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Άλλα σε προετοιμασία

구원받은 자의 감사

by 【고동엽】 2022. 1. 3.

구원받은 자의 감사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위대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양식을 먹으며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능력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의 위대한 삶의 모습을 하박국 선지가 우리에게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는 주전 700년경 앗수르의 침략을 받기 전에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어느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 계시 가운데 들려온 음성이 바로 16절이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하박국 선지가 전쟁의 경보 소리를 듣습니다. 적군이 쳐들어 온다는 계시를 받게 될 때 하박국 선지는 내 창자가 흔들렸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심령 깊은 곳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두려움 때문에 입술이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는 이런 말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 뼈가 무너지는 아픔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의 경보를 통해서 그에게 보여주는 참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7)

전쟁으로 말미암아 적군들이 완전히 국토를 황폐화시키는 참담한 모습입니다. 원래 중동지방의 침략자들은 침략하면 과수나무를 다 잘라서 불살라버립니다. 다시는 저들이 먹고 살 수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화과 나무는 양식으로, 포도나무는 음료수로, 감람나무는 기름을 짜서 먹는 나무들인데 이것이 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완전히 폐허 된 강산에서 먹고 살 길이 없는 저들의 비참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저들은 한 마디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8)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갖는 신앙고백입니다.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즘 상황에 비추어서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실직자가 되며, 사업이 부도나고, 공장은 문을 닫고, 굶주리고 헐벗으면서 길거리에서 헤매일지라도 하나님을 인해서 즐겁게 살 것이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최고의 은혜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감사는 우리의 구원받은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복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 있으면 감사하고 없으면 불평하는 것입니다. 조건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좋은 조건이 주어지면 감사하고 조건이 없으면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건도 없고, 아무런 복받은 것도 없고, 물리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 이것은 바로 구원받은 자의 신앙고백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조건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은 하박국 선지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방의 부자요, 정직하고 순결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환난이 휘몰아 옵니다. 당시에 그는 양이 7천이요, 낙타가 5천이요, 양이 천마리요, 나귀가 5백마리인 대재벌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욥의 모든 재산을 다 불사르고 약탈해갔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비추어서 말한다면 외양간에 있는 소와 우리에 있는 양이 다 약탈당했습니다. 또 집에 있던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큰 아들 생일 잔치에 모였다가 태풍이 불어서 집이 무너지면서 다 몰사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보통 사람은 이런 일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욥은 일어났습니다. 그가 일어나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1:21). 하박국 선지의 고백대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는 고백입니다.

보통 사람은 주면 좋아하고 빼앗기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빼앗긴다 할지라도 하나님 한 분을 모셨기에 그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며 만족하는 삶의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뇌성마비로 태어났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송명희 양의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남들처럼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고, 건강이 없지만 남이 갖지 못한 하늘의 음성, 신령한 세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감격하는 삶, 이런 부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다가 문둥병자 열명을 만났습니다.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할 때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희가 가다가 문둥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하시고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내 마음속에 감사가 있을 때만 그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감사가 없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앙도 감사는 살아있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죽은 구원은 감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확증을 감사로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우리의 모든 삶의 즐거움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자족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것을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것이 행복한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은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요, 불평하는 사람들은 지옥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감사는 행복의 연습이며, 불평은 불행의 연습이다. 불평하면마귀가 자리잡고 감사하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된다.’

현대인의 병은 감사의 빈곤에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조건을 찾으면 얼마든지 감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있는 자에게 더 있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감사가 있으면 계속 감사가 늘어나고 불평이 있으면 계속 불평이 늘어납니다. 불평을 늘리면 지옥이 되고, 감사를 늘리면 천국이 됩니다.

옛날 우리 어린 시절에는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전부 펌프로 물을 올렸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펌프질을 하면 물이 안나오는데 부엌에 가서 물 한 바가지를 가져다가 펌프에 넣고 펌프질을 하면 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우리 심령 속에 감사의 물 한 바가지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면 감사가 펑펑 쏟아질 줄 믿습니다. 내 입 속에 감사의 말 한마디만 넣으면 연속해서 감사가 나옵니다. 불평의 쓴물 한마디만 넣으면 불평의 쓴물이 나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이 복입니다. 어떻게 즐겁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즐거운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을 보아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는 천국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생각하면서 현실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발표되고 또 최근에 영국에서 발표된 것이 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즐겁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수명이 7년 더 길고, 밤 예배 나오는 사람은 8년 더 길고, 수요일 밤 예배에 나오는 사람은 9년 더 길고, 심야예배에 나오는 사람은 10,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은 계산할 수 없답니다. 왜 그러느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이 이 세상 어디에 가서 마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한 번 웃을 때 내 속에 있는 엔돌핀이 나와서 암세포를 죽이고 우리 속에서 병을 유발시키는 세포들을 죽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 6만불짜리 시계를 제가 가졌는데 그 시계를 제가 차야 합니까 안차야 합니까?” “당신도 이제 인생이 복잡해졌소. 그것을 안차고 그냥 놓아두자니 아깝고, 그것을 차자니 불안하고, 또 그것을 장롱 속에 놓아두자니 도둑이 들어와서 가져갈 것 같고... 갈 데는 한군데밖에 없소. 바치시오. 시계는 아무데나 벗어 놓아도 걱정없는 것을 차야지 비싼 시계를 차면 나에게 짐이 됩니다.”

