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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

by 【고동엽】 2022. 1. 3.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고린도전서 13:11

 

우리는 모두 어린시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시절은 단순한 인생 과정의 때가 아니고 훗날 생각해보면 어린시절에 받았던 영향이 일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린시절의 성장과정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은 좋든 나쁘든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우리 외모가 거의 부모와 비슷합니다. 성격, 생활습관, 우리 속에 흐르고 있는 혈통, 기질은 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 느끼는 것은 아버지께서 했던 모습들이 나에게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는 어린시절에 형성된 나가 숨어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어린 아이를 내재적 자아, 과거의 어린 아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른 속에 들어있는 어린 아이가 있고, 지금 현재 신체적으로 소년기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에는 현재 자라는 아이가 있고 부모속에 내재된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결국 지금 어린 아이를 향해서 가르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어린 아이입니다. 그 어린 아이가 현재 어린 아이를 지배하고 또 다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반복된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놀라운 일입니다.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모든 영향은 우리가 지금은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도 그대로 잠재되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년기를 지배했던 형상이 평생의 삶의 스타일과 의식구조를 결정하고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내 모습이 있고, 또 그 모습을 자녀들에게 반복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어른들의 아버지다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말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의 성장해 온 어린시절을 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결국 어린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삶의 현장을 자기들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어린 아이를 찾아내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우리가 성장해서 어른이 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른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어른처럼 행세하면서 아이들을 구박하고, 아이들을 혼내고, 아이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은 제 속에 있는 어린아이의 근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셨던 순수한 형상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 받은 영향으로 잘못 형성된 것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대한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

많은 사람들은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어렸을 때 받았던 나쁜 습관과, 성격과, 어떤 인간성을 가지고 그대로 일생을 살면서 자기도 괴롭고 함께 사는 사람도 괴롭고 이 역사도 괴롭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의 장에서 왜 이 말을 했습니까? 당시에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도 했습니다. 예언도, 능력도 행했습니다. 그리고 통변도 했습니다. 많은 지식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서 신앙의 유치한 면을 보고 있습니다. 저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것처럼 방언을 하고, 치유의 은사도 있고, 능력도 나타나는 면이 있었지만 신령한 것을 행하는 반면에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너무도 유치했습니다. 저들은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신령한 방언을 하면서도 남들과 대화할 때는 남의 흉이나 보고, 비난하고, 유치한 소리를 하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말하는 것이 어른과 같이 된 것 같지만 어린 아이의 말을 하고 있구나라고 했습니다.

또 저들이 영분별을 합니다. 전혀 알 수 없는 신령한 통변을 합니다. 깨닫는 것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것도 탁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어린 아이 같으냐는 것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많이 깨닫고 저들이 놀라운 말을 하는데도 전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교회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때는 하늘로 올라갔는데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보니까 간단하게 넘어갈 것도 이해를 못해서 다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남들 속에 있는 생각까지또 꿰뚫어볼 수 있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사소한 생각으로 분난하고, 분쟁하고, 서로 싸우는 것을 볼 때 사도 바울이 너희는 말하는 것도 어린 아이요, 깨닫는 것도 어린 아이요, 너희가 생각하는 어린 아이요, 너희가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말하고, 놀라운 하늘의 신비한 비밀을 말하고, 방언을 하고 있지만 유치하다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의젓하게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볼 때 다 천당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전혀 변하지 않은 자아,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전혀 우리 속에 변하지 않은 어린 아이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인 마실라인은당신의 과거의 내적아이라는 고전책을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과거의 내적 아이는 가정에서 자주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넥타이 매고 근사하게 앉아있으면 누가 압니까 그런데 자기만이 알고 있는 고쳐지지 않는 내적인 존재가 때때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산다고 말하지만 마음의 상처와, 과거의 내가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어야 될 것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들과 함께 진실하게 내적인 자아, 성년 아동을 치유하는 시간으로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린시절에 치료되지 않은 인간성을 성년 아동이라고 말합니다. 신체적으로 성년인데 이 속에 아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일을 버렸노라는 말의 헬라어 카타르게오라는 말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완전히 내어버린다, 끊는다, 또는 묶어놓은 것으로부터 풀어놓는다라는 뜻입니다.

