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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나사로/누가복음 16:19-31

by 【고동엽】 2022. 1. 3.

부자와 나사로/누가복음 16:19-31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소원을 갖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늘 땅의 부요를 누리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모든 인간의 행복과 좋은 것은 다 부자들의 것이고 불행과 슬픔은 다 가난한 자들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것은 저주요, 불행이며 부자로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고 모든 우리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2 2절에 보면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이 세상에서 괴로움이 있고, 탄식이 있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편안한 것도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날마다 근심 가운데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병은 다 있습니다. 부자도 병들어 죽으며 가난한 자도 병들어 죽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부자 가난한 자 모두 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운명의 본질적인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자냐 가난한 자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있느냐 안믿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부자 불행한 것입니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잘 믿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비유는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한없는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말씀을 보면 부자는 호화로이 연락하다가 죽었고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간에서 헌데를 앓으며 고생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천국에 갔고 부자는 하나님 없이 살다가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는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가 거기에서 이렇게 호소합니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사로를 보내서 나는 몰라서 여기에 왔지만 너희들만은 절대로 이 지옥에 와서는 안된다.’ 이렇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을 합나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세상에는 많은 선지자들도 있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할 것이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누가 가서 얘기한다 한들 소용이 없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부자의 고통과, 나사로의 영화로운 모습이 우리 눈에 생생하게 비춰올 줄로 믿습니다.

저는 18살에 폐병이 들어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당시에 폐병이 들면 죽는 때였습니다. 날마다 피가 넘어오고 몸이 너무 너무 쇠약해서 병원에 가서 검사한 결과 폐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입니다. 백방의 약을 먹고 노력해도 가난한 집에서 영양도 부실하죠, 요양도 되지 않죠 그러니까 낫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대로 살 수 없으니 죽자하고 다량의 약을 준비했습니다.

밤에 죽으려고 눈을 감았는데 제 눈앞에 지옥의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해골떼들이 아우성치는 환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데 제가 너무 너무 두려워서 눈을 떴습니다. 눈을 떠도 그 환상이 비췄습니다. 그래서죽지를 못했습니다. ‘죽어도 이렇게 지옥에 빠진다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삼일밤이나 죽으려고 했어도 지옥의 환상 때문에 죽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지옥의 환상은 제게 너무 너무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옥의 환상이 왜 나타났느냐? 그것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 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철인, 성자들의 명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예수 가라사대하면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제가 그때 그것을 읽으면서 , 지옥이라는 곳이 이렇게 무서운 곳이구나!’ 하면서 어린 마음에 지옥에 대해 두려운 생각을 가졌는데 제가 죽으려고 하니까 그 생각이 머리속에 환상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죽지를 못하고 제가 삼일동안 자살연습을 하다가 끝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자라고 해서 주님이 책망하지 않습니다. 또 가난하다고 해서 칭찬하지도 않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축복받아서 부자된 자가 있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부자되는 것 얼마나 좋은 것입니다. 또 자기가 성실해서 부자되어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으면서 좋은 집에 사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가난한 것도 저주받아서 가난한 것이 있습니다. 죄 짓고 가난해지는 것, 게을러서 가난해진 것은 마땅한 것이요, 이것은 저주받은 가난입니다. 그런데 선하게 예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가정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세상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살았던 위대한 성빈의 사람들과 같은 가난은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말씀에서 부자라고 해서 찬사를 보내지도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칭찬한 일도 없습니다. 다만 현세적 삶 속에서 부자나 가난한 자를 인격적으로 평가할 뿐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삶의 처절한 현실을 그대로 그려놓았을 뿐입니다.

