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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성장 개념

by 【고동엽】 2021. 10. 20.

교의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성장 개념

 

우리가 교회성장 하면 Donald A. McGavran의 이름이 얼핏 생각나다. 그는 풀러 신학교에서 선교학(School of Mission)을 가르치고 있다. 1970년에 Understanding Church Growth 책을 써내었다.

10년 후 80년에 개정판이 발간되었다. 맥가브란의 교회 성장은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많은 선교사들이 맥가브란의 방법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현재 많은 나라에서 그들의 기독교 상황에 교회 성장의 원리에 따라 보고되고 있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복음전도에 실제적인 전도경과에 대한 여러 책의 논문들이 논의되어지고 있다. 지금은 이 교회성장 원리의 실제적 결과가 아니고 조직신학적 원리의 출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것에 관한 신학적 복음은 옳은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어떤 전도의 방법을 쓰기 전에 또한 어떤 전도의 방법을 쓰는 동안에도 그 방법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된 것인지 아닌지 물어봐야 한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이라는 책의 원칙들을 심사해 보고자 한다. 그의 교회성장에 대한 책을 읽는 사람은 여러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그분의 복음전도의 열정을 이 책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참 좋은 점이라고 생각된다. 본인이 동의 할 수 있는 몇 가지 점을 든다면 맥가브란이 어떤 부류의 사람이 가진 선교사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선교사란 학교, 병원을 짓도록 도와주는 사람, 농부들에게 농사를 짓는 방법에 대해 충고하는 사람이요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견에 대해 맥가브란은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그의 이 견해는 옳은 것이다. 맥가브란이 반대하는 이 견해는 오늘날 기독교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이 부류 중에 어떤 이들은 선교사의 중요한 임무란 이 땅에 사회적인 정의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전도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좋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도란 전도를 받는 사람이 속한 고유한 교육이나 문화적인 배경에서 그를 격리시키는 것이며 자기 친족들에게 여러 곤란을 야기하므로 우리는 전도하는 일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상황 가운데서 맥가브란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사의 가장 중요하고 첫째 되는 임무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선교의 중요한 출발저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회적인 불의에 대해 싸우도록 명령합니다만 이러한 사실이 가장 중요한 임무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를 전하는 일을 중시하게 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 본인은 맥가브란의 입장과 같이 복음 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다. 둘째로 맥가브란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설득(persuade)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생각은 중요한 생각이다. 모든 선교사는 전도 받는 사람을 억지로 예수 믿게 하려 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어떤 것을 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서 과자 드세요 하는 말과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는 말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다과는 받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예수님의 은혜는 꼭 받아야만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과 개종하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그래서 신약에는 설득하는데 대한 아이디어로 여러 번 말한다. 사도 바울이 그의 전도사 역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고후 5장 11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느니...” 여기서 권한다는 뜻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전도자가 애를 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단순히 흥미 있는 이론들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생명의 말씀으로 제시해야 한다.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다른 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 한다. 셋째로 세울 교회의 위치를 올바르게 강조한다. 어떤 선교사들은 교회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맥가브란은 그런 선교사들의 말을 반대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나. 이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고려하여 볼 때 옳은 것이다. 신약에서 볼 때 교회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세우셨던 것부터 12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12사도의 12이름이 있는 새 예루살렘까지 중심 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나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도를 통해서 그의 교회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넷째는 맥가브란은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을 때 교회는 그 초신자를 위하여 더 많이 도와주어야 된다고 한다. 맥가브란은 folding and feeding 즉 교회가 그들을 한 우리 안의 양떼로 보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도 중요한 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예수 믿는 자가 되도록 애쓴 후에 그 사람이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이 초신자는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그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대전도 명령을 하셨을 때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아라” 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교인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살게 하고 행해야 하는 것처럼 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둘째 이유는 사탄은 어떤 사람이 교회에 출석한다고 그 사람을 위촉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 사람의 약한 부분을 잘 알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새 신자들이 쉽게 사탄에게 속히는 편이다. 그래서 맥가브란이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가 특별히 새 신자들도 계속적으로 말씀으로 먹여야 한다. 지금까지 맥가브란의 좋은 점을 몇 가지 말했으나 맥가브란의 결론적인 교회성장이란 아이디어에 대해 아직껏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동의하는 점들은 교회성장의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본론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지금부터 ‘교회성장’ 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맥가브란이 이상한 의견을 말했다.

