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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신복음주의의 주권주의

by 【고동엽】 2011.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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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와 신복음주의의 주권주의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류호준 원장은 "개혁신학 전통 안에 공존하는 세 가지 유형의 신앙 형태<<"라는 글에서 개혁신앙의 세가지 전통을 말한다. 교리를 강조하는 전통, 경건을 강조하는 전통, 그리고 (사회)변혁을 강조하는 전통이 그 세가지이다. 그 중 마지막 개혁주의의 전통, 즉 아브라함 카이퍼로 대표되는 '변혁주의'에 대해 잠시 살펴 보려고 한다. "개혁주의신학"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주권주의(왕권신학 Dominionism)와 신복음주의에 대해서는 할 말이 조금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신 교단의 이광호 목사의 [칼빈주의와 한국교회<<]라는 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내용이 매우 유익하니 조금 길더라도 (원문도 포함해서) 모두 읽어 보기 바란다.

 

 

신 칼빈주의(Neo-Calvinism)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의 신학체계에 의한 칼빈주의를 일반적으로 ‘신 칼빈주의’로 이해한다. 물론 이러한 경향성은 어떤 형태로든 그 전부터 있어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 신 칼빈주의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카이퍼의 신학사상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기독교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카이퍼의 일반은총론, 하나님의 영역주권,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등이 신 칼빈주의의 일반적인 특성이라 볼 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 이전의 전통적 칼빈주의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폭넓은 신학적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전통적 칼빈주의는 교회 중심적 신학을 전개하는 특색을 띠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주권 역시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구원론과 관련지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 영역을 우주적 보편교회와 시대적 지역교회로 부터 국가를 비롯한 세속적 일반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교회뿐 아니라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시키는 세계관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는 칼빈주의의 중심사상에는 모든 피조세계의 각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교회론적 사고의 틀을 넘어 세상과 세속 국가의 모든 영역에 확장시킨 새로운 신학적 틀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전인격적 신앙인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학적 사고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세상에 대한 공격적인 참여적 사고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여기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아브라함 카이퍼 당시 네덜란드의 전반적인 사회 배경이다. 그 때의 네덜란드는 기독교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국가였다. 따라서 당시 모든 국민들은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런 국가 사회의 분위기 가운데서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 문제에 관한 논의를 했던 것이다. 그런 특수한 시대와 지역적 배경 가운데서 형성된 신 칼빈주의 사상임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우리 나라처럼 전형적인 세속국가에서 그 사상을 그대로 유입하여 적용하려는 것은 억지논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즉 카이퍼가 당시 네덜란드의 정치와 사회 등 각 분야에 관여하고자 했던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 기독교와 무관한 이교적 한국 정치와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면서도 그가 살던 시대와 교회적 배경을 살피지 않아 그의 진정한 신학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한국사회에 어설프게 적용하려고 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국가와 사회를 향한 신 칼빈주의적 신학사상이 20세기에는 미국의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헤롤드 오켕카, 칼 헨리 등의 ‘신복음주의 운동’과 영국의 존 스토트를 중심으로 하는 로잔언약 운동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경우 스스로 보수주의라 일컫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그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즉 한국교회에는 이미 전통적인 칼빈주의는 거의 사라지고 없으며, 칼빈주의라 주장하는 자들은 대개 신 칼빈주의자들이다.

일반은총에 대한 개념 자체는 카이퍼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그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카이퍼 이전의 일반은총 개념은 세상에 대한 적극적 참여가 아니라 도리어 소극적 참여를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회를 위한 사회참여였을 뿐 세상에 대한 참여자체에 대한 값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사회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삶의 원리에 대한 성도의 일반적인 적용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카이퍼는 일반은총의 개념을 세상을 향한 적극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일반은총 개념이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에게 구분없이 허락하시는 은총 개념인데 반해, 카이퍼의 일반은총은 그 개념을 넘어선 것이다.

