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천국의 신비/에베소서 5:31-33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31-32절)
왜 부모를 떠나는가? 그것은 부모를 떠나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는 세상을 떠나서 예수를 만나는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만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면 내가 그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관계, 아들의 관계, 신부의 관계가 있는데 이 세 관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내가 종이 되어서 일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일의 관계입니다. 충성하고, 섬기는 관계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충성된 종으로서 상도 받고, 면류관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 내가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됨의 권세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를 받아서 천국에 가는 유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시고 사랑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행복을 얻는 관계입니다. 종으로 일할 때는 삯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아들로 믿게 될 때는 거기에서 유업을 받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랑 신부의 관계가 되면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서 행복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인 만남을 이룹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명령의 관계고, 순종의 관계며, 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도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보호의 관계이며, 돌봄의 관계이며, 유업을 받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서로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기에서만 진정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의 단계를 보면 처음에 하나님을 만날 때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만나서 주인에게서 무엇을 얻습니다. 또 도움을 받습니다. 조금 더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는 위대한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서 마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고 교제하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연합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종이고, 모세도 종이며, 여호수아, 이사야 모두 종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연합하듯이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신랑 신부의 관계로 일생을 살 듯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의 심령속에 하늘의 천국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1-33절)
먼저,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연합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통을 상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형상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고 창세기 1장 27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자 혼자만의 형상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만날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내게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남녀의 연합은 결국 신비한 비밀인데 천국의 즐거움, 기쁨을 땅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비하게 봐야 합니다. 부부의 만남은 남녀의 성적인 만남이며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우리의 성이 그 인격을 표현하는 도구라면 부부는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일대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우리가 회사에 가서 사장과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권위상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일대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호자의 입장에서 자녀는 약한 존재로 섭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일대일의 존재는 안됩니다. 빈부, 학력, 인물, 모든 것에서 비교되는 차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는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는 유일한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대일의 인격으로 만나는 것은 부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 있는 아내는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남편도 그 아내 앞에서 일대일의 인격적 존재의 존엄성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존엄성이 깨질 때는 그 가정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마이크 메이슨이라는 사람이 쓴「결혼의 신비」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가정생활의 고전적인 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듯 진정한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됨의 신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의 신비에 이르듯이 남녀의 교제만이 하나님과 하나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부부의 관계로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25절에 보면 부부가 연합하기 위해서 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기 전 존재를 진실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또 연합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최상의 헌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의 만남은 진실과 헌신입니다. 이 이상의 헌신이 없습니다. 이 이상의 진실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 존재를 벌거벗은 존재로 진실하게 내놓아야 되며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듯 헌신하는 것은 이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 7:3-4절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연합을 위해서 자기 존재를 내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함께 잠을 자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남편은 건너방에서 따로 자는 것, 이것은 성서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집안에 서재를 꾸며놓고 혼자 거기에서 연구하고 잠자는 것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연구했으면 잘 때는 같이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건강상의 이유나 특별한 기도를 위해서라면 허락을 받고 하라고 성서가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이 12시에 철야하러 왔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했더니 아이 대학 진학을 위해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어서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백일기도는 새벽에 해도 됩니다. 자식 대학가는 것 가는대로 내버려두어야지 백일기도 한다고 떨어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실력없는 것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주무시죠.” 자야 할 자리에 가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라고 제가 집으로 보내드린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부는 서로 존경과 사랑으로 연합해야 됩니다.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33절)