그의 교회성장에 대한 견해는 여러 교파 즉 침례교, 칼비니스트, 순복음 등에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교회성장에 관한 원리들은 다 성격적이고 신학적인 것이므로 교파마다 이 원리들에다 자기들의 교리를 알맞게 첨가해야 한다고 맥가브란은 말했다. 교회가 이 작업을 잘 하는데 따라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좌우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의견을 이상하다고 하는 이유는 어떠한 사실이 옳은 지 잘못된 것인지는 그것의 성공여부에 따라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된 생각이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옳은 생각이 아주 작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교회성장의 생각이 옳은 지의 여부는 그 학설에 따른 실제적인 성공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학설이 성격적인가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이 교회성장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 성경 신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교의학적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 세 가지 측면 인간론 신론 교회론 에서 이 학설이 성격적인지 연구하고자 한다.

맥가브란은 인간론에서 특별한 용어를 많이 쓴다. findable people - 찾아질 수 있는 사람, winable people 얻을 수 있는 사람, receptable people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등이다. 맥가브란은 이 용어들을 쓰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말했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findable people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싶어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들의 큰 무리들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기쁘게 받도록 그들의 생활을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그들을 찾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 이렇게 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findable people이므로 그들을 믿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많은 findable people들을 버리는 것이 되고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받도록 일하였는데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그는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찾아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어떤 때는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는 사실을 볼 수 있지만 이 사실이 findable people이라는 말을 정당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직 성경만이 인간이 복음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느냐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인간에 대해 말하는가? 구약에 나온 인간에 대한 가르침을 힘들여 모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이 같은 힘든 작업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서 3장 10 - 18절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이 사실은 신약시대에 와서 즉 복음을 모든 족속들에게 전도해야 할 이 시대에서는 바뀌게 되었는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의 계시도 인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로 말할 때에도 신약시대에 관하여 비슷하게 쓰고 있다. 에베소서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에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라고 썼다. 엡 2장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보관상 신도의 자녀였거니...” 전에는 즉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는 말을 쓰고 있다. 엡 2장 1절, 5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외친다고 하더라도 죽은 사람들은 능력이 없으며 그들은 findable people, receptable people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원리적인 인간의 계시를 도외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하시지 않았는가? 맥가브란은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심과, 하나님의 보호와 성령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을 준비하시지 않았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비친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밝혀 주었지만 이 하나님의 주신 선물과 섭리가 복음을 받기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성경 어느 곳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8절에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타락을 인하여 진지를 막는 사람들이 되었던 사실을 썼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그의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서 분명히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로마서 1장 20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을 거절한다.

그래서 복을 전할 때 바로 이런 사람만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을 이미 거절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어떻게 findable people을 만나리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성격적인 기준이 없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도할 때에 복음을 받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리라는 사실을 성경 아무 곳에서도 약속하시지 않았다. findable people 아니라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신론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한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고백한다. 이것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교회의 고백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은 우리 신자의 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이고 사실은 또한 전도하는 일에도 지극히 중요하다. 그런데 맥가브란은 이 근본적인 고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전능하신 신이라는 것은 물론 「교회성장학」이라는 책에서 참을 수 있다. 맥가브란은 이렇게 쓴다. “자그마한 교회성장만이 계속되어진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을 결코 얻지 못한다. 만약 선교회와 교회들이 작은 성장에 만족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간다면 천국잔치는, 하나님의 준비는 허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인용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에 대한 맥가브란의 광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은 전도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분이시고 우리 인간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일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준비하시지만 우리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준비하신 것이 실패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 맥가브란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들에게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런 생각은 다른 곳에 나오는 그의 예를 통해서 지지할 수 있다. 그는 어떤 불타는 집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만약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을 억지로 밖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가 물어본다. 물론 그 사람이 말하는 집에서 그대로 있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는 머무를 수도 있지만 또한 우리는 그 사람을 설득해서 밖으로 나가게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 신자들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도록 애쓰고 노력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지만 이 예화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맥가브란이 순 예화로 말하지만 그들이 이 집이 불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와서 구원을 받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강요해서 믿는 자가 되도록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설득하는데 달려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도 크리스찬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3장 5절 이하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썼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요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 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역을 이렇게 구별하였다. 즉 인간 아볼로나 바울은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이나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우리들이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사람들을 믿게 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실이 사도행전13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14절에 루디아라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 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또 하나님을 믿게 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맥가브란은 인간의 마음을 여는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다시 사도행전 13장 48절을 생각해 보자. 영상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거라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받도록 작정하셨고 복음을 받게 하시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복음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셨을 때 그 사람이.