어린시절 일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내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린 아이의 일이 낙엽이 지듯이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이것은 끊임없는 노력과 은혜를 받아야만 됩니다. 그래야 내 속의 어린 아이가 물러갑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어린 아이와 같은 나쁜 성격들이 다 버려지기를 바랍니다.

왜 성인속에 있는 아동을 고쳐야 하느냐? 그것은 자신의 인격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자라야 하거든요. 외모는 성장했는데 내 속에 어린 아이가 숨어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저는 최근에 내적 치유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 어린시절의 내가 그대로 숨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수십년을 살았구나!’ 하는 것입니다. 현재 내 성격이라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하여 우리에게 끼친 영향들이 모아진 하나의 작품들입니다. 기질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며 그것이 각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체질은 우리가 손댈 수 없지만 성격은 고쳐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격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작품입니다. 잘못된 성격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사람에게 주신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상처로 잘못되어진 성격, 부모들이 잘못 만들어준 성격, 자기가 어렸을 때 자라면서 잘못 형성된 성격, 이것은 은혜로 고쳐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살면서 내 성격은 이래그럽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각각 형성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성격에 고쳐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속에 내재된 아이들, 자라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가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목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신학을 했고, 박사고, 그래서 훌륭한 것 같은데 신학교 교수들이 사소한 것 가지고 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 아이 아닙니까 이해를 전혀 못합니다. 자기는 다 어른이 된 줄 알지만 이 속에 어린 아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를 보십시오.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잘 거느려서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이 속에 어린 아이와 같은 것들이 있어가지고 날마다 사소한 것 가지고 수라장을 만들지 않습니까 그것이 다 어린 아이가 치유받지 못해서 그럽니다.

두 번째로 성인 아동을 왜 고쳐야 되느냐?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부부들이 학력이나 재능이나 외모로 봐서 훌륭한 것처럼 보이지만 꼭 집에 가서 사는 것을 보면 어린 아이같이 다투고 있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높은 수준의 공부를 했으면 높은 수준에서 근사하게 살아야 할텐데 근사하게 못삽니다. 성인 아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남자는 유학도 갔다 오고,. 사회적으로 지위도 있는데 집에 가서 제 아내에게 욕설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들 가운데 부인에게 욕설하는 분, 손찌검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대학 나오고 쟁쟁한 사람인데 저 짓을 한단 말이야또 못된 부인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오래전에 한 부부가 있었는데 사회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높은 학력, 외모가 아름답고, 훌륭한 가문의 부인을 모시고 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실업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에만 가면 부인에게 화를 내고, 때로는 손찌검도 하고, 그래서 부인이 견디다 못해서 집을 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와서 상담을 하는데 목사님, 나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내 아내를 봐도 훌륭한 아내입니다. 그런데 집에만 가면 공연히 신경질을 내고 애정도 표시 못한채 이상한 성격이 나타나가지고 결국은 제 아내가 나가버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볼 때 문제가 어디에 있었느냐? 현재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어린시절에 형성된 인간성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어린시절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당신의 가정환경은 어떠했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저희 아버지가 늘 술만 먹으면 저희 어머니를 때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들어오면 우리 어머니와 우리는 벌벌 떨고 무서워했죠. 우리 어머니가 맞을 때마다 제 가슴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치유하지 못한채 자기도 모르게 느닷없이 그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그 상처들이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연히 만만한 것이 부인이거든요. 가까운데서 자기 감정이 표출됩니다. 이것이 소년기에 잘못 형성된 감정의 표현들입니다. 이것 치유받아야 됩니다. ‘내 성격이 원래 그래그것은 안될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이것을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술 끊고 담배 끊는 외형적인 행위도 있지만 내재적 자아, 감추어진 자아, 남도 알고 나도 알고, 남들은 아는데 나는 모르고,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깊은 인간성이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이것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찾아내어서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속에 있는 성인의 아동을 치유해야 되느냐? 이것은 자녀교육을 위해서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른이 되어야만 아이를 교육할 수 있는 것이지 나도 어른이 못된 처지에 어떻게 어린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겠습니까 내 속에 있는 어린 아이가 표출되면 어린 아이에게 상처만 줄 뿐이지 교육이 안됩니다.

