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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를 찾습니다/사도행전 11:24-26

by 【고동엽】 2022. 1. 3.

바나바를 찾습니다/사도행전 11:24-26

 

성경 가운데 이름없이 큰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받으면서도 그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한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잘 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면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다가 조용히 사라져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바나바가 없었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도 없었을 것이며, 13편의 바울서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라는 인물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있었고, 13편의 바울서신이 기록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선교의 업적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바나바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서 바나바를 찾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24)

이러한 칭찬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최고의 찬사며,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바나바의 신앙인격은 결과에 있어서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6)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많은 무리들을 가르쳤는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는데 결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안디옥 교회는 이방땅에 선교사를 통해서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저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제자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이방 땅에서 제자가 나오는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안디옥에서 많은 무리를 가르쳤는데 그때 제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위대한 제자는 바나바에게서 나왔습니다. 위대한 제자의 모습을 바나바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바나바가 있는 곳마다 많은 사람을 살려놓는 위대한 사건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도 바나바를 찾고 있습니다.

성경은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4:32-37)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지어준 이름이고 그 사람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여기보면 바나바는 구브로라고 하는 지중해에 있는 섬에서 태어나서 유대인의 레위 지파속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에서 많은 농장을 소유한 대지주였는데 그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추측컨대 예루살렘에 와서 명절을 지키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아래 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맡겨서 당시의 교회에 필요한대로 쓰도록 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요셉에게 바나바라는 이름을 지어주는데 바나바 바르나비스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권위자라는 말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분명히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본 이름은 없어지고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바나바라는 이름은 개인적인 이름이 아니고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살려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은 바나바가 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평신도였지만 사도라는 칭호를 갖게 됩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여기까지는 바나바라는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 후에는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바울로 바꾸어집니다.

이와같이 바나바는 평신도입니다. 그는 특별히 주님에게서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도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는 사도의 전승을 받아서 위대하게 살았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를 사도 바울과 함께 사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나바가 왜 이렇게 위대한 사람이 되었느냐? 그것은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의 성품이나 성격 때문에 된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믿음에 따라서 착한 사람이 되었고 결국 그는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라는 말은 바나바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바나바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합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옆에서 돕는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보혜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도와주셨으니까요. 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쓰신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 요셉이라는 사람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서 그의 생애가 바나바 생애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를 누가 썼느냐? 하나님께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쓰시려고 예정하실 때 바나바를 먼저 세웁니다. 사도 바울이 있기 위해서는 바나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어서 바나바가 되게 하십니다. ‘네가 바나바가 되어라 그래야 바울같은 위대한 사도가 너 때문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떻게 사도 바울이 되었느냐? 이것이 신비한 비밀입니다. 사도행전 9 26-27절 보겠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스데반이 죽을 때 옆에서 증인들의 옷을 들고 서서 스데반을 죽인 자들과 함께 살기등등하게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예수 믿는 자들을 처단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려고 했던 악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사도 바울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본질적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이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다.’ 그래서 상대를 안하려고 합니다. 그가 은혜를 받았지만 주위에서 그가 은혜받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 그 먼 길을 걸어서 사도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이 분은 이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하면서 신원을 보증합니다.

바나바는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에게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를 인정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므로 바나바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줍니다. 그래서 사울이 드디어 제자들과 교제를 합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런 변화가 있게 됩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9:28)

드디어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함께 동행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함께 출입할 때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인정하게 됩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9:29)

본토 유대인이 있고 헬라파 유대인이 있는데 이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일을 누가 했느냐? 배후에서 바나바가 다 했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만약에 바나바가 없었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의 위대한 사도적 사역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25-26)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목사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그가 얼마든지 선교적 사건을 놀랍게 이루어서 영적 사역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생각합니다. ‘나 보다도 바울이 와서 하면 더 좋겠지그래서 바울을 초청해서 세웁니다. 이것은 바나바의 위대한 사역입니다.

바나바는 함께 일하면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도와주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놓은 것입니다.

저는 제 생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제가 바나바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바울적 목회를 집중적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께서 너도 바나바와 같이 일하라하시므로 내가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바나바 목사가 되어야지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성도는 바나바 성도가 되어야 하고, 목사는 바나바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 교회의 문제는 서로 높아지려는 사람만 있지 배후에서 남을 높이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반장만 하려고 합니다.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있었습니다. 반장 아이가 병이 들어서 입원했습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같이 병문안 가자고 하니까 안간다고 그러더랍니다. 왜 안가려고 하느냐고 하니까 그가 죽어야 내가 반장하지하더랍니다.

전부 대통령, 반장하려는 사람만 있지 밑에서 보좌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인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동업을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높여주고 세워주는 일,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신 일이고, 성령께서 하신 일이고, 성령께서 요셉을 변화시켜 바나바를 만들어 하신 일이고, 지금도 이 일을 할 수 있는 바나바를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교회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가정, 직장, 사회 어느 곳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들은 내가 남편을 격려해주는 바나바 아내가 되어야지하는 마음을 갖고, 남편들도 내가 아내를 격려해주는 남편이 되어야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사에 가서도 내가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바나바가 되어야지이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가장 좋은 어머니는 바나바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살려주는 일로 일생을 삽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역이 보혜사가 하는 일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일생동안 자녀를 낳아서 길러주고, 보호하고, 도와주면서 일생을 마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다 바나바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을 잘 격려해서 살려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전 성도가 다 바나바가 되어야 합니다.