우리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준비하셨을 때 틀림없이 어떤 신자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끝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맥가브란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의지하고 계신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신자들을 의지하시고 늘 필요로 하시고 또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불신자들 자신의 동의가 필요하신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의 질문은 이런 것이 된다. 어떻게 맥가브란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근본적인 기독교인의 고백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이다.

셋째로 교회들을 살펴보자.

맥가브란은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을 찾을 수는 없다. 맥가브란은 그의 책제목을 「Understanding Church Growett」라고 했지만 교회 성장학이란 책에서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맥가브란은 무엇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인가 이 문제는 쉽게 대답될 수 있다. 자기들 스스로가 교회라고 부르는 모든 교회로 맥가브란은 교회라고 불렀다. 그는 주로 신교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그 교파들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교회가 자유주의이거나 또는 정통교회이든지 간에 어느 교회든지 성장해야 한다. 어떤 교회든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저는 맥가브란이 교회들에 아무 구별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나의 이 신고는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맥가브란은 교회 사이에 어떤 구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3국가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는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애쓰는 구원받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애를 쓰지 않는 어떤 교회라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당해는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될 수 없다.” 라고 했다. 그래서 맥가브란의 생각에 의하면 교회의 특징이 하나밖에 없다. 즉 복음을 전하는 행동만이 교회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계시를 전하지 않고 다른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맥가브란은 교회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성경에 대해 에베소서를 예로 들어보라. 엡 2장 20~21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라고 썼다. 이 성경 본문의 주제는 교회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교회성장에 대해 말한다. 21절에 나오는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라는 말은 헬라어로서는 ‘주안에서 성전으로 성장하는’ 뜻이다. 이 성장해 나가는 교회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27절에 보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된 것이다. 교회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다 받아야 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우리의 구주와 왕으로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교회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교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받지 않는 교회가 많다는 것을 안다. 이런 교회가 성장할 때, 이것이 교회성장이라 쉽게 말할 수 있으며 이런 교회 성장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

 

 

 

화란의 종교 교육을 물어본다.

저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기독교 계몽의 학교에 갔지만 같은 나이 또래의 이웃집 친구는 다른 학교에 다녔습니다. 네덜란드에는 두 가지 종류의 학교로 즉 국립학교와 사립학교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 학교는 사립학교에 속하여 있습니다. 국립학교는 국가가 설립하여 그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고 기독교 학교는 개인들이 설립했지만 대체로 정부가 그 경비를 치르고 있습니다. 물론 국가는 모든 학교의 수준을 잘 파악하고 있는데, 장학사들이 학교들을 다 방문하여 가르치는 수준의 질을 점검하는데 표면상 국립학교와 기독교 학교의 수준은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어떤 학교에 다닐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이웃집의 친구 부모님이 나의 친구를 위하여 국립 학교를 선택하였고 제 부모님은 형과 동생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독교적인 학교를 골랐습니다 제 친구와 저는 다른 방향의 학교를 각각 다녔습니다. 그러면

