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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받은 치유자이사야 53 : 4-6

by 【고동엽】 2022. 1. 3.

고난받은 치유자/이사야 53 : 4-6

 

예수님은 짧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 비하면 반생애 정도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생애마저 우리 주님은 험난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우리 주님은 태어날때 가장 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났으며 낳자마자 해로왕이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강보에 싸여 어린아이로 어머니 품에 안겨서 애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해로왕의 눈을 피해서 어린시절 그가 고향땅에 돌아와 그는 목수 일을 하면서 30년을 지냈습니다. 30세가 되던 때에 세레 요한으로 세례를 받으시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공적인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회개하라" 수많은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지한 백성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병든자를 고쳤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큰 사역이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그리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굶주린 자를 먹였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그의 권능은 역사의 일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 시달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기다리시는 지도자 메시야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환호성을 울리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그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수많은 민중들로부터 환성과 존경과 신망을 얻어갈때에 예수님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이 지도충의 무리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그들에 대하여 늘 신랄한 비판을 했습니다. “너희가 지도자라 하면서 이 백성을 착취하고 그리고 양의 가죽을 쓰고 앉아서 늑대 노릇을 하느냐" 하고 비판을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분노를 느낀 지도층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런 흠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예수님에 대하여 율법을 어기는 '. 우리 조상적부터 지켜오고 우리가 늘 말씀을 따라 살아왔는데 율법을 범하고 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또 율법으로 말씀한 것을 새롭게 해석할 때에 저들은 세가지면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두번째로 율법을 범한 자'로 세번째는 자기들을 비난하는 자'라 하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죽일 재목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회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목을 이렇게 걸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왕'이라고 한다. 이것은 당시의 로마에 대한 반역죄가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로마에 대하여 시져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다. 이렇게 저들은 재목을 붙입니다. 세번째로 무슨 재목을 걸었느냐? ‘민족을 선동한다'하고 3가지 재목을 걸었습니다. 당시의 로마의 총독의 빌라도에게 이렇게 고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볼때 예수님이 죽을만한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놓아 줄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민중을 선동해서 저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만약에 예수를 죽이지 아니하면 당신은 가이사에 신하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큰일날 일입니다. 빌라도는 어쩔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의 처형을 언도합니다. 예수님은 이른 새벽의 심문을 마치시고 그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며 그리고 수많은 채찍으로 맞았습니다.

심문을 마치고 자기가 죽어야 할 십자가를 지고 그는 골고다로 향했습니다. 수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로 자기가 지고 간 십자가를 지고 내렸을때 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양손을 못박았으며 두발을 대못으로 박았습니다. 그리고 구덩이에 십자가를 세울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손에서 피를 흘렸고 그 발에서도 피가 흘렸으며 머리에서는 가시관에서 피가 흘렸습니다. 뜨거운 태양빛 아래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동안 가진 고난과 시련과 그 아픔 속에서 주님은 매달려서 신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은 아지못해서 그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기도하시고 12시가 되었을때에는 엘리엘리 라마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예수님이 통곡을 하셨습니다.

