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을 허는 여우 /아가서 2:15-17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동안 맺는 관계 속에서 가장 신비한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행복을 얻고, 삶의 깊은 신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 만나는 것은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일생동안 괴롭게 탄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록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계획하신 것은 창세기 창조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조하시고 남녀를 만드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므로 그 자리가 에덴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일생동안 에덴을 만나지 못하고 인생을 끝나게 됩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기록한 아름다운 사랑의 애정시입니다. 이것은 세계 역사상 유일한 남녀의 사랑을 고백한 신비한 노래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가서는 8장의 짧은 분량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책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이 책 속에는 한마디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으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신랑되시고 교회가 신부되는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사랑의 정서를 종교적 목적으로 삼는 사랑의 송가지만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진솔하게 고백할 것인가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사랑의 시작과, 사랑의 전진, 사랑의 승리 삼 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노래는 솔로몬이 지은 노래중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소개되고 있으며 이 책은 전무후무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전무후무한 지혜를 내가 너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사랑을 체험케 했던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이런 사랑을 다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2:10-14)
이것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는 그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함께 가자’ 그러면서 그는 사랑을 꽃처럼 눈으로 보고 비둘기 소리처럼 듣고, 포도열매의 아름다운 향기처럼 향내를 맡고, 그래서 눈으로 사랑을 보고, 귀로 사랑을 들으며, 입으로 사랑을 맛보는 시각과, 청각과, 후각 전체에 사랑의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이러한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15절)
이 말이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우떼를 잡아주세요. 꽃이 한창인 우리의 포도밭을 짓밟는 새끼 여우떼를 잡아주세요”
왜 술람미 여인이 이 말을 했느냐? 사랑의 꽃이 피었는데 여우가 침노하면 꽃이 시들고, 가지를 갉아먹고, 포도원이 짓밟히니까 여우를 잡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이 그대로 나에게 아름다운 꽃처럼, 아름다운 향기처럼 아름다운 꿀처럼 임하기를 원한다면 여우새끼를 잡아주세요.”
당시에 유대 땅에는 여우가 종종 포도원 둥지에 굴을 파고 서식하면서 봄철 포도나무에 싹이 돋고 꽃이 필 무렵 포도원을 돌아다니면서 포도나무를 갉아먹고 헤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에 꽃 피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데 방해되는 여우 새끼들을 잡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은 성경에 두 가지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포도열매를 맺어야 할 교회가 포도원입니다. 둘째는 가정이 포도원입니다. 포도원이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면 여우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우 사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우는 교활하고 간사한 동물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근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에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무섭게 병들고 있는 현상 중에 하나가 가정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통계청 보고에 의하면 한국인의 이혼율이 1년에 5만쌍이라고 합니다. 35만쌍이 결혼하는데 5만쌍이 이혼하고 있다면 일곱 가정 가운데 한 가정이 무너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대개 결혼 후 5년내에 헤어지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대 부부의 이혼이 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황혼이혼이 늘고 있습니다. 자식들의 혼인길에 장애가 될까 해서 참고 살다가 자녀들을 다 결혼시키고 난 후에 노년에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편의 굴레에서 더 이상 못참겠다.’
옛날에는 이혼할 때 남자들의 일방적인 요구에 의해서 했습니다. 거의 남자들이 자기 주권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부인을 퇴출시키고, 강제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꾸어졌습니다. 여인들이 자원해서 이혼을 신청합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일생을 사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이혼하는 이유를 보면 건강이나 경제 문제는 2% 미만입니다. 주된 원인은 부부의 갈등에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옛날에는 살기 어려워서 이혼하는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 때문에 이혼하는 것이 아니고 성격이 맞지 않거나 마음의 상처, 자존심의 상처, 대화의 불통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이혼하게 됩니다. 또 실제로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남남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다 간단한 문제에 있습니다. 마치 여우가 굴속에 숨어있는 것처럼 전혀 외형적으로는 안보이는데 속에 숨어있는 여우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온통 집안이 시끄럽습니다. 겉으로는 신사 숙녀 멋진 사람인데 속에는 여우가 숨어서 한 번씩 나타나면 아름다운 가정의 포도원이 짓밟혀집니다.
여우의 속성은 교활하고 의심이 많고 변화무쌍한 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우는 얼마나 교활한지 말뚝처럼 딱 서 있다가 새들이 그 위에 앉을 때 잡아먹습니다. 이 정도로 여우는 자기 변태에 탁월합니다.
