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상(히브리서 9:27).
사랑하는 성도님, 오늘 우리가 붙드는 말씀은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짧은 한 구절은, 인간이 애써 덮어두고 싶어 하는 현실을 정직하게 열어젖힙니다. 우리는 시간 속을 걷지만, 시간은 우리를 영원으로 끌고 갑니다. 우리는 내일을 계획하지만, 내일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은 괜찮다”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정해져 있다”라고 말합니다. 성도님, 이 말씀은 공포를 팔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잠들어 가는 영혼을 깨우기 위해, 흩어진 마음을 모으기 위해, 자기 의의 성을 허물어 복음의 피난처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로운 경종입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첫 현실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며, 사건이 아니라 정해진 길입니다. 세상은 죽음을 ‘자연’이라고 부르며 담담히 정리하려 하지만, 성경은 죽음을 ‘정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타락과 죄의 삯이라는 엄중한 진실을 놓치지 않습니다.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모두가 그 길을 가기 때문이지, 그것이 본래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아름다운 일부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그 단절의 그림자가 온 존재 위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종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실상이 끝내 회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마침표’입니다. 그 마침표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쌓아 올린 모든 장식은 무너집니다. 학벌도, 명예도, 재산도, 평판도, 스스로에게 붙인 괜찮은 이름들도, 그날에는 더 이상 영혼을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9장 27절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성도님,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결코 가볍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세상은 오히려 인간에게 잠깐의 용기를 주는 듯하지만, 그것은 바다 위에 종이로 다리를 놓는 일과 같습니다. 성경은 영원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을 우리의 현재로 끌어와, 오늘의 말과 선택과 숨결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심판이 있다는 선언은 잔인한 협박이 아니라, 우주의 도덕적 질서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선포하는 거룩한 정의의 빛입니다. 악이 끝내 심판받지 않는다면, 선한 이들의 눈물은 어디에 놓이겠습니까. 죄가 최종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양심은 끝내 어디에 안식하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며, 그 의로움은 반드시 마지막 날에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흔히 붙드는 두 가지 도피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는 “나는 남보다 낫다”라는 비교의 도피처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라는 자기합리화의 도피처입니다. 비교는 심판의 기준을 사람에게서 찾게 만들고, 자기합리화는 죄를 얇게 칠해 무게를 줄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심판은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며, 율법의 빛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까지 비춥니다. 우리는 행위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다는 오래된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끊임없이 강조해 온 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전적 타락),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붙드셔야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책임의 자리는 더 분명해집니다. 심판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진지하게 다루어진다는 뜻이며, 그 진지함이 바로 인간의 존엄과 도덕적 실재를 지탱합니다.
히브리서가 이 구절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잠시 마음으로 살펴보십시오. 히브리서 9장은 대제사장, 성소, 피, 언약, 그리고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27절의 “한 번 죽는 것”과 28절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바 되었다”가 서로 맞물립니다. 인간에게는 ‘한 번의 죽음’이 정해져 있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심판 아래 있어야 할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성도님, 여기에서 복음은 단순히 “좋은 소식” 수준의 위로가 아닙니다. 복음은 심판을 무효화시키는 얄팍한 면죄부가 아니라, 심판을 정면으로 통과하여 그 심판을 만족시키고, 그 만족 위에 은혜를 세우신 하나님의 구속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가 얼마나 무거운지 보여 줍니다. 사랑이 공의를 무시하지 않고, 공의가 사랑을 버리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를 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 히브리서 9장 27절은 “심판이 있으니 두려워하라”에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가 단번에 제물로 드려졌다”로 이어지며, 우리를 복음의 심장으로 데려갑니다. 하나님이 심판자이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자께서 동시에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 그분이 친히 길을 여셨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놀라움입니다. 인간이 심판을 피하려고 애쓰는 방식은 대개 자기의 개선입니다. 더 선해지겠다고 다짐하고, 더 종교적으로 보이겠다고 꾸미고, 더 바쁘게 봉사하겠다고 달려갑니다. 물론 거룩한 삶과 선한 행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뿌리를 열매로 바꾸는 순간, 우리는 다시 불안과 교만의 진자 운동에 갇힙니다. 잘되면 “내가 해냈다”로 교만해지고, 무너지면 “나는 끝났다”로 절망합니다. 