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치유와 행복/에베소서 5:22-32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거의 다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는 부모님을 통해서 성장을 합니다. 또 조금 성장하면 친구를 만나서 친구의 영향을 받습니다. 또 학교에 들어가면 좋은 스승을 만나서 진리를 배우고 그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는 좋은 직장을 찾아서 가려고 애쓰고 직장에서 생업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모두 다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만나는 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을 생각해보면 두 관계로 정립이 됩니다. 하나는 부모와의 만남이고 또 하나는 부부의 만남입니다. 이것이 전 일생의 과정입니다. 결혼 전까지는 부모의 슬하에서 보호를 받고 그 안에서 지도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는 부부가 일생동안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이 두 관계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됩니다.
이 세상에 부모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없이 성장해 온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고아로 일찍이 조실부모 한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도 부모의 생명을 받아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절대적인 관계속에서 내 인격을 형성했습니다.
또 하나는 배우자를 만났을 때 가정을 이루면서 일생동안 살아갑니다. 물론 독신으로 사는 사람도 더러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가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부의 관계, 부모의 관계는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결정적 관계요, 결정적 만남이 됩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 속에는 부모로부터 받은 혈통, 성격, 잠재된 내재적 자아가 있습니다. 알든 모르든 우리 속에는 부모에게서 받은 용모와, 혈통, 심지어 병까지도 부모로부터 받아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모로부터 받아서 형성된 자아가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될 때 많은 진통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성장배경과, 형성된 성격과, 가지고 있는 자아라는 두 개체가 만날 때 이것이 연합되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진통을 겪습니다.
일생동안 이 진통 과정에서 끊임없이 싸우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이런 진통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작품적 가정을 이룬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도저히 맞지 않아서 결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살기는 살지만 두 개의 개체가 다 괴로움 가운데 말할 수 없는 탄식 속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렇게 조그만한 땅덩이 속에서도 서로 맞지 않아서 싸우고 살아가는데 한 가정에서 잘 산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고 기적입니다. 친구와 맞지 않으면 헤어지면 됩니다. 직장이 맞지 않으면 떠나면 됩니다. 목사가 맞지 않으면 돌아서면 됩니다. 그러나 가정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처음에 성격이 잘 맞아서 사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그러나 서로 독특한 개성이 만나서 연합하는 과정에서 수없는 진통과, 고통과, 아픔을 극복하면서 성취해 갈 때 이들은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순수한 하나님의 뜻에서 이루어진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진통과 고통을 겪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최고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기에 그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함께 전진해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다 중요합니다. 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최고로 중요한 문제는 가정의 문제며, 부부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최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출세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출세에 생명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사업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업을 위해서 생명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하는데까지 하고 안되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어라’ 절대로 그런 말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출세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세상적으로 성취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정은 살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가정을 지상 천국으로 만들어야 되며 가정에서 지상천국을 이룬 사람만이 하늘나라의 천국도 그의 삶 속에 온전해집니다. 여기에서 예수를 적당하게 믿은 사람이 죽으면 무조건 천당에 가서 예수님과 잘 살겠다는 것은 허상입니다.
