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Άλλα σε προετοιμασία

공의의 법칙, 위에 은혜의 법칙

by 【고동엽】 2021. 12. 8.

공의의 법칙, 위에 은혜의 법칙 갈6:6~10 09.10.25.설교녹취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9

 

(내용이 모호한 듯 하지만, 천천히 자세히 읽어보시면,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중에 딜레마는..

우리가 심은 것을, 우리가 즉시 거두려고 하는데,

사실 그게 잘 거두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생활 잘 하면서도.. 우리는 잘 낙심한다.

 

종종 우리는 ‘내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설교를 듣는다. (소위 공의의 법칙)

그런데 주위에 어떤 사람을 보니까, 심은 대로 잘 거두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심은 대로 못 거두니까.. 신앙이 딜레마에 빠진다.

 

아래 설교문은,

성도는 ‘심은 대로 (일단) 잘 못 거둔다.’며,

그 이유는 ‘성도가 심은 것을.. 타인으로 하여금 거두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의 법칙’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물론 성도가 심은 것을 거둘 때도 있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9 ...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한참 있다가 거둔다는 뜻이다.

 

 

◑공의의 법칙 = 심고 거두는 법칙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 공의의 속성

하나님은 공의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당신의 공의로우심과 공정하심을 세상에 나타내신다.

이 원칙이 분명해야..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 되실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이 원칙대로 움직여진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고,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돌려받는다.

 

▲그러나 공의의 법칙, 그 이상의 원칙이 있는데.. 은혜의 법칙이다.

만약에 심은 대로 거두는 원칙만 이 세상에서 통용된다면

우리 중에 기뻐할 사람이 있는 것만큼, 낙심하고 후회할 사람도 생길 것이다.

 

우리는 ‘분별력/판단력’에 있어서도..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노력’의 측면에서 봐도.. 그렇게 열심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공의만 적용된다면.. 이 추수의 계절에.. 우리가 많이 괴로울 것이다.

 

하나님이 이 ‘공의’의 대원칙을 지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가 못난 존재’임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우리에게는 이 원칙보다, 더 차원 높은 하나님의 통치(은혜)가 필요한데...

 

 

◑은혜의 법칙 1 -내게 이익이 되는 은혜의 법칙

 

하나님의 통치/구원의 원리로서의 은혜의 법칙

 

▲1.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20:1~16

주님은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일과가 마치고, 주인의 청지기가 와서 품삯을 지불하는데,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만 일한 일꾼이 1데나리온 받는 것을 보고서,

아침 일찍 온 일꾼은, 원래 정한 품삯(1데나리온)보다 더 받을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도 똑같은 품삯을 받았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심은 대로 거두고, 노력한 것만큼 받는 대원칙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주인은 약속한 1데나리온을,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에게, 약속대로 주었다.

그가 일한 대가를.. 그는 정확하게 받았다. 공의는 분명히 세워졌다.

 

그런데 주인은, ‘공의의 원칙’.. 그 이상을 갖고 있었다.

공의의 원칙, 일한 대로 받고, 심는 대로 거두는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을 넘어서는/초월하는 어떤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의 원칙’이었다.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에게 따지던 일꾼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공의가 분명히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은혜의 법칙은, 공의의 법칙을 깨는 것이 아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한다.)

그러나 공의의 법칙 그 이상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법칙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이다.

 

그래서 우리 같이 못난 자들이 받게 되는 이 은혜의 법칙은

놀라운 소망의 복음이 된다.

 

 

▲2. 부자 청년의 일화 마19:16~30

이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보상의 원칙>과 <은혜의 원칙>이다. *보상의 원칙=공의의 원칙

 

부자 청년이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질문한 것은

<보상의 원칙>으로 물은 것이다.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네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자 부자 청년은 근심하여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아직 보상의 원칙)

 

24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결국 예수님은 <은혜의 법칙>으로 결론을 내리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다.

 

이 ‘은혜의 원칙’은, ‘보상의 원칙’을 무효화시키는 원칙이 아니라,

그 보상의 원칙을 인정(계명들을 지키라)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원칙이다.

