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과거를 치유하고 새 출발하라 / 요한복음 21:15-23

by 【고동엽】 2021. 12. 8.

과거를 치유하고 새 출발하라

 

요한복음 21:15-23

 

 

사람은 그 일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과거를 남기게 됩니다. 과거라는 것은 지나간 세월들이 모두 우리에게는 과거로 남습니다. 짧게 산 청소년들에게는 과거가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과거가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의 인생을 회상할 때 우리는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실패로 얼룩진 그런 흔적들로 차 있는 것입니다.

지나온 과거를 회상할 때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것보다는 차마 생각하기 조차 싫은 날들도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우리가 치유하면서 자기 생을 아름답게 창조해 갈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 자신에게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상처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치유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가 다 과거의 실패와 얼룩진 상처들로 남아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 실패를 딛고 서서 위대한 생을 창조해갔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위대한 제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책망도 많이 들었습니다. 또 주님으로부터 칭찬도 들었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서 책망도 많이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성공적인 주님의 제자처럼 보였으나 그의 생애는 실패한 제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실패를 거듭했으나 결국 크게 성공한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의 성공적인 삶은 실패를 딛고 서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실패한 베드로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는 어부였던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때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따랐고 주님의 사랑도 칭찬도 많이 받으면서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믿고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제자였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충성을 가장 많이 한 제자였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는 어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뱃사람, 비린내 나는 그물을 만지면서 평생을 살아야 할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아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그의 생애는 찬란하게 빛나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학력은 오직 예수님에게서 배운 3년간의 제자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되어 2천년 교회사를 빛내주고 있는 위대한 스승으로 우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요,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베드로보다 다 나은 사람들입니다. 학력으로 봐도 베드로보다 나은 사람이요, 출생으로 봐도 베드로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베드로가 그러한 환경에서 우뚝 서서 위대한 사람으로 되어갔듯이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그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신앙고백이 탁월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하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무명한 베드로가 이 신앙고백으로 교회의 반석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 주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물러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을 얻은 베드로는 이제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을 가진 베드로는 그의 생에 큰 수치를 남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이 말씀을 할 때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힘있게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대로 그 날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연약한 소녀 앞에서 수치스럽게 부인했습니다. 자기를 잡으러 온 것도 아니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핍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연약한 소녀 앞에서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수치스러운 과오를 범했던 것입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라고 했던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엄청난 배신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후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제자로 끝났습니다. 3년동안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의 결과는 주님을 부인하는 수치스러운 제자로 과오를 남긴 채 좌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3년동안 그렇게 신앙고백으로 칭찬도 받고, 주님을 따르는 열정에서도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마지막 이렇게 비참하게 수치스러운 존재로 끝이 났다는 사실은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났지만 베드로는 아직도 그 마음속에 옛날 처음 부르셨던 소명의 열정을 회복하지 못한채 고기를 잡으려고 갈릴리 바닷가로 나아갔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좌절감에 빠져있는 베드로, 실패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은혜를 주시려고 하십니다.

 

실패가 주는 죄책감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중의 하나가 실패입니다. 실패를 경험할 때 실패 자체보다 실패로 인해 오는 죄책감 때문에 우리는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죄책감은 삶을 짓누르는 커다란 압박감이 되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그 압박감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로 고통이 따릅니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자신을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자기의 안목 때문에 실패는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은 거의가 다 실패의 경험을 통절하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를 인생의 파멸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어떻게 처리하고 치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우리의 과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왜 실패했느냐, 나를 왜 부인했느냐, 왜 너는 그렇게 비겁했느냐, 너는 왜 그렇게 약했느냐’ 그렇게 묻지 않으시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베드로에게 가까이 가셔서 따스한 손길로 접근해 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3년 반동안 베드로를 제자로 사랑하고 아꼈던 예수님은 얼마든지 배신감을 느끼고 베드로에게 등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에게 가까이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실패의 죄책감을 따스한 사랑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수치스러운, 또는 실패한 과거들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가까이 가셔서 “너 과거에 실수한 것 다 잊어버려라 지나간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가까이 오셨습니다.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가까이 찾아오셔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부끄러운 베드로에게, 또 용서를 빌 수도 없는 처지에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시면서 치유하시는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으로 그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작가요, 심리학자인 헨리 나웬은 그가 쓴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후회란 쓰라린 기억이고, 죄책감은 자신을 고소하는 기억이며, 감사는 즐거운 기억이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을 잊어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과거의 상처는 잊으려고 하지만 우리 속에 잠재된 상처로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남의 것을 훔쳤는데 그것을 ‘잊어야지’ 한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해결해야 됩니다.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면 원한에 찬 기억이라든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잠재되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처입은 기억들을 가능하면 망각의 세계로 이끌어가려고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망각의 구석에서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셔서 우리의 삶의 한 부분으로 상기시키면서 치유시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막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용서를 받으려면 자기 죄를 자기가 고백해야 됩니다. 그래서 치유를 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병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음성적인 병이 있고 양성적인 병이 있습니다. 음성적인 병은 잠복되어 있는 것이고 양성적인 병은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상처의 기억이 잊혀진 것이 있고 잊혀지지 않는 것이있는데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양성적 상처입니다. 음성적 상처는 잊기는 잊었는데 속에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의 상처가 잊혀졌다고 그 상처가 다 나은 것이냐? 안낫고 여전히 병으로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 어느 때 돌발적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이것들을 예수님은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까지도 드러내서 치유하십니다.