부부가 땅에서 잘 살려고 노력하고 고통하면서 자기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연단한 사람만이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삶에 신비한 감격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땅에서 예수를 믿기 위해서 자기를 부정하고 노력한 사람만이 천당에 가서도 예수가 좋지 여기에서는 세상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싫어하던 사람이 갑자기 천당 가서 예수님을 향해서 프로포즈를 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부부라는 것은 신비한 관계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신비한 관계며, 예수님을 만나는 신비한 관계입니다. 남남이 성년이 되어 만나기 때문에 각각 서로의 부모의 혈통이나, 성격이나, 기질이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성장하면서 서로의 약점과, 슬픔과, 실패, 좌절, 두려움, 거부감 및 죄의식, 자기 연민, 우울증 등 많은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서로 치유하면서 행복을 창조해 가는 사람들이 있고 상처들을 치유하지 못한채 더 아프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원래 성격이 이래’ 하면서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자기 성격을 그대로를 가정에 투사하면서 가족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안됩니다. 끝까지 고쳐가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시간을 수십년 살아가면서 ‘나는 원래부터 이랬어’ 하는 소리를 되풀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치유해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계속 고쳐가야 됩니다. 가정도 그래야 됩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일생의 과제로 이루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업하면서 성자 노릇 못합니다. 며칠 전에 창업하는 어떤 집사님이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 저는 사업하면서 우리교회 아무개 장로님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장로님이 어떤데” “제가 그 장로님을 볼 때마다 존경스럽고 어쩌면 그렇게 사업하는 일이나 인간관계를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당신 사람 잘 봤소. 좋은 사람이 있으면 본받아 살아야지”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한가지 꼭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모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 부족합니다. 그래서 일생을 계속 성숙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를 떠나라’ 성경의 중요한 원리를 이 말씀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창세기 2장 18절에서 명령하신 말씀인데 에베소서 5장 31절에 우리 주님께서 또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가정에 대한 명령이면서 우리 모두에게 대한 신비한 비밀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라’ 부모를 떠나라는 말은 가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를 떠나 가출한 아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불행한 아이들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부모를 떠나는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로, 처음에 결혼할 때는 일단 부모와 공간적인 별거를 시작해야 합니다. 늙은 부모님과 별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늙은 부모님은 모셔야 됩니다. 그러나 처음에 결혼했을 때는 부모를 떠나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결혼의 신비입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것은 서로 분가해서 살라는 말입니다. 분가해서 살라는 말은 부모나 친척, 형제, 그 누구도 부부 사이에 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이 사이에는 아무도 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는 아이도 끼어서는 안됩니다. 부부가 잘 때 아이를 가운데 놓고 자는 것은 성서를 위반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시아버지도,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끼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이 부모를 떠나라는 말입니다.
많은 한국의 가정들이 결혼한 후에 부모의 지배를 떠나지 못하므로 불필요한 고부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 심각한 불행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적인 가정이란 부모를 떠나 독립하므로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우리 교회 권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우리 아이가 결혼하면 정들기 위해서 신혼생활 때 3년정도 데리고 있으려고 합니다.” “어허 큰일날 소리 하네. 당신도 살아봤잖아 신혼생활 3년이 가장 좋은 때인데 그 좋은 때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다 빼앗아 버리려고? 안될 일입니다.”
나중에 늙어서는 외로우니까 자녀와 함께 살지언정 꿈같은 신혼생활 3년은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끼어들어 저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아기 낳기 전 3년은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혼여행을 떠날 때 직장에서 월급도 적은 사람이 비싼 호텔에 들어가는 이유가 뭡니까? 비싼 곳에서 아름다운 생의 출발을 꿈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혼여행 가서 시시한 여관방에서 자려면 가지 마세요. 그 돈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주 조용한 곳에서 하늘을 안고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이 신비입니다. 그래서 신혼여행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가야 합니다.
중요한 생의 출발이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멀리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집 주변에서 첫날밤을 맞이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세계로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혼 새 가정에 부모를 떠나라는 신비입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은 주례를 하는데 신랑 신부가 서약하기 전에 부모님을 일어서게 하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앞으로 사랑하는 아들이 결혼한 후에 사랑하는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 중간에 서지 않기로 서약하겠습니까?” 신부 부모님께 묻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될텐데 그 딸을 진정으로 부모의 슬하에서 떠나보내 주시며 당신의 딸과 사이에 중간에 서지 않기로 서약하십니까?”
부부 사이에 아무도 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들의 행복을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두 번째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독립을 의미합니다. 생활의 독립입니다. 부모의 생활을 의지해서는 그 자식의 가정은 이미 온전치 못합니다.
