를(more authority) 가진다; 힘의 집적 (an accumulation of power)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개혁 교회의 이해에 의하면, 노회나 총회 등의 큰 회의체들(major assemblies)이 권위 있는 것은 그것 자체의 본래적인 권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기본적으로 권위를 부여하신 각 교회의 권위가 파생적으로 부여된 것이며, 따라서 더 많은 이들이 모여서 더 많은 교회를 대표하여 주의 뜻을 따라서 결정하는 것이기에 그 결정이 권위를 지니 것이다. 그런 회의체들이 더 높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더 넓은 권위와 더 큰 권위를 가질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모여서 한 결정이 주의 뜻에 합치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그저 권고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서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바른 해석과 적용으로 교회를 규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된다는 것이 밝혀진 경우에는 더 이상 교회를 규제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또한 큰 회의체의 임원들은 한시적으로만 일을 수행하는 권위를 가질 뿐이다. 심지어 침례교 신학자인 밀라드 에릭슨조차도 장로교회의 노회나 총회의 임원들이나 상비회 위원들은 “그들을 선출한 사람들의 결정을 수행할 수행력(an executive power)만을 가질 뿐이며, 따라서 그 권위는 그 직임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출한 집단(the electing group)에게 있다”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런 교회의 제도와 관련해서 과거 개혁 교회의 가르침과 정신을 잘 반영하면서 우리 한국 교회에 이것을 잘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신 분으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암은 그 누구보다 각 지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지교회와 노회나 총회의 관계에 대해서 노회나 총회는 상회가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의 지혜를 모으는 확대 회의라는 점에서, 그리고 보다 많은 이들의 지혜를 모은다는 점에서 그 권위가 더 넓고,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박 목사님은 이들 사이에는 높고 낮음의 등급이 없으며, 따라서 헌법에서나 용어의 사용에서 상회(上會)와 하회(下會)라는 말, 또 ‘상회에 올린다’, 또는 ‘하회에 내린다’는 말도 고칠 것을 요구하셨고, 넓은 회의체들(major assemblies)의 사회자를 그저 “의장”(moderator)이라고 불러 모든 회원의 평등성과 그에 근거한 논의를 잘 이끌어 내도록 하셨다. 또한 이런 더 넓은 회의체들은 회의 기간 동안에만 열린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총회가 개회(開會)되고 파회(罷會, dissolve)됨을 헌법에 분명히 명시할 것을 요구하셨다. 박윤선 목사님 이외에도 허순길 교수님도 화란 개혁 교회의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같은 점들을 강조한 바 있다. 예를 들어서,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유의하라:
먼저 개혁교회에서는 당회만이 상설 치리회이고, 다른 모든 치리회는 임시회이다. ...... 그래서 이 치리회들은 모일 때마다 새로 조직을 하게 되고 폐회와 동시에 파회가 된다. 이는 장로 교회 총회의 원래 성격과 같다....... 당회 이외의 모든 치리회는 그 회가 폐회됨으로 모든 임원의 역할도 끝나게 된다. 그래서 그 회기 밖에서는 노회장, 총회장의 이름이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다음으로 개혁 교회에서는 상회, 하회(higher court, lower court)라는 말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노회를 당회보다 높은 치리회로, 총회를 노회보다 더 높은 치리회로 보지 않는다.
이런 생각과 그런 생각을 헌법에 반영시키고, 모든 회원들이 그런 정신을 따라 살도록 가르치신 점에서 우리는 정암 박윤선 목사님과 고신대학교 신대원의 허순길 교수님의 이런 노력을 낙스(John Knox) 등의 노력에 의해서 일단 신학적으로 개혁된 교회가 되었던 스코틀랜드 교회를 좀더 장로교적으로 분명히 하기 위해 노력했던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의 철저한 장로교적 제도를 구체화하려고 한 노력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개혁파 교회의 교회 제도까지도 성경적 원칙에 따라 하려고 노력한 매력 때문에 다른 교회의 목사가 아니라,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2-3. 개혁파적 목회의 매력 때문에 우리는 개혁파 목사가 되고자 한다.
