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을 치유하라
출애굽기 4:10-17
사람마다 자기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보고 왔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을 보면서 자기 얼굴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기 얼굴을 아름답게 만들려고 화장하고 성형수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형수술을 하고도 만족한 사람이 있고 아무리 고쳐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수년전에 맥스웰 멀쯔라는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가 「새로운 미래를 소유한 새로운 얼굴」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것은 성형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얼굴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애의 문이 열렸다는 개개인의 경험담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얼굴이 달라지니까 마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바꾸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얼굴을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불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최근에 또 이런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얼굴을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은 외모를 아무리 바꾸어도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는데 하나는 외형적인 얼굴이고 하나는 내적인 얼굴인데 내적인 얼굴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자화상입니다. 내적인 자아상이 바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얼굴을 싫어하듯이 자기 인생의 자아에 대하여 싫어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격이나, 가문이나, 환경, 성장배경, 학력 이런 모든 것을 다 싫어하는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싫어합니다. 가장 좋아해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가 싫어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부터 인생의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면 분내고 화를 내면서도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더 무시하고 자기를 멸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열등감에 꽁꽁 묶여서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멸시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무서운 악인데 이것을 낮은 자존감(Lowself-esteem)이라고 말하고 다른말로 말하면 열등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무시하고 낮추는 감정입니다.
이런 자아상을 보면서 슬퍼하고 몹시 분노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네 얼굴을 만들었는데 네가 너 자신을 보면서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는데 네 자신에 대하여 부정하고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을 극복해야 될 과제가 있습니다. 열등감은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심리적인 질병입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것도 나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싫어하는 것은 하나의 무서운 질병입니다. 이런 질병이 전염병처럼 퍼져서 어린 아이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생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탄식하고 울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성공하고 찬란한 영광의 금자탑을 남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자로
끝내버립니다. 부부간에 서로 이해하고 화목하게 살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일에 분내고 가정을 감옥처럼 패쇄해서 대화를 잃어버리고 다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자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채 항상 질투심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낮은 자존감에서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자아상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성공적인 존재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잠재된 낮은 자존감을 치유해야 됩니다.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의 열등감
모세는 날 때부터 외모가 준수하고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성장 배경이 훌륭한 환경이었습니다. 당시에 최고의 교육을 궁중에서 받았습니다.
그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였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애굽의 궁실에서 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에게는 강한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말씀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열등감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0절) 하고 주께서 말씀하실 때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13절에 모세가 하나님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모세는 수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폐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실패할 때 받을 조롱이 두려웠으며 저들이 듣지 않고 믿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4장 1절에 보면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하고 자기를 세 번째로 부정합니다.
네 번째는 10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렇
게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13절에 모세가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고 거절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다섯번씩이나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서 크고 분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모세가 자신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못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셨습니다. 우리가 죄 지었을 때만 하나님께서 노하시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기
대를 스스로 자학하고 포기할 때 하나님께서 노하십니다. 열등감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무서운 악이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으로 오는 나쁜 영향
첫째, 열등감은 우리 속에 있는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또 내게 있는 무한한 가능성,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잠식시켜버립니다.
둘째, 열등감은 우리의 꿈을 파괴시킵니다. 희망을 꺾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담력을 상실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상실하고,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나약한 존재, 패배자로 낙인시켜서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어갑니다.
셋째, 열등감은 대인관계를 해칩니다.
자기 얼굴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열등하게 인정하고 가치없는 자로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가치없는 자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 있습니다.
넷째,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사역에 큰 방해가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훌륭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면류관을 받아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한다'
하고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고 포기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고, 하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재능을 다 사장시켜서 초라하게 썩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자아상의 문제인 것입니다.
열등감은 일종의 병적인 심리현상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만사에 자신이 없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무능하고, 무력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교인 중에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교회 봉사도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오해하고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열등감의 원인
낮은 자존감이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봅니다.