ㄱ. 서로 다른 학교가 생기게 되었던 상황과

ㄴ. 왜 저의 부모님이 저를 기독교적인 학교에 보내고 싶어 했는가하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ㄱ. 지금은 국립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지만 옛날에는 경우가 달랐습니다. 1806년의 학교 법은 학교에서 성경 읽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교에서는 하루의 수업을 시작하고 끝낼 때 성경을 읽으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정부도 선생님들이 좋은 기회에 성경을 읽고 설명하도록 충고했습니다. 그렇지만 1830년 이후에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학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자기 아이들에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국가는 그런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아서 성경 읽는 풍습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때부터 학교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여 일반적인 종교 교육 즉, 도덕적인 교육이외에는 허락되지 않아 기독교 교육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때 학교 싸움이라는 것이 나타나 믿는 자들은 자기의 자녀들을 기독교적인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였는데 기독교적인 국립학교를 짓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인 학교를 짓기 위해서는 인가를 얻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가를 얻는 데에는 너무 오래 걸렸고 어려웠습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 국가는 초등학교의 기독교적인 교육은 없어야 된다고 법적으로 결정하여 기독교적인 초등학교의 소망은 좌절되어 버렸습니다. 다만 자식들에게 기독교적인 교육을 하고 싶으면 부모가 자신들이 그 학교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들의 돈으로 그 학교들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자기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두 배의 돈을 내어야 했는데 한번은 초등학교를 위하여 세금으로 돈을 내고 또 한번은 자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돈을 내여야 했습니다. 이 문제는 1888년 까지 끌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정부는 기독교 학교를 부분적으로나마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시작하여 1917년 비로소 국립학교와 기독교 학교가 재정적으로 균등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싸움은 거의 90년 동안이나 걸렸고 두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첫째 단계에서는 초등학교가 중립적으로 되어 기독교적인 학교를 지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둘째 단계에서는 두 종류의 학교 사이에 재정적인 균등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경우는 이러합니다. 우리 교단 교인들은 많은 학교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등을 설립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어떤 학교를 지을 때에 교인들은 그 학교에 필요한 경비를 수년 동안 스스로 내어야 하지만 그 후에는 국가가 경비의 양도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 학교는 너무 작기 때문에 국가가 보조금을 주지 않아 교인들은 매 년마다 다 같이 그 학교가 필요로 하는 경비를 기부합니다.

ㄴ. 그러면 둘째 문제로 왜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많은 경비와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까지 기독교적인 교육이 그렇게도 중요하다가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에 한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다닌 중학교와 고등 학교는 제가 살았던 레이와르든(Leeuwalden)이란 시(市)에서 약 60km의 거리를 두는 시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날마다 저하고 다른 학생들은 기차를 차고 통학하였습니다. 저와 같이 간 친구들은 처음에는 열 명이었는데 나중에는 삼십 명이 되었습니다. 이웃 사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그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시에도 중학교와 고등 학교가 많이 있는데 왜 다른 시에 있는 학교를 굳이 다니느냐는 것이었지요. 그 당시 어느 날의 한 사건으로 기억되는데 우리는 기차를 타고 학교에 가면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가까이 앉아 있던 어떤 부부가 무슨 학교에 다니느냐고 묻길래 중학교와 고등 학교에 간다고 대답하였더니 그들은 놀라워하면서. “그렇지만 그런 학교는 우리 시에도 많은데 도대체 어째서 날마다 기차를 타고 다른 곳에 있는 학교에 가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우리는 “예, 우리는 개혁주의적인 학교를 다니고 있어요.”라고 대답하였더니 그 부부는 “당신네들 개혁파 사람들은 항상 그래요. 당신들은 우리보다 더 좋다고 여기고, 당신네 학교는 우리 학교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하고는 화가 난 듯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침울해졌습니다. 우리 시에도 좋은 학교가 많이 있었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교만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그 먼 학교에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학교는 있었으나 개혁적인 학교는 없었으며 교육 수준의 질은 좋았으나 개혁주의 신앙적인 교육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개혁주의 신앙적인 교육 때문에 다를 시에 있는 개혁파 학교를 다녔습니다. 오늘까지 저는 그 개혁주의적인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집에서는 부모님들이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기독교적인 믿음과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집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개혁주의적인 생활관이었습니다. 학교의 학과 공부 중 생활면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와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개혁주의적인 교회를 다닐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많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