그 순간 하늘이 빛을 잃어 버렸으며 온땅은 흑암으로 뒤덮었습니다. 하나님도 정녕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에게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씌워서 처형하실때에 정녕 눈 뜨고 볼 수 없었기에 온 세상을 다 어둠 흑암으로 감추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옥의 어둠을 방불케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인으로서의 버림을 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죄없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렇게 잔악하게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죽은 자를 살리시던, 바다를 잠잠케 하시던, 그리고 모든 병자를 고치시던, 그 능력으로 어찌하여 저렇게 나약하게 죽어야 했던가?" 이것은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실망을 한 제자들은 엠마오 도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알았다. 그런데 로마의 권원에 의해서 넘겨짐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었노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자들도 실망했고 모든 민중도 실망했으며 예수님은 모두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는 700년 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고난을 당한다하였노라." 이것이 바로 당시의 모든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통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이 징벌을 받음은 하나님께 매를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모든 사람이 그러하였으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는 똑똑히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찔름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우리는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우리 모든 죄악을, 우리의 고통을, 징벌을, 홀로 담당하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내가 너희의 허물 때문에 이 가시관 쓰시고 찔려있노라. 피흘렸노라. 내가 너희 허물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노라. 너희가 반역한 죄 때문에 내가 옆구리에 창 찔려 물과 피를 쏟노라." 주님은 말없이 지금도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고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믿는 예수는 나 때문에 죽은 예수요. 나 때문에 고난 당한 예수요. 나의 허물 때문에 그가 죽는 예수로 십자가에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는 그가 우리의 질고를 졌다. 졌다라는 말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사는 말인데 이 말은 레위기 16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대사장이 속죄일에 양 두마리를 가지고 회막문에 서서 한마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에게 모든 속죄 양으로, 그는 재물이 되어 재단에 피뿌림을 했던 것입니다. 한마리는 아사셀양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모든 제사장들의 죄를 다 그에게 씌워서 머리에 안수하면서 그에게 모든 죄를 씌워서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내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죽도록 한 것입니다. 이 광야의 아사셀양에게 씌웠던 그 모든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그 아사셀, 장차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십자가에 달려서 아세셀양처럼 죽어가는, 우리의 죄를 지고, 그것은 우리의 고통과 죄와 모든 질병을 당신의 몸으로 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에 고통을 통해서 내가 받어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그 은혜는 바로 나의 질병과 마음의 상처와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이 예수님에게 지우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고난을, 내가 고난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의 고통을 내 손에 다시 못 박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질병과, 죄악과, 나의 모든 상처를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는 나의 모든 죄악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치 환자가 병원에 가면 자기 상처를 의사에게 드러냅니다. 그래야만 의사가 고칩니다. 의사에게 자기 몸을 마낍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곧 질병과 같아서 죽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죄는 질병과 같아서 계속 두려운 것입니다. 모두 싫어하는 것입니다. 죄와 질병은 감출려고 하는 은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숨겨진 나의 죄악과 질병과 고통을 주님 앞에 십자가에 드림으로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이번 오늘 순환 주간에 내가 받아야 할 은혜는 주님의 고통을 내가 고통으로 분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나에게 모든 고통을,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을 담아 있는 모든 인간의 상처들을 주님 십자가의 고난에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시고 치유하시는 겁니다. 내가 노력으로 내 재주로 내가 눈물 흘리고 내가 회개함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이 내 고난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오늘 이사야서에서 말한대로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는 우리의 질병, 육체적인 질병도 내 마음의 상처도 우리 영혼의 죄악도, 모두다 이것은 병입니다. 이것을 주님께 고난속에 드림으로 치유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별세의 치유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다 상처받은 인간들입니다. 전부 병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린시절부터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형제로부터 받은 상처, 그리고 학교에서 친구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전부 얼룩져 있습니다. 잠재되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정에서 남편으로부터 무시당하는 또는 어떤 상처를 입은 아내 마음의 응어리 또 아내로부터 섭섭함을 받는 남편의 가슴속에 잠재된 그런 마음의 섭섭함, 이 세상의 직장에서 당하는 모든 고뇌, 우리 물질을 잃어 버리는 그 마음의 분노와 상처들, 자기를 부정하는 인간의 열등과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도사린 자기 자신을 부정해 버리는 생각들, 이게 모두다 상처요. 죄악의 투성이입니다. 모두 악한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치료받는 역사가 순환주간에 내가 너를 위하여 이 모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한다." 의사는 기술로 치료를 하지만 예수님은 친히 모든 우리의 질병과 죄악과 고통을 자기가 받아 들이고 우리를 살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고난의 사랑입니다. 어렸을때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아파야 할 것을," 그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 어린아이는 그 어머니의 고통을 통해서 치유를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늘도 달리셔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노라. 내가 너희를 고통을 당하노라. 내가 너희를 위해서 마음의 상처를 다 입노라. 너는 내 안에서 마음을 입어라. 고통의 안식을 입어라. 그리고 평화를 얻어라." 오늘 귀한시간에 우리 모두다 성도들이 이번 주간 이 고난주간에 모두 새벽을 깨워 기도하면서 치유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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