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지혜로운 자는... 가장 무식한 자
어떤 사람이 신탁(神託)에게 물었다.
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일 지혜로운 현자는 누구입니까?
그러자 신탁(신전에서 신의 계시를 받는 사람)이 말하기를
아테네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소크라테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찾아가서
신탁이 그러는데
“당신이 우리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디다”
라고 전하였다.
이 말을 들은 쏘크라데스는
“무슨 소리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련한 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다시 신탁에게 찾아가서
소크라데스는 자기가 아테네에서 가장 미련한 자라고 말하던데,
왜 당신은 그가 가장 현명하다고 했는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신탁은 '바로 그거다.
자신이 미련한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가장 현명하고, 가장 지혜로운 것이다.' (펀 글)
◑소란함 속에도... 고요함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오래 살다 온 사람들은
한국이 무척 시끄럽다고 한다.
지하철, 길거리, 식당, 커피숍 어디든지
핸드폰, 큰 성대, 고함소리, 여자들 수다, 아이들 떼쓰는 소리...
그러나 소란스럽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고요함이 있을 수 있다.
내 내면이 매일 기도하며 평상심을 유지하면
떠드는 소리 속에서도... 내면의 고요함을 누릴 수 있다.
포기하지 말고 가능한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며,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 경청하며
너무 공격적인 사람은 지혜롭게 비껴가면서
당신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흥분하지 않으면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시끄럽고 혼란한 삶 속에서도
자기의 고요한 영혼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다.
세상이 깨어지고 시끄럽고 짜증나는 것은
사실은 내 내면이 깨져있고, 불안정하기 때문인 것이다.
은혜가 넘치는 사람은
그 시끄러운 모든 소리가... 오히려 삶의 생동감으로 들린다.
저들이 건강하게 살아있으므로... 지금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평안하고 고요함속에 행복하십시오.
*관련글 : 소리 http://blog.daum.net/ygbhygbh/7947801
◑가장 즐거운 자는... 가장 고통스런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영혼의 수많은 고통과 고뇌를 거친 뒤에... 비로소 환희에 도달한다.
육체적 즐거움은 처음에는 잔치를 겪지만, 그 다음에는 휴유증을 겪기 쉽다.
어쩌면 두통마저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에,
영혼은 처음에 깊은 고통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다만 잔치의 전주곡으로 불가피한 것이다.
인간적 사랑에 잘못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우며
처음에 온전히 이성마저 잃고
삶의 질서와 조화까지 깨뜨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열매는 쓰디쓴 것으로 결말이 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초대하신 길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길이기에
처음에는 좌절과 고뇌와 고통의 길이지만
주님의 영광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전주곡으로 불가피하다 (신부님 글 펌)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재한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는
‘그’라 하더라도
그의 내면과
나의 내면이 만나지 못한다면,
내 앞에 있는 그는,
내게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현존하고 있지만 그의 내면을 만날 수 없을 때,
그는 나에게 늘 타인이듯,
현존하시지만
내가 그분의 현존을 ‘발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부재(不在)하시는 분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라도
자기 눈에 보여 져야 믿겠다는 ‘실존주의’는
많은 사람들을 미혹에 빠뜨렸다.
전 세계를 피와 죽음으로 물들게 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도대체 신은 존재하고 있었는가?
그들이 제기했던 비수 품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21세기,
지난 세기를 되짚어볼 때
‘내가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그분의 실제적 부재’로 오해했었다.
나의 역량 부족으로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단정 지었던 것은
내 만용이었다. 김혜윤 <생손앓이>에서, 축약
오늘도 내가 깊은 은혜를 못 받는다고 해서
그 분이 내게 무관심하신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오늘도 내가 외롭다고 해서
그 분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같은 원리로, 내가 그 형제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꼭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가장 은혜를 많이 받은 자는... 빚만 늘어난다. <고 이중표 목사님 설교
▲목회란 -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공동체다.
그러므로 목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하는 과업이요,
은혜는 목회의 생명이다.
은혜 없이는 목회가 안 된다.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절대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고, 그 은혜 때문에 살게 된 것이다.
▲은혜 못 받은 자는, 사실 믿음도 없다.
이러한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요, 구원이다.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그래서 말과 행동에 은혜가 없으면,
사실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이 난다.
성도는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마쳐져야 한다.
▲은혜를 조금만 받으시라!
저는 교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오늘 은혜를 많이 받고 싶습니까? 하면 교인들은 모두 ‘아멘’ 한다.
그때 저는 은혜를 조금만 받으라고 부탁드린다.
은혜를 조금 받으면 편히 살 수 있지만,
많이 받으면 빚진 자가 되어
그 빚 때문에 재산과 생명을 뺏길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은혜를 많이 받겠느냐 할 때는
‘아멘’이 적어진다.
▲은혜=축복으로 오해하지 마시라.
은혜란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거저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은혜를 좋아한다.
아마 은혜를 축복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교인들은 공짜를 좋아해서, 은혜도 많이 받기를 원한다.
▲은혜=빚이다.
오늘날 은혜 받기만 좋아해서 교회로 몰리는 현대 교인들의 생리에는
심히 위험한 요소가 있다. 왜냐하면 공짜만 좋아하고
공짜로 뭐든지 얻으려는 기복성의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공짜로 알면, 결국 복음이 변질되고
기독교는 타락하여 역사에 악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를 빚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때 역사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은혜를 조심해서 받으시라!
너무 많이 받으면, 바울처럼 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졸지에 복음에 ‘빚진 자’가 되고 만다. 롬1:14
은혜 받기를 좋아하는 성도님들이여,
사명의 빚이 부담되시걸랑 아예 은혜를 적당히 받으시라!
큰 은혜 받았다고, 이제 앞으로 큰 축복 받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시라! [주제별 분류]삶의 통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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