여우는 식용으로는 쓰이지 않고 가죽 하나 벗기려고 쓰는 것입니다. 여우 가죽은 왕국에서 키스를 받을 정도로 환영을 받습니다. 이것은 아주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를 둔갑해서 변화시키는데 놀라운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우들이 우리 속에 숨어있다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파괴하는 가장 큰 여우는 자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열등감의 여우입니다. 낮에는 굴속에 숨고 밤에만 나옵니다. 여우는 사람이 보면 숨고 사람이 없으면 나타납니다. 완전히 이중적입니다.
우리가 결혼생활을 할 때 두 사람의 성년 남녀가 결혼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사는 것은 네 사람이 삽니다. 그러면 두 사람은 어디에서 왔느냐? 두 사람은 각각 우리 속에 숨어있는 여우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한 두 내면적 자아가 그대로 표출됩니다. 그러니까 안방에 앉아있기는 두 사람이 앉아있는데 얼굴이 네 사람이 왔다갔다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다 그런 상태입니다. 이 속에 어린시절부터 성장된 소년 소녀가 잠재되어 있다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길거리에 나타나는 신사숙녀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가정에서 표출됩니다. 여기에서는 근사한데 집에 가서는 이상한 존재가 등장됩니다. 이것은 네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침대에는 두 사람이 누워있는데 네 사람이 희희낙낙거리고 있습니다. 가정생활 할 때 문제가 거의 어디에서 표출되느냐? 두 사람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우처럼 숨어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한 한 존재가 표출되어서 서로를 이해 못하는 경지로 바꾸어갑니다.
처음에 연애할 때는 얼마나 근사합니까 투피스, 원피스를 빼 입고 나오니까 멋있죠, 향수를 발라서 향기는 나죠, 외모는 아름답죠. 그런데 살다보니까 이상한 것이 나와요. 잠자면서 코를 골고, 이를 갈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이불도 안개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자기의 한 과정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안맞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바로 자기 안에 있는 문제 때문입니다.
건강한 가정생활이 이루어지려면 건강한 자아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병든 가정, 심각한 갈등 속에 헤매는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를 찾을 때 치료의 영역의 80%는 자존감의 치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큰 문제는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시켜주는 일입니다.
유명한 작가인 막크 트웨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없이는 결코 인생을 편안하게 살 수 없다.”
일생 일대에 가장 심각한 고민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입니다. 고민의 대상이 남이 아닙니다. 시어머니나 남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인정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용모에 대해서, 자기 개성에 대해서, 자기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습니다.
저도 길을 걸어가면서 혼자 뭐라고 중얼거립니다. ‘나는 왜 이럴까’ 자기 자신에 대해 불평 불만합니다. ‘왜 나는 오늘 설교할 때 이렇게 실수를 하나, 필요없는 말을 하나’ 하면서 혼자 중얼거립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내가 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안좋다고 말하지만 거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기가 안좋기 때문에 그럽니다. 나를 좋아할 수 없는 나에 대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아동자아가 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성장하고, 대학을 나오고, 외적으로는 성장된 사람인데 이 속에 성장하지 않은 아동자아가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욕심과, 집착과, 이기심과, 비교의식과, 질투와, 시샘 등 여러 가지 심리적인 병적 현상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열등감은 어려서부터 갖게 됩니다. 어린시절에는 부모로부터 무시당하면서 들었던 ‘바보, 멍텅구리, 병신아’ 그런 것이 잠재되면서 열등의식이 생겼고, 자라면서는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니까 거기에서 열등의식이 오고, 또 직장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보다 실력이 딸려서 뒤떨어질 때 열등감이 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등감이 결혼해서 상대가 인정해주지 않을 때는 좌절하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소아기적 자존감의 상처나, 사회적 환경에서 오는 자존감의 상처는 그대로 잠재되어 있는데 이것이 가정생활에서 부부가 서로 상처를 줄 때는 인간이 좌절하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대하여 학력의 자존감의 상처를 주었다든지, 인물에 대한 상처를 주었다든지, 가문에 대한 상처를 주었다든지 그러면 그것은 깊이 상처로 잠재되어서 그때부터 대화가 끊깁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못생겼어. 왜 이렇게 뚱뚱해” 이런 여러 가지로 상처를 줍니다. 또 남편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못났어 머리가 안돌아가 당신을 내 남편이라고 데리고 있는 것이 창피해” 이런 사람들은 자존감의 상처 때문에 서로가 무너져서 그때부터는 이 사람들은 성 생활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메스터 존스라는 사람의 임상결과에 의하면 육체적인 장애는 10%밖에 안되고 90%는 자존감의 상처 때문에 성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들 딸 잘 낳고 살았는데 지금은 남남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편은 회사에서 진급이 안되고 부인은 영리해서 컴퓨터를 해서 월급도 많아지니까 “당신은 무능해” 하니까 그때부터 모든 것이 무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립니다. 그래서 이 자존감의 상처를 가정에서부터 받을 때는 완전히 그 인간은 무능해지고 맙니다.