한번은 우리 아이가 영국에서 편지가 왔어요. “아버지, 결혼시켜 주세요.” “네가 지금 유학생인데 공부해야지. 아들아, 결혼을 하고 싶냐? 그러면 결혼해야지 그런데 한가지는 네가 기억해야 한다. 네가 결혼한 후에는 나한테 용돈 타서 쓰는 것이 네 자존감에 상처가 될 것이다.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결혼은 네가 독립된 주체가 되는 것인데 그때 부모에게 의존해서 용돈을 타고 부모에게 ‘돈 주시오’ 하면 네 자신이 수치스러울 것이다. 그래도 결혼하고 싶다면 편지해라” 했더니 다시는 편지가 안왔습니다.
결혼하게 되면 생활의 독립을 해야 됩니다. 자기 아내가 있는데 용돈 타다가 아내 화장품을 사주겠습니까 부모에게서 용돈 타다가 제 아내 옷을 사주겠습니까 이것은 안되는 일입니다. 생활의 독립을 해야만 진정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늙어서 부모의 상속을 받을 수는 있지만 일단 결혼을 하면 독립을 선언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모를 떠난다는 말은 자기 생활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과거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이것은 성장배경에서 건전치 못한 인간성, 부모로부터 받은 잘못된 성격, 품성, 이것이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도 완전한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도 죄인입니다. 부모도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부모의 혈통 속에도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부모의 혈통 속에 우상을 섬긴 죄악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 속에 부모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세상의 중독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물론 훌륭한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완전한 인간은 아닙니다. 어떤 부모도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부모에게서 성장해 오면서 무언적으로 잠재된 내재적 자아에서 내가 탈출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모를 떠난다고 할 때 지배나, 간섭이나, 생활 관리에서 떠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소년기적 자아의 본성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다” 무슨 비밀이 이렇게 큰 것이 있습니까 이것은 부부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입니다. 아무도 가본 일이 없는 하늘나라의 비밀입니다. 아무도 만나볼 수 없는 예수, 천국의 오묘한 기쁨, 이것은 부부 사이에서만 얻을 수 있는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볼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깊은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신비한 비밀은 부부만이 알 수 있습니다. 연합되는 그 속에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길러온 모든 정에서 부모가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할 때 자녀도 불행해지고 자기도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결혼시킬 때 자녀를 떠나보내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자녀를 길러온 모든 정에서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은 피차 고통을 더 크게 합니다. 그래서 외아들이나 막내 자녀들은 결혼생활이 힘듭니다. 외아들과 결혼해서 시댁에 들어가는 며느리는 중대한 각오를 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일생동안 외아들을 그 품에 안고 자란 시어머니는 그 자식을 끝까지 떠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며느리 잠자리까지 끼어들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가정에 들어가는 여자는 참으로 불행합니다.
유복자를 길러온 시어머니는 철저하게 결혼하기 전에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시어머니 공부를 하고 결혼시켜야 됩니다. 끊어야 하는 결단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는 결혼한 후에는 모든 자식의 정이 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게로 흘러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못하도록 막을 때는 이미 자식도 망하고, 자기도 망하고, 또 한 여인도 슬프게 만듭니다.
막내 딸이나 막내 아들을 항상 염려하고 있는 어머니도 정상이 아닙니다. 어머니 태에 매달려 있는 아이는 아무리 귀하다 하여도 그 탯줄을 끊어주어야 독립된 생명체가 됩니다. 이처럼 지금까지 길러온 아들 딸들에 대한 깊은 인간의 관계도 끊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떠나보낸다는 것은 인간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정신적인 도움이 지속적으로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녀들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모의 슬하를 온전히 떠나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으로서 한 가정을 형성하는 위대한 창조를 이루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부모로부터 받은 개성이 있습니다. 남편은 시댁으로부터 받은 개성이 있고, 아내는 친정으로부터 받은 독특한 개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피차 떠나야 합니다. 떠나버리고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유받아야 할 내적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몸을 이루어 연합해서 살아야 되는데 나쁜 요소들, 남편의 강인한 성격이라든지 말도 안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지내는 것, 이런 것을 다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성장해 온 배경이 다르고 서로 독특한 성격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이 연합해서 살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에서 치유되는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원에 들어가서 치료받는 아픔을 거치고서 병이 낫습니다. 병이 저절로 낫지 않습니다. 수술할 때 수술하는 아픔, 치료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면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 아이들이 치과에 가자고 하면 울고 보챈다고 내버려 둔 것이 어른 되어서 이를 다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가정을 위해서 서로 두 사람이 만나 연합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듬어가야 합니다.