그는 교회의 구속적 의미를 넘어서 모든 영역에서 요구되는 일반은총의 개념을 주장했다. 다시 말하자면

신칼빈주의 사상에서는 교회가 불신자와 함께 사회정의를 위해 활동할 수 있으며 인간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반은총론에서는, 인간은 신앙과 무관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진선미를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나름대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가 세상을 변혁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신 칼빈주의자들은 전통적 칼빈주의를 이원론적이라 보며, 성속의 구별이나 영육의 차이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기독교가 윤리적 선도를 위한 사회적 책임과 정치 경제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하며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존 스타트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칼빈주의를 자처하는 한국의 다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와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신 칼빈주의 사상은 결국 교회를 세속화에 빠지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변혁을 이야기하면서 도리어 세속에 동화되어 버린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브라함 카이퍼를 중심으로 한 신학 사상에 대항하여 소위 ‘31조파’가 태동이 되고 이 교회는 나중 한국의 고신교단과 자매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에 앞장섰던 신학자는 스킬더(K.Schilder)이다. 카이퍼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한 모든 세상의 선함을 강조하여 일반 사회와 문화 속에 남아있는 일반은총을 통한 기독교 문화회복을 주장한 반면, 스킬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일반은총이 가능하며 문화도 새롭게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 결과 카이퍼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일반 학문의 영역 등 각 분야에서 창조의 선함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스킬더는 카이퍼로부터 분리하여 깜펀 신학교를 설립하여 교회와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앙운동을 강조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한국의 고신교단은 스킬더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교단과 자매관계에 있으면서 스킬더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고 스킬더가 대항했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에 대한 아무런 비판적 이해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변혁을 꿈꾸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가담하려고 한다. 나아가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서도 신 칼빈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 자체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특색을 띠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사회 변혁을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칼빈주의 사상은 외견상 활발해 보이고 세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회 참여적 활동은 성경이 교회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가 아니다

. 한국의 신 칼빈주의를 지향하는 교인들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명선거 운동을 한다든지 일반대학에서 일부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컨닝추방운동’ 등을 전개함으로써 사회개혁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내의 만연한 부정 선거나 신학교에서 있는 ‘컨닝’, 그리고 성도라 하면서 부정행위를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대개 침묵하고 있다. 설령 간간히 음성을 낸다 할지라도 세상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 볼 때 지극히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천국 메시지를 증거했는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말씀으로 영혼을 깨우는 순수한 '복음 전도(evangelism)'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 '세상'에서의 영향력을 더불어 추구하는 '복음화(化 evangelization)'를 주장하는 사상을 흔히 일컬어 신복음주의라고 부른다. 

[신복음주의는 '세상'에서의 기독교(인)의 '영향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리고 이를 위해 (카톨릭을 포함한) 범기독교적인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블로그를 검색하면 신복음주의에 대한 자료들을 더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신복음주의가 (사회)변혁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한국 교회들의 신복음주의화에 대해 우려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실례로, 보수적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사랑의교회는 존 스토트의 로잔언약의 입장을 따르고 있으며, 빌리 그래엄의 신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를 발간하고 있다.

 

위 글에 의하면, 크리스천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변혁시켜야 한다는 그릇된 주권주의/킹덤나우 사상은 아브라함 카이퍼로부터 본격적으로 추구된 것으로 보이며, 이런 흐름은 빌리 그래엄 등의 로잔운동과 풀러신학교뿐 아니라, CCC 등에도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글 서두에서 소개한 문서에서도 아브라함 카이퍼가 풀러신학교의 리차드 마우 총장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했다.)

[복음전도와 복음화의 차이점, 로잔언약운동과 빌리 그래엄, CCC의 빌 브라이트 등의 복음화 운동 참여의 배경에 대해서는

신복음주의와 복음화<<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위 글의 내용 중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빈주의 사상에서는 교회가 불신자와 함께 사회정의를 위해 활동할 수 있으며 인간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수 있다"는 부분은 한번 깊이 따져 볼 만하다. 바로 이 부분에서 에큐메니즘이 치고 들어올 공간이 마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사회정의와 세상의 인간적인 삶을 (불신자와 타종교도들과의) 공동의 목표로 삼는 것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하겠다.

