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나그네의 신비 히 11:13-16

by 【고동엽】 2021. 11. 30.

◈나그네의 신비 히 11:13-16

 

이중표 목사

 

(히 11:13-16)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세 가지를 기억하면서 산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사는 날이 너무 짧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자기 하는 일에 대하여 성실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사는 날이 한번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삽니다.

그래서 '짧게 사는 인생, 한번 살다가는 인생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또 한 가지 기억하는 것은

'인생은 나그네, 반드시 내가 돌아가야 한다.

나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며 나는 반드시 이 세상이 끝나는 날이 있다.'

라는 것을 기억하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짧고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엄숙한 생애,

그것도 돌아가야 할 나그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그네'는 자기 고국이나 고향을 떠나 다른 장소에 거주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로 '게르'라는 말인데 이방인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신분은 종 취급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고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인 고향이 있습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있고, 내가 태어난 곳이고, 내가 어린시절 놀던 곳입니다.

우리는 그 태어난 곳을 떠나서 살아가기 때문에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 삶 전체를 다 타향살이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삶 자체가 다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나그네요, 이 세상에서 영주하지 못하므로 타향살이와 같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구는 여관방, 하나님은 여관방 주인, 우리는 나그네,

우리의 사는 날은 전세 기한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다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돌아가야 할 사람들, 50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이 가운데 남아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거의 다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고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행렬 속에 끼어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유명한 한국의 방랑시인이었던 김삿갓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국을 순례하면서 시를 쓰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느 고을을 지나다가 해가 저물어 쉴 곳을 찾다가

큰 집이 있는지라 집 주인을 불러서 하룻밤 쉬어가자고 부탁할 때

주인은 "이 집은 여관이 아니니 저 산 밑에 있는 객주 집으로 가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때 김삿갓이 이렇게 묻습니다. "이 집은 몇 대나 살아온 집입니까?"

"16대 조상 때부터 살아온 집입니다." "오랫동안 살았군요.

그러면 16대 조상들이 다 살아계시나요?" "그야 다 세상을 떠났지요."

"그러면 당신도 살다 갈 것이니 당신도 나그네 나도 나그네 같은 처지이니 하룻밤 쉬어갑시다."

그래서 그 집에서 쉬어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다 잠시 머물다 갈 나그네들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 자리에 남아서 영원히 살 사람은 없습니다.

가끔 옛날 교인들이 인사차 저를 찾아와서 그럽니다.

"목사님 많이 가셨군요." 제가 볼 때는 그 사람이 더 갔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다 가는 것입니다. 안 간다고 말하지만 다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늙는 것은 보면서도 자기 늙는 것을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지금부터 25년 전에 한 여고생이 있었습니다. 미모가 준수하고 착했습니다.

그런데 한 10여 년 전에 누가 나를 뵙자고 한다고 해서 나갔더니

어떤 중년 여인 하나가 앉아있어요. "목사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아무개입니다." "아, 전양 많이 갔구만"

나보고 많이 갔다고 한참 쳐다봐요. '30대의 젊은 목사 박력의 사나이 이중표 어디 갔는고'

30대 박력의 사나이를 찾는데 나는 그 여인을 보면서

'10대의 그 아름다움은 어디 갔는고' 인생이 허무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다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선택된 백성

 

가고 있는 인생길에서 우리 자신에 대하여 분명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그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그네로 선택하십니다.

나그네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저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외국인과 나그네라 했습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왔기에 그의 일생은 나그네의 생애였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니"(창 23:4)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은 '너는 이제부터 나그네 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아브라함을 축복의 사람으로 성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 주실 때 안주할 땅을 주거나 부동산을 많이 주거나

빌딩을 많이 준 것이 아니고 그로 하여금 나그네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나는 나그네요, 외국인이라'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은 나그네 백성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시 39:12)

 

위대한 족장 아브라함도 나그네라고 고백했고,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도 자기 자신을 나그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그네 민족이요, 나그네 공동체요, 나그네 역사를 이끌어갔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13절)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나그네라는 것을 자랑삼아 얘기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나그네임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존재를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나그네로 나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바르게 살기를 원한다면 자기 존재를 나그네로 인정해야 됩니다.

 

저는 성 프랜시스나, 성자나, 동양의 수도승들이 걸식하는 것을 보고

'일하면서 살아야지 거지처럼 사는 것이 어찌 수도가 되는고' 했는데

거기에 철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걸식 수도사들은 걸식하면서 두 가지 훈련을 합니다.

 

하나는 겸손의 훈련입니다. 자기 존재를 완전히 낮추면서 겸손을 배우는 것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적선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걸식 수도사들의 영성 훈련의 신비입니다.

 

나그네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땅에서 나그네가 되게 하십니다.

철저하게 나그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땅에서 안주하는 자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하셨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족장들을 믿음으로 세우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고,

부모 친척집을 떠나게 합니다. 야곱이 자기 집을 떠나서 20년동안 머슴살이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가 막혀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어 나그네 길의 세월 속에서 삶의 의미를 알게 하십니다.

그는 철저하게 나그네 생활 속에서 하늘을 지붕 삼고 사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광야 40년도 나그네 생활이었습니다.

나그네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만 의존하며 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철저하게 나그네 백성으로써 훈련을 시킵니다.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왕국을 건설하고 안주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저들을 바벨론 앗수르로 흩어지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그네 백성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전 세계에 나그네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저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을 우상화할 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부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면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이 망하고 전 세계에 흩어져 전 세계 속에 들어갔습니다.