복음은 그 진자 운동을 멈추게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고, 우리의 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님, 복음은 결코 인간의 현실을 흐리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만듭니다.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상은 죄의 문제입니다. 죄는 단지 나쁜 행동 몇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의 독립 선언입니다. 죄는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앉히는 왕좌의 전복입니다. 그래서 죄는 관계를 깨뜨리고, 사랑을 왜곡하고, 진리를 비틀며, 결국 죽음과 심판으로 향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 실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장식품이 됩니다. 그러나 죄의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생명의 문이 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자기 변명으로는 하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종교적 습관으로는 하나님의 거룩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눈물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회개의 눈물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의 눈물입니다. 회개의 눈물은 “주님, 제 안에 하나님을 밀어내고 나를 세운 죄가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눈물입니다. 감사의 눈물은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라고 찬송하는 눈물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회개는 단순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 전환입니다.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자기 의로부터 그리스도의 의로, 자기 주권으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조차도 성령의 은혜로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는 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오히려 은혜를 자랑합니다. “내가 돌이켰다”가 아니라 “주께서 돌이키셨다”가 됩니다.
성도님, 이 말씀을 듣는 오늘, 우리가 붙드는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죽음을 멀리 있는 이야기처럼 밀어 둡니다. 어떤 이는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진다고 말하며, ‘긍정’이라는 이름으로 영원을 추방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지혜는 죽음을 기억하되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삶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말의 무게를 알게 되고, 관계의 소중함을 다시 배우며,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함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심판을 기억하는 사람은 은혜를 값싸게 여기지 않습니다. 은혜가 값비싼 이유는, 그것이 공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공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값싼 도장이 아니라, 하늘 법정에서 우리를 위한 판결의 근거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예화를 함께 붙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빚을 졌습니다. 매일 독촉장이 오고, 마음은 눌리고, 밤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법원에서 최종 통지서가 왔습니다. 더 이상 연장도 없고, 이제는 법적 절차가 진행된다는 통지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여기저기 돈을 구하러 다닙니다. 친구에게, 친척에게, 아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도 돌아오는 것은 한숨뿐입니다. 마침내 그는 ‘내가 더 열심히 일하면 되겠지’라고 말하지만, 시간은 너무 촉박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찾아와 말합니다. “그 빚, 내가 갚겠습니다.” 그는 믿지 못합니다. “왜요? 내가 누구라고요?” 그 사람은 조용히 서류를 꺼내 도장을 찍고, 실제로 빚을 전액 상환합니다. 법원에서 정리되었다는 확인서가 도착합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는 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깊은 부끄러움과 벅찬 감사입니다. 성도님, 복음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빚은 단지 감정의 불편함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 문제입니다. 심판은 실제이며, 우리의 힘으로 갚을 수 없는 부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단번에 갚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평안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이루셔서’ 오는 평안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님, 이 복음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먼저, 겸손으로 삽니다. 심판을 피할 수 없던 자가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낮춥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며 “저 사람은 저래서 문제야”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은혜가 저 영혼에게도 필요하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감사로 삽니다. 감사는 감정의 장식이 아니라 신앙의 호흡입니다. 매일의 평범함 속에서 “주님, 오늘도 심판이 아니라 은혜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또한, 거룩을 사랑하며 삽니다. 심판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을 대신 받으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룩을 향해 걸어갑니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화는 구원받기 위한 사다리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필연적 열매입니다. 열매가 전부는 아니지만, 열매 없는 나무가 스스로를 속이는 일도 경계해야 합니다. 은혜는 우리를 방종으로 풀어놓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묶어 그리스도를 닮게 합니다.