셋째로, 우리는 개혁파 교회의 독특한 개혁파적 목회(reformed ministry)의 매력 때문에 개혁파 목사가 되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가 강조하는 세 가지 요점 가운데서 가장 강조해야 할 점이 아닐 수 없다. 왜냐 하면 오늘날에는 신학에 있어서는 개혁신학적이면서도, 목회는 다른 모습으로 할 수 있다든지, 또 다른 모습으로 해야만 한다는 주장이 너무나도 많이 들려 오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는 개혁파 교회의 위기 시대라고 할 수도 있다. 과거에는 참된 개혁파 교회에서 오래 생활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개혁파적 목회의 모습을 배울 수 있고, 그런 삶 가운데서 개혁파적 특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의 대표적인 예로,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화란 개혁파 성도들이 미리 미국에 있던, 그래서 그 신앙을 표현해 내는 방식에 있어서 좀 자유롭게 보였던 교회와 교우들과 한 교단인 화란 개혁 교회(the Dutch Reformed Church)에 속해 있을 수 있느냐를 문제 삼으로면서, 1857년 5월초에 4개의 교회가 자신들만의 노회를(classis) 조직해 결국 기독교 개혁 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라는 교단이 세워진 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좀 지나친 예이기는 하지만, 당시 교우들과 목회자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개혁파 교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에 비하면 오늘날에는 어떤 교단의 교회를 살펴보아도 비슷한 목회의 형태가 나타나며, 또 목회를 비슷하게 유도해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개혁파 목회의 위기 현상을 절감하게 된다. 현대에는 그저 어떤 형태로든지 교인들이 열심히 모여서 종교적 활동을 해 나가며, 그것을 열심히 해 나가면 목회를 잘 한 것이라고 하는 일종의 실용주의적 개념이 확산되어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그렇다면 과연 개혁파적 목회(reformed ministry)의 특성은 무엇일까? 나는 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여해 주신 세력(힘)의 성격에 대해서 벌코프가 하고 있는 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는 교회에 주어진 힘은 첫째로 영적인 힘[靈力, spiritual power]이라고 말하면서, 이는 그저 내면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뜻은 아니니, 그리스도의 권세는 우리의 몸과 영혼 모두를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영력(靈力, spiritual power)이라고 말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바빙크를 인용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성령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행 20:28),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에 능력에 의해서 행사되어(요 20: 22, 23, 고전 5:4), 도덕적이고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고후 10:4). 이렇게 교회의 힘은 전적으로 영적이므로 그것은 물리적인 힘(force)에 호소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벌코프는 로마 교회, 즉 천주교는 세속적인 힘(temporal power)을 주장하고 사람들의 삶 전체를 교회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는 점에서 이 큰 사실을 보지 목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벌코프에 의하면 교회에서 행사되는 힘은 무력(武力)을 포함한 모든 물리력이나, 경제력이나, 이 세상의 외적인 힘을 사용하여 행사되는 힘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끔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끔 하는 것도 교회에서 나타나는 힘이 아닌 것이다.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을 향하는 순례자의 무리로서의 교회는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요 18:11, 36). 교회는 그런 식으로 싸울 필요가 없으니, 하나니 나라는 인간적 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며; 교회는 싸우지 않으니 (십자군들이 경험을 통해 배운 바와 같이) 칼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기는 영적인 것이다....... 칼은 궁극적 문제를 결정하지 못한다.
이렇게 모든 무력에 반하는 정상적인 영력은 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적인 영력도 아니다. 오히려 가장 인격적이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말씀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원들을 포함해서 모든 교우들은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힘이 행사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온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데 영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들이 전혀 인간적으로 두려워하거나 하지 않고 건전한 가운데서 전인격적으로 주의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하여 나아 갈 때에야 그리스도의 통치가 행사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목사 자신의 말에 성도들이 복종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목사의 말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주의 말씀이기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이가 전혀 주의 말씀과 관련이 없는 것을 전하거나 강조하면 결국 성경이 말하고 개혁신학이 말하는 영력은 없는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에 대해서 벌코프는 섬기는 권세(a ministerial power, diakonia leiturgia)라고 말한다. 박윤선 목사님도 이점을 늘 강조하면서 교회에서의 봉사는 수종적(ministerial)이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세는 독자적으로 수행되는 독자적이고 주권적인 힘(independent and sovereign power)이 아니라 주를 섬기는 힘이므로, 이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게 성령의 지도 아래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성도들을 섬기는 것에서 나타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권세는 이 세상이 볼 때 참으로 힘있는(powerful) 그 힘을 드러내는 권세이지만, 교회에 주어진 권세는 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무력하고 그것은 그저 주님을 섬기는 권세이며, 또 성도들을 섬기는 권세이다. 따라서 우리 주께서 그리하셨듯이 이 힘은 섬기고 자신을 희생할 때에야 나타나는 권세이다. 