나무가 서로 연합해서 하나의 도구가 되기까지는 껍질을 벗기고, 깍아내고, 다듬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서 새로운 존재로 연합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하나의 돌을 깎아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가듯이 가정이라는 아름다운 모델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잘라내고, 다듬고, 깎아내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 없이 잘 맞아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은혜가 적습니다. 안맞는 것을 맞추어 가면서 산 사람들은 신비하게 뗄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안맞는 사람이 맞도록 된 것은 하늘이 기뻐하는 일입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폴 투르니에라는 사람은 일본에서 강의를 할 때 “병을 치료하지 말고 인격을 치료하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모든 병은 육체의 병보다 더 많은 병이 마음의 병인데 육체의 병은 병원에 가서 단기간에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병은 의사가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일생동안 안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고칩니다. 외적인 병은 병원에서 고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마음의 병은 좀체로 떠나지도 않고 고치기도 어렵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잠재된 상처로부터 임한 병을 인간이 고친다는 것이 너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만 이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치유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육신의 병도 예수님이 고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고쳐야 할 병은 내적인 병입니다.
폴 트루니에가 일본에서 강의를 사람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도 부부싸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부싸움 하는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때린 적도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말하기를 “전혀 싸움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어느 한편이 완전히 주저앉았기 때문이겠죠.” 못된 여자 만나가지고 남자가 완전히 죽어버리고 사는 사람, 또 못된 남자 만나가지고 여자가 완전히 자기를 “에이 버린 몸 죽고 살자” 하고 주저앉은 사람, 그럴 때는 싸움을 안합니다.
처음부터 어쩌다가 잘 만난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은 잘 만나서 편하게는 살지만 창조의 신비는 모릅니다. 안맞는 사람을 만나서 맞춰가면서 사는 과정에서 세월이 흘렀을 때 신비에 이릅니다.
며칠 전에 목사님을 한 분 만났는데 그래요. “우리 교회는 이상한 것이 하나 생겼어요.” “뭔데요.” 장로님 한분이 사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결혼하려고 여자를 선별하는데 대부분이 아파트 한채를 등기해주면 가겠다고 한답니다. 그래서 무슨 붐이 일어났느냐 하면 현재 살아있는 부인이 아파트 한채 주저앉고 살고 있으니까 보약으로 대접해서 잘 살게 해준다 해서 부인에게 보약사주기 운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장가 가려고 생각해보니까 전부 아파트를 내놓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돈이 있어서 아파트를 주고 삽니까 그래가지고 자기 교회에서는 남자들이 부인 50이 넘은 남자들은 부인들에게 보약 사주기 운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옆에 있던 목사님이 “그래? 남자만 아파트 사주고 여자 만나나? 요즘은 여자도 남자 하나 만나려면 아파트 한 채 사줄 수 없나?” 그래요. 그래서 제가 “없어” 그랬습니다. 50 넘은 남자들은 지금 현재 있는 부인을 소중히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제가 왜 그 생각을 했느냐 하면 제가 우리 식구와 결혼해서 살아온 과정을 보면서 한 인간이 맞추면서 수십년 살아갈 때 “나는 당신이 세상을 떠나면 나는 결혼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과 내가 맞추기 위해서 수십년을 노력해서 이제는 연합의 신비에 이르렀는데 나대로 형성된 인간을 나이가 들어가지고 누가 맞추어가며 살겠는가”
살아간다고 해도 연합도 안되고 둘이 그냥 사는 것이죠. 이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고운 정 미운 정 젊어서부터 안맞으면서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이제는 맞추어가지고 뗄 수 없는 관계로 형성되어 갔는데 수십년 자기대로 형성된 개성을 누가 갑자기 와서 맞추겠습니까 다음날 짐 싸가지고 나갈 것입니다.
