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를 극복하라/마태복음 6:25-34
무더운 여름철이 오면 더위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산으로, 바다로 시원한 곳을 찾아갑니다. 피서는 더위를 피하는 것이지만 쉬는 것이 목적입니다.
육체가 쉬는 것은 건강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쉬는 것입니다. 마음이 쉬지 못하고 더위에 시달리는 것처럼 답답한 상태가 염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염려는 근심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고 평안하게 사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모든 염려와 걱정에서 쉬게 하십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은 마음에 눌리는 압박감입니다. 이 짐을 풀고 쉬라고 하십니다. 주일날 교회에 오는 것은 쉼을 얻는 시냇가요, 조용한 바다, 은혜의 산과 같습니다. 영혼과 정신적인 휴식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되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원하고 바라는 복이 사실은 근심 가운데 있고 인생을 고통 가운데 살게 합니다.
저는 매주일 강단에 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까 피로와 긴장에 쌓인 가슴을 풀어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마음에 파도처럼 엄습하여 오는 염려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근심은 목을 조르고 동물이 목을 물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근심에 대하여 가르치신 말씀을 생각하십시다.
근심은 비합리적입니다.
인생은 먹고 입는 것, 소유하려는 어떤 것보다 소중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근심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6-28)
자연의 만물이 걱정을 않고 살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근심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 근심으로 해결된 일이 없고 나아지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근심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30)
근심은 영적이지 못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이 세상에 불신자들은 근심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보살펴 주는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근심할 자격도 없고 근심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근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근심은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정신적 살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근심은 불신의 죄 때문입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0-21)
사람의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 가는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항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싸움을 선포할 때 당신은 결코 평화가 없습니다.
‘염려’는 헬라어로 ‘매림노’라는 말인데 이것은 ‘마음을 나눈다’는 말입니다. 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버린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요, 실패와, 좌절과, 열등 인생으로 만드는 병입니다.
염려는 건강을 해칩니다.
마음의 염려는 오직 우리 마음의 상태이기에 마음의 생각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한 의과대학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의사에게 오는 환자의 20%가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면할 수만 있다면 자기들 스스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음식 때문에 위궤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좀먹는 근심과 염려 때문에 위궤양에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지금 우리들 마음속에 바라는 것은 염려없이 일생을 살고자 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염려는 거의가 다 이 문제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건강문제, 생활문제, 명예 등 모두가 내 삶의 문제입니다.
어떤 분이 말한대로 염려는 기한 전에 무는 장래의 가상적 곤란에 대한 이자라고, 장차 곤란이 오리라는 가상에 대하여 미리 이자부터 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염려는 강에 미치기 전에 어떻게 강을 건널까 하는 도강의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양식이 떨어지기 전에 밥 굶는 수고입니다. 병이 나기도 전에 입원하는 수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죽기 전에 장사하는 수고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로이드 보험회사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을 걱정하는 사람들 덕분에 수억만 달러의 돈을 벌고 있습니다. 보험회사는 인간의 염려 때문에 부자가 됩니다. 사실 이 염려는 무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겠느냐” 염려함으로 머리카락 하나 더 나게도 못하는 것이요, 검게, 희게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염려는 아무 유익이 없을뿐더러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염려를 없이 해야겠습니다.
사실 염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심입니다. 의심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침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 노릇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 아버지 노릇까지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요, 우리는 종입니다. 모든 염려는 주인의 것이요, 종은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내가 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책망은 믿음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의심하므로 염려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너희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는 장래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시 37:5)
지금 우리 교인들 가운데 아직도 자신을 맡기지 못하고 내 스스로 염려하는 분이 있습니까? 몸의 병도 주님께 맡기십시오. 절대로 자신의 것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피어있는 백합화를 보라 천부께서 기르신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염려를 기도함으로 없이할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죽으려던 순간에 들려온 찬송가(근심이여 안녕 171장)
메리큐스만 부인은 남편이 수입은 적은데다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집을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식료품점에 50불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다섯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입을 벌리고 부인은 남의 집 빨래를 해주면서 헌 옷을 사다 아이들에게 입혔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연필을 한 묶음 훔쳐가지고 선생님한테 맞았습니다. 부인은 앞으로 도저히 혼자 살아갈 희망이 없어서 근심하는 중에 정신 이상이 왔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연탄까스를 마시고 죽으려고 연탄통을 열어놓은채 아이들과 같이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부엌에서 라디오를 안 끄고 왔는데 그때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은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죄짐 같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네
주께 고함 없으므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은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그 부인은 찬송을 들으면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모든 문제를 단독으로 해결하려 하였지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지 않았다.’
