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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세 의 장 자 마태복음 20:17-28

by 【고동엽】 2022. 1. 3.

별 세 의 장 자

마태복음 20:17-28

 

사람은 누구나 다 크게 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등이 되려고 하는 노력을 합니다. 또 사회에서는 실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장자가 되려고 하는 의욕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높아지려는 마음, 크게 되려는 욕망,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그런 욕망을 가진 자가 성공도 하고 업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인류 역사는 이러한 꿈을 가진 사람들의 창조의 작품입니다. ‘무엇인가 내가 뛰어나야지, 내가 잘 되어야지라는 의욕을 가지므로 성공도 하고 발전도 합니다. 물론 역사에는 이것이 지나쳐서 어떤 때는 불협화음도 있지만 역사는 이것 때문에 발전해갔던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교인들을 축복하면서 장자가 되라는 축복을 하겠습니다. 모든 면에서 장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이 욕망을 가질 때 두 종류의 장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나온 장자가 있고 하나는 땅에서 나온 장자가 있습니다. 땅에서 나온 장자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장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우고, 또 사람들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온 장자는 하늘이 세웠기에 그는 사람이 손댈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영원히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보통 땅에서 나온 장자를 지배자, 통치자, 통솔자, 관리자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권을 잡을 때 지배하려고 하는 독재자가 있고, 국민이 어느 기간 위임해서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달라고 해서 통치하는 통치자가 있고, 어느 기관을 통솔하는 통솔자가 있습니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통치자일 뿐이지 우리의 지도자는 아닙니다. 그들이 군림할 때 어떤 자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지배하는 자로 있다가 끝날 것이고, 어떤 자는 국민이 위임했기 때문에 5년동안을 통치자로 있다가 끝나면 아무도 그를 통치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러난 후에도 국민의 가슴속에 감동을 주고 정신적인 신성한 인도자가 될 때 그를 지도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보낸 장자는 지도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운 장자는 하나면 됩니다. 통치자는 하나여야지 둘이면 나라가 혼란이 옵니다. 회사도 사장은 하나여야 합니다. 어느 기관이든지 통솔자는 하나면 됩니다. 그러나 하늘이 세운 지도자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전부 다 지도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이 보낸 지도자는 정신적이며, 감동적이며, 자기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오를 수도 있고 안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높은 직위를 받을 수도 있고 안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직위를 안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할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의 욕망일 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장자가 되어야 되겠는데 어떤 장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늘이 세운 장자는 하늘로부터 왔기에 아무도 끌어내릴 수도 없고 사람이 손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자리입니까 예수님은 하늘이 세우는 장자가 되는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으로 선포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요, 별세하러 가는 길인데 사랑하는 열두 제자들을 따로 길 위에 세우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18-19)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러 가시는 길에서 제자들끼리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이종 사촌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예수님에게 간청합니다. “주님, 영광의 나라에 임할 때 우리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소서

당시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로 오신 줄 알았기 때문에 우리나라로 표현하면 좌정승, 우정승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이 그 얘기를 듣고 분을 냈습니다. “그대들이 좌우편에 앉으면 우리는 들러리냐

당시 로마가 지배하던 사회는 힘이 정의였습니다. 권력을 가진 로마 사회는 남을 지배하고 사람을 부리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권력 지상주의였습니다. 저들을 많은 종을 거느리고 부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지배하는 것, 힘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사회의 권력 지상의 가치관인데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혁명적 도전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

이것은 당시 사회 가치관에 있어서 일대 혁명적 선언입니다. 우리는 세속적 가치관과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갈등을 느낍니다. 세상에 가면 힘이 최고요, 권력이 최고요, 돈이 최고인데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주님이 말하니 어떤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데 갈등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숭고한 목적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그 분명한 목표는 나는 너희들을 데리고 별세의 장자가 되기 위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이 보낸 장자가 되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나는 갈릴리 촌사람으로 태어나서 섬기는 종으로 살다가 세속적인 권력을 잡은 로마의 지배자에 의해서 죽는다. 그러나 나는 하늘이 세운 장자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나온 장자가 있고 먼저 죽는 장자가 있습니다. 먼저 나온 자, 먼저 세움받은 자가 장자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먼저 죽어서 갔으면 선배요, 장자입니다.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누가 장자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가진 예수님을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첫 열매라는 말은 장자라는 말입니다. 맏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맏아들의 정신을 따라서 자기도 십자가에 죽고 부활된 삶, 승리를 가진 사람이 하늘나라의 장자입니다.