나그네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알리는 선민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디아스포라입니다. 혹시 이 가운데 '아, 넓은 땅을 가졌다.' 하면서

안주하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까? '내가 큰 빌딩을 가졌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빨리 그 생각을 버리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부터 6년 전 좁은 교회당에서 기둥을 세워놓고 예배를 드릴 때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다가 반포에 와서 기둥도 못 빼내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가,

교회당만 넓으면 나도 수많은 청중을 모아 멋진 목회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분당에 6천 평의 땅을 샀습니다.

그 땅을 자동차로 돌아보니까 한참 돌아요. '야, 이 땅을 두고 어떻게 죽나 어떻게 은퇴하나'

하고 안하던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안하던 운동을 하니 잘 될 리가 없죠. 운동을 하다가 잘못하여 팔이 부러졌습니다.

깁스를 하고 두 달 동안 있는데 설교할 때마다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빨리 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성령께서 "자빠져라 너는 자빠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왜 그러시옵니까?"

"네가 6천 평의 땅을 가지고 안주하려는 것은 별세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자빠져서 하늘을 보아라." 눈을 뜨고 볼 때는 땅만 보았습니다.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안주하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넘어지고 보니까 하늘만 보였습니다.

넘어지지 않고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밤은 왜 옵니까? 누워서 하늘을 보라고 오는 것입니다.

낮에는 돈 벌고 사람과 싸우고 사업 하느라고 계속 땅만 보고 삽니다.

그런데 밤이 오면 다 누워서 하늘을 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비한 은혜입니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3천명이 모이고 부흥되니까 저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되기는 하지만 이들이 벌써 땅에 안주하고 있구나!'

 

드디어 스데반 집사가 설교 중에 유대인들을 비난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칩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이 죽은 후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기독교인들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복음이 세계화되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그네가 되어야 선교가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핍박과 고난이 따랐고 그 섭리에 따라

이스라엘은 나그네로서 세계에 흩어져갔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나그네로서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왕은 나그네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기 존재가 나그네임을 알았고 나그네 됨을 자랑했습니다.

사실 다윗은 세상에서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왕궁이 있고,

수많은 처첩이 있고, 금은보화가 있고, 온 나라가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나그네 됨을 자랑했고 자기 조상들도 나그네였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의 사명

 

나그네 된 자만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나그네라는 의식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내가 땅에 많이 가졌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못합니다. '나는 나그네다.' 할 때

나그네는 '다 두고 가야 할 것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써야지'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예수님은 나그네의 삶의 표본이었습니다. 하늘을 버리고 나그네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나실 때 베들레헴 여관집 구유에 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여관집에서 나십니까?

인생은 모두 다 나그네, 지구라는 여관집, 거기에 예수님은 아기 예수로 눕습니다.

저 궁궐의 안방에 나지 않으시고 말구유에 나십니다. 예수님은 아기 예수로 오실 때도

나그네 예수로 오십니다. 그는 살아계실 때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주님은 마지막 죽을 때도 옷 한 벌 걸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가 죽어서 무덤도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려서 3일 동안 있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땅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3년 동안 다니시면서

나그네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나그네로 땅 끝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위대한 종들이 다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성자는 다 나그네로 산 자들입니다. 순교자들이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선교사들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선교하러 간 것이 나그네로 간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의식만 가지면 주님을 위해서 많이 일할 수 있습니다.

나그네라는 의식만 가지면 그렇게 땅에 쌓아두었다가 헛되이 탕진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명한 이해인 수녀님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주여!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

우리의 나날은 어찌 그리 소유를 위해 숨이 차게 바쁜지

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케 하소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이승의 순례객인 우리가

이기와 탐욕의 노예가 되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당신께 빌려 받은 것임을 항상 기억케 하소서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는 나그네임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위해 쓸 수가 있고 하늘나라에 투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쓰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나그네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날 때와 죽을 때를 보면 교훈을 받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는 주먹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의욕과 야심의 표시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열심히 일하고, 힘써서 돈을 벌고, 지식을 얻고, 권세를 얻습니다.

 

그런데 떠날 때는 손을 쭉 폅니다. 세상 것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붙잡아도 내놓을 날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할 나그네들입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이 세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며 자유 하는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꼭 하고 싶은 영성훈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떠나는 연습 훈련입니다.

관을 하나 만들어 놓고 한 사람씩 그곳에 눕게 하고 자기 죽음을 고백하게 하는 일입니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관 뚜껑을 덮고 못질을 탕탕하고 한 시간 정도 죽음을 체험하게 하고

관속에서 나오게 하는 일입니다. 나올 때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라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제가 1년 설교하는 것보다 더 큰 은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새로 되는 장로님부터는 이 훈련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나그네 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니까요. 이 세상에 매이면 매인만큼 나를 속박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유를 노래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행복인 것입니다.

 

나그네의 행복

 

오늘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더욱 은혜롭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였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살이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이 찾고 있던 고향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고향으로 생각했었다면 그리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그들이 갈망한 곳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자기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더 나은 고향을 사모했으니 하늘에 있는 것이라' 고향은 태어난 곳입니다.

부모 친척이 있는 곳입니다. 효자는 고향에 갈 때 기쁘게 갑니다.

그러나 불효자는 고향에 가기는 가도 떳떳하지 못하게 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효자 되어 갈 때 그 발걸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늘나라에 갈 때 당당하게 가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16)

 

하늘에 고향을 두고 기쁘게 달려가는 성도가 되시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