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 26일] 그 신앙인의 용기 (행 4:13~22)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LyVue-GWNp0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4장 13절부터 22절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4장입니다. 신약성경 192쪽, 192쪽, 사도행전 4장 13절부터입니다. 이 귀한 말씀을 봉독할 때 다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을 알고 대적할 말이 없었습니다. 공회에서 나가라고 명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분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노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는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었습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40세나 되었더라. 아멘.
1963년 입니다. 아, 제가 미국의 나바호 미션 기관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영어 공부를 얼마 동안 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한국 사람이라고는 도대체가 한 열 명도 안 됩니다. 그렇게 좀 외딴 곳이었는데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많아요. 그 한 열 명 되는 학생들 열심히 공부하고 정신이 바르고, 또 뭐 실력도 대단히 좋은 그런 청년들이 있었는데, 제가 교육자인 줄 알고 “목사님, 예배드립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모여서 성경 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린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예배드린 다음에 뭐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학문도 어렵고 환경이 다 어려운데 열심히 공부하고 진실한, 참 착실한 기독 청년들이요. 이분들이 제게 진지하게 물어봅니다. “목사님,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꼭 이렇게 살아야만 되는 건 아닌데 이건 정말 힘듭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어려운 곳에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심지어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죠. ‘무슨 팔자가 이 모양입니까? 어쩌다가 이런 팔자가 돼서 이 고생을 해야 되죠?’ 두 번째는 공부해 봐야 그다음이 보장이 없어요. 벌써 와서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딴 사람들이 무려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취직을 하지 못하고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있어요. 공부해 봤자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이거 도대체 공부를 왜 해야 되는지 모르겠대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대요. 미래에 대한 보장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저도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딱 한마디 했습니다. “이 사람아, 시작했으니 끝내. 잘 들어라.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끝내지 못하고 물러서면 패배감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일생 동안 패배감에 시달려야 한다. 알았나? 이유를 묻지 말아. 시작했으니 끝내라.”고 해서 용기를 북돋아 공부를 하게 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이 그의 저서에 **"The Will to Meaning"**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공허감과 무의미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람들은 '존재적 진공 상태' (Existential Vacuum) 여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존재적 진공 상태. 여러분 한번쯤 생각해 보세요. 동물은 인간과 다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릅니다. 동물은 충동적 본능에서 만족합니다. 배고플 때 먹으면 됩니다. 목마를 때 마시면 됩니다. 그저 아무데서나 누워 자고 편히 자면 됩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은 전통과 관습과 가치관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이 내게 본질적인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보세요. 참 용기가 어디 있습니까? 지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식할 때 잘 모를 때 우리는 주저하고 방황하고 걱정하다가 알게 되면 걱정에서 벗어나지 않습니까? 용기를 얻지 않습니까? 지식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지혜도 줍니다. 그러나 꼭 잊지 마셔야 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를 얻게 되면 두 가지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잘 아는 바와 같이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용기가 없어요. 공부 못한 사람들이 용기가 많아요. 무턱대고 고집도 부리고 힘도 냅니다. 아마 공부 많이 한 사람은 그래서 가만히 보세요. 사업을 해도요, 남의 집 비서실장밖에 못 해요. 사장, 회장 이런 분들은 미안하지만 공부 못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그냥 뭐 용기가 있거든요. 이건 무지에서 오는 거죠. 그 많은 지식이 사람에게 용기를 주지 못합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를 얻으면 두 가지를 잃어버립니다. 한 가지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것이 됐다 하고 용기와 지혜를 얻는 순간 두 가지 걱정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를 얻으면서 둘을 잃어버리는 것이 지식입니다.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한다는 거 참 좋은 거 같지만은 이런 존재론적 진공 상태에 비추어 본다면 역시 인간은 약간 무식한 사람이 용기가 있습니다.
또 그런가 하면 돈이 용기를 줄 때가 있어요. 이런 재밌는 말이죠. "장사도 무전불립이면 무안색이다." 아무리 장사를 하더라도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으면은 안색이 변한다, 용기가 없다. 돈은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보세요. 친구를 만날 때 “아이고, 오랜만에 만났네!” 할 때 딱 손 쥐는 순간 생각은 주머니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사람하고 점심 먹을 만한 돈이 있나?” 아, 있으면 “아이고, 반갑네. 점심 같이 하세!” 이렇게 되지만은 돈이 없으면은 “오랜만이구만.” 하고 도망가죠. 반갑지 않아요. 반가울 수가 없죠. 이게 돈의 힘입니다.