최근에는 IMF로 남자들이 직장을 잃어가면서 무능한 남편으로 가출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직장을 잃으니까 생활이 쪼들려서 집을 줄이고 이사를 가는데 남편이 트럭 어디 타겠습니까 운전석 옆좌석에 타겠습니까 짐칸에 타겠습니까 짐칸에 탑니다. 짐칸에 왜 탑니까? 짐 지키려구요? 아닙니다. 짐짝처럼 나를 버리지 말라고 사정하느라고 짐칸에 탑니다. 이것은 만화에 나오는 우스개 소리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큽니다.
최근에는 여성들이 우월해지면서 ‘남성의 기를 살려다오’ 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한 때 ‘간 큰 남자 시리즈’가 있었는데 아내의 행동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여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남자들을 간 큰 남자라고 불렀습니다.
간 큰 남자도 등급이 있습니다. 마누라를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은 간이 큰 남자입니다. 그리고 돈을 어디에 썼느냐고 묻는 남자는 간이 굉장히 큰 남자입니다. 그런데 아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남자가 있습니다. 부인이 텔레비젼을 볼 때 채널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나이별로 간 큰 남자에 대한 표현이 이렇게 다릅니다. 20대의 간 큰 남자는 부인더러 밥상 차려오라는 남자, 30대는 외출하는 부인더러 어디 가느냐고 묻는 남자, 40대는 외출하는 부인을 똑바로 쳐다보는 남자, 50대는 몇 시에 들어오느냐고 묻는 남자, 60대는 따라가도 되느냐고 묻는 남자, 이것이 간 큰 남자입니다. 혹시 지금 폭군처럼 군림하는 남자가 있습니까 이 분은 성녀를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여우는 썩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무덤가에 살면서 썩은 것을 파헤칩니다. 서로의 결점을 파헤치는 것이 여우의 근성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연애시절에는 좋았는데 내가 눈이 멀었던가봐’ 그러면서 자꾸 옛날의 장점은 다 사라지고 단점만이 남습니다. 결혼하게 되면 장점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단점만 보게 됩니다. 사소한 단점을 지적하고 서로 흉을 말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것이면 헐뜯고 비방하면서 마음이 멍들고 상처를 입어 처음에 뜨겁던 첫사랑은 꽃이 시들어버리고 열매는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마저도 여우가 먹어서 말라버리는 가정으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20대는 꿈에 살고, 30대는 삼삼하게 살고, 40대는 사생결단하고 살고, 50대는 오기로 살고, 60대는 서로 불쌍해서 산다.’
우리가 상대방의 허물을 보지 않고 살면 가정은 존속됩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면 자기의 것으로 감싸야 됩니다.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허물이 더 나옵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경지로 가야 합니다. 허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허물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상대는 허물이 보입니다. 한 몸이 되면 허물이 안보입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의 허물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더러운 것까지도 좋아서 냄새를 맡습니다. 이것이 자기입니다. 그래서 한 몸이 되라는 것은 허물이 보이지 않는 경지로 가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살면서 친정과 시가에 대한 허물은 절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상대의 약점을 건드리는 것은 가정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내 남편이 되고 내 아내가 되어도 성장해 온 가문에 대한 허물을 얘기하면 기분이 상합니다. “당신 어머니는 왜 그래?” 하면서 건드리면 전 존재가 거기에 연결되기 때문에 뿌리가 흔들립니다. 인격적 관계가 있으므로 그것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제 후배 목사 중에 부인은 거제도 여자고, 남편은 부여 남자인 후배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다르 때는 잘 안싸우는데 선거 때만 되면 싸웁니다. 한 부부인데도 선거 때만 되면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모더러 그랬습니다. “남편 따라가시오. 그것이 성경의 원리요. 선거가 당신을 살리는 것 아니야 가정이 더 중요해”
선거 때가 되면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남편 따라가면 됩니다. 부인 따라가도 괜찮지만 가급적이면 남편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남편을 존경하는 표시입니다.
