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 데 반 의 얼 굴
성경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스데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역사에 길이 빛나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얼굴을 스데반의 얼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천사의 얼굴을 가졌던 사람, 이게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은 어느 개인적인 사람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을 최고로 나타내는 사람의 이름을 스데반으로 붙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면류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최고의 영광을 지닌 존재다 그래서 스데반 장로, 스데반 집사, 스데반 권사, 스데반 성가대, 스데반의 얼굴은 최고의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얼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인격을 표현하는 사람의 얼굴로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얼굴입니다. 인간에게만 하나님은 얼굴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똑같은 하나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각각 그 얼굴이 다릅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꼐서 만드셨기에 못생긴 사람도 없고 잘생긴 사람도 없습니다. 그대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누가 잘 생겼나 하고 전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배신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미인 선발대회 이런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각각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그대로 그 얼굴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얼굴은 천부의 것입니다. 내가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그대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눈썹 하나, 입술 하나 내가 만든 것이 없습니다. 물론 요즘 성형수술 해서 코도 고치고, 눈도 쌍꺼풀 하고, 얼굴 모양도 아름답게 고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내 얼굴은 창조의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나는 변형을 안시킨다’ 해서 생긴 그대로 유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요즘 성형수술이 나와서 인물들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들이 고쳐주어서 다 예뻐졌습니다. 성형수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나라가 한국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전부다 인물이 좋아졌습니다.
우리 아파트 아래층에 살던 부인이 있었는데 제가 봐도 주름이 많고 별볼일 없었는데 며칠 전에 보니까 얼굴이 훤해졌어요. 옛 인상은 가졌는데 그 분이 아닌가 할 정도로 예뻐졌어요. 그래서 제가 지나가면서 “요즘 부쩍 예뻐졌네요.” 했더니 옆에 지나가던 부인이 “예, 요즘 집수리좀 했습니다.” 그래요.
우리 자신들의 얼굴을 보면서 어떤 분들은 그런 생각이 날 것입니다. ‘기왕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인상이 좋게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자기 소원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신 인물에 대하여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얼굴 모양은 주셨지만 인상은 내 마음에 따라 표현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내 얼굴이 빛납니다. 마음에 근심이 싸이면 얼굴의 빛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은 마음을 표현하는 상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건강을 상징합니다. 내가 병들면 가장 먼저 병색이 얼굴로나타납니다. 기쁜 표정이 얼굴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고 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을 지니게 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인격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어떤 얼굴로 역사에 보여줄까 어떤 얼굴을 역사에 남길까’
서울에 관상을 잘 보는 유명한 무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에브라함 링컨 대통령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김동길이 에브라함 링컨의 얼굴을 스케치 해가지고 제자를 시켜서 무당에게 보냈습니다. 무당이 관상을 보더니 그러더랍니다. “잘 생긴 것은 없는데 존경을 받을 상이고 또 하나는 요절할 상이다.” 그것을 맞추는 것을 보고 김동길 교수님이 “무당도 공돈 먹는 것 아니구나!”