 

 

 

 

신앙고백과 교회교육

1. 교회의 가르침

교회는 학교가 아니지만 교회에서도 교육은 중요한 것이다. 처음부터 교회에는 가르침과 배움이 있었다. 구약을 보자면,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크신 사역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애굽에서의 해방을 특별한 행사로 기념해야 했다. 그 행사의 규칙 중 하나는 이것이다. “이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사람을 치실 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숙여 경배하니라.”(출12:26, 27). 그래서 매 해마다 아이는 행사의 의미에 대해 질문해야했고 아버지는 해마다 그것을 설명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역을 암기할 만큼 확실히 알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에게도 가르치는 임무가 있었다. 제사장에게는 술마시는 일이 금해진 일인데 그 이유 중에는 그들이 “여호와가 모세에게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레10:9-11)

신약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가르치셨고, (예, 마 4:23)제자들도 가르쳤으며(예, 행 4:2) 디모데도 가르쳤다. 사실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일이 계속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을 명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도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딤후 2:2)

 

2. 가르침의 성경적 규칙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치면 되느냐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두가지 성경본문을 살펴보자.

첫째로 딤전 1:11에서 바울은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고 하였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디모데가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설명하고 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두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로 그것은 사도바울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물론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는 다른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도바울의 말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제자들의 말과 동일한 것이다. 또 예수님 자신은 바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맡기셨다.(행 9:15). 이처럼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 것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이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그 가르침이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가르침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물론 그 가르침에는 예수님과 우리의 구원도 나와야 한다. 하지만 구원의 복음은 항상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두 번째의 본문은 행 20:27인데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오랫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가르칠 수 있었다.(19:9․10). 그 결과로 에베소에도 교회가 생겼다. 나중에 바울은 그 교회의 장로들에게 자기가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고 말한다. 에베소의 교인들은 복음의 어떤 한 부분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나 청중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교회가 가르치는 일을 위한 세가지 규칙을 발견하다.

������. 교회의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 교회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 교회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제시해야 한다.

 

3. 성경적 규칙들과 신앙고백

이제 이 규칙들을 신앙고백에 적용해보자. 가르침을 위하여 사용된 고백은 초대교회에 이미 만들어진 사도신경과 16,17세기에 생긴 요리문답이다. 영국과 미국교회의 선교를 받은 나라에서는 특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위 두가지 고백 사이의 차이는 크다. 사도신경은 매우 함축된 형식으로 신앙의 내용을 요약하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신앙을 보다 광범위하게 설명한다.

또 형식뿐만 아니라 다루는 방식도 다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사역을 따라 신앙을 요약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로부터 영생까지 교회의 교훈을 제시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보다 논리적 순서를 따라 신앙을 설명하는데 성격, 하나님, 찬조, 범죄, 구원 등을 다룬다. 하지만 둘 다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 내용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하는 규칙도 이 고백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도신경은 사실 삼위하나님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성부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사역이 언급되고, 다음으로 성자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의 사역이 언급되고, 다음으로 성령님이 언급되고 마지막으로 교회로부터 영생까지 삼위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루시는 일이 언급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하나님의 중심적 자리가 이미 첫 문답에 나타난다. “문: 사람의 첫째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첫째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규칙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 나온다는 것인데, 그 규칙은 복음의 내용을 제한시키려는 위험으로부터 가르침을 지켜준다. 인간의 경향은 자기를 중심하고 자신의 구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창조나 교회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아주 간단해도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적 사건을 고백하고 창조와 교회도 언급한다. 또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은 구원사역을 넓게 설명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문답8,9,10) 그리고 말씀과 성례의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교회(문답 89-97)가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교회의 신조, 특히 사도신경과 소요리문답은 교회의 교육을 위하여 잘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4. 교회의 가르침과 신조형성의 이유

정확한 신앙고백이 교회의 교육을 위해 왜 중요한지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교회사에서 잘 나타난다.