이런 뜻에서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은 모두가, 특히 직임자들은 섬김으로 말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를 섬기며 교회를 섬기는 그곳에 이 세상에는 없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다스림의 실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요점은 위에서 말한 영적인 힘이라는 것과 같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이 세상의 힘을 동원해서 지도하려고 하거나, 인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유행하는 지도력의 원리에 따라 교회를 인도하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소위 교회 성장에 대한 경도를 바르게 바라보는 에드문드 클라우니의 개혁파 사역의 관점에 충실한 다음과 같은 지적은 우리에게 귀한 도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성장에 대한 그의 묘사들은 숫자의 성장에 초점이 있지 않고, 주의 날을 바라보면서 거룩에 있어서의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역에 교회의 참된 힘이 있다, 즉 주께서 교회에 주신 세력의 성격에 충실하게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통치하시도록 하는 데에 교회의 참된 힘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성령님을 의지해서 진전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님만을 의지해서 하는 교회의 목회는 과연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쳐서 하나님 경륜 전체(the whole counsel of God)를 모든 성도들이 잘 깨닫고, 그에 근거해서 자신의 삶의 목표적 생각하고 주께서 내리신 사명를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 나가도록 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맡은 사역자”(minister verbum dei: M.V.D.)로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잘 가르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온 회중에게 풍성히 공급되게 해야만 한다. 그 말씀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게 되는 일이 이루어져야 기본적인 사역이 이루어진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클라우니가 잘 말하듯이, “설교는 예배의 핵심적 요소이다.......왜냐하면 설교자와 백성들 모두가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에게 그의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에나 바른 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늘 주의하면서 그 말씀의 의미와 함의를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 잘 적용한 교회였고, 어두운 시대의 어두운 교회는 항상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적고 말씀을 도외시한 종교성에만 치중하여 가던 교회였던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파적 목회는 무엇보다도 말씀에 충실한, 말씀이 풍성한, 말씀이 다스리는 말씀의 목회(the ministry of the word of God)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사역의 다른 측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말씀이 바로 전해지면 다른 것들의 중요성이 많이 상실되고 경감될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시피 하는 로이드-죤스의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오늘날에 동서양의 모든 교회들에서 심하게 나타나고 있는 변질 가능성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바르게 지적하는 클라우니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증언은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진리의 빛을 붙들어야 한다...... 교회의 선교를 다문화주의, 급진적인 여성주의, 또는 심지어 교회적 제의주의적 가정(假定)에 적응시켜려고 하는 것은 다른 복음에로 돌이키는 구자유주의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역은 무엇보다 먼저 말씀의 풍성함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을 중심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이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의 예배에서는 성경 말씀이 명하지 않은 모든 요소들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 언급된 요소들만을 중심으로 예배 의식을 마련해서 주께 경배하려고 힘써 온 것이다. 심지어 예배에 있어서도 하나님 말씀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견지해 온 것이다.
그리고 개혁파적 사역은 곧바로 성령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의 목회(the ministry of the Holy Spirit)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말씀과 성령은 (통상적인 경우에는) 늘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벌코프는 교회에 주어진 힘은 영적인 힘이라고 말했었음에 유의하라.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적으로 동반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개혁파적 목회는 기도의 목회(ministry of prayer)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도하지 않는 이는 성령에게 민감하지도 않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목회는 항상 주님에 대한 사랑과 서로에게 대한 따뜻한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목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적 목회는 사랑의 목회(the ministry of love, ministerium amoris)라고 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따뜻한 마음이 없는 곳에는 개혁파적 목회는 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성경에 근거한 바른 제도가 있어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주께서 주시는 충만한 사랑 가운데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벌써 개혁파적 목회이기를 그친 것이다. 결국 개혁파적 목회는 주님의 사랑을 나누며, 그 사랑으로 서로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므로 개혁파적 목회는 역시 박윤선 목사님께서 개혁파적 원리에 따라 많이 강조하신 상호 돌봄의 목회(mutual ministry)일 수밖에 없다. 이런 뜻에서 개혁파 신학에서는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성도가 다 목회자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물론 좁은 의미에서는 특별한 직임을 가진 이들이 목회자 역할을 한다. 목사와 장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보편적 직임을 지니고 감당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서로가 서로에게 대해서 서로를 지키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폭넓은 의미의 목회자라고 할 수 있은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는 자라는 의식이 참된 교회의 지체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파적 목회는 사랑의 목회, 상호 목회이다.