여기 부자는 좋은 것을 다 가졌습니다. 좋은 옷을 입었으며, 좋은 집에 살았고, 그는 호화로이 지냈습니다. 나사로는 친구도 없고, 병들었으며, 굶어죽어가는 거지였습니다. 그는 병이 들어 헌데를 앓고 있었고, 그의 잠자리는 부자의 대문간이었고, 그의 음식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 살았지만 둘 다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흙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으며 모두 다 결국은 똑같은 나라에서 똑같은 통치를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부자, 가난한 자 어떤 형편에 처했든지간에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는 부자라고 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돈은 인간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으로 옷은 살 수 있으나 인격은 돈으로 못삽니다.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으나 밥 맛은 돈으로 못삽니다. 돈을 가지고 약은 살 수 있으나생명은 돈으로 못삽니다. 돈 가지고 침대는 살 수 있으나 돈으로 잠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세계 일주는 할 수 있지만 천국은 돈으로 못갑니다. 인간이 돈을 가지고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단 하나 마음의 평안, 양심, 천국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살 수 있지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부자는 호화로이 연락했지만 그것으로 행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부자는 많은 재물을 가졌으나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지 못했으며 자색옷과 고운 베옷은 입었지만 주께서 주시는 의로운 옷은 입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환락을 나눈 친구들은 많았으나 하늘 우편에 계신 대언자이신 예수가 없었습니다. 호화로운 연락은 했으나 생명의 떡은 먹지 못했으며 그는 날마다 주지죽림에 빠졌으나 결코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화려운 궁전에서 살았지만 영원한 하늘나라에는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부자는 죽었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무덤과 함께 그의 인생은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하나님 없이, 그리스도 없이, 은혜와 믿음이 없이, 용서와 거룩함이 없이 그는 잠시의 세상을 이기적으로 살았으며 그리하여 그는 아무런 희망이 없이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의 비극은 하나님이 없이 살았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나사로는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빈곤한 자였습니다. 그는 집도, 돈도 없었고 굶주렸으며 병을 앓고 있었고, 심지어 옷 조차 변변치 못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가 있다고 한다면 개 뿐이었습니다. 그의 거처는 부자집의 대문간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불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는 영광의 상속자였습니다. 영속하는 재물과 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자기 집으로 삼고 소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좋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친구로 모셨습니다.

그는 가장 좋은 음식을 먹었으니 하늘나라 생명의 양식을 먹었으며 그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부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살아있을 때에도 이런 은혜를 간직했고 죽었을 때도 그 은혜를 그대로 무덤 너머에까지 가지고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나사로와 함께 동행했던 것입니다.

나사로나 부자나 함께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5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면 이 자리에 앉아있을 사람은 몇 명이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년 몇 사람 외에는 다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가기 싫어도 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는 죽음이 휘몰아 올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공평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부자도 죽었고 나사로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한번 살다 가는 세상 죽으면 끝장이나 살아있을 때 마음대로 살자이것이 부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줄기차게 인류가 생긴 이래 역사가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는 음성입니다.

성경은 선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으나 어떤 사람은 손바닥 만한 땅 한평 없이 전셋집으로 전전긍긍 하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둘 다 죽었을 때는 단 한 두평의 땅 속으로 고이 들어갑니다. 부자라고 해서 무덤은 넓게 깔고 누워있지만 그가 들어가는 땅은 한 평입니다.

진시황도 죽었고, 한 때 호령하던 이방원이도 죽었으며, 돈 많은 이병철씨도 갔고, 한 때 호령하던 박정희 대통령도 갔습니다. 다만 우리의 인 생이 끝났을 때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죽어 땅에 묻혔습니다. 아마 그의 장례식은 호화찬란했을 것입니다. 생전에 그가 누린 호화로운 삶에 어울리는 장례식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장례 행렬은 끝이 없었을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만가를 들고 그의 뒤를 따랐을 것이며 수많은 거지떼들도 무엇을 얻어먹으려고 뒤를 쫓았을 것입니다. 무덤은 호화분묘로 높이 쌓아 올렸고 그의 비석은 산처럼 솟아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죽었을 뿐입니다. 그는 죽어서 지옥으로 갔습니다. 불꽃 가운데 고민하는 탄식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장사되었는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제 추측에 의하면 부자집의 머슴들이 가마니에 그를 감싸가지고 것입니다. 공동묘지 어디에 내던졌을 것입니다. 그의 장례 행렬을 따르는 조문객이 있다고 한다면 개가 유일한 조문객으로 그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분명히 나사로에게는 하늘로부터 파송된 조문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파송해서 그의 육신은 저 공동묘지에 내던져질지라도 그의 영혼은 네가 모시고 오너라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부자의 뒤에는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 나사로 뒤에 그 말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 뒤에는 천사가 늘 동행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파송된 천사가 동행하고 있으며 마지막 내가 숨질 때 내 영혼을 받아서 주께로 갈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요. 내가 비록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일지라도,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못올랐을지라도, 남들이 나를 멸시하고 천대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천사가 옹위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는 날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보내신 거룩한 천사의 손에 받들려 갈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사로라는 말은 하나님을 기대는 자, 하나님을 의존하는 자성도라는 말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가난하게 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살지라도 낙심하지는 마십시오. 부자로 못산다고 해서 탄식하지 마십시오. 노력해서 잘 살 수 있다면 잘 사십시오. 그러나 내가 물질적으로 부요하지 못하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탄식하지는 마십시오.