저는 요즘 제 자신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는데 저는 어린시절에 아버지와 전혀 대화를 못한채 자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무섭고, 두렵고, 말을 하면 계속 호령하는 음성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대화를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제가 나눈 대화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사람들과 만나면 대화를 잘 못합니다. 대화를 못한다고 하니까 말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제하는 대화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제가 이것이 잘못된 성격이라 고쳐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잘 안되니까 제대로 못고쳐가지고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나보다 윗 어른들에게는 입이 더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나오라고 그러면 안나가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 몸도 물론 피곤했지만 제가 한신교회를 개척하고 전혀 아이와 대화를 잘 안했습니다. 며칠 전에 영국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이야, 내가 요즘은 내적인 내면적 자아 치유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있다.” 그랬더니 답장이 이렇게 왔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내면적 자아 치유에 대한 책을 읽는다고 하니까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사실은 제가 아버지에게 이 기회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어린시절에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지 못해서 내적인 상처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나와 함께 대화하지 아니하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너무 피곤에 지쳐 있으니까 말도 안하고 방에 들어가고 엄마는 방문을 닫아주면서 아빠에게 접근하지 말아라 너무 피곤하시다.’ 그래서 대화를 일절 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나의 내적인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도하면서 치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제가 그것을 읽으니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어린시절의 자아와, 가정에서 성숙하지 못한 아버지로서의 아동적 아버지, 그것이 아들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쳤구나그래서 제가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교육상 문제가 되는구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시절에 전혀 아버지와 상담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너 어느 학교에 갈래, 학비는 어느 정도 냈냐, 어디 아프냐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병이 들어 있어도 어디 아프냐는 말 한마디 안했습니다. ‘졸업하는 날이 언제냐, 학교는 어디로 가느냐그런 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대로 나옵니다. ‘너 공부하는 것은 네가 알아서 해라 어느 대학이든지 가고 싶은대로 가라 가기 싫으면 말아라

내가 아버지에게 전혀 그런 말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어도 여기까지 왔지 않느냐이것이 내 속에 자아로 형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무관심하고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저도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똑같냐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무언중에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녀교육을 시킬 때 가장 큰 문제가 뭐겠습니까? 부모로부터 받은 그것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다 상처들이 있고, 아물지 못한 흔적이 있으며, 우리 속에 감추어진 내면적 자아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들추어보면 ,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열등의식이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리 공부를 해도 더 노력하라고 책망만 받고 자란 아이들은 끊임없이 속에 불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성취하지 못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적 실패자라고 말합니다. 항상 나는 실패했다는 성공적 실패자로서의 불만이 그 속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분노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깊은 분노가 숨어 있습니다.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부모의 지나친 훈계 때문에 속에서 반항심이 싹튼 아이들은 가출하든지 아니면 있기는 있지만 이 속에 표출되지 않은 반항심을 가지고 도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강압적인 부모에게서 받는 어린 소년의 형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존적 아이가 우리 속에 숨어있습니다. 어린시절 부모의 지나친 과보호가 나약한 의존적 성격을 형성해 왔다는 것입니다. 막내 아이들, 외아들, 너무 너무 보호해 주었습니다.