 

 

◑은혜의 법칙 2 -내게 (일단) 손해가 되는 은혜의 법칙 / 내가 베푸는 은혜

 

자기는 손해 보면서도,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은혜의 법칙

 

▲1. 마게도냐 교인의 헌금을 통해 나타난 은혜의 법칙 고후8:1~15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인하여 극심한 궁핍에 빠지자,

마게도냐 교회는..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예루살렘에 보냈다. 고후8:2

 

이때 사도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의 구제헌금을 칭찬하면서

같은 원리로, 예수님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8:9

 

예수님의 가난하게 되심은

‘보상의 원칙’을 넘어서는, ‘은혜의 원칙’이었다. (본문에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이 예수님의 베푸시는 '은혜의 원칙'을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에, 사도바울은 적용시킨다.

 

‘심은 대로 거두는’ 보상의 원칙만 알았다면,

마게도냐 교인들은, 예루살렘으로 헌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지금 구제헌금을 심어봤자, 당장은 거둘게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의 가난함을 인하여, 당신이 부요케 되신 것이 아니다.

당신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셨다.

이것은 보상의 원칙을 뛰어넘는, 은혜의 법칙이다.

자기는 손해 보고, 남들만 좋은 일시키는.. 은혜의 법칙인 것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나눠줄 줄도 알게 된다.

은혜의 법칙으로 내가 이익을 볼 때가 있지만, 손해를 볼 때도 있다. 은혜의 법칙 때문이다.

 

▲2. 자기는 심고, 타인으로 추수하게 하는.. 은혜의 법칙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자로 사는 것이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하나님은 분명히 '심는 대로 거두는' 대 원칙을 적용하는 통치자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들이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면서

어떻게 신자들은, 그 법칙을 잘 적용시키지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억울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이

타인을 위하여 자기를 심는 원칙이라는 것을 종종 놓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심는다.

그러나 교인들은.. 타인을 위하여 자기를 심는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으로 심고, 이기적인 결실을 거둔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타인을 위해 자기를 심기 때문에,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지 못하는데..

가장 극명한 예가, 한 알의 밀알처럼, 밭에 떨어져 죽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서 실망과 낙담이 있다.

우리는 이 ‘심고 거두는 대원칙’에서 (처음에는) 제외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나중에, 결국에, 최후에 거둔다. 갈6:9

그런데 자꾸, 당장 거둔다는 식으로 설교를 들으니까.. 신앙이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꼭 당장에 성공한 사람/열매를 거둔 사람 1%만 예를 들어서 부각시키니까,

그렇지 못한 나머지 99%가 딜레마에 빠진다.)

 

세상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거스리며, 자기만 위해 사는데도 이 원칙이 적용된다. (심고 거두는 공의의 법칙)

자기가 욕심을 내는 만큼 결실하고

배타적이고, 경쟁적이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기의 욕심을 채움에도 불구하고.. 결실한다.

 

그러나 신자는 이타적이며, 겸손하며, 믿음으로 삶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같은 동등한 결실을 얻지 못한다. (자신이 심고, 타인이 거두는 법칙)

 

왜 그런가 하면, 그 ‘결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가 종종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실은.. 타인을 위한 것이다.

(그런 현실을 잘 깨닫고, 이 세상에 살 때, 늘 억울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당연히 여겨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예

주의 일꾼들을 사용하시지만, 일꾼은 일꾼일 뿐이요, 결실은 다른 사람의 몫이다.

 

농부가 추수할 때, 일꾼들을 불러서 쓰지만,

그 일꾼이 추수한 곡식은.. 엄연히 주인의 것이다.

일꾼이 자기가 추수했다고.. 그 곡식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파당이 나눠져서 분쟁이 있었다.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예수파가 있었다.

 

이 파벌들의 우위 경쟁은

자기들은 자기들이 심은 것들을, 자기가 거두었다고 자랑하는데 있었다.