내적인 요인에서 오는 열등감과 외적인 요인에서 오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첫째, 내적인 요인에서 오는 열등감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받은 가정과 사회의 영향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열등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의존하고, 기저귀에 의존하면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로 자랍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의 심리속에 '나는 의존하고 사는 존재구나!' 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낮은 자존감을 만들어버립니다. '네 형은 공부를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해' 하면서 형제간에 비교시킵니다. 또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너는 왜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 하면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합니다. 세상이 온통 우리 자신을 못난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어린 아이들은 여과가 없기 때문에 어렸을 때 귀속에 들려오는 그대로 다 수용합니다. 어른들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아이들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려주는 대로 잠재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들이 열등감을 만들어 주고, 형제들이 만들어 주고, 선생님이 만들어줍니다. 또 성장해서는 직장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뒤지면 열등감이 옵니다.
둘째, 자기 스스로 만든 자화상으로 인하여 오는 내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된 사고, 신학적 사고입니다.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더 심하게는 '나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야' 하면서 자기 자신을 한없이 정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형상을 상실해버리고 완전히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인 열등감의 원인이 됩니다. 외적인 것은 성장과정과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형성되었고 내적인 것은 자기 스스로 잘못된 사고를 갖는데서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겸손하다고 말할 때 자신을 무시하고 격하시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또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는 못났다고 학대하면서 남에게 굽실거리는 것은 겸손이 아니고 비굴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조건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하나님께서 창조한 위대한 존재다' 이렇게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 때문에 자기를 너무 격하시키고 자학하고 학대하는 비극, 이것이 바로 열등감입니다. 우리는 열등감이 우리 속에 어떻게 잠재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낮은 자존감을 치유해야 됩니다.
열등감의 치료
창조 가치 인정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11절)
'누가 네 입을 창조했느냐 창조하신 자를 기억하라' 그럽니다. 이것은 창조 가치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현재 나의 현실, 나의 가문, 신체적인 조건, 나의 기질, 나의 성장배경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께서 나를 부르신 후에도 하나님의 종으로 나에게 사명을 맡겨주신 후에도 나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모세는 천성적으로 입이 어눌하고 혀가 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모세의 혀가 어눌하게 된 원인을 생각해보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양만 이끌고 다니면서 대화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말이 둔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완전하게 우월하게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약점이 있고 장애가 다 있습니다. 이것을 열등감으로 자기를 비하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등감을 갖게 되는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비교의식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외모나, 재능, 환경, 학벌을 비교하면서 우울해하고 원망하고 탄식하면 열등감이라는 병이 듭니다.
그래서 유명한 엘리슨이라는 분은 이런 병적 열등감에서 불행해지는 결과로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고, 소외감을 갖게 만들고, 공포감, 분노, 적의, 상심, 불안감, 창의력 상실, 시기, 질투, 원망, 좌절, 자기 학대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들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기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세워주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수평적인 시선을 위로 올리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라고 물지 말고 '하나님은 왜 나를 여기서 이렇게 태어나게 하셨을까'라고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들어 나를 이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선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자화상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상을 내 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화가가 길거리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데 거지 아이가 와서 "선생님, 한 달라만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화가는 "잠깐만 기다려라" 하고는 그 아이의 얼굴을 스케치 했습니다. 거기에는 거지의 얼굴이 아닌 멋진 신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게 누구인지 알겠니?" "잘 모르겠는데요." "장차 되어질 너의 얼굴이야" 이 거지 아이가 신사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너무 너무 좋아서 "아저씨, 그 그림 저에게 주세요." 하고 말하자 화가는 그림과 함께 1달러를 거지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거지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사는 지하실 방에 와서 그것을 벽에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거지들이 "그 사람이 누구야" 하고 물었습니다.
"나야" 하니까 거지들이 "야 임마 너는 거지인데 어떻게 이 신사가 너야" 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래도 그 거지 아이는 "아니야 내 얼굴이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미래에 그림 속의 신사처럼 되어질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신사의 모습을 가지려면 내가 여기에서 떠나야 한다. 거지같이 살아서는 안된다.' 이 결심을 하고는 이 거지 아이가 서점에 가서 주인에게 "아저씨, 제가 서점에서 심부름을 할테니까 밥만 먹여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가 일도 착실하게 잘 하고 틈틈이 책도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서점 주인이 야간대학에 보내주었습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는 서점 주인까지 되었습니다. 화가가 그려준 신사의 얼굴 그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거지는 화가가 그려준 얼굴을 보고 자기의 인격과 운명을 바꾸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미래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천국에 있는 스데반의 얼굴이요, 영화로운 얼굴입니다. 이 모습을 본다고 할 때 현재 어떤 상황속에 있든지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열등감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위대한 향상의 욕구가 분출되며 무한한 가능성을 창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절).
