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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평화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누가복음 19:41-46

by 【고동엽】 2022. 1. 3.

민족 평화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누가복음 19:41-46

 

오늘은 이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얻은 날입니다. 이 날은 이 민족이 자유와 해방을 얻은 은혜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약소민족으로 일본에 강제로 속국이 되어 30년동안 노예살이를 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자유와 독립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합군을 승리케 하여 일본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 해방의 감격은 잠깐이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 칼을 갈고 서로 원수를 맺고 죽이고 살아야 되는 분단의 아픔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이 민족의 최대의 과제는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드는 날이 속히 오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평화적인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통일은 국토가 하나가 되고 민족이 화합하고 사상이 일치를 이루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이 성민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통일신학이 필요합니다.

이 민족의 생존, 이것은 평화통일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이 전쟁의 칼을 녹여서 민족의 생존의 보습을 만드는 날이 빨리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민족이 평화통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통일은 민족 생존의 문제입니다. 민족의 생존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무기를 양쪽이 계속 가지면 가질수록 위험합니다. 이 무장을 해제해야 합니다. 6.25때는 500만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제 전쟁이 나면 이 민족은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옛날 무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는 평화를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선진조국을 위해서입니다.

지금 통일이 되지 아니하면 경제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양쪽의 군사비 10조원을 계산하면 150억불입니다. 민족의 복지향상을 위해서 써야 할 이 엄청난 돈이 군사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칼을 갈고 있는 민족의 슬픈 사실입니다.

 

셋째, 민족의 주체성을 위해서입니다.

민족의 분단은 민족 주체성을 상실케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강대국에 종속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서로 침략을 당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에 군사원조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북은 소련과 중공에 붙어서 간을 빼주고 있습니다. 또 남한은 미국에 붙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밥을 먹고 살고 있지만 이 민족은 양쪽이 다 주체성이 없습니다.

넷째, 민족 양심을 위해서입니다.

분단은 민족 양심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민족의 양심이 어디에서 무너진 줄 아십니까? 정치와 이념의 차이로 수많은 동족을 죽이면서도 양심에 가책이 없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사실입니까? 지금 이 민족에게는 그토록 선했던 양심이 없어졌습니다.

백의민족의 순수한 양심도 잃어버린 채 도덕성이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진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분단이 가져온 구조악의 비극입니다. 한번 갈라지면 상대편에 대해서는 양심이 마비됩니다. 그래서 갈라지면 서로 적이 되기 때문에 어떤 악을 가해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이것이 전쟁이 저지르는 최대의 악인 것입니다. 전쟁에는 양심이 없습니다. 6.25의 전쟁은 동족 수백만을 죽이고도 양심에 가책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이 민족을 살리고 자손만대를 위하는 최대의 과제는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입니다. 월남식 통일은 안됩니다. 월남식 통일은 무력에 의한 공산당 통일이고, 독일식 통일은 흡수 통일입니다.

우리 남한과 북한의 통일은 동서독이나 월남식이 아니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통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의 통일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신적인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분단은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사의 문제요, 역사의 문제요, 영과 육의 문제요,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통일을 원하는 주변 국가는 없습니다. 미국, 일본, 중국, 소련도 원치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이 부강한 국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다께무라 겐히찌라는 평론가가 있습니다. 그는 일본의 국제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통일이 되면 일본에게 많은 손해가 난다. 그래서 일본의 국가이익으로 봐서는 남북 통일이 안되게 지연시켜야 한다.

그 이유는 만일 남북통일이 되면 엄청난 군대를 가지게 되는데 북한의 120, 남한의 50만 합하면 170만 군대가 한반도에 있게 된다. 그런데 일본의 군대는 자위대 18만이라 170만 대 18만이면 이건 게임이 안된다. 한국이 지나간 과거에 일본에게 그렇게 설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통일국가를 이루면 그 군대로 일본을 침략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한국이 통일이 안되도록 외교적인 노력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한국 민족 평화 통일을 가장 원하시는 분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애국자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조국이 멸망할 미래를 예견하면서 통곡한 애국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큰소리로 우셨습니다. 평화의 성이어야 할 예루살렘이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평화를 잃어버리고 전쟁으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망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멸망할 미래를 모른 채 죄악으로 잠든 백성을 탄식하셨습니다. “멸망할 때가 오면 원수들은 토성을 쌓고 너를 사방으로 가두고 너와 네 자녀들을 땅에 내어칠 것이요, 성은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이 말씀대로 주후 70년경에 로마의 침략으로 어린 아이들이 버림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성 안에서 굶어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평화의 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조국의 참상을 눈으로 보면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장사하는 자를 내어쫓으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하셨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거늘 기도하는 사람은 없고 장사치들만 우굴거렸습니다. 그것은 성전에 오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 제물을 가지고 올 수 없으니까 성전 밖의 가까운 곳에서 사서 바칠 수 있도록 한 것이 이제는 성전 마당 안으로 들어가 시장이 들어선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부정한 마음으로 이것을 허락하고 물질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의 원인을 성전 타락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멸망의 원인이 정치, 경제, 사회의 정신적 도덕적인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성전의 타락이었습니다.

