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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감정의 치유/에베소서 4:26-27

by 【고동엽】 2022. 1. 3.

상한 감정의 치유/에베소서 4:26-27

 

사람들은 감정이 상할 때 터뜨리는 분노가 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우리 속에 타고 있는 불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길이 탈 때 잘 연소되면 빛이 되고 열을 내어서 폭발적인 힘을 갖습니다. 그러나 잘못 타면 연기만 나서 다른 사람 눈에서 눈물을 내고 주변을 어둡게 하고 주변을 불살라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 가운데 분노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26-27)

오늘 이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는 분을 내어도이것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분을 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를 짓지 말며분을 내어도 죄는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안지을 수도 있고 지을 수도 있는데 죄짓는 일은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귀로 틈타지 못하도록 자기가 치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분노하는 인간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분노는 하나의 감정입니다. 분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내 속에 타오르고 있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분노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그래서 이 분노가 악한 동기에서 나오는 분노가 있고 선한 동기에서 나오는 분노가 있는데 선한 동기는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볼 때 진노하십니다. 이것은 선한 분노입니다. 또 하나 불의한 것을 보았을 때 우리 속에 타오르는 분노는 선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선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는 대개 욕구 불만에서 옵니다. 그래서 내 속에 욕구가 불만될 때 표출되는 울화라든지 고뇌, 불쾌, 긴장, 이런 모든 상태가 곧 분노의 상태인데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이것을 라고 말합니다. ‘는 불이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불만이 내면화될 때 화병이 됩니다. 이런 분노를 일으키는 요인이 가중될 때 분노가 격노로 변해서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분노는 그것의 표현이나 작용하는 대상에 따라 자학적 분노와 타학적 분노가 있습니다. 자학적 분노는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행동이나, 원인이나,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이 나면 머리를 쥐어뜯는다든지, 가슴을 친다든지, 통곡을 합니다. 이것은 분노를 자기가 책임을 지고 학대하는 것입니다. 격한 감정이나 행동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고 마음속에서 억누르면서 참고 인내하는 내성적인 상태입니다. 성숙한 인격자일수록 평범한 요인에 의한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 드물지만 혹 일어난다 할지라도 드러내지 않고 발을 구른다든지 혼자 탄식한다든지 하면서 분노를 삭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분노는 타학적입니다. 분노의 책임을 전적으로 타인에게 돌리고 격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물건을 던진다든지, 문을 쾅 닫는다든지, 사람을 때린다든지, 욕설을 한다든지, 멱살을 잡고 죽인다든지 이런 이런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분노의 폭발을 밖으로 터뜨리면서 다른 사람을 학대하는데 그러지 않고 내면화할 때는 이런 징조로 나타납니다.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싸우면 분노를 침묵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1년동안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밖에 초조, 원한, 비통, 증오, 이를 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분노가 어떤 일을 통해서 나타날 때는 과속을 한다든지, 직장에서 권위에 도전한다든지, 근무를 의식적으로 태만하게 한다든지, 대개 이런 것으로 나타납니다. 화가 났을 때 주먹으로 손을 때리면서 나 화 안났어그럽니다. 이것은 화는 났는데 자기는 모르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용납하는 분노가 있는데 운동선수들이 분노가 나면 그 분노를 운동경기로 표출하기 때문에 이깁니다. 한국은 축구할 때 일본 사람만 만나면 이깁니다. 다른 나라와 하면 지는데 일본하고만 하면 이깁니다. 그것은 일본은 감정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같은 축구를 하더라도 일본만 하면 밤새도록 악을 씁니다. 속에 있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받을 때 화가 난 주부는 남편에게 대들지 못하니까 남편이 출근한 후에 집안 청소를 합니다. 그리고 설거지를 세게 합니다. 그리고 빨래를 해가지고 남편의 옷을 털 때도 세게 텁니다. 또 옷을 다릴 때도 세게 누르니까 주름이 칼처럼 잡힙니다.또 어떤 날 남편이 화를 내고 가면 세탁이 잘 됩니다. 화풀이로 세탁을 하기 때문입니다.

