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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칼/출애굽기 17:8-16

by 【고동엽】 2022. 1. 3.

여호수아의 칼/출애굽기 17:8-16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곧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인류 문화를 파괴하고, 인명을 살생하는 인간의 잔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악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인류 역사에서 사라져야 할 절대악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이 지구상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가간의 전쟁이 있고, 동족간에도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비극은 동족간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한 민족이면서 서로 원수 맺고 죽이는 전쟁, 이것은 6.25의 한국전쟁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올해로 6.25의 전쟁이 그친 지 49년이 되었습니다. 거의 반세기에 걸쳐서 전쟁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6.25 이후 그동안 한 피 받은 형제요, 동족이면서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원수로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전 세계 역사에 그토록 비참한 전쟁은 찾아보기 어려운 전쟁이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친구를 원수로 삼는 전쟁, 이것이 바로 6.25의 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은 곧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인간의 가장 잔인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곧 오늘 읽은 말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성경 가운데서 최초의 전쟁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 한국의 6.25 전쟁의 뿌리가 여기에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모든 국가 전쟁이 결국 이 말씀에서 출발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전쟁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모든 전쟁의 승리에 대하여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출애굽을 해서 첫 번째로 한 전쟁이 바로 이 전쟁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 당하는 전쟁이면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신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는 모세가 바로와 일대일로 대결했습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대일로 대결을 한 것입니다. 모세와 일대일로 대결을 해서 바로를 꺽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나왔습니다.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번째로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전면전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있고 모세 혼자 바로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면전에 들어갑니다.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8)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아말렉의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아말렉이라는 뜻은 전쟁을 좋아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말렉은 누구냐? 창세기 36 12절에 보면 에서의 손자가 아말렉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자의 명분을 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에서의 후손이 아말렉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누구냐? 야곱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여기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싸움은 에서의 후손과 야곱의 후손의 싸움인데 소급해서 올라가면 형제인 야곱과 에서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족, 형제간의 싸움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형제가 원수가 되었고, 전쟁의 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도 있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형제였는데 이들이 서로 싸우고 죽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전쟁을 누가 먼저 공격했느냐는 것입니다. 아말렉이 먼저 공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방어형이고 아말렉은 공격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싸움에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미리 결과를 말한다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16)

아말렉과 이스라엘이 싸우는데 싸움은 하나님께서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싸워주므로 이스라엘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기는 것은 이스라엘이 싸움을 잘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심으로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승리의 비결을 두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10)

여호수아가 싸우고 모세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들어서 전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전략이 백성들이 나가서 육박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칼날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산꼭대기에 높이 올라가 손을 들고 있고 여호수아 혼자 칼날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인데 싸움은 둘이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13)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라고 했을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칼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칼이 전쟁을 하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칼날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전쟁은 시작인데 이 세상에 있는 전쟁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특수한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전쟁,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전쟁이 있고 하나님 백성의 전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싸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에 대한 주의 말씀입니다.

모든 전쟁을 승리하려면 고지를 점령해야 합니다. 고지를 점령해서 거기에 포를 가져다 놓아야 산 밑으로 포를 쏘아서 전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꼭대기를 점령하라는 것입니다.

여기도 보면 모세가 산꼭대기를 점령하는데 모세가 왜 산꼭대기에 올라갔느냐? 손을 높이 들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무기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칼날은 전쟁의 현장에서 칼날을 쓰는데 성경이 여호수아의 칼 하나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말렉 백성들을 다 쳐버렸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떻게 전쟁을 했을까요? 백성들은 전쟁에 나가기는 나갔는데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를 보고 있습니다. 산꼭대기를 보는데 산꼭대기에서 어디로 포를 쏘느냐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산꼭대기에서 모세의 손이 올라가기만 하면 전쟁에 이기니까 박수치고 만세하는 것이죠. 여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머리속에 추상해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손만 들고 있고 여호수아의 칼날만 움직여가지고 전멸시킵니다.

이 전쟁에서 저는 놀라운 비밀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아말렉과의 싸움은 곧 영과 육의 싸움입니다. 여기 아말렉은 육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돈 벌고 배를 채우는 것이 전부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일날 아침에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하면서 영이요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공산당은 주일날 아침에 육이요하면서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을 누가 이기느냐? 우리가 이겼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쳐서 다 이겼습니다.