그 여자는 까스를 끄고 문을 열고 온종일 눈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섯 아이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 세 들었으나 지붕이 있는 것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감사는 근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고 신앙 동지였다. 결혼 후 소식없이 10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자가용에서 내린 사람, 그는 친구(사장 부인), 드디어 문제해결 기도하는 자의 은혜로다.
모든 염려를 나 혼자 지고 근심하려 들지 마세요. 하나님과 상의하세요.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비극을 당하였을 때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 평화와 안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외아들을 뇌막염으로 입원시켰습니다. 밤중에 전화벨이 울리기만 하면 병원에서 오는 전화인 줄 알고 겁을 냈습니다. 14번째 수화기를 들었을 때 병원에서 즉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겁에 질린채 병원 대합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은 4분의 1밖에 없으니 용한 의사를 알거든 찾아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저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교회에 들러 기도했습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드디어 저들은 하늘의 평화가 깃들고 평화스런 잠을 이루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짐을 덜어주며 나 홀로 있지 않다는 의식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나 홀로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날 구해줄 이 주 예수시니 오직 예수”
이제 우리는 한숨을 쉬거나 걱정하거나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당신의 축복을 헤아려보라는 것입니다.
헤롤드에보트는 식품상을 하다가 파산당하고 7년간 갚아야 할 빚을 지고 켄사스로 취직하러 힘없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앞에서 두 다리가 없는 앉은뱅이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손에 쥔 나무토막을 밀면서 오다가 헤롤드에보트를 보더니 “안녕하십니까? 참 좋은 날씨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에보트씨는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두 다리가 있고, 걸을 수가 있다.’ 그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이 다리가 없어도 즐겁고 행복하고 신념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두 다리가 있으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할 때 자신감이 생겨 가슴이 뛰었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돈 없다고 부자를 부러워하지만 두 눈을 10억불에 팔겠습니까? 두 다리를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손과 귀, 자녀 중 어느 것을 팔겠습니까? 당신이 가진 것을 계산해 보십시오. 삼성 그룹을 다 준다해도 팔지 않을텐데 우리는 고마움을 모르고 삽니다. 가진 것에 관하여는 거의 생각지 않고 우리는 늘 갖지 못한 것을 생각합니다.
염려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언제나 생각이 나에게 집착되어 있는 한 염려나 근심이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상한 정체여서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강하게 달려드는 것이 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아예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생각하는 사람은 염려가 그의 생에서 결코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하는 심정으로 봉사할 것을 찾는 자에게는 결코 세상 염려가 있을 리 없습니다.
꿀벌은 근심할 틈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는 자는 자기 문제로 고민하거나 염려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애틀의 프랭크 루프 박사는 23년간이나 관절염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는 불구자이면서 인생을 풍족히 살 수가 있었으니 그 비결은 그는 남에게 봉사하는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병상에 누운 다른 불구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모아 가지고 그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불구자들끼리의 단체를 만들어 서로 편지로 격려하려 하였고 마침내 전국적인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매년 1만 4천여 통의 편지를 쓰고 방송과 집필로서 수천명의 병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목적 의식, 즉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세계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자기보다 더 의미있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자기를 바친다는 기쁨을 그는 가졌던 것입니다.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말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진리입니다.
항상 주기를 좋아하는 샘물은 계속 줄 것이 있고 생생하지만 고여 있는 도랑물은 썩어 악취를 내고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남에게 봉사하며 자기의 생을 나누어 주려고 하는 자는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지만 받으려고 하는 자는 불만이 가득합니다.
남에게 좋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것입니다. 남에게 장미를 주는 사람의 손에는 항상 약간의 향기가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욕설을 주기 위하여서는 내 입에 독을 품어야 하고 그 독은 자기 심장을 뛰게 하고 온 몸에 독기가 스며드는 것입니다.
염려를 없애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남에게 흥미를 가짐으로서 자기를 잊을 수 있고 남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를 일을 매일 하나씩 하자는 것입니다.
링컨은 “모든 사람은 그들이 행복하려거든 그만큼 남에게 행복스럽게 할 만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을 제거하는 일이나 행복을 창조하는 일은 오직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데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뉴욕 어느 고아원에서는 하루에 세 가지씩을 의무적으로 실천토록 했습니다.
첫째, 매일 아름다운 것을 하나씩 찾아 볼 것이요,
둘째는 매일 감사한 일을 하나씩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매일 선한 일을 하나씩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행복클럽이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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