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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운명을 결정합니다/로마서 8:5-7

by 【고동엽】 2022. 1. 3.

생각은 운명을 결정합니다/로마서 8:5-7

 

우리가 한번 살다가는 인생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은 최대의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예수의 인격을 닮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인격을 닮아 산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또 진정한 의미에서 닮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닮으려고 노력했을 뿐이요, 모방하였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9),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 없이는 예수를 주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영의 인도를 받아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삶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자기 욕심으로 본능을 따라 삽니다. 자기 중심입니다. 자신에게 매여 삽니다. 지나친 교만, 욕심, 더러운 마음에 매이면 결국은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5-6)

그리스도인이란 그 생각이 영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릅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노력하여야 할 과제가 있다면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내 생각을 하나님 생각에 맞추고 불안한 심령을 평안으로, 좌절한 심령을 용기로, 부정적인 인생은 긍정적인 인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의 생각을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의 사람이요, 생각의 변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와 운명은 그 사람의 생각여하에 따라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은 곧 그 사람의 운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잠언 23:7절에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과 사람됨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의 인격이요, 결국 운명을 결정합니다.

현재 자기의 운명과 미래의 나의 운명은 결국 나의 생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고상한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 되고 생각이 천한 사람은 천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좋은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공과 승리가 있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나쁜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에게는 실패와 어두움의 그림자만이 찾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6:8)

생각은 씨앗과 같아서 행동으로 싹이 나고 습관으로 뿌리가 내리고 품성으로 자라서 인격이라는 열매를 맺고 운명이라는 결실을 추수하게 됩니다.

 

첫째, 생각은 생명과 멸망을 결정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5-7)

육체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요, 사망이요,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곧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인격적 변화는 곧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대로 거둔다는 말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생각이 곧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5:19-21)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됨은 결국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침투하여 들어옵니다. 그 사람의 생각만 사로잡으면 그의 모든 행동과 생활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생각에 따라서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먼저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 신앙입니다.

회개한다는 말의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 생각을 바꾸어 갈아넣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서 방향을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고는 불의한 길에서 돌아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55:7)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불의한 자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15:18-20)라고 했습니다. 악한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하고 악한 생각이 곧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침투합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를 팔려고 할 때도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13:2)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롯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팔아 넘겼으며 자신도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두고 목 메달아 자살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지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행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으나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꽉 들어 차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저주하면서 부인한 뒤 밖에 나와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였고 이러한 베드로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부활 하시자마자 부활의 소식을 베드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요, 육의 생각은 멸망입니다. 성도는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야 합니다. 모든 죄는 악한 생각에서 시작되며 악한 생각은 죄를 낳고 죄는 멸망을 가져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4:26-7)

미운 생각이 잠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도록 품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도 잠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품지 말아야 합니다. 음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알을 품고 있으면 알을 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리알을 품고 있으면 오리가 나옵니다. 독사의 알을 품고 있으면 뱀이 나옵니다. 사람이 욕심을 품으면 도적질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마음에 미움을 품게 되면 살인을 합니다. 사람이 음욕을 품고 있으면 간음하게 됩니다. 공중에 나는 새의 그림자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머리에 앉아서 새가 둥지를 만들지 못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4:23)

선하고 악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각이 선하면 선한 자요, 악한 것을 생각하면 악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1-2)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땅의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남을 미워하는 생각, 섭섭한 생각, 원통한 생각, 분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불결한 생각은 땅의 생각입니다. 아름답지 못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 신령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생각이 들 때 그리스도의 겸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난이 서러울 때 인자의 머리둘 곳 없는 모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시밪가의 아픔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배신을 당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하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주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우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였습니다.

 

둘째, 생각은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행복과 불행이 사람의 생각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행복하고 어떤 사람이 불행합니까? 고래등같은 수억원짜리 저택과 값비싼 자가용을 두고 호의호식하면서 살면 행복합니까? 이런 가운데서도 절망하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참 행복도 마음에서 오고 인간의 불행도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행복한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은 행복합니다.