저도 결혼생활 하면서 네 번이나 안산다고 짐을 싸가지고 나갔잖아요. 제가 그 생각을 해볼 때 저는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내재적 자아가 하나 있었고 하나는 목표성취를 위해서 집념하는 특수한 인간, 저는 어린시절 본 것이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무조건 포기하고 일생을 살아온 것만 봤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완전히 주저앉은 여자입니다. 남편을 위해서 일생을 아무 생각없이 그냥 주저앉고 살아간 것이죠.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무슨 보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살아가신 것이죠. 이런 것이 내 속에 성년 아동으로 형성된 것이 가정 속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생활하신 대로 우리 어머니는 돈 한분 만져본 일이 없이 살아갔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돈 한푼 손에 쥔 일이 없이 그냥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결혼해서는 그 식으로 살려고 그래요. 내 멋대로 호주머니에 돈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상의없이 헌금하고, 책 사고, 형제에게 주고, 아내는 돈을 어떻게 쓰고 사는지 모릅니다. 한 푼도 주지 않고 사는 것이 내 속에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교회 부흥이라고 하는 성취 지향, 이 목표로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철저하게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 거기다가 내 나름대로 모델을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살아야 목사다 해서 가난한 자들을 준다 해서 아내를 전혀 돌보지 않아서 집을 네 번이나 못살겠다고 나갔습니다. 나갔다고 해서 아주 나간 것이 아니고 나를 겁주려고 빙빙 돌다가 들어온 것이죠. 해가 지면 집사님들이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죠.
그런데 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를 떠나야 할 요소인 것을 모르고 산 것이죠. 지금도 제 아내를 보면서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들어올 때도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리면 교인이 그럽니다. “목사님, 사모님을 위해서는 눈물이 나오고 우리를 위해서는 눈물이 안나옵니까? 우리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좀 해주시죠.” 몰라서 그럽니다. 왜 교인들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깊은 신비의 세계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게 하신 하나님이 교인들을 향해서 그렇게 울게 하시던 하나님이 제일 나중에 제 아내를 향해서 눈물을 흘리게 하십니다. 이것은 신비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역사하는 비밀입니다.
