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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예정/로마서 8:29

by 【고동엽】 2022. 1. 3.

영화로운 예정/로마서 8:29

 

우리가 동남아에 여행을 가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많을까? 거기에 대해서 많은 회의를 느낍니다.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은 빈부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많은 경비원을 두고, 식모를 두고,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지만 어떤 사람은 날마다 길거리에서 거지마냥 구걸하고 삽니다. 엄청나게 큰 대궐같은 집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거지같이 움막집에서 살아갑니다. 만약에 한국 땅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도 혁명이 날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목사인 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같은 나라 안에서 이렇게 빈부의 격차가 심한데도 용납하고 살아갈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게 살도록 태어났다. 조상적부터 운명적으로 가난하게 살도록 태어났다.' 귀족과, 왕실과, 부자들은 부자로 살도록 태어난 사람들이고 자신들은 운명적으로 가난하게 살도록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불평도 없습니다. 부자를 보면서도 시기하는 마음도 없고, 부러워하는 마음도 없이 그대로 거지로 만족하면서 삽니다.

일반적으로 운명론자들은 사람의 운명이란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체념합니다. 거의 불행한 자신을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두 다 행복하고, 평화롭고, 부요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지 가난하고, 병들고, 불쌍하게 살도록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불공평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이럴 수 있나'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가난하고, 젊어서부터 일생을 고생으로 끝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북의 가난한 산등성이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은 기가막힌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운명론자들의 생각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사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노력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가 있고, 절대적인 섭리가 있습니다. 노력하는 자에게 축복하시고, 악한 자에게도 햇빛을 비춰주시고,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은 일반적인 섭리입니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창세전부터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창세전부터 천국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을 다 예정되었다면 구원받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뭐 있느냐' 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만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초해서 나온 진리입니다. 이것은 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8 29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유명한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이 예정론의 신학을 확립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또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펠라기우스는 이런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미리 다 예정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시되는 것 아니냐,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 신앙으로 구원을 받는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 아니냐

인간 자유에 의해서 결단하고, 고백하고, 나아가는 것을 무시한다면 인간의 자원적 응답이라든지, 노력이 불가능한 것 아니냐

구원과 멸망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하나의 운명론이 아니냐 나의 구원을 위한 노력은 아무런 필요도 없단 말이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안믿는 사람이 있고, 또 잘 안믿는 것 같아도 잘 믿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 이것을 어떻게 획일적으로 구별할 수 있느냐

선택받은 사람만 구원받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너무 제한적인 것이 아니냐 만약에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 믿는 자들만 위한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넓은 공로를 제한시키는 것 아니냐

예정론은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데 우선을 두는 것입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되는 것 아니다. 힘써서 되는 것 아니다. 선하게 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와, 성령의 보증과, 전적인 은혜로만 된다.' 여기에 근거해서 예정론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억해 볼 것은 여기에서 이 말씀을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나를 택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예수를 맏아들 되게 하셨다.' 이 세 가지 핵심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나를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 장래를 미리 알고 예정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착한 성격이나 행동을 미리 알았다든지, 내가 미리 죄지을 것을 아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나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되어질 인생 과정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나를 창세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이 말씀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전도를 해도 이 사람이 믿을 것인지 안믿을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택함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안믿을 것 같은데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믿을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 사람을 택했다" 그래서 그의 인간됨까지 다 아시기 때문에 택했다고 하는 해석이 카톨릭의 해석입니다.

'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조카도 알고, 이웃집 아이도 다 압니다. 그런데 아들을 아는 것은 그 아들의 성격이나 얼굴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사랑할 수 있도록 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위해서 생명을 구하려고 불속이나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미리 아셨다'는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중에 아는 것과 미리 아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좀 도와주시죠.' 하면 '알았다'고 하고 뒷조사를 합니다. 이 사람이 의리가 있는지, 인간됨은 괜찮은지 앞에서는 이 말하고, 뒤에서는 저 말 하는지 뒷조사를 합니다. 이것은 나중을 알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괜찮을 것인지를 알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미리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간됨과 관계가 없습니다. 나중에 만나보고, 상대해보고, 생각해보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태중에 가질 때 그 아이를 낳기전에 미리 알고 있습니다. 낳기도 전에 그 아이를 위해서 방을 만들고, 침대를 만들고, 장난감을 삽니다.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위해서 다 미리 예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나중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미리 알았기에 나중에도 압니다. 미리 사랑했기에 심판날에도 사랑합니다. 미리 용서하고 구속했기에 나중에도 그 은혜는 확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리 알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나를 미리 사랑하셨고, 내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자식노릇 잘 해야만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키워봐서 부모에게 효도하면 사랑하고 불효하면 미워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미리 사랑한다는 것은 불효를 하든 효도를 하든 상관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판날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합니까?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원래부터 몰랐다는 말입니다. 박태성이나 문선명이가 처음에 잘 믿었다고 예수님이 알아주는 줄 아십니까 이 사람들은 원래부터 몰랐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심판날에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은 심판날에도 아십니다.