삼중고를 겪었던 헬렌 켈러가 자서전에서 쓴 글 가운데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한 번만 저 무지개를 볼 수 있다면

내가 단 한번만 떨어지는 낙엽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단 한번만 산속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나에게 한번만 우리 목사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나의 삶을 바꾸었던 감동스러웠던 이 성경을 단 한번만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저 지는 해 석양노을을 단 한번만 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보고, 듣고, 말하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흘간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게 한다면 얼마나 보고, 듣고, 말한다는 것을 감사할까 하루동안만 눈을 멀게 하셔서 답답함을 알게 하시고, 하루동안만 귀를 멀게 하셔서 답답함을 알게 하시고, 하루동안만 벙어리 되게 하사 말못하는 아픔을 알게 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감사하며 살 수 있겠는가

우리가 가진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가 넘칩니까? 눈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듣는 귀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입, , 두 발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자가용 가운데 최고의 자가용이 몇 호인지 아십니까? 11호입니다. 이 자가용은 세계에 없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가용입니다. 감사는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19)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 높은 곳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은 천한 사람입니다. 높은 곳에서 사는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높이 되려고 합니다. 회사에 가서 사장님, 학교에 가서 교장님, 군대에 가서 사령관님, 정치계에서는 높은 권좌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높아져도 땅에서는 도토리 키재는 것입니다.

여기 높은 곳은 어디입니까?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을 누리는 곳입니다.

사슴이 밑에 있을 때는 계속 포수의 추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높은 곳에 오르면 포수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기 때문에 추격을 받지 않습니다. 사정권 밖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되 보통 은혜를 받으면 언제나 이 세상의 환난에 흔들립니다. 그러나 큰 은혜 받으면 저 창공 높은 곳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비바람이 치나, 어두운 구름이 끼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창공 높이 올라가면 구름이 밑에 있습니다. 구름 밑에서는 비가 내립니다. 바람이 붑니다. 그런데 구름 위는 잔잔한 햇빛이 비췹니다. 은혜를 받되 낮은 은혜를 받으면 비바람에 시달립니다. 찬바람 불면 괴롭습니다. 환난이 오면 웁니다. 그러나 높은 은혜를 받으면 환난이 오나, 역경이 오나, 시험이 오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는 신앙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생물들의 변화를 보면 신기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비가 애벌레로 있을 때는 땅에서 기어다니면서 땅의 것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어느날 집을 짓고 날개를 달고 나올 때 창공 높이 날으면서 이슬을 먹고 향기를 마시면서 노래하며 삽니다.

세상의 타락한 죄인들이 교회라는 집에 들어오면 교회에서 신앙의 날개를 달아줍니다. 그 날개를 달면 창공 높은 곳을 날면서 하늘의 신령한 이슬을 먹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마십니다. 그리고 노래하면서 감사하면서 사는 거듭난 신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높은 경지에 오르는 신앙, 이것은 곧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사슴처럼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은 바로 감사의 능력이며, 기도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귀한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지옥같은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감옥을 천국의 별장으로 바꾸어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감사의 찬송을 통해서 삶의 현장을 천국으로 바꾸었습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을 감사로 바꾸는 축복의 잔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됩니다. 그래서 감사의 떡을 들므로 말미암아 나의 삶을 축제로 바꾸며, 나의 삶의 현장을 천국으로 바꾸며, 삶의 현장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곳을 행복하게 만들어가야 됩니다.

성찬은 구원받은 자의 감사의 떡이며, 삶을 잔치로 바꾸는 신비이며, 저 높은 천국으로 이끌어가는 무한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성찬을 받았습니다. 이 성찬의 능력으로 저들은 감옥에 살면서도 기뻐했고,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하며 갔으며 자기를 죽이고 괴롭히는 핍박자들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들은 죽으면서도 기쁘게 웃으면서 갔습니다. 이 성찬이 바로 감사의 잔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초대 천주교 100년 역사에 보면 그때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제자훈련도 없었습니다. 함께 모여서 예배도 못드렸습니다. 다만 중국에서 들어온 신부들이 성찬을 나누어 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 이 감사의 잔 때문에 저들은 가난해도 감사했으며, 핍박해도 감사했으며, 쫓기면서 추방을 당해도 유리하는 신세속에서도 감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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