에브라함 링컨은 당시에 미국 사람들이 가장 못생긴 얼굴로 비난을 많이 했습니다. 대통령 출마했을 때 갖가지 비난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는 미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격 때문에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국사가 있을 때마다 링컨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럴 때 링컨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럴 때 링컨은 무슨 마음을 가졌을까’ 이렇게 링컨의 얼굴을 우러러보면서 저들의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긴 줄 아십니까? 성경은 예수님이 인간적인 얼굴로는 천하에 못쓰게 생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초상화가 있지만 원래는 그 얼굴이 아닙니다. 그때 당시에는 화가도 없었고 사진사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사람이 없어요. 다만 추상해서 그렸는데 예수님은 그 얼굴이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고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나이가 20이 되었을 때 얼마나 겉늙게 보였던지 유대인들이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8:57)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생겼든지 과연 자기 얼굴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스러운 얼굴이요, 하나는 부끄러운 얼굴입니다. 영광스러운 얼굴은 주님의 마음을 품어서 주님의 인격의 광채를 나타낼 때 영광스러운 얼굴이고 부끄러운 얼굴은 수치스럽게 살아갔던 얼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도소에 가면서 얼굴을 가립니다. 부끄러워서 그럽니다. 얼굴을 가진 인간에게 준 고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것입니다. 내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든지 무엇인가 잘못할 때 부끄러운 얼굴을 갖게 됩니다. 일생을 살면서 부끄러움이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부끄러움에 대해서 잘못 표현한 사람도 있습니다. 심방을 가면 가난한 사람들은 “집이 너무 누추해서 부끄럽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옷을 잘 못입었다든지 집이 초라한 것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내 인격이 주님의 형상을 닮지 못할 때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비근한 예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직분답게 살지 못할 때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할 때 부끄러운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답게 살지 못하는게 부끄러운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집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학생은 학생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대통령이 대통령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나의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실 때 ‘이렇게 살라’ 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얼굴의 부끄러운 것입니다. 얼굴은 서로 보며 살도록 만든 것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해서 내 얼굴을 들 수 없으면 부끄러운 것이요, 사람을 향해서 내 얼굴을 들 수 없으면 그것이 바로 부끄러운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영광스러운 얼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처럼 보였다’ 천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한 인간의 존재의 모습이 천사의 모습입니다. 원래 스데반이 성령과, 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 많은 기사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또 그 설교가 얼마나 유창한지 그의 설교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질투를 했습니다. ‘저 자가 도대체 배운 것도 없는데 어쩌면 그렇게 말을 잘할까 어쩌면 그렇게 능력이 있을까’ 하고 고소할 조건을 찾는데 그의 설교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허신 분이다.” 이 말은 육체를 헐고 다시 짓는다는 말인데 저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헐었다 또는 하나님을 모독한다. 예수님꼐서 율법을 완전케 하는 자라고 말하니까 율법을 뜯어고친 자다 이렇게 표현했다고 해서 고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최고의 의결 기관인 공회에 끌고 가서 그들이 거짓 증인으로 고발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데반을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한데 스데반은 그때 그 얼굴이 스데반과 같았습니다. 한쪽은 지옥에서 출장나온 것처럼 살기가 등등하고 한쪽은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가?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악한 자는 자기 악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 얼굴이 언제나 악한 상징을 나타내고 선한 사람은 그 마음이 선한 것 때문에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이 납니다.
스데반은 스데반의 마음의 가졌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상이기 때문에 스데반의 마음, 스데반의 생각, 스데반의 얼굴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일화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네오나르도다빈치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했던 그림을 그리려고 준비하는데 예수님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까 제자들의 얼굴을 어떻게 그릴까 하고 모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회에 가서 성가대를 보니까 한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그 사람을 모델로 삼아가지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네오나르도다빈치에게 하나의 고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모델을 찾아서 그렸는데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은 가롯유다의 얼굴 모델은 어디에서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러서 길을 지나가는데 술 취하고 험상궂은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를 데려다가 화실에서 모델로 그림을 스케치 하니까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이 전에도 나를 그리더니 왜 또 그리시오.” “당신이 전에는 그 얼굴이 너무 너무 빛나서 예수님의 얼굴로 그렸는데 오늘은 당신의 얼굴이 너무 너무 험상궂어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유다의 모형을 그립니다.” 그 말을 듣더니 그 사람이 통곡을 했습니다. ‘아, 내가 옛날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지녔는데 지금은 내 얼굴이 가롯유다의 얼굴로 바꾸어졌구나!’ 그가 술취하고 방탕하면서 증오심과, 악한 생각과, 불의한 생각을 그 마음에 담을 때 그 얼굴의 상이 그렇게 험상궂은 사람으로 바꾸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자꾸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워하면 그 얼굴이 예수님처럼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얼굴 가운데서 예수 믿는 사람의 얼굴이 아름답습니다. 마음으로 아름다운 생각, 주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인상이 밝아져서 일반적으로 어느 교회에 가든지 성가대가 그 교회의 스타들입니다.