그리고는 개혁 교회는 온 교회가 개인적으로나 특히 전체적으로 무엇을 결정할 때에 제대로 깨닫게 된 하나님 경륜 전체에 비추어서 그 시점에 분명히 깨닫게 된 주의 뜻을 따라 결정을 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이는 항상 주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려는 사려 깊은 목회(ministry of prudence)요, 주의 지혜를 따라 판단하는 지혜의 목회(ministry of wisdom)이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분들이 주의 뜻을 살펴서 주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바를 따라 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그 누구든지 “주장하는 자세”를 가질 수 없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특히 이점을 강조해서 말하기를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라고 권한다(벧전 5:3). 이는 위에서 교회에 주어진 권세가 말한 섬기는 권세(ministerial power)라는 것을 유념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점이다. 따라서 아직 대다수의 회중이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이 성숙할 때까지를 기다려서 온 성도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갈 때에야 모든 성도들의 지혜를 모아서 일을 이루도록 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디고 일을 하기 어려워 보여도 결국 주께서 이 땅에서 교회에게 주신 교회를 움직여 가는 유일한 방도가 되는 것이다. 연약한 교회는 그 구성원 모두가 주의 뜻을 잘 따라 가지 못하는 교회이고, 성숙한 교회는 그 성원들이 주의 뜻에 유의하면서 그 뜻을 수행하여 가는 교회인 것이다.
이 모든 점에 유의하는 목회는 그야 말로 성령께서 교회를 자연스럽게 인도하시는대로 이끌려 가는 아주 자연스러운 목회(natural ministry)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성령에 의존하는 목회는 가장 자연스럽고, 그 안에서 또 놀라운 성령의 역사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는 초자연스러운 목회(super-natural ministry)인 것이다. 이렇게 개혁파 신학이 그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자연과 초자연이 잘 조화되는 신학을 추구하듯이, 그 목회에 있어서도 그 둘을 대립시키지 않고, 잘 조화시키는 목회를 추구하여 가게 될 것이다. “성령 안에서는 자연과 은총의 대립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클라우니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뉴스를 들으면서,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또는 저녁 식사를 하며 가족과 이야기하면서 [즉, 자연적 삶의 영역 가운데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워야 하는(롬 12:2)” 것이다. 개혁파적 목회는 이렇게 자연과 초자연을 성령 안에 통일시키는 사역인 것이다. 이런 개혁파적 목회의 매력이 우리를 개혁파 목사가 되도록 부르는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개혁신학 자체의 매력, 개혁파 교회의 매력, 그리고 개혁파 목회의 매력 때문에 우리는 다른 교회의 목사가 아니라, 개혁파 교회, 장로 교회의 목사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논의했다. 그렇다. 이 모든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가장 성경적인 신학, 성경적인 교회, 성경적인 목회를 지향하는 개혁파 목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말씀을 가르침으로 주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싶은 열망이 가득해야 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이런 일로 주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가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우리가 주께서 원하는 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혁 신학의 교회론에서 늘 바르게 가르쳤듯이 이는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내적 소명(internal calling)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와 함께 우리에게 이런 목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을 최소한의 은사가 있어서 이를 감당할 만한 지적인 영적인 자질이 있다는 확신과 주께서 이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며, 목회자가 되는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경험이 내적 소명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내적 소명을 우리가 그 회원과 지체가 되어 섬기고 있는 교회의 회중들이 이런 이가 다음 세대의 목사가 되어 섬길 것을 원하고 세우는 방식으로 인쳐 주어야 하고, 이것이 외적 소명(external calling)을 형성하여,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일이 확증되는 것이다.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요 은혜의 일인가?
부디 바라기는 이 땅의 모든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이 과거의 개혁 신학적 선배들에 잘 제시한 그 놀랍고 귀한 신학과 교회와 사역에 대한 이상에 따라서 이 땅의 교회를 바르게 섬겨 나감으로 우리들의 교회가 진정 바른 교회로 이 땅 위에 나타날 수 있기를 원한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우리는 이 땅에서 개혁파 신학을 하고, 개혁파 신학을 공부하여 개혁파 목회를 하는 개혁파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카이퍼(R. B. Kuyper)와 함께 우리는 우리의 신학과 교회 제도와 목회에 있어서 참으로 “개혁파이려고 하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참으로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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