지금 이 민족의 위기를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너도 나도 국민들은 정치가의 부패를 탓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썩으려고 할 때 썩지 못하도록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움에 빠져 앞을 보지 못할 때 빛이 되어주지 못한 책임이 있습니다.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할 때 입을 열고 들려주어야 할 책임이 바로 종교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지금도 채찍을 드십니다. 여러분과 나는 주님의 채찍에 맞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습니까? 그것은 예루살렘의 멸망 때문이요,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하나님을 모시고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민족의 평화, 통일, 미래 민족의 살길은 교회가 바로 서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시고 발걸음을 성전으로 옮기신 것은 의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민족 역사는 정치인이 살리지 못합니다. 사업가가 살리지 못합니다. 오직 의인이 민족을 살립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민족 평화 통일을 위해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평화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하였습니다.

평화의 일은 곧 주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인류 평화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들과 화목케 하려고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시고 화평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평화는 전쟁없는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정의로운 조화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전쟁을 이김으로 얻는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시는 구속의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용서하고 저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을 입은 스데반 집사는 죽으면서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저들을 위해 주 예수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죽었습니다.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화해자로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민족의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가는 곳에 분쟁이 있으면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 화해를 남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있는 곳에 갈등이 해소되고 증오의 칼을 버리게 하십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어 평화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세계 역사상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국으로 유일하게 서로 원수가 된 나라는 우리나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평화 통일은 미국이나 중국의 힘이나 어떤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평화의 주님이 그 은혜로 될 것을 인류에게 보여줄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칼로 로마와 싸워서 이 민족을 해방시킬 수는 없다. 칼을 집에 꽂으라하셨습니다. 너와 나는 평화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의 사도로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숨어있는 어떤 칼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칼을 녹여 평화의 보습을 만들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결국 로마에 들어가 네로의 칼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 의 마음속에는 칼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평화의 보습이 되어 로마의 가슴을 갈아엎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로마는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평화의 도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기 위해 먼저 칼을 버리게 하십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려고 40년동안 가슴에 품은 칼로 결국 자기 백성을 위하는 정의감에서 애굽인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증오의 칼로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로 망합니다.

그러나 미디안 광야에 40년동안 있으면서 그의 가슴속에 숨겨둔 칼을 버리고 바로와 칼없이 싸웁니다. 드디어 그는 승리자가 되었고, 민족을 구원해 냈습니다.

오늘 이 민족의 평화를 원한다면 나 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의 주님을 모시기 위해 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어떤 칼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합니다.

 

셋째, 교회는 사회 정의를 위한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32:17에 정의는 평화를 가져오고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하였습니다.

참 평화는 정의의 결과요, 공의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함으로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히는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죽어야 할 것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짐승의 소리를 지르기에 주님은 밖으로 내어 쫓은 것입니다.

언제나 역사의 비극은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될 때였습니다. 강도의 굴혈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추방하고 사람이 주인이 될 때입니다. 물질이 예수님보다 더 높이 받들어질 때 강도의 굴혈이 된 것입니다.

성전은 짐승이 죽어 제물로 들어와야 하거늘 살아서 팔고 사는 동물시장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타락한 모습입니까? 교회가 정의와 사랑을 외면하고 세속적인 물질주의에 빠져 기복성의 종교로 전락할 때 역사의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서울에 오시면 그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실까요? 청와대로 가실까요? 국회 의사당으로 가실까요? 노사분규 현장으로 가실까요? 분명히 예수님은 오늘의 성전된 교회에 오실 것입니다. 여기 오셔서 채찍을 드사 장사하는 무리들을 내어 쫓으실 것만 같습니다.

