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을 주님의 교회로
고린도전서 16:19-20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브리스길라 집사와 아굴라 집사 가정의 성도들까지 함께 문안을 드리고 있는 내용을 여기 담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19절)
사도 바울은 자기만 문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교인들과 함께 문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 가운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함께 문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라’ 하고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정처없이 갈곳이 없었지만 가까운 고린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가서 저들은 텐트를 치면서 살아갔는데 마침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사도 바울을 만나서 업이 같으므로 텐트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귀한 가정으로 함께 일을 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여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정을 특별히 사도 바울은 ‘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동역자는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나와 같이 선교 동역자요, 교회를 섬기는 목회 동역자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동역자를 찾고 있습니다. 동역자는 함께 일할 사람인데 지금까지는 목사 동역자를 찾는 목회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교인들이 목사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의 선교 동역자요, 목회 동역자요, 모든 면에서 교인들이 목사와 함께 동역하는 목회 형태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큰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들은 거의 교인들이 동역자가 된 교회입니다. 미국의 뉴호프 교회라든지, 새들백 교회라든지,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는 거의 교인들이 수천명씩 목사의 동역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들은 목회 전담 동역자는 몇 명 없습니다. 교인들이 시간을 내어서 교회에 와서 자기 은사에 따라 돕습니다.
은사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주보를 접는 사람, 주보 인쇄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주차 안내하는 사람, 식당 봉사, 가르치는 일, 양육하는 일, 안내하는 일 등 자기가 할 수 있는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동역자로 일할 수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동역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이들은 어느 정도로 동역자였느냐 하면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사도 바울의 목숨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동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형태로 사도 바울의 목숨을 구했는지에 대해 기록된 문헌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사도 바울이 이렇게 편지를 보낸 것을 보면 죽을 위기,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두 부부가 살려주었다는 것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교자 동역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충성스러운 가정과 함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문안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를 떠날 때 아무런 생계의 보장이 없었습니다. 저들을 맞이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단 하나 저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사명감으로 떠났고 낯설은 땅에 가도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함께 한 가족이 되어서 사귀어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특별히 자기가 살던 집을 교회 처소로 내놓았던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큰 빌딩이 세워져서 교회 건물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 보낸 문안 편지는 건물 교회가 아니고 성도들이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은 예배드려지는 교회당으로 처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신자들은 도시에 몇십 가정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 장소가 바로 개인 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기들이 살던 집을 예배 처소로 만들어놓고 교인들이 거기에 와서 예배드리고 잔치하고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브리스길라는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다가 교인들 먹이고, 예배드릴 수 있는 준비를 하는데 썼던 것입니다. 이 가정은 오직 교회를 섬기는 일에 다 투자했습니다.
저들은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갈 때 살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목적은 분명합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문안은 에베소로 갔다가 거기에서 바울과 함께 고린도 교회에 문안을 하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이 자기의 집을 전도의 센터로 만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역사를 보면 지금까지 한국의 수만개의 교회들 대부분은 장로님들이 자기 살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그 집을 다 교회로 내놓아서 오늘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빌딩 건물이 있었습니까 거의 다 초가집이었죠. 거기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그냥 그 집을 교회로 내놓는다든가 자기의 텃밭을 교회짓는 성전 부지로 기증해서 교회가 된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기들이 살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이사갈 때는 교회로 바쳤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가는 곳마다 ‘내가 어떻게 전도할까’ 그 생각을 했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30, 40년 근무하다가 올라갔다가 내려왔습니다. 올라가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런데 내려옵니다. 만약에 내 일생이 그것으로 끝났다고 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내 생에 무엇을 했든지 남는 것은 생명을 구원하는 전도로 남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가는 곳마다 전도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우리의 집을 예수님을 모시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집의 주인이다, 머리다 이렇게 모셔야 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절대 권위로 가장 존귀한 분으로 모시고 경배하는 가정이 되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빌딩에 모이는 교회를 공교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는 가정에 있는 교회입니다. 가정에 교회가 있는 나라는 흥합니다. 가정에 교회가 있는 사회는 평화롭습니다. 