대개 얼굴도 먹는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부자촌에 가면 얼굴이 다 예쁩니다. 그런데 가난한 지역에 가면 얼굴 예쁜 사람 드뭅니다. 우리나라도 옛날 60년대 사람의 얼굴과 90년대 청소년 얼굴은 완전히 다릅니다. 음식을 고급 식품을 먹으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미국 국무성에서 그런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왜 우리 청소년들이 타락하고 잔인해가고 두뇌가 동양인들에게 떨어져가고 있는가 지금 위대한 석학들이 동양인에게서 나오니까요. 연구해본 결과 너무 동물성을 많이 먹어서 비대하고 사람들 활동이 나쁘고 머리도 둔해진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쥐를 가지고 연구를 했습니다. 한쪽 그룹은 쥐를 넣어놓고 금식을 시켰습니다. 한쪽은 현미만 먹였습니다. 한쪽은 백미만 먹였습니다. 그런데 금식시킨 쥐들은 힘은 약했지만 윤기는 그대로 있었고 현미를 먹인 쥐들은 눈동자도 빛나고 윤기도 나고 생기가 있었고 백미 먹은 쥐들은 자기들끼리 싸워가지고 여덟마리가 죽었습니다. 식품이라는 것이 인간성과 용모까지 바꿉니다. 그래서 현미라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미용 식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먹으면 그 얼굴이 달라집니다. 왜 그러느냐? 대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건강에 있습니다. 미인도 건강해야지 병들면 미가 사라집니다. 우리 정신도 건강한 사람은 얼굴이 예뻐집니다. 심령이 말씀으로 충만하면 얼굴이 아름답습니다. 스데반이 원래 얼굴이 잘 생긴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니까 얼굴이 천사처럼 바꾸어진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비교적 다른 사람에 비해서 용모가 세련되고 인격적인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자매님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나는 화장법이 다릅니다. 언제나 내 입술에는 진실이라는 것을 바르고 나의 음성은 친절로 다듬어지며 나의 눈은 관심으로 화장을 하고 나의 손은 섬김으로 아름다워지고 나의 가슴은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놓고 나의 코는 신령한 하늘의 향기를 호흡하기 위해서 세우며 나의 미용 식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먹는 사람은 그 용모가 아름다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으므로 날마다 아름다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는 음식까지도 구별해 주었습니다. “너희는 식물성을 먹고 동물성을 먹을 때 굽이 있고 새김질 하는 고기를 먹고 굽만 있고 새김질 하지 않는 돼지고기는 먹지 말고 바다의 고기를 먹을 때도 비늘이 있는 것이나 지느러미가 있는 것은 먹고 그것이 없는 것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 먹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별할 때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굽이 있고 새김질 하는 것은 상향성입니다. 그런데 굽이 있고 새김질하지 않는 것은 하향성입니다. 고기도 폭포를 향해서 올라가는 고기가 있고 내려가는 고기가 있습니다. 올라가는 고기는 일반적으로 물 위에 뜨기 때문에 깨끗합니다. 하향성의 고기는 먹는 방법이 있습니다. 고아먹어야 좋습니다. 바싹 고아서 먹어야지 그것을 그냥 먹으면 중독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보는 것에 따라서 그 형상이 달라집니다. 스데반이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을 보고 있습니다. 부부도 서로 보면 볼수록 얼굴이 닮아갑니다. 예수님을 계속 보면 예수님을 닮기 마련입니다. 부부가 오래 살면 음식을 같이 먹고 같이 얼굴 보고 대화하죠 생각을 같이 하죠 그렇기 때문에 얼굴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신 교회인들이 부부 세미나를 연수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강사가 서로 예쁜 곳을 만져보라고 그래요. 그 다음에는 서로 마주보고 눈을 맞추라고 그래요. “서로 마주보고 앞으로 10분 동안만 쳐다보겠습니다.” 한 7분 쳐다보고 나니까 강사가 그래요. “지금부터 눈물이 날 것입니다. 눈물이 안나오면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산 것이고 눈물이 나오면 부부가 산 것입니다” 이제 큰일 났습니다. 눈물이 안나오면 안되잖아요. 교인들도 나를 다 쳐다봐요. 그런데 용하게도 10분동안 쳐다보니까 눈물이 쏟아져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만 나온 것이 아니고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연수원에 다녀온 사람들이 일생일대에 최고의 황홀한 감정을 가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부부가 40년 50년 해로해도 서로 눈을 맞추고 쳐다본 시간이 3분 정도도 안된답니다. 대개 눈을 흘기고 쳐다보고 열받쳐 쳐다봤지 사랑스러운 눈으로 눈을 맞추고 쳐다본 시간은 3분이 안된답니다. 그러니까 10분을 맞추었으니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죠. 저는 그때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내가 우리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내가 신부되어 눈을 맞추고 10분동안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쳐다보면 눈물만 나오겠는가 하늘의 불이 쏟아지겠지’