왜 눈물을 흘리느냐? 부모를 떠나지 못해서 그대에게 준 아픔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보면 성격을 변명하거나 탓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고치면서 떠나셔야 됩니다. 어머니가 말을 함부로 해서 상처를 준 것이 딸 속에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딸도 말을 함부로 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는 떠나보내야 할 내적인 부모의 자아상입니다. 이것이 부모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면서 오늘날 나의 가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찾아내야 합니다. 부모의 가정생활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나의 성격형성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데이빗 올슨 박사는 가정의 이상한 형태를 넷으로 구분했습니다. 혼돈된 가정, 경직된 가정, 유리된 가정, 밀착된 가정, 전혀 규율이 없이 혼란스러운 가정으로 누가 아버지인지 누가 자식인지 제멋대로 사는 가정을 혼란스러운 가정이라고 했고, 이와 반대로 경직된 가정은 지나치게 엄격해서 명령과 복종의 권위로 대화없는 가정, 명령으로 억압하는 아버지 앞에서 벌벌 떠는 가정, 이런 폐쇄적 가정이 있습니다. 유리된 가정은 뿔뿔이 흩어져서 가족 중심성이 없고 일체감도 없는 가정, 이런 가정은 가족이 다 따로따로 노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밀착된 가정은 지나치게 밀착되어서 서로 의존이 지나쳐서 새댁이 들어와서 끼어들 수 없는 너무 형제 우정이 심하기 때문에 시동생이 형수를 내쫓는 가정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너무 효도한다고 부모의 말을 듣고 제 아내를 쫓아내는, 이런 가정은 완전히 밀착된 가정인데 이런 가정도 비정상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제 아내를 쫓아내는 자식은 더 불효하는 자식입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자라온 사람들은 성인 아동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떠나는 치유를 해야 가정생활을 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기 위해서는 자기 속에 있는 소년기적 부모의 가정생활을 발견하고 자신에게서 성인 아동이 자라도록 치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치유를 위해서 연합의 원리를 우리에게 설명했는데 연합하기 위해서는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자기 남편에게 범사에 복종할지니라”
여기 복종은 일반적인 복종이 아니라 존경과 따르라는 것입니다. 순종은 어떻게 할까요? 남편을 머리로 삼고 가정을 세우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몸의 구조를 보면 머리가 있고 몸이 있습니다. 머리는 하늘이요, 몸은 땅을 상징합니다. 머리가 있어야 몸이 있고 머리가 성해야 온 몸이 생명을 유지합니다. 머리의 뜻을 몸이 따릅니다. 머리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장애자가 됩니다. 머리를 몸이 세워주듯 아내는 남편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연합의 원리입니다.
남편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일을 하라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귀담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복종이라는 연합은 신비한 성서의 언어에서 아래에서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한 것인데 가정생활에서도 잘 들어주어야 되지만 잠자리에서까지도 잘 들어주어야 되는 신비한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에 있어서 가정생활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피차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자존감의 상처를 순종으로 치유해주어야 됩니다. 아무리 남편이 못났어도 받들어주므로 사회에서 멸시당하고 직장에서 소외당한 남편을 끝까지 보호해주어야 됩니다.
성경에서 다윗의 가정의 비극, 한가지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공주를 얻기 위해서 목숨 걸고 아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미갈이 다윗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므로 다윗이 큰 실수를 범합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데서 춤을 추고 기뻐뛰느라 속살이 보였습니다. 다윗이 입은 옷이 바지가 아니고 까운과 같은 치마같은 옷이었으므로 속살이 보인 것입니다. 이 정도로 찬양하고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한 다음 그는 번제와 화목제 드리고 창고를 열어서 아낌없이 백성들에게 고기도, 떡도, 건포도도 한덩이씩 나누어 주면서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니까 그 아내 미갈이 멸시와 경멸에 찬 태도와 얼굴로 다윗을 비꼬았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이렇게 책망을 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불쾌하고 자존감의 상처를 얻은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뛰놀았노라 하나님이 당신 아버지와 당신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여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것이 무슨 잘못이오 나는 더 뛰놀겠소 내가 더 천박하게 되어도 당신이 말한 계집종들에게는 절대로 천대받지 않고 존경을 받을 것이오”(삼하6:21)
다윗은 미갈에게 자존감의 상처를 입고 그와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미갈의 불행은 이미 태문을 하나님이 닫았고 그리고 다윗의 불행으로 결국 밧세바와 잘못된 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이후에 밧세바와 접하게 됩니다.
다윗의 가정의 불행은 바로 미갈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존감에 상처를 주었습니다. 받들어주어야 할 왕인데 그 정도는 미갈은 인간적으로 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다윗, “당신은 정말로 어린 아이처럼 위대하시도다.” 그래야 할텐데 옷 벗은 것만 보았지 하나님 앞에서 춤추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자존감에 상처를 준 미갈은 결국 가정을 파괴시켰고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게 하는 큰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들이여, 연합을 위해서 남편의 자존감을 끝까지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므로 연합해야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25절). 이것은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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