우리는 오늘 자기 존재를 먼저 이 말씀 속에서 기억하여야 할 원리가 있습니다. 인자는 예수님을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하늘나라의 장자로서 나에게는 세 가지의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섬기기 위해서 산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대속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한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는 하늘이 보낸 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영성입니다. 땅에서 나온 장자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자기 존재를 땅의 존재로 알 뿐입니다. 그래서 지배자는 남과 싸워 이긴 자요, 다른말로 말하면 남을 죽이고 선 자입니다. 이것이 땅에서 장자입니다. 회사에서도 끊임없이 남을 넘어뜨려야 자기가 올라가지 안넘어뜨리고는 못올라갑니다. 그래서 오늘날 중상모략이 온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집권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직접 죽인 자도 있고 간접적으로 죽인 자도 있고 계속 죽여서 올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그런 자로 온 것이 아니고 하늘이 보낸 장자는 자기와 싸워 이긴 자요, 다른말로 말하면 자기를 죽인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장자입니다. 자기와 사워 이긴 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모든 성도들이 나를 큰 자로 세웠지자기 존재를 하늘이 보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지만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예정하셔서 때가 되매 부모를 통해서 보내주셨습니다. 자기가 어떤 지위에 있든지, 어떤 신분을 가졌든지, 인물이 어떻든지 물어볼 것 없습니다. 자기 존재는 하늘이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하늘이 보낸 자는 분명히 의식이 달라지는데 나는 하나님께서 보낸자라는 분명한 소명과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를 천대받거나, 멸시받거나, 비난받는 존재로 세우지 않습니다. ‘하늘이 보냈는데 내가 어찌 아무에게나 비난받을 수 있는가이런 신성한 자존심을 갖게 됩니다.

자기가 천대받을 때 통곡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낸 자의 위치에 대하여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자기 존재가 비록 까다로운 시어머니를 만나서 학대를 받고 때로는 구박을 받으면서도 자기 존재는 하늘이 보낸 존재로 우러러 보게 만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위대성입니다.

명절이 오면 가장 큰 고민이 고부간의 고민입니다. 시골에 가서 시어머니를 받들어주려고 하니까 상당히 열받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자기 존재를 신성한 자존심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잘 생기고 똑똑한 여자가 시어머니 모시고 사느라고 너무 너무 힘들어서 시집살이에 시달리느라고 얻은 복이 있는데 위장병이었습니다. 친구에게 하소연하기 위해서 대학 동창을 찾아갔는데 그 친구는 시어머니를 잘 받들고 사는 것입니다. 잠시 앉아서 들어봐도 이치에도 맞지 않고 상식에도 맞지 않는 얘기를 어머니, 알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공부했는데 왜 저 친구는 저럴까의아해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너는 상식도 맞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시어머니 말에 어쩌면 그렇게 잘 순종하고 사느냐하니까 나는 이치나 상식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늘 이치에 따른다.” 하는 것입니다. “너 참 위대하다. 어디에서 배웠니” “나는 예수님에게서 배웠다.”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아도 시어머니 밑에서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냈다고 하는 자기 위치를 우러러 세웠습니다. 그 친구가 감동을 받고 , 예수 믿는 자는 위대한 것이구나감동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인류 역사에 위대한 자가 누구입니까? 로마의 황제는 권세를 부린 집권자의 장자였습니다. 그 손에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지도자로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죽었으나 별세의 장자가 되어 인류 역사를 다스리는 지도자로 우리 가슴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역사의 장자는 곧 자기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믿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믿는다면 자기 어머니도 하늘의 계획 속에서 나에게 주신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생명의 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절할 때 눈물이 나야 됩니다.

유명한 요한 웨슬레가 수잔나 어머니의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그 어머니는 18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길러갈 때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까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를 기르고 기르고 했는데 밤이면 다 모아놓고 묻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역살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켰지?” “하나님이 시켰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지?”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들은 위대한 교육을 배웠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그 마음이 솟아오르기를 바랍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왔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에서 장자는 섬김을 받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섬김 받으려고 높아지려고 합니다. 대접받으려고 권좌에 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섬기기 위해서 장자가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돈을 벌어서 섬기기 위해서 장자가 됩니다.

고향에 가면 형님, 동생 다 모입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돌아만 가시면 장자 행세 하려고 눈이 두배나 커지는 형님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 세상에서 나온 장자입니다. 하늘에서 나온 장자는 가족들을 섬겨야지, 부모를 섬겨야지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돌아만 가시면 유산 큰 것 가지려고 빨리 비행기 타고 옵니다. 그래가지고 내가 장자라고 행세하려고 합니다. 땅에서 나온 장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섬기는 장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기기 위해서 높아지고, 섬기기 위해서 커져라그럽니다.