 

(주제 넘은 말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 카이퍼는 (종말의 배교의 두 개의 키워드인) "주권주의"와 "에큐메니즘"이라는 큰 배교의 흐름에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으며, 이에 대해 개혁주의권에서의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까지도 든다.

[주권주의와 에큐메니즘은 적그리스도의 정치통합과 종교통합을 각각 합리화시키는 도구이다.]

 

참고로, 신복음주의 사상은 예수전도단(YWAM)과 CCC를 거쳐서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 운동에까지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신사도 신디 제이콥스와 체 안을 강사로 초청한 어느 (신사도) 영성세미나의 안내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신사도들의 주권주의/킹덤나우 운동에 대해서는 늦은 비의 교설: 킹덤나우<<를 참고하기 바란다.)

 

예수전도단의 창시자 로렌 커닝햄목사와 대학생선교회(C.C.C)의 창시자 빌 브라이트박사는 십 수년 전 하나님께로부터 사회의 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성회복을 통해 변화되어 사회를 변혁하는 주최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통해 전 세계 열방의 추수가 일어날 것이라는 비전을 받았다...이 영역들을 7개의 전략적 산들이라고도 하고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변화시켜야 할 사회의 7가지 영역들로 불려지고 있다...이 일곱가지의 영역은 가정, 교회, 교육, 미디어, 정부, 예술·스포츠, 사업의 영역들이 있으며 이는 각 나라의 문화를 형성하는 영역들이 됐다...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전략적 산지들을 여호수아, 갈렙의 세대로 일어나서 유업으로 취하며 열방의 부흥과 영혼 추수의 군대로 일어나길 희망한다.

어쨌거나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변혁시키시려고 애쓰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은 그대로 마귀의 권세 하에 죄악 가운데 내버려 두시고, 오히려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 내신다. 하늘의 시민으로써 이 땅에서 나그네의 길을 가는 우리는, 우리가 (또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세상을 점령해서 주께 바쳐야 한다는 비성경적 미혹과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복음화로 세상을 바꾸려 말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복음전도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에 관해 TLT<<의 김삼 목사를 인용한다:

우리는 마귀의 메이트릭스 격인 세상의 시스템을 바꿀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은 어차피 세상이다. 거듭난 성도는 하늘에 속해 있고 땅에서는 나그네들이지,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요복 8'23; 17'14,16; 히브리서 11'14),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근본적으로 마귀의 것일 뿐이다(요한서신A=요일 2'15-17을 깊이 묵상해 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한 요한복음서의, 동일 저자임을 기억하라. 요복 3'16).  

 

세상을 변화시키고 정복하려고 애쓴다면, 세상에 속하여 뭔가 세상에서 건질 것이 있어 미련을 둔다는 뜻이 되고 만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부득부득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것인가?
실제로 주권주의자/식민주의자들은 그렇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세상에서 건질 것이 있다면 잃어진 영혼들 뿐이다. 잃어진 영혼들을 구하려고 구태여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질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으로 그 분이 지으신 창조계의 일부인 세상에서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 받아 살며, 잃어진 영혼들을 구해내지만, 그 이상은 세상에서 건질 게 없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거니와,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런 생각도 가져선 안 된다. 그러나 '7 영역 정복' 사상 등 주권주의를 주입/이식 받은 패러처치나 중보기도운동권, 신사도영성권, '목적'영성운동권 등은 그러고들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되뇌지만,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직 복음으로 세상의 영혼들을 변화시킬 뿐이다. 성도라면, 이 점을 결코 착각해선 안 된다. 그러므로 '성시화운동' 따위는 궁극적으로 철저히 비성경적이다.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 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사람이 더러운 채로 내버려 두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요한계시록 22:11 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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