블란서 루이 14세는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사치스럽기로 이름난 분이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져보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해 종래는 심각한 병이 걸렸습니다. 여러 유명한 의사를 다 불러 진찰하여 보았으나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의사를 청하여 진찰을 하니 그가 하는 말이 대왕의 병은 보통병이 아닙니다. 이 병을 고치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 그 사람의 속옷을 빌려입으면 병이 낫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행복한 사람을 찾았으나 돈 있는 사람도, 지식 많은 사람도 다 불행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실망하고 돌아오다가 어느 시골 나무 밑에서 양을 치는 목자가 하프를 켜며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하십니까?” “, 정말로 행복합니다.”

루이 14세는 자기의 사정을 얘기하면서 속옷을 얻어 입으면 병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 목동이 웃으며 웃옷을 벗었는데 속옷이 없고 맨살이 나왔습니다. 그때 루이 14세가 한 말은 유명합니다. “세상에 행복한 사람은 있어도 행복한 사람의 속옷은 없구나!”

정말 그렇습니다. 행복한 사람의 속옷은 그런 옷이 아닙니다. 행복한 사람의 옷은 행복한 생각의 옷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만이 우리 마음에 입힐 수 있는 옷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인간의 생각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을 불평과, 불만과, 탄식의 눈으로 본다면 아무리 그 생활이 윤택해도 입에서 불평과, 원망과, 탄식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영원한 천국을 이미 내 집으로 얻어놓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나의 일생을 돌보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알고 선악간에 감사와 찬송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원망할 것 대신에 감사할 것을 찾을 때 반드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감사는 마음에 기쁨을 가져옵니다. 자기 생에 없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있는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잠언 15 13절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17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근심은 곧 생각에서 오는 것이고 즐거움도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평안이요, 육신의 생각은 근심입니다. 영적인 생각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육신의 생각은 불행을 가져옵니다.

염려와 근심은 살인마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마음속에 근심하게 만들어 각종 병으로 죽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근심은 무서운 병입니다. 현대인을 무덤으로 끌고 가는 무서운 암병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무서운 병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울증이란 병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생활을 더듬어 보고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며 실망하고, 분노하고, 탄식하며,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현재에 처하여 있는 환경에서 실망하고 탄식하여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과거로 인한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가장 큰 무기는 과거에 실망한 것을 생각지 않고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그동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을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생각하고 감사할 때 모든 불행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

사실 모든 염려는 육신의 생각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근심은 마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14:27)

우리 심령속에 평강으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4:6-7)

이사야 선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57:20-21)

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을까요? 악인에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7).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돈 많은 복부인이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돈 문제도 있었지만 가정문제도 복잡했습니다. 항상 다투고 근심하며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고 술을 마셔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시골에서 올라온 믿음 좋은 가정부가 있었습니다. 가정부 아주머니는 항상 평안하고 찬송하며 명랑했습니다. 안방은 근심이요, 탄식이요, 아주머니는 은혜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술에 취한채 돌아온 주인 마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남의 집에서 살면서 그토록 평안하고 기쁜 이유가 무엇이오?” “나는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말을 들은 주인 아주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한채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단 말인가 열심히 배우고 벌었다는 것이 근심을 모은 것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고 자신의 신세를 탄식했습니다.

혹시 이 가운데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자기 욕심 때문에 서울 장안의 근심을 다 모아놓고 사는 분 있습니까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영입니다. 생각을 평안으로 지켜주시는 영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평안을 얻고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 생각은 성공과 실패를 결정합니다.

우리들은 성공과 실패의 조건을 우리 환경, 교육에 두기도 하고 부모에게 책임을 지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생각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생각은 창조적인 인생으로 살게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주시며 창조적인 일을 하게 하십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간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조그만한 차이가 운명을 바꾸고 생애를 바꾸어놓는 것입니다.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주십니다.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11)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살림하는 영입니다. 살리는 생각이 성령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자마다 살려놓았습니다. 병든 자를 살리셨습니다. 죄인들을 의롭게 살려놓았습니다. 쓸모없는 인간 부스러기같은 인생들을 부르셔서 귀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살림이란 생명도 살려내고, 낙심된 자도 살려내고, 인격도 살려내고, 가정 경제도 살려놓습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영을 살리고 혼도 살리고 육도 건강하게 살려 놓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는 전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내 친구들은 다 교회에 다니므로 전도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십일조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믿음대로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4-5)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것만이 자신의 생각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므로 그 생각은 곧 자기의 운명을 창조적인 인격으로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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