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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늘 을 우 러 러 사도행전 7:54-60

by 【고동엽】 2022. 1. 3.

하 늘 을 우 러 러

사도행전 7:54-60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살다가 인생을 끝냅니다. 우리의 생이 끝날 때 어떻게 끝날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은 심각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마지막 내 생을 마칠 때 내 인생이 어떠한 자취를 남겼으며 어떤 흔적을 보이고 내가 한 생을 끝냈는가 성경 가운데서 가장 인생을 아름답게 끝낸 위대한 사람을 스데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면류관이라는 말입니다. 스데반은 그의 생애 마지막을 너무도 아름답게 끝냈기 때문에 예수를 닮은 사람이라고 지금까지 지칭해 왔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어떤 한 사람의 인격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그스도인의 최후의 인격은 이러해야 한다는 표본으로 하늘이 예정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우연히 생긴 사람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자기 노력으로 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정하셔서 스데반이라는 이름으로 한 그리스도인의 최대의영광스러운 모습을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자기 이름을 갖습니다. 이름은 일생동안 불러주기 때문에 이름을 잘 갖는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 이름대로 되기 때문입니다.그 이름을 스데반이라고 부른 것은 면류관, 다시 말하면 최고의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은 최고의 영광의 위치를 차지한 사람들이 쓰는 것입니다. 왕과, 왕의 사랑을 받는 사람, 운동 선수 중에서 챔피언 이런 사람들이 당시에 썼던 것이 면류관입니다.

면류관은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적 의미를 표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으로 최고의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위대한 생애였습니다. 물론 스데반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서 칭찬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설교를 잘했는지 그의 설교에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이 이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된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

여기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생애를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이 충만한 생애였습니다. 스데반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스데반은 철저하게 성령이 충만한 생애를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말씀은 스데반의 최후의 순교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예수님처럼 죽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예수님처럼 살기도 어렵지만 죽는 것을 예수님처럼 죽는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이것은 다른말로 말하면 스데반의 생애 전체가 예수를 닮았다는 뜻입니다.

평상시에 사람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기 생애 위기가 온다든지 손해가 온다든지 자기 생이 끝장날 때 본심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죽을 때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지 본심이 나타났는데 예수님처럼 나타났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일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을 때는 성령 충만하게 죽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열심히 성가대에서 봉사하다가도 섭섭한 일이 생기면 기분 나쁜 충만이 생깁니다. 열심히 교회 봉사하다가도 섭섭한 일이 생기면 섭섭 충만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그의 생애 마침이 성령 충만으로 끝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죽어야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성령 충만의 비밀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스데반이 바로 여기에 성령충만한 삶의 비밀이 있고, 그를 성령충만하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는 말과 성령충만은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성령이 충만했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들고 축사할 때 하늘을 우러러 축사했습니다. 또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여, 아들의 기도를 들으심을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여, 때가 되었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다락방에서 최후의 제사장적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가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셨던 예수님을 닮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우리는 매일 땅을 보고 삽니다. 땅을 보고 일하고, 사람 보고 살고, 전부 사람을 보고 삽니다. 일을 보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밤에 잠을 잘 때는 하늘을 우러러 잠이 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장 은혜를 받을 때가 낮에 일할 때가 아니고 잠잘 때입니다. 우러러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문제만 가지고 몸부림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스데반을 통해서 남겨주는 위대한 교훈은 하늘을 우러러 보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주목했다는 말은 집중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위에 세우시기 바랍니다.

 

먼저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러러 본다는 것은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날마다 집중해서 바라보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는데 무슨 하나님을 생각했느냐 영광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은 철저하게 영광의 하나님을 믿었고,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며, 영광의 하나님을 설교했습니다.