공산당과 싸워서 이긴 나라가 없습니다. 공산당과는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당이 쳐들어오면 공산당이 이깁니다. 중국, 월남, 소련이 다 이겼습니다. 그런데 망할 때는 전쟁해서 공산당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망합니다.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니까요. 성경이 여호와께서 아말렉을 쳤다고 했습니다. 공산당은 아말렉의 족속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싸움은 곧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곧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영과 육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는 이스라엘과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려고 하는 에서의 후손들과의 싸움인데 이것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싸움인데 영의 사람들은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들을 이기게 하시므로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승리를 우리에게 주님께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우리 안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으로부터 물려진 사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에서 난 것이 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자녀됨의 본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 17절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지금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갈 때 교회를 가야 한다는 성령의 소욕이 있고 가지 말라는 육체의 소욕이 있습니다. 일찍이 가야 한다는 성령의 소욕이 있고 조금 천천히 가라는 육신의 소욕이 있습니다. 주일날도 세상의 날로 바꾸려는 육체의 소욕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전쟁, 국가간에 일어나는 전쟁도 있지만 우리 안에 매일같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신의 정욕이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체내도 끊임없이 적혈구와 백혈구의 싸움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전체가 다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1-24). 이것은 자기 안에서 싸우는 갈등을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의 적이 내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원수로 알고 싸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부모가 원수인 줄 알고 부모와 원수 맺고, 또 형제와 원수 맺고, 직장 동료와 원수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적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적을 발견하는 것이 최대의 발견이며, 자기와 싸워서 이긴 승리가 최대의 승리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생동안 다른 사람과 원수맺고 싸우면서 살았으나 아무도 이긴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와 싸워 이긴 자만이 영원한 승리를 자기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여기 모세는 전쟁에 나가지 않습니다. 산꼭대기에서 손만 높이 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의 승리의 비밀은 다른 사람과 육체의 정욕으로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남이 나에게 사기쳤다고 나도 사기치고, 남이 나를 미워한다고 나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남이 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나도 도적질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는 끝까지 기도로 이겨야 합니다.

또한 여호수아 예수라는 뜻인데 여기 여호수아의 칼 말씀의 칼을 말합니다. 말씀의 칼로 자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모든 아말렉이 든 칼은 남을 죽이는 칼인데 예수의 칼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남 죽이는 칼이 있고 자기를 죽이는 칼이 있는데 세상의 칼은 다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여호수아의 칼은 자기를 죽이는 칼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아말렉을 쳐서 파하는 칼, 이 칼이 최고의 칼인데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칼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은 최대의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와 싸우지 않습니다. 일생동안 다른 사람과만 싸웁니다. 자기와 싸워서 승리한 위대한 승리, 이것이 바로 아말렉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아말렉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속에 육신의 정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라는 말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고 지배자는 다른 사람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배자는 언제든지 패배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을 이기는 사람이 또 나오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이고 권좌를 차지한 사람은 결국은 자기도 무너집니다. 그러나 자기를 이긴 사람은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최대의 승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승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달릴 때 능력이 없어서 달린 것이 아닙니다.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얼마든지 예수님은 이 무리들을 다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권능으로 얼마든지 무리들을 다 짓밟아버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스스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자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별세의 승리이며,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어떤 부인이 교회에 와서 능력을 받기는 받았는데 무슨 능력을 받았느냐? 자기 남편과 싸우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은혜가 충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남편을 향해서 설교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설교로 남편을 정죄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이 작전이 남편한테 안먹히니까 40일 작정기도를 시작했습니다. 40일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여, 우리 남편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돌아오게 해 주시옵소서. 저렇게 술 취하고 방탕한 내 남편이 빨리 주 앞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옵소서.”

40일동안 작정기도를 하는데도 남편이 돌아올 생각을 안합니다. 부인이 낙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작정한 것이라 40일동안 기도를 하는데 마지막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딸아, 네 남편이 구원받는 때와 기한은 묻지 말고 너는 성령이나 받아라 성령이 네게 임하면 권능을 받는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된다.” ‘내가 죽어야지그래서 자기가 죽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권능이 두 가지 있습니다. 남 죽이는 권능이 있고 자기를 죽이는 권능이 있습니다. 남 죽이는 권능은 아말렉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칼로 죽이는 권능입니다. 자기 죽이는 권능은 성령의 권능입니다. 말씀의 권능입니다. 믿는 자의 권능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그날 아침에 자기가 죽어야 되겠다는 것을 깨닫고 집에 돌아와서 남편을 보니까 전에는 남편을 싸움의 대상으로 봤는데 이제는 긍휼의 대상으로 보였습니다. ‘알지 못해서 술 마시고, 인생의 사는 목적을 모르니까 저렇게 방탕하고, 삶의 의미를 모르니까 저렇게 허탄한데 매여있으니 내 남편은 불쌍한 사람이다.’