 

치유받는 베드로

 

예수님께서 상처받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것은 베드로의 양심의 죄책감을 드러내서 치유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치유의 손을 펴 주시고 있습니다.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실패한 제자에게 용서와 사랑의 손을 펴셔서 그를 다시 한번 새롭게 만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매우 부드러운 방법으로 베드로를 과거로 데리고 가서 그의 아픈 기억을 부드럽게 치유하셔서 찢어졌던 상처가 아물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한 과거를 치유해주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마지막까지 그의 사역에 충성할 수 있도록 은혜의 기회로 그를 전환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세워주시는 일을 먼저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지나온 과거의 아픈 상처들이 아물고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죄책감과 상처로 멍들고 분노와 원한으로 신음하고 깊은 내면의 좌절감과 패배감으로 차 있다면 치유받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상처받은 아픔이며, 고난이며, 부활은 치유의 승리요, 평안이요, 기쁨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과거에 못질한 상처들이 우리속에 다 얼룩져 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옆구리에 창을 찔러 상처낸 것들이 우리의 과거의 흔적들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우리의 못박은 상처들을 그에게 투사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찔린 것은 우리의 가슴속에 창 찔러 상처난 것들을 그에게 전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서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상처를 받고 있으면서 그 상처를 가지고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가슴속에 못박힌 상처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이 못난 자식’ 한 것들이 잊혀진 것 같으나 상처로 못이 박혀 있습니다. ‘공부도 못하는 자식이 세상에서 뭐 할거야 이것을 자식이라고 낳아놓았어’ 이것이 상처로 남습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모, 형제, 친구, 학교 선생, 직장 상사 등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못질을 합니다. 이런 상처들이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을 치유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그 상처를 다 받으셔서 피를 흘리고 치유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것은 그냥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의 상처를 내가 다 대신해서 죽노니 너희 과거를 십자가에 처형하라’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치유입니다. 이 치유를 별세의 치유라고 말합니다.

저는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을 쳐다보지 못하는 열등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이 너무 무서워서 정면으로 보지 못한 것이 수십년 동안 사람을 정면으로 보지 못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남들은 내가 강대상에 서서 설교를 잘하니까 담력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실은 저는 담력이 없습니다. 무서운 아버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 속에서 언제나 억압을 당해서 나도 모르게 열등의식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늘 술 취하시고, 밤이면 도박을 해서 돈을 잃고는 아침에 집에 오시면 꼭 화를 내십니다. 돈 잃어버린 것이 속상하니까 저희한테 화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굴 표정이 분노하시는데 그 분노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내 속에 잠재되어 갔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그것이 가끔 저에게서 표출되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교인들은 모릅니다. 그런데 부목사들은 압니다. 또 어렸을 때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한 것을 저희 아들에게 저도 똑같이 했습니다. “이 자식아 공부도 못한 것이 세상 살아서 뭘 할거냐” 어떻게 목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했습니다. “이놈아, 네 아버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이렇게 되었지 않느냐 너는 좋은 집에서 살고 네가 사달라는 것도 다 사주는데도 왜 안돼?” 이렇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제 속에 잠재된 과거의 상처들이 내 속에 그대로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말은 나의 모든 과거의 상처도, 아픔도, 분노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죽음을 선언할 때 나의 과거가 치유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세 번째 서울대병원에 가서 수술할 때 마취하고 마취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바늘로 찌를 때 ‘아야’ 하니까 “아직도 안죽었네” 그래요. 이것은 선명하게 제 머리속에 남았습니다. 죽어야 수술을 하죠, 죽어야 병이 나가죠, 죽어야 나쁜 것을 빼죠, 죽어야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대고 우리를 죽이는데 아프다고 소리치니까 치료를 못합니다. 죽어야 되는데 안죽고 소리만 치다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내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제가 늘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라고 별세를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병도 살아있지만 완전히 죽을 때는 병도 다 죽습니다. 이와같이 내 속에 있는 많은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나의 죽음을 선언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과거의 상처도, 저주도, 불행도, 아픔도, 쓰라린 기억도 다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로 새로운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새 출발하는 베드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가까이 가셔서 그를 치료하실 때 놀라운 사건을 이루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실패한 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숯불 위에 떡과 생선을 구워 먹이시면서 가까이 가십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대제사장의 집에서 모닥불을 불을 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침입니다. 이것은 밤에 부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가 넘어질 때는 몹시 시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떡과 생선을 구워 먹이신 후에 주님께서 베드로의 과거를 치유하시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묻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묻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과거의 기억들을 회상시켜서 그를 새롭게 바꾸어주시려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의 상처들, 이것들을 주님께서 은혜로 바꾸셔서 놀라운 일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일생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생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질문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그의 상처가 아물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세 가지 나의 존재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내 존재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나의 모든 존재를 가장 영광스럽게 만들어주는 치유의 사건은 사랑함으로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 수치스러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영광스러운 제자가 되기 위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최대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이것은 베드로가 어떻게 영광을 돌리며 죽을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비겁하게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수치스러운 존재로 네가 나를 부인했지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영광스러운 존재로 죽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를 행복한 존재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베드로는 행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베드로는 그의 삶을 통해서 최대의 창조적인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켰습니다. 세 번 부인하던 비겁한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한 번 외칠 때 삼천명이 회개하는 능력있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와, 좌절과 부끄러운 수치들을 주님의 십자가에서 치유받고 부활한 주님을 만나서 더 큰 영광으로, 능력으로, 행복으로, 은혜로 자기의 생을 재출발시키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