내가 전도하고 양육했으니, ‘내 부대’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꾸짖는다.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과 아볼로는 심고 물주는 수고를 하였지만,

자라게 하시고, (결실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사실 심고 물주는 사람은.. 수고만 할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기르시고 결실하시는 손길/도구로서

수종 드는 사역자/일꾼에 불과하다.

우리는 일꾼의 상급을 받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생명을 자라게 하거나, 생명을 결실케 하는 이는 아니다.

 

그런데 바울파, 아볼로파 운운 하는 것은

마치 바울과 아볼로가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처럼 생각하니까.. 생겨난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아볼로/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너희에게 결실을 주시고자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일꾼)들이요, 너희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쓰셨다.

 

내 인생의 고단함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나의 것을 만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양떼들의 생명과 영생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즉, 나는 그저 하나님의 밭에 날품팔이 일꾼이요, 일용직 품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과 통치를 시행하시는데..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통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지금 고단한 길을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심어서, 우리가 거두는 것처럼 오해하는 자들이 있어서

파당이 나눠지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비교우위나 비교경쟁은 있을 수 없다.

 

▲3.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은혜의 법칙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법칙)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면,

우리가 영생을 가진 자요, 하나님의 자녀란 이름으로

더 크고 높은 자리를 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언제나 우리를 삼키고, 우리를 이기고, 우리 위에 군림한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 나가면,

삼키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이 하는 얘기는

너희는 삼키워지는 것이 아니라, 심기워 지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늘 삼켜지고, 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루 서말 속에 있는 누룩처럼

가루가 누룩을 다 삼킨 것 같은데.. 결국은 가루 반죽이 부풀듯이

결국은 누룩이 가루를 다 삼킨 것이 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완전히 죽어 없어지는 것 같은데..

신비하게도.. 그래야만 결실이 된다.

 

 

◑그러나 최후에 거두는 날이 반드시 온다.

 

우리의 삼켜지는 매일 매일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할 수 없어서 참고 기다리는 그런 억지로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는 매일 심고, 매일 심겨지고, 매일 물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때가 되면 하나님은 거두실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평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위대한 일상이다.

 

그래서 갈6:9절은 이렇게 마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가 심은 것을, 처음에는 타인이 거두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누룩이 반죽을 다 변화시키듯이,

한 알의 밀알이 백배의 결실을 맺듯이.. 다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이다. 어쩌면 '저 천국에 가서 거둔다'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실이 없다고, 결코 낙심하지 마시라.

지금 나는 모르지만, 나는 씨를 심고 있다. 나는 언젠가는 심은 것을 거둘 것이다.

 

여러분, 신자된 당신의 존재와 현실이 낙심되시는가?

여러분이 헛된 일을 하는 것 같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고,

여러분은 중요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저는.. 이렇게 설교하니까 위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저도 매일 삼키운다.

고단하고, 어렵고, 낙심되고, 절망스러울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가끔 제(박영선 목사님)게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다.

(20년 전에 제가 악쓰며 설교했던 것

그 때 제가 젊었던 시절에, 서슬이 시퍼렇게 설교했던 것

지금 돌이켜 보면, 사실 제가 약간 민망하다.)

 

그런데 ‘그 때 은혜 받아서, 아직까지 신앙생활 잘 하고 있습니다!’

제게 이렇게 고백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깜짝 깜짝 놀란다.

나는 그 때를 지금 민망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때, 나로 하여금 씨를 심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때, 내가 아무 결실도 없는 일에, 고생만 실컷 한다고 생각했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고된 현실에 눈물을 흘리지만,

(남들은 잘 거두는 추수를, 나는 아무 것도 거두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알의 밀알의 추수, 적은 누룩의 부풀게하는 역사는

하루아침에 즉시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에는 반드시 나타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9

 

시편 기자도 이렇게 약속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126:5

 

그래서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말씀으로 본문의 단락을 마친다.

갈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지금 하는 그 고생을.. 계속 하라는 것이다. ▣ 은 혜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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