분노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위장 된 감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화내는 것은 나쁜 것이야, 무조건 참아야 돼그러면서 참는 것은 위장된 분노입니다. 분노가 위장으로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 속에서는 상처가 깊어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위장된 분노는 꼭 우표를 수집하는 것처럼 수집해서 쌓다가 마지막 한 장이 오면 팔아 넘기는 것처럼 분노가 쌓이다가 어느 사소한 것이 하나 걸리면 그 쌓였던 모든 것이 폭발하게 됩니다. 침묵하는 위장이 있습니다. 화가 났지만 전혀 말을 안합니다. 또 냉소나 비판적인 분노의 적대감으로 위장합니다. 눈을 흘긴다든지, 비웃는다든지 하면서 분노를 위장합니다.

수동적 공격성으로 토라진다든지, 고집을 피운다든지, 약속을 어긴다든지, 남의 의견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으로 표출하는 분노가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은 에너지처럼 축적되거나 변형되어 존재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억악하고 그 존재는 부정해도 용해되지 않는 응어리로 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체내에 지방이 쌓이듯이 분노가 어디든지 풀지 아니하면 내 속에 쌓여서 자기를 위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축적된 분노가 결국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습니다. 자기 속에 축적할 때는 병으로 나타납니다.

미국의 권위있는 심리학자 헨리 브랜튼은 모든 비정상적인 사람의 상담을 분노에서 80-90%를 보고 있습니다.

병이 든다는 것은 무서운 것인데 제가 관악교회에서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나를 억울하게 할 때 병이 터지는데 치질로 터졌습니다. 변비가 생기면서 한달만에 치질이 생겨가지고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분노가 내 속에 쌓일 때 어떤 면으로든지 터져야 되는데 병으로 터졌습니다.

노르만 D교수는 억압된 분노는 당신에게 심한 두통, 여러 가지 병을 주는데 목이 굳어진다든지, 구토, 위궤양, 설사, 궤양성 대장염, 가려움증, 피부질환, 천식, 호흡장애, 동맥, 혈정증, 중풍, 이것이 다 분노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든 안내든 이것이 쌓이든지 표출되든지 이 속에 분노가 생겨서 병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존 헌터라는 생리학자는 이 분은 연구 발표에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화 내면 화 내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 이것이 이 분의 명강의로 유명한 것인데 마침 그날 따라 강의를 하는데 앞의 사람이 일어서더니 헌터씨에게 반박을 합니다. 그런데 헌터씨가 갑자기 분노하면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자기가 강의한대로 화내는 자가 먼저 죽는다는 것을 임상실험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를 울화로 터뜨릴 때 뇌출혈, 고혈압, 대뇌동맥경화증, 뇌졸중, 중풍으로 나타납니다. 화내면 시력이 나빠집니다. 그리고 억압된 분노는 사고형이 됩니다. 문을 쾅 닫다가 제 손가락이 다친다든지, 기분 나빠서 운전하다가 자기가 사고낸다든지, 하기 싫은 망치질을 하다가 자기 손을 친다든지, 이것이 억압된 분노로 인해 자기가 당하는 사고입니다.