역시 그러나 돈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훨훨 날아다니는 거예요.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고 그런 것이 소유의 문제입니다. 또 하나의 용기가 있습니다. 건강입니다. 여러분, 병들면 용기가 없습니다. 누구든 용기가 있을 수가 없는데 건강하면 건강한 만큼 용기가 있지만은 이거야말로 보장할 수 없는 겁니다. 누구도 건강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저도 이제 90이 넘으면서 생각합니다. 이만하면 건강한 편이죠. 그러나 이제는 아니에요. 건강의 그것이 보장할 수 없는 것이요.
또 그런가 하면 명예라는 거 있죠. 명예라는 것 대단히 높이 봅니다만 정말 무상한 게 뭐지 하면 명예입니다. 오늘 아침의 명예가 내일은 부끄러움으로 뒤바뀌는 것을 우리가 매일같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또 그런가 하면 업적입니다. 업적이라고 하는 것처럼 무상한 게 없습니다. 다 부끄러움으로 사라지고 있고 명예라고 할 것이 없고 업적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러면 이 모든 것은 용기에 근본이 되지 못합니다. 용기란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베드로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나타납니다. 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수제자이면서도 부끄럽게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 십자가의 고통이 다가올 때 예수님을 부인했는데, 그 삼중 부정이라고 합니다.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저 모른다고” 부인하고, “모른다고” 맹세하고, “모른다고” 저주하지요. 아, 참 있을 수 없는 그런 실수를 했죠.
그러고 보면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만나 보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이고 나는 나고 어떡하겠어요? 그래서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갑니다. 그 성경을 보면 아주 참 비참합니다. “내가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도 “나도, 나도.” 하고 일곱 제자가 따라갑니다. 이 또한 비참한 겁니다. 아주 무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필로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때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말씀하십니다. “아가페로 네가 아가페 사랑을 하느냐?” (필로스) 참 안타까운 얘기입니다. 사랑을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어디 여기 물고기 잡으러 왔냐? 이게 사랑이냐? 내 양을 먹이라.”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그 시간이 되어서 기도하러 올라가는데 문간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가 있어요. 그 사람은 직업적인 거지예요. 왜냐하면 앉은뱅이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으니까 매일같이 여기 앉혀 놓으면 하루 종일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구걸하세요. 구걸하세요.”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좀 도와주면 그걸 먹고 사는 이런 사람이에요. 그건 소문난 사람이고 모두가 다 아는 전형적인 거지예요.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딱 지나가니까 마찬가지죠. 똑같은 습관적인 방법으로 손을 내밉니다. “구걸하세요. 적선하세요.”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합니다. “금은 내게 없거니와”까지만. “당신이 달라고 하는 금은 없어, 은도 없어.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 말까지만 할 때 아마도 이 앉은뱅이가 실망했을 거예요. 한 푼 줄 줄 알았는데 없다니까. “그럼 지나가. 누가 뭘 하나. 나 원망하지 않아. 수많은 사람이 그냥 지나가는데 당신도 그냥 지나가세요.” 하는 그런 자세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 엉뚱한 얘기가 들어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 내게 있는 것,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그리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벌떡 일어납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고 한평생 앉은뱅이로 산 사람인데 벌떡 일어나 아, 놀랐겠습니까? 내가 늘 그런 생각을 해 봐요. 앉은뱅이가 놀랐을까, 베드로가 놀랐을까? 내 생각에는 베드로가 더 놀랐을 것 같아요. ‘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더구나 내가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 부르자마자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죠?’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성경, 사도행전 4장부터 쭉 읽어 보면요, 이 사건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이 됩니다. 이 표적 때문에 교회가 기초를 놓고 주의 권능과 함께 이루어지는 교회의 위상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성경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거기서 용기를 얻는 거예요.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어디까지, 이제는 순교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십자가를 져도 상관이 없다. 왜요? 이걸 보았으니까. 이 능력을 보았으니 이 표적을 보았으니까. 그것이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된 초석입니다. 이걸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자, 그런데 본문이 나타나는 대로 이 사람이 용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며 베드로와 요한을 생각하면서 봅니다. 여기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말함을 보고 그들이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알고.” 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사람 별 사람 아니에요. 갈릴리 어부예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됐느냐? 여기 ‘학문이 없다’ 하는 말을 아그람마토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 **‘그람마’**란 말이 **‘글’**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이 문맹, 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본 거예요. 이런 아그람마토이 정도의 그런 사람으로 여겼는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담대하게 너희가 판단하라.” 이런 사람인데 아, 굉장한 용기입니다. “담대히 말함을 보고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
자, 여러분 이 용기가 어디서 온 겁니까? 거기 설명이 따라 나옵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알고.” 예수로부터 와요.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이 사람, 그것밖에 없어요. 무슨 공부를 많이 했다든가, 돈이 있다든가, 건강이, 지혜가 있다든가, 권력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것. 예수의 제자요, 예수로부터 배워서, 예수님 말씀하세요. “내게 와서 배우라.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을 3년 동안 배운 사람이에요. 그것이 오늘 여기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봐요. 아무래도 누구한테 배웠느냐가 중요해요. 우리 교인으로 말하면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 중요해요.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주 중요한 거예요. 한번 삐끗 잘못되면 엉뚱한 것으로 가죠.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웠다. 이 사람 예수님의 제자예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했어요. 그의 제자예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알고.” 예수를 만나고, 예수에게 듣고, 예수를 경험하고, 예수와 함께 3년 동안을 제자로 살았어요. 바로 그런 사람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이 객관적 사건만이 아니에요. 부활함 말미암아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그 심령 속에 부활이 있는 거예요. 부활 신앙이 생기는 거예요. 부활 사건에 부활 신앙이 따라가는 거예요. 그것이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이 같은 일이 그 증거가 이 시간에 표적으로 나타났어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다. 아, 굉장한 사건이죠. 이거는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어요.