한 번은 유치원 아이가 세면을 하고 나서는 그래요. “선생님, 얼굴 닦아주세요.” “네가 닦아라” “나 못닦아요.” “너 손 있잖아” “저는 항상 우리 엄마가 닦아주는데요.” 이런 아이가 장성해서 결혼하면 여보 얼굴 닦아줘그러고 늙으면 아이야, 얼굴 닦아라그럴 것 아닙니까 이런 남자 만나면 그 부인은 일생 힘듭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도 아이의 요구대로 달라는대로, 사달라는대로 다 사주니까 낭비형이 되었습니다. 이런 남편과 아내 만나면 큰 일납니다. 오늘날 제 분수에 안맞게 빚지고 사는 사람들 보십시오. 전부 이런 형태의 어린 소년기가 그 속에 싹터있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아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일찍이 떨어져서 자란 아이들,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 조실부모 하고 친척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고독형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자학적인 아이가 있습니다. 이런 아이는 거부형의 부모 슬하에서 자란 사람들인데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거절당하는 자신의 자멸감이 깊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학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 근성, 어린시절에 형성된 자아가 내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성인은 되었는데 그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치유해야 됩니다. 이것이 내 성격이라고 내버려두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 속에 이런 것이 발견될 때는 이것을 찾아서 고치시기 바랍니다.

어린시절에 부모로부터나, 친척으로부터 받은 말할 수 없는 상처들, 상처 중에서도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상처들, 또는 어린시절에 받았던 어떤 충격들을 우리는 기도중에 상처를 치유해서 자기 인격적 성숙의 노력을 해야 됩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물려진 죄성을 파악하고 이것을 극복하고 대를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

아브라함에게 왜 그랬습니까?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 섬기는 죄, 내 혈통에 흐르는 악한 것들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대를 이어서는 안되고 대를 단절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 많이 먹는 사람들의 술 알코올의 중독성이 자식에게 유전되고, 도적질하고, 음란하고, 아버지가 외도한 가정은 아들도 외도할 가능성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종합검진 할 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뭡니까? “당신의 부모가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습니까? 혈압입니까, 암병입니까, 결핵입니까이것을 묻습니다. 이것은 유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합니까?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20:5). “하나님, 무슨 원한이 져서 자손 삼사대까지 죄를 물려줍니까?” 아버지의 사악성이 자손 삼사대까지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자기도 모르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범죄로부터 가져온 병도 삼사대까지 물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악한 부모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에게서 끊어내야 합니다.

나의 시대의 불의와 악과 나쁜 습관을 끊어서 이제 다른 세대의 자녀들에게는 이 저주의 끈꾼을 물려주어서는 안됩니다. 태중에 있는 아이도 최근에는 연구 결과가 태중에 있는 아이도 알고 있다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태중에 있는 아이도 다 안다는 것입니다. 태중에 있는 아이에게 어머니의 성격이 그대로 전수되고 있습니다. 부부가 싸우면서 자라난 아이는 정신적, 육체적 장애가 화목한 가정보다 두 배 반이 나쁩니다. 성격상 장애는 다섯배나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는 밤에 기분 좋아서 잉태된 아이는 성격이 명랑하고 싸우고 잉태된 아이는 성격이 괴팍하다고 그럽니다.

만약에 임신한 부인이 있다고 한다면 절대로 열내지 마십시오. 임신한 며느리에게 눈 흘기는 시어머니는 큰일납니다. 아이에게는 한 인간에 대한 창조의 신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 독일에 술고래가 된 요크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술로 헤매다가 술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 후손을 조사한 결과 834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거지가 142, 매춘부가 142, 사생아가 109, 양육원에 신세진 자가 304, 범죄자가 76, 그 중에 살인자가 7명이나 되었다고 그럽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 아이 일을 버렸노라이 내재적인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현재 자기 자신을 원망하거나 성격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고 이것을 극복하는 수용성을 가져야 됩니다.

저는 한가지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부모님과 대화를 잘 안해서 대화가 안되니까 다른 방법으로 출구를 찾았습니다. 공부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실력을 길렀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이것은 목사로서 내 인생을 성공시켰습니다. 큰 성공은 못했어도 내 나름대로 이것을 승화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때 환경이 자기를 어렵게 만들 때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하지 말고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이다.”(50:20)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형들의 모든 과거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절대적인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현재 자기 존재를 그대로 은혜로 수용하면서 좋은 방향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을 통해서 내 속에 있는 성년의 어린 아이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시키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변화시키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우리 모두 다 자신을 별세시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로 날마다 날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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