장사는 경제시장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종교시장도 있습니다. 흥정하고 자기 안일과 실리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거룩을 가장한 교회는 시장이 될 것이요, 거기 모인 사람들은 종교상인들이 될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진리와 공의는 외면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현실과 내세의 실리만을 찾는 상술심리의 기복성에 신앙이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된 우리 마음으로부터 물질숭배의 기복신앙을 추방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시는 인격적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 나라 정의 실현에 사명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필연적으로 역사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타락으로 생긴 이단입니다. 공산주의는 타락한 기독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아야 합니다.

특히 러시아 교회는 많은 부를 축적하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 안일에 빠졌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제정 러시아의 경우도 교회는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당시 러시아에는 그릇 하나에도 십자가 표시가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보면 문학이나 언어나 의식이나 모두 기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혁명의 기병대가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여 들어오던 날 밤에 사제들은 모여서 축도를 할 때 어떻게 할 것이며, 성직자의 까운은 무슨 색으로 할 것인가하고 싸움을 했습니다. 그때 쳐들어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 최후의 날을 예견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의 탄식은 러시아 최후의 날에도 되풀이 되고 말았습니다.

1917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제정 러시아 귀족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추운 겨울 피난을 떠났습니다. 추운 겨울 끝없는 시베리아 벌판에 얼어죽은 시체는 눈에 쌓여 만리장성같이 뻗어갔습니다. 피난 도중 잠들어 죽었고, 눈물을 흘리면 두 눈은 얼어 붙었습니다. 한 사람도 살아 남는 자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몸에 십자가를 걸고 신을 부르며 자비를 구했으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물질주의에 빠진 기독교를 물질주의로 심판한 것입니다.

결국 공산주의는 타락한 기독교가 낳은 사생아요, 회칠한 무덤속에서 생긴 종교 전염병이었습니다.

교회는 역사적 교훈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 공산주의를 저주하고 증오하는 것만으로 역사에 아무런 해결이 못됩니다. 예수님의 경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너희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었도다.” 왜 눈에 숨기었을까요? 에수님 눈에는 보이는 비극의 종말이 왜 우리 눈에는 감추어져 있을까요?

예레미야 5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요즈음 2천년 교회사를 조명하면서 한국 민족을 사랑하는 한신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눈물, 그 심정에서 우리의 역사적 사명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교회 공동체의 회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양심의 성결을 위해 회개합니다. 그리고 허물과 죄악을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이것만으로 민족을 살리지 못합니다. 한국교회 공동체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기장 교단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예장 합동 총회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기장 예장이 갈라진지 46년 반세기가 되었으니 서로 인사를 나누자고 제의했습니다. 함께 예수 믿고 천국 가야 할 주의 종들도 화해와 일치가 어려운데 민족의 통일 문제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 생각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협의회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회 선언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평화통일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면서 분단 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어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 고백한다.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죄를 범해 왔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죽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다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려는 이중의 죄를 범해 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포기하고 자주독립정신을 상실하는 반 민족적 죄악을( 9:3) 범하여 온 죄를 고백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민족 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하였으며 면면히 이어온 자주적 민족통일 운동을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분단을 정당화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체제가 강요하는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하여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역죄( 20:3-5)이며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하는 교회가 정권의 뜻에 따른 죄임을( 4:19) 고백한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해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이다.

이상과 같은 시각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민족의 평화를 위한 기도와 새로운 결단이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먼 훗날 역사에 부끄러움이 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또한 아닙니다. 미래의 한국에 하나님 나라가 이룩되기 위해서는 정의가 실현되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자신을 평화의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기도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평화를 위해 희생되었듯이 우리는 지금 이 민족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사랑의 나라가 실현되도록 먼저 자신을 이기는 기도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강도의 굴혈처럼 전락한 당시의 성전의 부패상을 탄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화려하나 속은 율법과 교권과 타락한 윤리로 악취를 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도의 굴혈은 지금 우리의 심령에서 되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문 밖으로 몰아내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정욕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심령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은 셈입니다.

이 백성이 사는 길은 먼저 기독교인으로부터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나라의 정의 실현을 위해 과감히 전진해 나갑시다.

우리는 이 시간 예수님의 눈물을 받아 먹어야 합니다. 그 눈물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자기 백성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당할 슬픈 사실, 그 참상을 예견하면서 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눈물은 우리 민족도 포함되어 흘리신 것입니다.

주님의 눈물속에는 내 개인의 참상, 그리고 우리의 현실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평화의 사람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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