'네 입이 둔하냐 내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약점이 있습니까 주께서 한마디를 더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 말은 그 약점을 내가 함께 함으로 보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잘난 것 가지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약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거기에 덧붙여 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계곡이 깊어야 물이 깊습니다. 그래서 낮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보입니다.
잘난 것에는 하나님께서 손댈 것이 없습니다. 약점에 하나님께서 손을 대십니다. 신체에도 병든 곳에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지 건강한 곳에는 손댈 필요가 없습니다. 병든 곳에 손을 대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고 했습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열등감이 오려고 할 때마다 '이 열등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구나' 하고 은혜로 채워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약점이 있습니까 공부를 많이 못했습니까 성경을 읽으십시오. 얼굴이 못생겼습니까 웃으십시오. 잘 생기고 안웃는 것보다 남들이 못생겼다고 해도 웃는 얼
굴은 굉장한 매력이 있습니다. 좋은 옷을 못입었습니까 친절의 옷을 입으십시오. 재능이 없어 교회 봉사 못합니까 기도하십시오. 헌금 못해서 목사가 안알아준다고 자학합니까
예배에 참석해서 앞자리에 앉으십시오. 말이 둔해서 전도 못합니까 전도지 가지고 가서 놓고만 오십시오.
우리들은 얼마든지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개척 당시에 시골에서 올라온 국민학교 밖에 안나온 여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반포에 와서 교인들을 보니까 전부 다 학력이 높아서 열등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어느날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리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구역장을 맡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칠 때 대학 나온 구역 식구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전문대 강사가 구역 식구가 되었고, 교수도 구역 식구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 구역에 예배드리러 가 보니까 국민학교도 겨우 나온 여 집사가 대학 교수들을 거느리고 구역예배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다.' 하고는 제가 나오면서 "총장님" 하고 불렀습니다. "총장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총장이야 대학 교수 거느리니까 총장이지" "목사님, 제가 출세했습니다."
대학 교수가 저보고 그래요.
"목사님, 내년에도 우리 구역장님 그대로 맡겨주세요."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학력의 열등의식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구역장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전도해서 구역을 많이 늘렸습니다.
만약에 이 분이 학력이 낮다고 뒤에 앉아서 자학하고 있었다면 구역장 못했습니다.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극복해야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중표 목사님에게도 열등감이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합니다. 설교하는 저에게도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입이 둔한 편이고, 자신감이 없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늘 저 자신을 학대합니다. 우리 식구가 교회를 개척하자고 할 때도 저는 못한다고 반대했습니다. 못한다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나는 기장이라 안돼. 시골 사람이라 안돼. 학력이 낮아서 안돼. 능력이 없어서 안돼. 돈이 없어서 안돼' 하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식구는 그럽니다.
"로버트 슐러 얘기하면서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조용기 목사님은 돈 가지고 했나요?" "그 분은 능력이 있었지" 제가 여러 가지로 변명하면서 안된다고 하니까 우리 식구가 된다고 하는 사람 열 사람을 만나게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개척을 안하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4,5백명 출석하는 교회에서 저를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로 가고 싶어서 개척을 안하려고 했는데 끝내 우리 식구가 안간다고 하니까 '나 혼자는 못가지' 하고 있는데 우리 식구가 저를 데리고 신반포1차로 왔습니다. 신반포 1차에 저를 인도해서 왔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저를 감동시키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 모세에게 들려주셨던 감동이 제 가슴을 뜨겁게 하면서 나의 못한다는 열등감을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래,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 하고는 개척의 용단을 내리고 청계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열등감을 그냥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의 한신교회가 어떻게 생겼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합니다. 그 열등감으로 교회개척을 안했다고 한다면 50개의 개척교회가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 어떤 일들이 되어질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개척을 안했다면 이 종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별세의 신학과 수많은 저서가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시골에 갔으면 이런 저서도 못나왔습니다.