전에는 남편을 볼 때 눈을 부릅뜨고 봤는데 이제는 남편을 볼 때 긍휼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부인이 잠자는 남편에게 가서 여보, 일어나셔야지요.” 하니까 남편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들리니까 눈을 떴습니다. 보니까 자기 아내가 자기 옆에 있는거라 남편이 자기 아내 눈동자를 보니까 눈동자가 얼마나 부드러워졌는지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눈이에요. 별세의 눈이에요. 또 음성이 별세의 음성이에요. 그때 남편이 자기도 눈에서 살기가 빠지더랍니다. 그렇게 독기로 아내를 보던 눈이 살기가 빠지는데 부인을 보니까 부인이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그리고 밥상을 차려오는데 무릎을 딱 꿇고 잡수시죠.” 그래요. 옛날에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물었습니다. “왜 이래?” “당신이 불쌍해서 그래” ‘저것이 죽을 병이 걸렸나알 수가 없는 것이죠.

남편이 밥을 먹는데 별세의 밥을 먹는 것입니다. 한번도 그런 밥을 먹어본 일이 없습니다. 부인의 눈물이 섞인 밥을 먹으니 그 밥이 세상에 있는 밥입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죠. 그 밥을 먹고 출근하는데 부인이 따라나오면서 안녕히 다녀오시죠.” 하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절 받고 출근해가지고 술이 넘어가겠습니까 절 받은 사람은 술을 못먹습니다. ‘내가 절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날로 술이 안넘어갑니다. 술 안마시고 일찍 퇴근했습니다. 퇴근해서 돌아오니까 또 문 앞에 서서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 아내가 나에게 절을 해주다니 내가 이렇게 살 수 없다.’ 그때부터 그 인생이 완전히 바꾸어졌습니다. 한달만에 부인과 함께 교회에 나왔습니다. 울어도 안되고, 설교해도 안되었는데 자기를 죽이고서야,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서야 남편을 주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최대의 승리입니다.

못된 여자는 일본으로 보내야 합니다. 일본 여자들은 얼마나 서비스가 좋습니까 하이 하이하면서 너무 너무 친절하니까 일본으로 보내야 합니다. 못된 남자는 미국에 보내야 합니다. 미국은 무엇을 하든지 레이디 퍼스트니까 미국에 보내면 됩니다. 여자도 못되고, 남자도 못된 사람은 한신교회로 와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자기를 이기면 둘 다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그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능력의 주님이, 그렇게 위대하신 주님이, 그렇게 의로우신 주님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여자가 똑똑해도 똑똑한 것을 죽이고, 남자가 잘났어도 자기를 죽여서 상대를 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여서 우리 모두를 살렸습니다.

이 싸움을 배웠던 위대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원수들이 자기를 미워해서 돌로 쳐 죽이지만 스데반은 예수님에게서 배운대로 저들을 원수로 삼지 아니하고, 저들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저들과 싸우지 않고 자기를 쳐서 죽입니다.

그 옆에 서 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스데반의 얼굴을 보면서 저가 사람인가 천사인가 어떻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저 얼굴이 저렇게 빛날 수 있으며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용서하며 복을 빌어줄 수 있단 말인가 저는 분명히 사람이 아니구나!’ 하면서 놀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고 칼을 들고 가던 사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순간에 그는 거꾸러졌습니다. 하늘로부터 빛이 내렸습니다. 그때부터 사도 바울을 남을 죽이려고 했던 칼을 버리고 예수를 영접하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자기를 죽이고 드디어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싸워야 할 대상이 자기인 것을 알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삶으로 일관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네로와도 싸우지 않았으며 자기를 죽이는 원수와 싸우지 않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위대한 승리자로 이천년 교회사를 빛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위대한 싸움을 하라고 주님께서 불러주셨습니다. 이 싸움은 6.25의 싸움도 아니요, 일본과의 싸움도 아니요,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전쟁, 이 전쟁이 오늘도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싸움으로 우리 육체의 질병도 이겨야 합니다. 사탄의 무서운 정욕의 육체를 병들게 하고, 내 심령을 상하게 하고, 내 영혼을 죄짓게 합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육신의 정욕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가인과 에서의 혈통으로부터 물려온 저주스러운 것들이 내게 무서운 병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술 마시고 방탕한 조상의 혈맥이 우리 속에 흘러들어와 우리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사소한 것으로 싸우고 죽이던 조상의 감정들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병을 유발시켰으며,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했으며, 내 영혼을 병들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므로 이기십시오.

또 하나 말씀의 칼이신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진리로 이 사탄의 모든 권세를 제어하면서 승리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자유, 평화, 가정의 화목, 형제간의 우애, 이웃간의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닛시입니다. 이 승리가 십자가 상에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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