이건 은사적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내가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했는데, 예수를 부인하던 사람인데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오늘도 나와 같이 계시어 내 기도를 통해서 응답이 있고 내가 예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예수의 생명력이 여기 나타난다.’ 깜짝 놀랍니다. 베드로 자신이 크게 놀랐어요. 그 놀람이 용기로 바뀝니다. 용기가 대단합니다. 자꾸만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 마라. 이 사람에 대해서 말하지 마라. 이 사건에 대해서 말하지 마라.” 베드로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들어야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대단한 용기입니다. 이건 정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그 용기가 나타납니다. 이게 베드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가 판단하라.” 큰 용기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베드로가, 옛날에 주님을 부인하던 주의 제자로 살면서 잘못한 거, 옛날 얘기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선택적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셔서 나를 통해 역사하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의 능력,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오늘 여기서 증거로, 표적으로, 경험적 표적으로 나타났다. 볼 수 없는 것이 볼 수 있게 실제로 경험되는 것을 생각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능력의 사람으로 선택해 주신 데 대한 용기.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어.’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 그가 예수를 핍박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사도 바울과 함께 하세요. 그걸 선택했어요. 이 선택적 교리,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고 하시고자 하시는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할 때 용기가 나오죠. 바로 이게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성령이 함께 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거, 그거를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한 사람으로 베드로가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어떤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 부활 신앙, 부활 신앙을 근거로 한 용기가 있는 거예요. 이 용기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어요. 그 죽음도 막을 수가 없어요. 환난도 막을 수가 없는 큰 용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용기는 과거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서 오는 겁니다. 영원한 약속에서 오는 겁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고 어떻고 아무리 해 봐야 거기서 용기가 생산되지 않습니다. 앞에, 앞에 있는 약속, 앞에 있는 영원한 약속을 바라볼 때 용기가 있으니 바로 순교자의 용기요, 사도들의 용기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또 용기 있는 사람 하나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요셉이 형님들이 노예로 팔아서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보디발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종노릇을 합니다. 그 종 된 때가 자세히 성경을 보니까 한 17살이 되거든요. 거기서부터 30세까지요. 그 사이에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데 하도 성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하다 보니까 이 사람은 감시할 필요도 없고 다시 뭘 물을 필요도 없어요. 너무 지혜도 많고 하기 때문에 보디발이 온 재산을 다 맡겼습니다. 온 권력을 다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보디발의 아내가 옛날에 풍속이 다 그랬으니까 이 청년, 능한 청년, 아주 능력이 있는 이 요셉에게 반했어요. 자꾸만 붙들고 말하자면 요셉 더러 사랑하자 그러는 거예요. 계속 붙들고 가니까 안 된다고. 마지막에 안 된다. 그 마지막에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안 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라고 할 때 보디발의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님은 우상,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거기 우상이 있어요. 우상이 이렇게 한쪽에 있으니까 자기가 치마를 벗어서 거기다 갖다 씌워 놓고 “보라고, 못 보지 않냐고. 그러니까 괜찮다.” 그때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이게 전설에 있는 얘기입니다. “당신들이 믿는 저 우상은 못 보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런 고로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일을 할 수 없노라.” 그래요. 바로 그 때문에 그가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야말로 억울한 겁니다. 정말 생억울한 겁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을 하지요.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총리가 됩니다.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하지만 두고 해 보세요. 요셉이 가진 이 용기가 어디서 온 겁니까? 오직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때문에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능력을 가지는 권세자 가 되기도 했습니다.