섬김에는 네 차원이 있습니다. 높이의 차원, 이것은 주님을 위하여, 넓이의 차원은 사람 구별하지 않고, 마음이 맞네 안맞네 차별하지 말고 모두 넓게 섬기는 것입니다. 길이의 차원은 기분 좋으면 섬기고 기분 나쁘면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나 내일이나 길게 섬깁니다. 깊이의 차원은 자기를 낮추면서 끝까지 겸소하게 상대를 섬길 때 깊이있게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섬김의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 섬김의 차원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섬김의 넓이를 넓혀야 합니다. 울 안에서 울 밖으로, 그리고 우리의 섬김의 영원해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이 끝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면서 계속해야 합니다. 이럴 때 이 섬김은 하늘이 보낸 지도자의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동서들이 집에 모이는데 영리하고 똑똑한 동서는 시간 딱 되면 갑니다. 그리고 하늘이 보낸 동서는 미리 가서 섬깁니다.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말은 안해도 저 아이는 달라그래서 우러러 보게 됩니다. 섬김의 차원이 하늘로부터 와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늘이 보낸 자라는 의식을 가질 때 그 마음은 모든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이 말은 희생의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를 감동시키는 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는 우리 교인에게 억지로 방안에 앉혀놓고 절을 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희생정신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절해주고 싶었습니다. 섬김뿐만 아니라 자기를 희생시켜 살아가는 그 숭고한 정신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는 왕이었습니다. 세상 왕은 보좌에 앉아 있고, 권좌에 앉아 있지만 십자가에 올라가서 왕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올라갔을 때 팻말을 히브리 말로, 로마 말로, 헬라 말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조롱하기 위해서 써 붙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명패를 떼라고 하니까 내가 쓰고 싶어서 썼다고 하면서 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왕이었습니다. 모든 세상의 왕들은 면류관을 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시로 면류관을 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류의 모든 가시를 내 머리에 쓴다, 인류의 모든 고통을 내 머리에 쓴다. 인류의 아픔과 수고 죄지은 저주를 머리에 쓰는 대표로 죽는 왕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너희들의 모든 죄악을 위하여 나는 희생의 대속물로 죽는 왕이다.’ 참으로 위대한 왕입니다.

세상 땅에서 난 왕은 보좌에 앉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남을 넘어뜨리지만 하늘이 보낸 왕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매달려 모든 사람을 살려줍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룬 하늘이 보낸 장자요, 지도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 존재를 바로 세워야 됩니다. 그 의식을 머리속에 심어야 됩니다.

한 번은 어느 회사에서 노조가 연말이 되어서 투표를 했습니다. 가장 존경받는 인물을 선정하는데 경비가 뽑혔습니다. 경비는 매일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자기 업무가 끝나면 회사에서 휴지를 줍고, 회사를 돌보고, 자기 할 일을 찾고 돌아가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그 회사의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돈 들이고 올라가는 자리가 아닙니다. 피나게 싸움할 것도 아닙니다. 이 교회의 지도자는 목사가 아닙니다. 통솔자, 통치자지 지도자가 아닙니다. 이 교회의 지도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기를 희생하면서 충생하는 자입니다. 가끔 교인들이 무릎을 꿇고 목사님, 축복해 주시죠.” 그럽니다. 장로가 목사에게 축복해 달라고 무릎 꿇기가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권사도 어렵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해달라고 하면 저는 그럽니다. “그대가 바로 하늘이 보낸 사자지

나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겼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님의 종으로 알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제가 무슨 축복을 받을만한 인물이 되겠습니까 자기를 낮추면서 무릎을 꿇은 것은 물론 사람 앞에 꿇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꿇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늘이 보낸 장자의 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하늘을 보아야 됩니다. 십자가에 달려 큰 마음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를 용서합니다. “아버지, 저들은 아지 못하여 그러하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그들을 덮습니다.

이 지구가 아무리 크다 한들 하늘이 덮고 있듯이 이 땅의 어떤 사람도 하늘의 마음을 가진 자가 덮어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의 막강한 가이사의 권력도, 빌라도 총독의 명령도 그 앞에 굽히지 않고 하늘이 내린 왕으로 지도자로 그들을 용서합니다. 이 위대한 예수님의 죽음을 본받은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주 예수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그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마음을 품은 스데반이 저들을 감싸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보낸 장자입니다. 스데반이라는 말은 면류관이라는 말이며 큰 자라는 말입니다.

장로님들은 모두 다 별세의 장자가 되십시오. 권사님들도 모두 별세의 장자가 되어 가정으로 직장으로 들어가십시오. 집사님들은 스데반과 같이 별세의 장자가 되어 서 있는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도자, 위대한 사람, 그래서 하늘이 보낸 자의 숭고한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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