우리는 분노가 저지르는 무서운 질병, , , 이런 것들을 다 알아야 됩니다. 성경의 분노가 곧 죄의 출발입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이 분노로 살인이 시작됩니다. 최초의 범죄가 창세기 4장에서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것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것은 거절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것은 거절당하고 아벨의 것은 열납되니까 얼굴색이 변하면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들 가운데서 동생을 쳐 죽입니다. 이것이 분노가 저지르는 최초의 죄악이었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자체는 죄가 아닌데 이것이 이기적인 미움과, 원한과, 보복으로 드러날 때 무서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분노는 죄 된 생각이나 행동으로 발전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악이 없더라도 해가 지도록 품으면 결국은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의가 없는 분노, 가령 불의한 것을 보았을 때 분노가 나면 그것으로 끝나야지 자기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나쁜놈 같으니라고하면서 다음날까지 그 마음을 품고 있으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헤치거나 모욕을 줄 때, 돈을 떼었다든지 할 때 속에서 증오심이 타오릅니다. 보증을 서 주었더니 집까지 날라버렸어, 직장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퇴출시켜버렸어 그럴 때 분노와 원한이 사무칠 때 이것을 승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잘 조절하지 아니하면 자기가 결국은 죄를 짓고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분노를 많이 터뜨린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세 번 크게 분노를 더뜨립니다. 한번은 청년시대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어서 궁궐에 있을 때 자기 백성들이 일하는데 애굽인이 와가지고 자기 백성을 마구 때려요. 그때 민족적 의분심에서 애굽인을 쳐서 죽입니다. 그리고 모레 속에 묻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탄로되어서 드디어 모세가 도망을 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연단을 받습니다. 그는 의분심에서 죽였을지라도 그의 분노였습니다.

또 하나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동안 금식기도 하고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습니다.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오는데 밑에서 황금 우상을 만들어가지고 춤을 추면서 노래를 합니다. 그때 속에 분노가 치민 모세가 십계명 석판을 던집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부셔서 가루로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마시우게 합니다. 모세가 한 일이 정의로운 의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분이 나도 석판을 옆에 내려놓고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발로 차든지 했어야 할 것인데 십계명을 부쉈다는 것은 모세가 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가 므리바에서 자기 백성들이 목말라 죽는다고 원망할 때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20: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명령대로 모세가 지팡이를 잡고 반석 위에 섰습니다. 백성을 보니까 모세의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수십년 이렇게 이끌어 왔는데 너희가 끝까지 나를 원망할 수 있느냐하는 마음이 들면서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반석이 깨지면서 물이 솟아올라서 백성들이 물은 마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20:12)

모세는 이것으로서 분노한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축복은 하나님의 거두지 않았습니다. 단 한가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드디어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손 들었습니다. 그리고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한 모세는 결국 그 대가를 받았습니다.

저는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모세가 왜 그렇게 분노가 있었을까 물론 성격상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질이 있습니다. 모세는 다혈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성장 과정에서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이 애굽인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출산할 때 여자면 살려주고 남자면 다 죽이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런데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바로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때 바로 왕이 모든 신민에게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1:22) 하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안있다가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용모가 너무 준수한지라 3개월동안 숨겨두고 있다가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때 마침 바로 왕의 딸이 하수에 목욕하러 갔다가 모세를 발견하고 궁으로 데리고 왔는데 보니까 히브리인이라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모세의 여동생 미리암이 얼른 바로 왕의 딸에게 가서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2:7)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의 유모가 되어서 모세를 기르게 됩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기르면서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눈을 맞출 때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모세야, 너는 애굽인이 아니다. 천덕꾸러기인 이 백성의 한맺힌 소리를 들어라 이 백성의 눈물을 닦아야 한다. 너는 아브라함의 피묻은 자손이다. 네 피속에는 선민의 피가 흐른다.”

이런 분노에 찬 모세의 어머니의 마음이 모세를 만지고 젖을 먹일 때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어렸을 때부터 분노가 그 속에 잠재되어서 그런 분노를 유발시키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우리는 분노가 나에게 잠재될 때 죄도, 질병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무서운 결과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분노가 승화되면 인격을 폭발적으로 위대한 일을 해내는 건설적인 힘이 됩니다. 마치 홍수가 내려서 도시를 쓸어버리면 도시가 다 파괴되지만 이것을 잘 조절해서 댐으로 흘러내리면 수력발전이 되어서 수많은 어두운 땅을 환하게 하는 빛이 되고 힘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에 순장공부를 하면서 몹시 화를 냈습니다. 화낼 일도 아닌데 화를 냈습니다. 화를 내고 제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원에 들어가서 잠잠히 묵상하는데 그 묵상하는 동안 성령께서 계속 울게 하셨습니다. 길을 걸어도, 앉아도, 사람 만나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올까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때 저는 내 속에 있는 성인된 아동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잠잠히 주님께 이 자존감의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성령께서 저를 데리고 어린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네 감정의 표출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제 병의 뿌리를 주님께서 찾아주셨습니다.