로마에는 원형 극장이 있습니다. 지금도 흔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끌려 들어가서 기독교인들이 순교했습니다. 그 원형 극장의 그 대기실에, 그 벽에 사람들이 순교하기 전에 벽에다가 이렇게 글을 써놨어요. 글을. 그거 써놓은 것이 많은데 그중에 하나 유명한, 소위 원형극장의 순교 유작이 있습니다. 뭐라고 썼느냐? “나를 저주하시오. 당신들이 저주하면 갈수록 나는 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낀다. 나에게 침을 뱉으시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느낀다. 나를 찌르시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들의 먹이로 던지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워 버리세요.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들의 증오를 녹일 것입니다.” 이렇게 벽에 써 있어요. 순교하는 사람의 마음은 용기가 있습니다. 담대함이 있습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용기가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뿐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믿고 성령의 능력에 힘입고 사는 사람은 세상과는 관계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 관계없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용기가 있습니다. 왜요? 표적이 있잖아요. 매일 표적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표적을 확인하면서 용기의 신령한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도 저희들을 주의 전으로 불러 주셔서 침체에 빠지고 나약하고 실망하고 지친 저희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회복할 수 있는 귀한 은혜의 시간 주심을 감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저렇게 좌절되었다가 표적을 보며 주의 능력을 보며 새로운 용기의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도 신령한 용기에 살고 영생 지향적 용기에 살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경험적 신앙의 용기가 우리에게서 솟아나게 하옵소서. 결코 비겁해지지 않게 하시고, 나약해지지 않게 하시고, 어리석은 자로 살지 않게 하시고, 믿음의 사람, 용기의 사람,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그 위대한 용기를 오늘도 증거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시된 글은 사도행전 4장 13-22절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진정한 용기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는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 목격한 청년들의 고뇌, 그리고 지식, 돈, 건강 등 인간적인 용기의 근원의 한계를 대비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과 부활 신앙,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용기가 참된 용기의 원천임을 강조합니다.
1. 🔍 본문 말씀 (사도행전 4:13-22)의 배경과 교훈
-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 공회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 없는 일반인(아그람마토이)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공회원들은 놀랐습니다.
- 용기의 출처: 공회원들은 그들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을 알고 더 이상 대적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용기는 세상적인 지식이나 배경이 아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표적과 증언: 이미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앉은뱅이를 고친 명백한 표적 때문에 공회는 이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 담대한 거절: 공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확신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2. 💪 인간적인 용기의 한계
화자는 미국의 나바호 미션에서 만난 한국 청년들의 고뇌, 즉 왜 고생해야 하는지, 미래에 대한 보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언급하며, 인간이 느끼는 **'존재적 진공 상태' (Existential Vacuum, 실존적 공허감)**를 지적합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용기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한계를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 지식 (Knowledge): 지식은 용기와 지혜를 주지만, 하나를 얻으면 두 가지 걱정을 낳습니다. 심지어 지식이 많은 사람이 오히려 용기가 부족할 때가 많다고 말하며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 돈 (Money): 돈은 일시적으로 용기를 줄 수 있지만, **"훨훨 날아다니는 것"**처럼 믿을 수 없고 무상합니다.
- 건강 (Health): 건강할 때 용기가 있지만,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며 나이가 들면 그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 명예와 업적 (Fame and Achievement): 명예와 업적은 대단해 보이지만 가장 무상한 것으로, 금세 부끄러움으로 뒤바뀔 수 있습니다.
3. ✨ 참된 용기의 원천: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의 과거 실패와 극복을 통해 진정한 용기의 원천이 제시됩니다.
- 과거의 좌절: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부활을 목격한 후에도 다시 고기 잡는 일(갈릴리)로 돌아가는 등 나약함을 보였습니다.
- 주님의 회복: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며 그의 사랑을 확인시키고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 기적을 통한 경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을 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이 능력을 경험하며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임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 참된 용기의 근원: 베드로의 용기는 **"예수와 함께 있던 것을 알고"**라는 말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배우고, 경험하며 얻은 것입니다.
4. 🌟 성령 충만과 미래 지향적 신앙의 용기
- 선택적 은혜와 성령 충만: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여 역사하신다는 선택적 은혜를 감사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통해 역사하심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 부활 신앙의 용기: 이 용기는 과거의 실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 신앙에서 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근거로 하는 용기는 어떤 고난이나 죽음도 막을 수 없습니다.
- 요셉과 순교자의 예:
- 요셉은 억울한 감옥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고 마침내 총리가 되었습니다.
- 로마 원형 극장의 순교자들은 증오와 고통 속에서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이라 외치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담대한 용기를 가졌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세상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매일 경험하는 신령한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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