며칠 전에 한 순원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우리 순장님을 좀 격려해 주시죠.” 그래요. “?” “우리 순장님이 상당히 낙심되어 있습니다. 제가 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목사님께서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수십년 목회하면서 자기 순장님을 격려해주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난 4월달에 분당 민족성전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월요일날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교인들이 오지 않을까봐 걱정되어서 교구장들한테 전화하라고 야단났을텐데 그날은 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야지 어쩔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했는데 성령께서 편안하게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버스를 타는데 할머니 한 분이 아들 우산을 쓰고 2차에서부터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어머니, 비도 오고 길이 미끄러우니 오늘은 가시지 마세요.” 하고 그렇게 말려도 아니다. 내가 가야한다. 이렇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목사님이 얼마나 초조해 하시겠니 내가 자리를 채워야 한다.” 하면서 아들에게 빨리 가자고 하더랍니다. 저는 그 할머니 이름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얘기를 들으면서 , 이 할머니는 목사를 격려해주는 위대한 여종이시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여종이 배후에 있었기에 그날 제 마음이 그렇게 편안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밤에 성도들이 많이 왔습니다.

제가 요즘은 가끔 나약한 생각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무능한 목사, 교인들이 네 설교를 듣지 않겠다고 안온다.’

지난 수요일 밤에는 좌석이 텅텅 비어 있어요. 제가 그것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물러서라 교인들이 네 설교 듣기 싫어서 안나온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하나는 주일날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아가지고 TV를 봐도 은혜가 쏟아지고 누워서 잠을 자도 은혜가 쏟아지니까 아예 안나오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전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후자인데 제 입장에서는 후자 생각은 안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너무 낙심이 되어서 힘없이 서 있으니까 2차에 살다가 송파로 이사갔는데도 밤 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집사님 한 분이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 힘 내시죠.” “, 힘 내겠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물질을 통해서 주는 자로서의 바나바였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가난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들은 빈곤한 자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에 예루살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오순절에 와가지고 은혜를 받고 고향에 안간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 은혜받고 예수 믿게 된 후에 고향 땅에서 핍박을 받고 실직자가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버림 당하고, 가정을 떠나고, 직장을 잃게 되니까 예루살렘에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이것을 보고는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내놓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급식하시오.”

직장을 잃어버리고, 가정을 떠나서 예루살렘에 모여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된다고 하면서 재산을 팔아서 제자들의 발 아래 놓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바나바야말로 진짜 바나바다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질을 가지고 와서 사도들의 손에 주어가면서 할 수 있는데도 발 앞에 갖다놓습니다. 자기 존재를 완전히 발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물질을 가지고 당시에 초대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바나바처럼 쓰여지기 바랍니다. 바나바라는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위로의 물질로 쓰라는 말입니다. 바나바가 되려고 하면 나의 물질이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을 봐야 합니다. 교회는 굶주리고 헐벗고 낙심되어서 위로를 기다리는 자에게 위로의 손을 펴주는 물질로 써야 합니다.

어떤 분은 그럽니다. “목사님, 밀알헌금 많이 해서 은행에 저축해가지고 이자로 결손가정을 도와주십시다.” 이것은 죽은 물질입니다. 이자로 남을 도와주는 것은 죽은 물질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담아줄 때 거기에서 사건이 나는 것입니다. ‘은행에 돈을 넣고 이자로 장학금을 준다.’ 그것도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돈은 죽은 돈입니다. 이자로 장학금을 주어서 공부한 사람중에서 인재가 나온 역사가 없습니다. 자기의 적은 것이라도 쏟아줄 때 거기에 정신이 들어가므로 인물이 나옵니다. 공부하는 것이야 국가에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을 살려주어야 됩니다.

가난한 자에게 사랑의 손길로 빵을 먹여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혀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고, 병든 자를 찾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는 것이 바나바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선 자리에서 과연 내가 바나바처럼 살아야 되겠다는 감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큰 돈 벌어서 선한 사업 하거나 목돈 모아서 자선사업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 모아서 은행에 저금해서 남을 구제하는 것 아닙니다. 현재 있는 작은 것을 가지고 사랑을 담아서 낙심되는 자를 찾아서 점심 한그릇이라도 나누면서 따뜻한 얘기를 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객과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16:14-15)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24:19-21)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26:12)

객은 나그네요, 고아는 부모없는 아이들이요, 과부는 신랑없는 사람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사회적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바나바 물질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부흥될 때 예루살렘 모교회가 가물어 흉년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친히 헌금을 모아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합니다. 이런 위대한 정신이 우리속에 타올라야 됩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의 한 성도일 뿐 아니라 전 성도가 바나바가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 전도의 문이 열렸으며, 바나바가 있는 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왔으며, 바나바가 있는 곳의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모두 다 교회를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들어가는 곳마다 바나바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울로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어느 직장, 어느 가정, 어느 사회든지 바나바가 들어가서 수많은 사람을 살려놓아야 합니다.

바나바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믿은 새신자 사울을 찾아서 먼저 사도 된 주님의 제자들에게 소개를 하듯이 교회에 처음 나온 새신자들에게 먼저 믿은 사람이 바나바로 그를 찾아가서 격려해주고 그에게 용기를 주면서 먼저 믿은 사람에게 가까이 하도록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바나바는 새가족을 통해서 교인과 화목을 이루어줍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사울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를 데리고 가서 화목시켜 줍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에게 일을 맡깁니다.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가서 일을 하도록 맡겨줍니다. 우리의 생애에도 바나바와 같이 위대한 사역이 계속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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