먼저 사랑해놓고 그 사랑에 따라 키워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창조적 사랑이라고 말하고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먼저요, 사랑을 미리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4-5)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믿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 집을 몰라서 마귀의 종노릇 할 뿐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하셔서 제 정신을 차리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믿는 세월이 수십년 동안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마귀의 종노릇이 긴 것 뿐입니다. 수요일 날 TV에서 '아침마당'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어느날 부모 따라 시장에 갔다가 "여기 잠깐 앉아 있어라 물건 사가지고 올께" 했는데 그 잠깐을 못참아가지고 아이가 울다가 어디로 가버린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찾아 헤매다가 끝내 그 아이를 찾지 못하고 그 아이는 고아원에 넘겨졌습니다. 이렇게 헤어진지 40, 한맺힌 세월을 보내다가 드디어 모녀가 상봉을 합니다.

우리는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수십년동안 부모를 잃어버린 자식처럼 세상을 헤매다가 이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 딸들에 대한 창조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아들로 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꼭 닮습니다. 얼굴도 닮고, 성격도 닮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는 행동까지 그대로 닮습니다.

최근에 가정상담에서 나온 얘기인데 미국의 처녀가 공부도 많이 하고 훌륭한 남자를 소개받아서 결혼을 했습니다. 미국은 결혼하면 부부가 밥도 같이 하고, 청소도 같이 하고, 시장도 같이 다니는데 이 남자는 부인이 늦게 와도 빵 하나 구워놓을 생각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입니다. 자기 친정은 아버지든 어머니든 시간 있는 사람이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며느리가 있어도 시부모가 알아서 밥도 챙겨먹고 하는데 남편은 꼼짝도 안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차츰 나아지겠지 하고 그냥 살았는데 전혀 나아질 기미가 안보이니까 나중에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시댁에 갔는데 보니까 남편이 영락없이 시아버지를 닮은 것입니다. 어머니만 부엌에서 일하고 아버지는 손하나 까딱 안하고 차려다주는 것만 먹는 것입니다. ', 이것을 닮았구나!' 그래서 이해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냥 포기하고 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아무리 조카를 데려다가, 이웃집의 공부 잘하는 아이를 데려다가 아버지를 본받게 해도 안닮습니다. 용모가 안닮습니다. 성격이 안닮습니다. 낳아야만 닮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나게 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닮게 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산상팔복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 복이 있다, 온유한 자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에 대한 말씀이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얘기한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가난하다. 너희들도 나를 닮아라. 나는 죄에 대해서 애통하고, 세상에 대해서 애통하고 있다. 너희도 그 마음을 가져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에게 이런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본받게 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본받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성자나, 위대한 사람도 본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바울이나, 베드로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본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본받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들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고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그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부활을 본받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친히 부활의 형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2-44)

 

부활하신 구속주의 영광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우리가 함께 갈 것이며,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은 것 같이 우리도 들림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왕이신 것처럼 우리가 면류관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듯이 우리 영혼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우리도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야 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 의지는 내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의지십니다. 창세전부터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과 의지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변덕스러운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의지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소원을 갖되 그 소원까지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할 소원까지도 주의 것입니다. 계획을 하나님이 세우셨고, 진행도 하나님이 하시고, 성취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릇을 담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이요, 담는 일도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는 그 뜻에 순종하고 따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해도 내 자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뜻일 뿐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느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회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다 아슬아슬 합니다. 살아온 것이 다 기적입니다.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그리스도를 맏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맏아들로 삼으셔서 많은 형제를 거느리게 했습니다. 이것은 곧 모든 영광을 예수께 돌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왜 예수께 돌려야 됩니까 예수님이 친히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마리아의 몸으로 나셨고, 또 십자가에 죽으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시고 희생하신 예수, 고난을 즐겁게 받으신 예수, 자기를 포기하고 이 세상에 완전히 섬기는 자로 살으신 예수, 그 예수가 생의 아름다움을 세세토록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시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2:5-11)

하나님과 본체시고 동등됨을 가져야 할 그리스도가 그것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서 창조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내가 이러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으로 창세전에 예정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가난도, 역경도, 고난도 극복하십시오.

미국의 유명한 가수가 하나 있습니다. 그 가수가 어느날 자기 아이가 이웃집 아이와 놀면서 주고받는 대화를 집안에서 살짝 엿듣게 되었습니다.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시장님과 잘 알아 그래서 골프도 같이 친단다." 하고 자랑을 하니까 자기 아들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안단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꿇고 "오 주여, 내 아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됨을 자랑했으니 너무 너무 영광이옵니다." 하고 울었습니다. 이것은 아들이 그렇게 말해준 기쁨도 되겠지만 자기가 다시한번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영광을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아들됨의 영광은 다 잃어버리고 세상적인 영광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혈안이 되어있는 그리스도인들, 시시한 것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베푸신 그 사랑에 감격해서 이 세상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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