인생이 육체가 연합되었다고 그것으로 일생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도 쇠합니다. 정욕도 갑니다. 육체의 연합도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견고한 연합만이 일생을 강한 끈으로 연합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이런 글을 읽고 혼자 웃었습니다. “아내가 예뻐보일 때...” 이런 제목의 글인데 20대 후반은 남편을 위해서 예쁜 아기 낳아줄 때 아내가 예뻐보이고, 30대 후반은 좋은 집에 못산다고 불평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아내를 볼 때 예뻐보이고, 40대 후반은 “당신 건강해요. 건강해야 되요” 하면서 보약 다려줄 때 예뻐보이고, 50대 후반은 “당신은 참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칭찬해 줄 때 아주 예뻐보이고, 60대 후반은 ‘당신과 살아온 생은 참 행복한 삶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싱긋이 웃어줄 때 예뻐보이고, 70대 후반은 조용히 “우리가 죽거든 양지바른 곳에 함께 묻힙시다.” 하면서 주름잡힌 얼굴로 쳐다볼 때 아주 예뻐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공통점이 있었는데 남자는 늙어서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당부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편을 존경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줄 때 남자들은 아내가 가장 예뻐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도 남편을 무시하면 정이 뚝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날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남편을 자꾸 세워주면 어떤 여자도 포근한 가운데 예뻐보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남편도 훌륭한 가문의 남자였고 부인도 명문대학을 나온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남편은 그 부인에게서 포근함도 느끼지 못하고 항상 지적만 당하면서 기죽어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지지리도 못난 여자와 눈이 맞아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부인이 목사님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정말로 자존심이 상합니다. 잘난 여자와 도망갔으면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겠습니다. 천하에 못생기고, 배운 것도 없고, 가문도 형편없는 여자와 도망갔으니 너무 창피합니다.” 할 때 목사님이 “나라도 도망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부인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해서 남편이 거기 붙어있을 수가 없어서 도망갔습니다.
남편을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아내가 순종해 준다는 얘기입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래에서 받들어 준다,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것이 있어도 남편 앞에서만은 감추어야 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똑똑한 것을 아무리 나타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만은 ‘똑’ 소리가 싹 사라지고 ‘덕’ 소리만 나야 됩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해서 남편에게서 ‘똑’ 소리가 나면 남편이 그때부터 기가 죽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어서 땅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을 품어야 되는데 하늘이 좁아지면 땅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품어야만 되기 때문에 품을 곳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 목사가 있는데 친구 목사는 외모가 외소하고 부인은 헤비급입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 부인은 쑥 올라오고 남편은 쑥 내려갑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와서 하는 말이“우리 식구는 얼마나 태산처럼 헤비급인지 안을 수가 없어”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자네가 하늘인데 하늘이 안아야지 땅이 안아서야 되겠어 땅이 안으면 거꾸로 되어서 뒤집어지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언제나 여자는 땅처럼 남편은 하늘처럼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의 신비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똑똑한 부인 있습니까 너무 똑똑한 척 하지 마십시오. 똑똑한 척은 세상에 나가서 하십시오. 가정에서는 똑 소리를 죽이십시오.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다윗은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미갈은 사울 왕의 딸로 왕가의 공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차이가 너무 많습니다. 가문, 교육, 배경, 인생관, 취미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정략적으로 다윗과 미갈을 결혼시켰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너무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고 기뻐 뛰노느라고 옷이 벗어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삼하 6장 16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미갈이 이것을 보고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출신이 그런 사람이야 왕 이 체통도 없이 벌거벗고 춤을 춰’ 하면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멸시하면서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올 때 멸시하는 투로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엽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 6:21-22)
이 말이 떨어지면서부터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별거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죠. 다윗이 아내 미갈로부터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후로는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후에 밧세바를 만나게 됩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이 뭡니까? 바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데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20년 길러놓은 남자를 다른 남자가 20분만에 망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편을 세워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순종을 명령하신 것은 남편을 세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것은 자기 존재가 주님을 만난 천사같이 되라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지아비 부(夫)자는 하늘 천(天)에서 조금 솟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남편을 하늘보다 높이 받들라는 말입니다.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면 자기도 하늘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자는 순종함으로 행복합니다. 순종함으로 자기 존재가 올라갑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왕노릇 하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만은 왕으로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회사에 가서는 멸시 당하고, 무시 당해도 가정에서만은 높은 자리에 세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하라고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자기를 희생한다는 말은 자기 이기심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별세시켜야 합니다. 