사도행전 7 2절 읽겠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그는 설교할 때도 영광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초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데반의 위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생각하지만 자기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스데반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영광의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무리들이 이를 갈고 달려들 때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저 원수의 무리에서 나를 보호하소서.”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데 스데반은 그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주여, 나는 죽어도 좋사오니 영광을 받으소서.”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나깨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영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고 물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죽는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는다는 생각을 않습니다. 성공할 때 성공의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실패할 때의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는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떨어지는 목적은 뭐냐 거기에는 대답이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살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산다는 목적을 두었다면 죽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아니하면 사는 것도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살아서도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다고 말했습니다. 인도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른 것이 아니요 영광의 하나님이 불렀다고 평소에도 그렇게 믿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도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은 가난해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습니다. 실패해도, 환난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은 성공이나 실패나, 부요나 가난이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실패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실패를 기쁘게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는 내가 쓰러지면서 실패할 때 그것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아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고의 실패는 목적의 실패인데 그것은 영광을 상실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스데반은 우러러 위대한 주님을 보고 있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56)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인자 예수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사랑의 위대한 정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여러 형태의 주님으로 그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도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도 있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인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아들이 되었나 그것은 죽으려고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예수를 볼 때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를 본 것이 아닙니다. 또 보좌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인자 예수를 보았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 그 인자를 본 것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은 위대한 사람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원수를 용서하되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대속물로 피 흘리면서 원수를 용서하듯 인자 예수를 보고서야 그 사랑을 받고 용서의 스데반이 된 것입니다.

스데반은 믿음에 있어서 스데반이었습니다. 또 사랑에 있어서 스데반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60)

마지막 그는 돌에 맞아 쓰러져 힘없이 나약하게 땅에 뒹굴고 있습니다. 머리가 깨지고, 등이 부서지고, 살점이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힘을 다하여 무릎을 꿇었습니다. 위대한 스데반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 나약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받아야 할 심판에 대한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물과 피를 다 쏟은 것은 자기 전 힘을 다하여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다 쏟은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그냥 누워서 죽어도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힘을 다하여 무릎을 꿇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듯 끝까지 원수를 용서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하늘을 우러러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너무 인간적이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한채 그냥 쓰러져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기분 나쁘면 다 식어버립니다. 하늘을 우러러 있는 사람은 끝까지 하늘을 우러러 있는 것입니다.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 이것도 하늘을 우러러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원수를 용서할 때 인자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인자 예수는 사랑의 예수입니다. 희생의 예수입니다. 그 예수를 닮아서 원수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닮는데는 직분이 필요없습니다. 주일학생도 닮은 사람이 있고 목사도 닮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닮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이 목표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그가 죽을 때 5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59)

그는 마지막 최후로 하늘을 우러러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아버지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하신 것처럼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마지막 예수님의 최후의 순간의 모습을 스데반이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내 영혼이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우리의 긍휼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낮에 일할 때는 땅만 보고 일합니다. 땅을 보지 않고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잠잘 때는 하늘을 쳐다봅니다. 내가 잠들 때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늘을 우러러 잠이 듭니다. 잠자는 시간은 하늘을 보면 눕습니다. 날마다 잠자리에 누울 때 하늘나라를 생각하고 내가 가야할 아버지 집을 그리워하고 잠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꿈을 꾸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수도하신 스님들이 임종이 가까웠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장좌입적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목사는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을 받지만 이런 면에서는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일생동안 주님을 바라보고 산 종이 그렇게 될 수 없을까 하고 자리에서 앉아보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7년동안 개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 개가 7년 넘으니까 노쇠해서 며칠 전부터 끙끙 앓더니 마지막 수하를 다해서 죽는데 아침에 새벽기도를 가려고 하니까 주인의 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죽더랍니다. 그 목사님이 그것을 보고 개를 만지면서 개야, 너는 나보다 선하다. 마지막 죽을 때 내가 주님을 향해서 너처럼 죽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마음도 뜻도 생각도 모두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을 수 있다면,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래서 그날 새벽에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죽을 때 무릎을 꿇고 그냥 누워서 힘없이 죽어도 될 것을 있는 힘을 다해서 주여하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애 모든 것이 다 주께로 내 마지막 영혼도,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도, 내 생의 좌표까지라도 주님을 위해 세울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그래서 믿음도, 사랑도, 우리의 소망도 하늘을 우러러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그래서 그는 스데반이라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위대한 그의 생애 때문에 짧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은 위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울이라는 청년이 살기가 등등해서 증인의 한 사람으로 거기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후에 스데반의 신앙을 전수받아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됩니다. 스데반의 최후의 영혼의 향기가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스데반의 죽는 불멸의 미소가 하나님의 얼굴처럼, 천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사울이라는 청년을 감동으로 휘몰아 이천년 교회사를 지금도 흔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늘을 우러러 살 때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어느 곳에서든지 하늘을 우러러 사는 자에게는 스데반의 위대한 영광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모두 다 스데반의 놀라운 영성이 가슴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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