스데반이 왜 이렇게 얼굴이 천사처럼 되었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생각하니까 성령이 충만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얼굴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자들이 화장하는데 세 단계가 있습니다.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보면 자기 헤어스타일이라든지 얼굴 용모가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 얼굴을 세수합니다. 더러운 것을 씻어냅니다. 그리고는 크림으로 맛사지 합니다. 그래서 용모를 아름답게 합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얼굴을 거울로 보게 합니다. 거울은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자기 마음의 얼굴을 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경의 거울이 있는데 성경의 거울이 뭐냐? 예수님이 곧 우리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유리가 있는데 유리는 그냥 투영되기 때문에 잘 보지 못합니다. 은을 붙여가지고 자기 얼굴을 보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 나를 보게 하는 한 존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거울을 놓고 나를 보게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거울로 자기를 볼 때 자기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거울로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얼굴을 보면서 ‘아, 이런 것은 악하구나 이런 것은 죄를 지었구나 이런 것은 부정한 것이구나!’ 그래서 나의 죄를 내가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피흘리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십니다. 사함받은 우리가 그것으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약은 거울이요, 신약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요, 사도행전으로부터 교회 시대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주님의 아름다운 신부로 단장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면 아름다움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신령한 미장원입니다. 목사는 미용사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한주간동안 세상에서 지내면서 머리 헤어스타일이 구겨졌습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줍니다. 귀가 가렵습니다. 이것을 뚫어줍니다. 눈꼽이 끼었습니다. 이것을 닦아줍니다. 코가 막혔습니다. 이것을 열어줍니다. 입이 더러워졌습니다. 이것을 닦아줍니다. 가슴속에 더러운 생각을 품었습니다. 이것을 씻어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학교도 되고, 병원도 되고, 미장원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주일 한 번씩 다녀가면서 우리의 더러운 몸은 씻어내고 아름답게 단장하고 아름다운 옷으로 바꾸어입고 그래서 우리의 삶을 날마다 날마다 주님께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데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을 지녔기에 예수님이 스데반을 만났을 때 이렇게 합니다.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4-55)
스데반이 살기 등등한 자들의 돌로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스데반이 죽어서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는데 예수님꼐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 오니까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만약에 내가 이 모습 이대로 하늘나라에 간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 천사가 “주님, 하늘에서 아무개가 왔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모른다고 해라 그 사람만 생각하면 열받친다. 그게 교회 뭐라고 부끄럽다야 모른다고 해” 그럴 것인가 아니면 “누구라고? 어서 맞이해라 스데반의 이름을 가진 자가 오는구나!” 하실 것인가 성찰해 보십시오. 하늘나라에 갈 때 주님이 바로 알아보고 일어설 수 있는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것은 그 인격이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신성한 자존심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는 땅에서도 아무개 생각하면 머리속에 떠오르는 좋은 인상, 내가 하늘나라에 갈 때 우리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아름다운 자기 존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세울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이 왜 스데반이 되었습니까 스데반은 별세한 사람입니다. 살기 등등한 원수를 보았을 때도 그는 원수의 마음을 죽였습니다. 악한 생각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자기 정과 욕심을 죽여서 별세의 마음을 가졌기에 스데반은 별세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땅에 있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
천사의 얼굴을 지닌 스데반이 드디어 역사를 바꾸어놓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을 보았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눈을 감아도 ‘천사처럼 생긴 사람, 어쩌면 그렇게 원수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이 빛날까 왜 그럴까’ 그 영상이 지워지지 않아 드디어 사울은 사도 바울로 바꾸어집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으나 아름다운 주님의 얼굴을 지녔던 그 모습을 보았던 살기등등한 사울이라는 청년도 결국은 회개하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위대한 2천년 교회사를 바꾸어놓은 또 하나의 제자 사도 바울이 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자기 존재를 스데반과 같이 만들어 주님이 나를 만날 때 너무 감격해서 천국에서 일어서서 맞이할 수 있는 존재로, 그리고 역사에 나 때문에 위대한 제자를 탄생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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