저는 어린시절부터 참으로 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도 부모님 뜻에 불순종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절대 순종입니다. 반항이 없습니다. 형제간에도 다툰 일이 없고 친구들과도 싸운 일이 없습니다. 군생활 하면서, 또 제가 결혼해서 저희 집사람과 싸운 일이 없습니다. 가끔 한번씩 있기는 있지만 시시한 다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하면서 저에게 감추어진 분노가 표출되는데 그것이 꼭 목사와 전도사에게만 표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와 전도사들에게 말할 때 꼭 화난 음성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돌아서면서 속으로 내가 사랑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인데 왜 말을 퉁명스럽게 할까그럽니다. 퉁명스럽게 말해도 그 속에 악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또 만나서 회의를 하면 또 퉁명스러운 말투가 나갑니다. 이런 말투가 두 군데에서 나타나는데 또 한 군데는 우리 아이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제가 이번에 기도원에 있는 동안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제가 어린시절을 회상할 때 내 속에 잠재되어 분노하고 있는 성인 아동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잠재된 감정이 의식 속에 쌓여서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성장과정에서 우리 아버님은 어른이시고 나는 아이였는데 우리 아버님이 저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도박을 즐기셨습니다. 제가 어머니와 함께 여러 번 아버지를 찾으러 밤에 도박장에 간 일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도박은 잘 하셨지만 따지는 못하고 잃기만 하셨습니다. 그것도 맑은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술만 드시면 도박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 아버님 주위를 항상 도박꾼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렇게 도박을 여러 번 했지만 한번도 돈 따 가지고 왔다는 말을 못 들어봤습니다. 도박을 했다 하면 전부 다 잃는데 술이 깨면 돈을 다 잃어버린 감정이 얼마나 상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속에서 상한 감정이 자식들에게 화난 음성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속에 잠재되어 갔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자랐으니까요. 제가 그것을 알아낸 것입니다. 제가 화를 낼만한 사람도 아닌데 제 속에 있는 어린아이의 상한 감정이 잠재되어 있다가 표출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제 아들에게 공부 못한다고 세차게 혼만 냈던 것을 기억하고 영국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이야, 지난날로 돌아가자 혹시 네 아버지가 너에게 언어상 상처를 준 일이 있으면 용서하고 잊어다오. 내가 어린시절로 돌아가보니 잠재된 성인아동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더구나. 용서해라. 그리고 우리 이제 새 출발 하자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술 취하시고 길에 누워계시는 아버님을 등에 업고 오면서 아버지에게는 아버지, 술 취하시면 안되옵니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옵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나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하는 분노가 타오르는 것입니다. 지금도 혼자 길을 걸어가면서 속으로 인생은 이래서는 안돼그럽니다.

이 분노가 목사와 전도사에게 일어나고 또 교단을 향해서 일어납니다. ‘똑같은 신학을 나왔는데 왜 우리 교단은 안되나그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교단이 안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입니다.

제가 1976 4월 지금부터 23년 전입니다. 제가 관악교회에 왔는데 교인들이 저를 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불평하고 불만하고 심지어 중학생, 주일학생까지 불평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 말이 그들에게 먹혀 들어가겠습니까 한번은 제가 밤예배 설교를 하는데 그 분이 성가대에 앉아 있어요. 거기 앉아서 제가 설교하는 동안 계속 뭐라고 불평을 해요. 그래서 제가 강대상 위에 있던 성경을 들어서 그 사람에게 던졌습니다. 그때는 제 마음속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때 제가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서 목사로서 제 인생은 끝났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임하고 청계산에 가서 6개월동안 기도했습니다.