나사로는 분명히 위대한 사람입니다. 부자는 호화로이 살고 나사로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삽니다. 빈부의 격차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진수성찬으로 술과 온갖 호화로운 음식으로 잔치를 배설하고 성경에는 없지만 주변에 날마다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사로는 불평이 없습니다. 그는 말이 없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은혜와, 천국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부자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습니다.

부자를 시기하지 마십시오. 질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좋은 것을 가졌으니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남이 5천만원짜리 1억짜리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눈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옷을 입었으니까요.

혹시 이 가운데 부자를 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탄식하는 분이 있습니까 회개해야 됩니다. 이것은 자기 믿음없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바로 고백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자신을 가난하다고 저주하지 마십시오. 탄식하지 마십시오. 멸시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자로 못가는 나라, 돈으로 못가는 나라 천국이 우리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나사로가 천국에 가 있을 때도 부자가 정신을 못차리고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다가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 같으면 저 자가 죽어서도 정신을 못차리네. 이게 어디라고 까불어 내가 네 종이냐 내 손가락에 물을 찍어다가 네 입에다 넣게얼마나 한번 해댈 자리입니까 주여, 불을 열배나 뜨겁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전날에 대문간에서 가난하게 살 때 나를 얼마나 천대했습니까 얼마나 무시했습니까 저 자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심판하시되 뜨겁게 심판하소서.“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입을 딱 다물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거기에 개의치 않습니다. 심판은 주의 것이니까요.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은혜 위에 은혜를 더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자야말로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자입니다. 이 믿음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전에 제 고향에서 근근이 살던 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분의 먼 삼촌뻘 되는 분이 이 동네 천석군이었습니다. 그 집에 가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근근이 살다가 어떻게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올라와서 장사해가지고 저축해서 봉천동에 집을 샀는데 좋은 집을 사가지고 그가 옛날 친척들을 다 불렀습니다. 옛날 그 천석군 친척도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부모님이 물려준 재산 다 없애고 겨우 집 한 칸 가지고 살다가 옛날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 하던 그것이 봉천동에 집 지었다고 해야 뭐 있겠나하고 갔는데 대문간에 가보니까 문간이 으리으리 해요. 그리고 촌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문을 열 수가 있어야지요. 뒤에 오던 사람이 벨을 누르니까 문이 찰칵 열리는데 이 분이 따라 들어가서 집을 보니까 으리으리 하거든요. 그래서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랍니다. 안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는데도 아무 즐거움이 없어요. “아저씨, 왜 그러십니까?” “글세 내가 어째 좀 이상하네.” 그 날로 돌아가가지고 쓰러졌습니다. 사촌 집 산 것이 배가 아파서 쓰러져 가지고 중풍에 걸렸습니다.

나사로는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인정 사정없는 부자에 대해서 전혀 불평이 없었습니다. 전혀 원망이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그의 생에 하나님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고, 하늘나라의 영광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아무것도 불평하지 않는 믿음의 부요, 이것이 바로 나사로의 행복이며, 믿음이며, 위로인 것입니다.

유명한 플루머는 나사로는 불을 인간에게 불공평하게 나누어 준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았으며 부자가 돈을 그릇되게 사용한 것에 대하여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가 낙원에 간 후에도 부자의 고통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부자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대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산 자는 결코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합니다.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다가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할 때 너는 땅에서 좋은 것을 가졌느니라

너는 땅에서 좋은 것을 가졌다는 말은 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좋은 것으로 알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좋은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나에게 좋으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믿으십시오. 나의 좋은 것은 천국에 있다고 믿으십시오. 나의 모든 좋은 것은 오직 주 안에 있다고 믿으십시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지옥에 가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보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다 나사로가 간 그 나라에서 그 행복, 그 영광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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