내가 나약해서 무엇을 못한다고 할 때 주의 음성을 들읍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열등감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악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공부를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른 것으로라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부부간에도 격려하십시오.
어느 목사님이 설교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부인에게 "여보, 설교를 들으면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줘"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이 설교할 때 사투리를 쓴다든지 표정이 밝지 않으면 메모해서 고치곤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목사님에게는 열등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모가 펜만 들면 기가 확 죽어가지고 설교를 못했습니다. 남편이 설교를 못하게 되니까 사모가 사모 세미나에 갔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에게 용기를 주어야지' 하고는 주일날 목사님이 설교할 때 메모를 하지 않고 '아멘 아멘' 하면서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내려가서 "여보, 오늘 뭐 잘못한 것 없소" 하니까 아내가 "아니에요. 당신 설교가 너무 은혜로워서 적을 것도 없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이 말에 힘이 생겨가지고 그 다음부터 외쳐대니까 능력이 생겨가지고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좀처점 생각하지 않고 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만을 생각한다"
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비극이며, 역사상의 모든 질병, 전쟁보다 더 큰 불행을 안겨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 있는 것으로 열등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을 하여야 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못합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라 너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고 하십니까? 네가 말로 못하면 지팡이로 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말로 못한다고? 네 손에 지팡이가 있지 않느냐 내가 네 입의 둔한 것을 지팡이의 권능으로 역사하리라 네가 정녕 네 입이 둔하다고 그렇게 부정하니 네 손에 있는 지팡이로 일을 하리라'
아마 모세가 하나님에게 "주여, 내 입술에 능력을 주시옵소서." 했다면 모세 입에 능력이 있어서 모세가 말만 하면 이스라엘이 백성이 그대로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입으로 부정하다가 결국은 입으로 망합니다. 어디에서 망하느냐?
므리바에서 망합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민 20:10)
'네 말로 명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라'고 할 때 그는 말을 안했습니다. 끝내 입이 둔한 자라고 부정하던 모세는 말을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쳤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12)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을 끝내 부정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진노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른 능력을 주셨습니다. 지팡이의 능력을 주셔서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반석을 깨뜨려 생수가 흘러나왔습니다. 지팡이 하나로 60만 장정이 말없이 따라오게 만들었습니다.
말로는 얼마 가지 못하나 지팡이를 높이 들면 수많은 군중들이 그 지팡이를 보고 따라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체적인 열등감이 있었고 말이 둔한 자였습니다. 그가 말로 했으면 2천년 전 소아시아의 설교자로 끝나버렸을 것인데 글로 써서 교회에 보낸 것이 13편의 서신
이 되었습니다. 말은 사라져 버렸으나 글은 2천년, 앞으로도 종말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변화를 일으키며,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며 교회를 세워가는 사도 바울의 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으로 못하면 저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짧으냐 왼손으로 하라 눈이 멀었느냐 입으로 하라'
양정신 목사님은 어렸을 때 맹인으로 태어나서 아무것도 쓸모없는 자라고 집안 식구들이 구박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주여 내가 어떻게 하오리까" "딸아, 네가 눈은 쓸 수 없으나 귀는 쓸 수 있지 않느냐 입을 쓸 수 있지 않느냐 머리를 쓸 수 있지 않느냐 손을 쓸 수 있지 않느냐" 그때 어린 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여,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나이다.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나이다. 머리로 하나님을 생각하겠나이다." 그는 위대한 목사요,
위대한 교육학자가 되어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가져갈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16절)
하나님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나의 약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 잘 생긴 것으로는 아무리 나타내도 그것으로 누가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말 잘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병을 고쳐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같이 봅니다. 내가 무능하고, 약점이 있고 허물 많은 사람인데 의로워지고, 변화되고, 새로운 일을 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같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귀한시간 내게 있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 신분을 확인해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됨의 가치를 인정해야 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하는 존재를 인정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뢰감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라 네 지팡이를 잡고 가라' 분명히 나에게 있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가지고 나의 약점, 내가 불행이라고 탄식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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