그 후에 한신교회를 개척하고 12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혼자 사는 것이 불쌍하다고 시골에서부터 데리고 온 집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분이랑 같이 15년동안 있었는데 얼마나 속을 불편하게 하는지 제가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게으르죠, 말도 잘 안듣죠, 사명감도 없죠, 그래서 우리 식구는 데리고 오지 말자고 했는데 제가 불쌍하다고 데리고 왔습니다. 제가 받는 스트레스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한 날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제가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 집사가 백지를 휴지통에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서 달려가서 그 분의 뺨을 때리고 발로 찼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수술하고 얼마 안되어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수술한 부위에 압박감이 오면서 수술한 부위가 터지려고 하면서 손이 마비가 오는데 큰일났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 식구에게 나 혼자 어디 좀 가야 되겠다고 말하고는 한탄강에 있는 대한 수도원 절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나를 불편하게 해서 내가 화를 냈지만 이것은 내 문제다.’ 하고는 하나님 앞에 통곡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하고 기도를 내려오는데 마음은 통곡하면서 눈물로 기도해서 어느 정도 풀었지만 평안함은 없었습니다. 제가 내려오는데 밑에 집사 하나가 저를 보더니 목사님이십니까?” 그래요.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안수해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안수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주여, 이 여종을 축복해 주시옵소서.” 하면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 분이 방언이 터지면서 통변을 하고 예언기도를 하는데 그 예언기도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사랑하는 종이십니다. 주님이 아끼는 종이십니다.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말씀의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담석증이 나았으니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이 예언기도가 다 끝난 다음에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목사님,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하셔야 됩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니까 겁이 나요. 제가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회개하라고 하니까 겁이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주님께서 화내지 말라고 그럽니다. 목사님 화내면 명대로 못삽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다시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내려왔습니다.

성인 아동이 네 안에서 울고 있다.’ 제 눈에서 눈물이 수없이 흘러나오고 또 나옵니다. 울어야 할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단 하나 네 속에 있는 성인 아동이 울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치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뭘 해달라고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잠잠히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노니 내가 너의 것을 다 치유했다. 다만 너는 믿고 하나님께 간구해라

우리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친히 바울을 통해서 감동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분을 내어도 죄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더 크게 확대하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분노의 감정이 악의에서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잠언 16:32절에서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십자가로 가십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보십시다. 주님께서 자기를 해치는 자에게는 분을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무리들에게는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짐승을 사고 팔 때 채찍을 드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괴롭히는 자에게는 분을 내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해치는 자에게 분을 내고 공의로운 일은 내버려둡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해치는 자, 못박는 무리들에게는 아무런 분도 내지 아니하고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분노의 대가를 지불합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 대가를 지불합니다. 내 속에 있는 남을 향한 분노, 증오심, 이것은 악한 것인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별세의 치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면서 죄인들을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 모습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목이 곧고 할례받지 못한 자들아하면서 책망할 때 저들이 이를 갈고 달려들면서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인자 예수를 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봅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 용서로 분노하는 무리들의 대가를 지불합니다. 만약에 분노의 대가를 보복으로 한다면 같이 던져서 같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으면서 그 대가를 자기가 지불합니다. 용서의 주님을 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봅니다.

우리 속에 타오르는 모든 분노와 감정을 치유하는 길은 십자가에 달린 주님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나의 분노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내가 너를 위해서 네 대가를 지불하고 죽나니 내 안에서 살아라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혹시 여러분 속에 분노가 탈 때 기도하시고 십자가로 달려가 주님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혹시 이기지 못하는 분노, 화가 있으면 그 출처를 밝혀내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로 올라가십시오. 우리 주님은 이 종의 어린시절의 것을 가지고 나를 붙들어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은혜가 성도들에게 임하셔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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