가정에 교회가 있는 세계는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가정에 교회가 있는 가문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반역하는 무서운 사탄의 역사는 가정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세계는 바로 가정적 교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가정에서 아버지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실 때 사장으로 모시는 법 없습니다. 사장 같으신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대통령 같으신 하나님도 없습니다. 대통령, 사장, 사회의 명성과 하나님을 비교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가 비교시킬 때는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 신랑 이 관계로 하나님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같으신 하나님,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게 됩니다. 또 신랑 신부가 화목하게 살 때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게 됩니다. 아들을 통해서 독생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하나님을 모시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회사에서 아무리 사장 노릇 잘해도 그것으로는 예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조금 인자한 정도지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그런 인자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장이라고 해서 성자되는 것 아닙니다. 예수 믿는 대통령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 아닙니다. 이런 것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형상은 가정에서만 나타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아버지라고 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자녀들 앞에서는 어떤 부족한 사람도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천당에 잘 가기를 원한다면 몇가지를 잘 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합니다. 부부간에 화목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목사와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언제나 사도 바울의 동역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이 관계만이 신앙을 온전케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세계기 때문에 반드시 부모는 가정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예배드리는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을 교회로 세우려고 할 때 부모님은 자녀들을 인도하는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서 “얘들아, 함께 모이자 예배 드리자” 하면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축복기도할 수 있는 아버지는 권위가 있습니다. 위대합니다. 부모의 권위 가운데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의 제사장적 축복권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축복했고, 이삭이 야곱을 축복했고, 야곱이 요셉을 축복했습니다. 부모가 축복하는 것보다 위대한 축복은 없습니다. “얘야 우리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이것은 아버지 됨의 위대한 권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자녀들에게 빌어주는 아버지로서의 제사장의 권위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어렸을 때 신앙으로 길러주어야 될 사명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사명을 부모가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어린 자녀들을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가르치는 스승적 사명을 다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오늘날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그것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주일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새벽기도 와서 어머니 혼자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기도하는 부모, 예배드려주는 부모가 더 신앙적으로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 부모가 될 때 가정을 교회로 세워주는 위대한 부모가 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끝으로 가정을 교회로 세울 때 그 인생의 최대의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사회가 구조조정이 일어나서 가정도 파탄이 일어나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면서 가정이 무너져서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가정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우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거품, 허영, 세상적인 물질로 엉켜져가기 때문에 그것이 무너지니까 가정도 무너집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비극은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400대의 안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가정은 400 가정 중의 하나 정도가 무너질 정도로 튼튼합니다. 그런데 일반 가정은 40대 1로 무너져갑니다. 물론 이혼율은 8대 1로 무너져가고 있지만 IMF로 말미암아 가정이 이렇게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의 가정은 든든한 것이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믿음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세 가지로 채워야 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야 됩니다. 그래서 집이라는 말은 건물이 아니고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일하는 집은 일집입니다. 학교는 배움집니다. 그러나 가정은 사랑하는 집입니다. 두 번째로 가정은 쉬는 집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안식을 주듯이 서로 편하게 하는 것이 최고의 안식을 주는 가정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집이 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게 되며 그리스도의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이 있기만 해도 편안해야 합니다. 청춘남녀들이 데이트를 하고 오면 제가 묻습니다. “만나보니까 어떻니?” “예, 편안합니다.” “그러면 되었다.” 그런데 “목사님, 만나보니까 아주 신경써집니다. 피곤합니다. 하루 몇시간 데이트 하고 와서 몸살 났습니다.”라고 말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짝이 아니다.”
가정에서 아내는 가족들을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남편도 가족들에게 편안함을 주어야 됩니다.
세 번째로 가정은 보화로 채워야 됩니다. 보화가 뭡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장롱 속에 금은보화를 가져다 놓으면 그것이 보화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보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많이 있으면 도씨만 찾아옵니다. 뭘로 채워야 되느냐? ‘상대가 나의 보화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그대 있음에 나는 만족하다.’ 이런 가정이 바로 집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 신비한 비밀입니다. 이런 행복이 금년 한해동안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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