자기 희생이란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여자가 잘못했을지라도 남자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머리됨의 원리입니다. “그래도 내가 남자인데...”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으면 머리됨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는데 우리 식구와 무슨 얘기를 하다가 제 자존심에 상처가 와서 마구 화를 냈습니다. 원래 제가 제 집 식구를 사랑하다가 존경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신교회를 개척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제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가 저를 설득해서 개척하자고 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위대하고 또 나를 복되게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단계를 넘어서 존경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존경스럽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추켜 세워주어서 그랬는지 자기도 모르게 우쭐거리면서 매사에 집에서도 무슨 얘기가 나오면 잘못한 것은 다 나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어떤 때는 속이 아려도 너무 존경해서 제가 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기도원에 가면서 무슨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했는데 잘못을 돌려요.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더니 운전하는데 마구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논두렁 길을 가는데 사고 나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자존심이 있지 잘못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그래도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세우라고 하고는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여종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이 종을 용서하소서. 제가 오래 참지 못하고 화낸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먼저 기도를 하고 나니까 잘못했다고 말하기가 쉬워요. 그래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동차가 제대로 가요.
그렇게 하고 기도원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설교가 잘되요. 아내는 연약한 그릇인데 괴롭혀놓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제가 그때 느낀 것은 남자는 자존심상 잘못했다는 말을 하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잘못한 것 없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죽지 않습니까 잘못은 다 우리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잘못했다.” 그럽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보면서 격에 맞지 않는 말을 해도 남편이 옆에서 참고 들어주면서 같이 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정생활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컬럼비아 바이블 컬러지 학장이었던 맥컬리킨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부인이 침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안정감을 가지고 편안히 있고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불안해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학장직을 여러해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장직을 사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42년전 결혼서약을 할 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아내를 돌볼 것을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나는 그 서약을 지키고 싶다. 내 아내가 40년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기에 이제는 내가 그 사람의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 때문에 나는 그의 곁으로 간다.”
그가 학장직을 사임하고 이 선언을 하면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학장으로 있을 때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학장직을 몇 년동안 수행하는 것보다 자기 아내의 침해를 곁에서 돕기 위해서 가정으로 돌아간 위대함이 전 세계 남편들에게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만남이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신비를 몸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될 때 남편은 예수님처럼 위대하게 되며 아내는 예수와 함께 사는 위대한 천사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결혼을 말하다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게 된 것은 부부의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목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의 모형이며, 가정생활은 천국 생활을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천국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가는 문턱까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땅에서 충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아들도, 종도 없고 신부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날 때 주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며, 주님의 영화로운 인격이 내 인격이며, 주님의 찬란한 빛이 내 빛이 되어 일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를 머리와 몸으로 비유한 것은 나눌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몸은 생명의 관계입니다. 신랑이 머리요, 신부가 몸이 되는 것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위험이라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 준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참으로 천국을 이루는 신비이며, 이것은 행복을 얻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신랑으로 모실 때 내가 그 품속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종을 거느리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삼고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신부를 만날 때만 하나님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므로 하나님도 행복하게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종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아들 노릇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이 외롭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이 나의 신랑이 될 때 하나님은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내가 행복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마십시오.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게 되면 주님이 나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신부 삼아 행복하소서.” 이것이 바로 신앙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국을 끌어 땅으로 안고 땅의 삶이 천국으로 이어가는 위대한 신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Άλλα σε προετοιμασία'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받은 자의 감사 (0) | 2022.01.03 |
---|---|
과거로부터의 치유/베드로전서 1:13-19 (0) | 2022.01.03 |
고난받은 치유자이사야 53 : 4-6 (0) | 2022.01.03 |
나눔의 목회 (마 26:17-29/행 2:42-47) |(목회자세미나) (0) | 2022.01.03 |
깨끗함으로 세상을 고치라 / 마 10:1-15 (0) | 2021.12.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