한 번은 제가 한 집사님에게서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압니다. 저는 그 사람을 싫어하지만 한 교회 안에서 내가 목사님을 존경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싫어하지만 목사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찍기로 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 사랑하는 자여, 그대가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가정생활 하면서 남편과 그것 때문에 다툰 아내가 여기에 있습니까 회개하십시오. 이것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오랜 교도소 생활을 했던 청년이 교도소 안에서 예수님을 잘 영접하고 회개해서 나온 이후에 처녀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사는데 어느날 대화 중에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당신은 전과자라 그래” 하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그 말을 듣고 눈이 뒤집어져가지고 부엌에 가서 식칼을 들고 와서 부인을 찔러버렸습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과거의 가장 괴로운 일이고 허물인데 그것을 들추어내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속에 있는 부정한 여우들을 들추는 여우들을 잡아내십시오. 자기 아내가 뚱뚱하고 볼품이 없어도 비대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학력이 낮습니까 학력의 ‘학’ 자도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TV를 보다가도 안좋은 과거와 관련된 일이 화면에 나오면 나가버리거나 보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상대의 상처된 허물은 서로 보지 않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이것이 포도원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사랑의 신비한 은혜입니다.
과거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므로 과거의 잘못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부부간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약점을 건드리지 말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혹시 남편된 사람이 아내에게 상처를 입힌 일이 있으면 정식으로 용서를 빌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야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한 대 때리면 아내는 그것을 절대로 안잊습니다. 이 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젊어서 했어도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욕설을 들으면 그 욕설이 머리속에 그대로 입력됩니다. 밥 먹고 삽니다. 아이 낳고 삽니다. 그러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됩니다. “여보, 내가 전날에 몰라서 그랬소. 그때 당신 참 아팠었지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이야” 그렇게 얘기를 하면 이것이 풀립니다. 이것을 풀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정적인 상처, 이것은 일생을 함께 살아야 할 부부로서는 치유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치유해 가야 할 것이냐? 방법은 하나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남편이 용서해 주지 않아도 치유할 수 있는 길, 아내가 용서를 빌지 않아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성령충만입니다. 굴 속에 들어간 여우를 잡아내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제가 한 번은 시골길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굴 속에 불을 펴요. 그래서 “제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까 여우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여우가 굴 속에 들어가서 안나오니까 불 피우면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의 굴속에 여우가 들어있는데 성령의 불을 피우면 여우가 다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18-21)
어떻게 노래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감사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피차 복종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충만해야 됩니다. 오늘 우리 속에 숨어있는 여우들을 잡아내고 내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은 아내에게서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최고로 인정해주어야 됩니다. “위대한 것이라고는 눈을 뜨고 봐도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존경을 합니까?” 그런 부인들이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기 남편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 남편을 볼 때 주님을 볼 수 있는 대상으로 세웠으니 그 남편이 얼마나 존경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소중한 사람입니까 아무리 못났어도 그 남편이 주님을 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내들이 남편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겠습니까 아내들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관심 갖기를 원합니다. “목사님, 사랑할만한 것이 있어야 사랑하지요. 인물이 예쁘나요 살림을 잘 하나요. 말이나 고운가요. 뭐 하나 사랑할 것이 있어야 사랑하죠.”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
구제하는데 예수님처럼 할 수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는데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 존재가 비록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고 배우지 못해서 인격적으로 실력도 없고 훌륭한 것이 없지만 한 존재를 예수님처럼 세울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아내 앞입니다. 가난한 거지 앞에서 예수님처럼 내놓을 것이 있습니까 자녀들 앞에서 인격적으로 훌륭해서 내놓을 것이 있습니까 아내 앞에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나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처럼 될 수 있는 것은 그것 하나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오늘 우리 속에 있는 여우들을 성령의 불로 잡아냅시다. 상처받은 나도 다 잡아내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충만해서 내 속에 건전한 자아를 세웁니다. 그래서 서로 만날 때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싸매주고, 그들을 돌봐주고, 덮어주고, 격려해 주고, 그리고 자존심을 세워주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사랑의 포도원에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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