사도신경은 그 원형이 이미 2세기의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당시의 목사들도 교회의 교리를 예비신자에게 설명해야 했고 그 요약으로써 사도신경을 사용했다.

예비신자는 그 신조를 외워야 했으며 세례받기 바로 전에 그 신조를 공적으로 고백해야 했다. 세례는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고백할 때에 받는 것으로서 교회의 교육은 이 삼위하나님을 설명하고 사도신경에서 이를 요약적으로 표현했다.

어거스틴은 신조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성경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그 핵심적 내용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잘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받을 신자가 신조를 외우고 확실히 알 때에 성경 내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암기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목사들은 신조의 내용을 넓게 설명했다. 하지만 중세교회에서 점차로 이런 설명이 없어졌다. 외적으로 신조를 외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믿음의 내용이 보통의 신자를 위해서는 너무 어려운 것이니까 신자는 교회가 믿는 것을 외적으로만 알면 된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의 개혁을 시작했을 때 이 중세교회의 악영향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를 보았다. 처음에 신부이었다가 개혁운동에 참여한 목사들 중에 사도신경을 잘 설명하지도 못하고 때로는 잘 암송하지도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때 루터는 그들이 교회의 교리를 설교로 설명하도록 그의 대요리문답을 썼고, 또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소요리문답을 썼다. 아이들은 사도신경 뿐만 아니라 소요리문답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외워야 했다. 왜냐하면 자녀를 포함한 모든 교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고 또 행하시는지를 잘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120년 후에 웨스트민스터 공의회는 유명한 소요리문답을 작성했다. 당시에 이미 교육을 위해 많은 요리문답과 같은 것이 있었는데 왜 또 하나를 만들었는가? 그 이유는 스코트랜드교회과 영국교회 간에 믿음의 통일을 이루기 위함이다. 한 교회가 교육을 위해 이것을, 다른 교회가 저것을 사용하게 되면 교회에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공의회는 네가지 요항을 제시했는데 그 중 교육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요리문답을 ‘통일의 네 번째 요항’이라 명하였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돌이켜 볼 때 다시 세가지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 성경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신경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입교할 때 사람들은 그 신경을 외워야했다.

������. 루터 시대에는 암기만으로 충분치 않음이 나타났다. 교회의 교육을 위하여 교리를 설명하는 요리문답이 필요해졌다.

������. 웨스트민스터 공의회 시대에는 목사들마다 자기 의견대로 교리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그 요리문답의 목적은 교회의 통일이었다.

 

5. 결론 성경의 규칙대로, 그리고 교회가 수세기 동안 이루어 놓은 지혜대로 신앙고백을 교회의 교육을 위해 사용하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신앙의 내용을 불확실한 말로써가 아니라 잘 숙고되고 그리고 교회가 인정한 정확한 말로 표현하게 된다. 그 결과로 신앙의 내용은 신자의 마음속에 정확한 형식을 갖게 되고,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또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교육할 때 개인의 한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목사와 교사도 제각기 기호가 다르다. 그 결과로 신앙교육이 일면에 치우칠 수도 있고, 또 교파내에서도 생각이 다른 다양한 그룹들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신앙고백은 완전한 교리를 제시하니까 교사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 그는 교백을 따라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결과로 가르침을 받는 신자들 가운데도 신앙의 일치가 형성된다.

이렇게 온전한 고백을 따라 세계의 모든 교회의 교사들이 가르치고 교인들이 배운다면 온 세계의 교회 안에 바른 신앙의 일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 참고 사항: 여기에 입력된 글은 전 네델란드 선교사로서 고신대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고재수 교수(Dr N H Gootjes)께서 월간 고신과 몇 잡지에 연재한 글입니다(신앙과 교회교육은「교의 신학의 이론과 실제」디다케 출판사 ). 그분은 지금 Canadian and American Reformed Churches의 교단 신학교인 Theological College of Canadian and Reformed Churches의 교수로 계십니다. 주소는 110 West 27th Street, Hamilton, Ontario, L9C5A1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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