그리고 성도님, 이 말씀은 목회적으로도 아주 날카롭고도 따뜻합니다. 날카로운 이유는 우리의 자기기만을 잘라내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이유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을 분명히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은 더 무겁고도 아름답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져 있다는 말은 우리를 절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참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라는 말은 우리를 얼어붙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달려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심판을 부정하는 시대는 사실상 은혜도 부정합니다. 병을 모른 채 약을 귀히 여기지 못하듯, 죄를 모른 채 십자가를 귀히 여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 오늘 우리는 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실상을 보는 눈,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눈입니다. 전자를 잃으면 복음은 장식이 되고, 후자를 잃으면 신앙은 공포가 됩니다. 성령께서는 두 눈을 함께 열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면서도 소망을 말하고, 떨면서도 평안을 누리며, 낮아지면서도 담대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이제 마음의 자리에서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는 언젠가 더 잘 준비되면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말은, 사실상 오늘의 부르심을 미루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을 말합니다.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상 앞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노골적인 악이 아니라, 미루는 무관심입니다. 영혼은 미루는 동안 마릅니다. 양심은 미루는 동안 둔해집니다. 그러나 은혜의 문은 오늘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오라”고 부르십니다. 회개하고 믿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를 결코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단번의 제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그 효력은 오늘도 생생합니다. 그 피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생명입니다.
그러니 성도님, 이 말씀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저는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저를 붙드십니다. 저는 제 의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가 저를 세우십니다. 저는 제 힘으로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저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경외를 배우고, 불안이 아닌 확신을 배우며,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이력서가 아니라, 어린 양의 피와 그분의 의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떨며 숨는 자가 아니라, 은혜로 씻김 받은 자로서 “주님,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요약
히브리서 9:27은 인간에게 죽음과 그 후의 심판이 “정해져” 있음을 선언하여, 회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상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공포의 종착지가 아니라 복음의 출발점이며, 바로 이어지는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가 심판 아래 있던 죄인을 위한 유일한 피난처임을 밝힙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칭의) 구원을 얻으며, 그 은혜는 반드시 거룩의 열매(성화)로 나타납니다.
묵상 포인트
- 나는 죽음을 ‘언젠가’로 미루며 오늘의 삶을 가볍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 심판을 생각할 때, 나는 회피(무감각)로 도망합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로 달려갑니까.
- 내 마음의 가장 깊은 의지처는 ‘내가 나름대로 괜찮다’는 자기 의입니까, ‘그리스도가 충분하다’는 복음입니까.
- 은혜를 값싸게 여기지 않고, 십자가의 값비싼 사랑 앞에 감사와 거룩을 회복하고 있습니까.
- 나의 성화는 공로가 아니라 열매임을 기억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까.
강해
히브리서 9:27의 핵심은 “한 번(단회성)”과 “정해짐(필연성)”과 “그 후(연속성)”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반복해서 연습할 수 없습니다. 삶은 단회적이며, 그 단회성은 영원의 무게를 현재에 부여합니다. 또한 죽음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정해진” 현실로 제시되어, 인간의 통제 환상을 무너뜨립니다. 마지막으로 죽음 이후의 심판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최종적 평가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 구조는 인간의 행위 의존을 끊고,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9:28)와 연결되어 복음으로 이끕니다. 인간의 ‘한 번 죽음’이 심판을 향한다면, 그리스도의 ‘단번 제사’는 구원을 향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회개의 촉구이자 그리스도께로의 초청입니다.
주석
- “한 번 죽는 것”은 인간 실존의 보편성과 단회성을 드러내며, 죽음이 인간의 죄와 연결된 성경적 세계관 속에서 엄중한 의미를 가집니다.
- “정해진 것”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인 질서를 시사하며,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절대 소유하지 못함을 폭로합니다.
- “그 후에는 심판”은 도덕적 우주관의 핵심으로,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관이심을 전제합니다. 이 심판은 단지 행위의 열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믿음/불신)와 그 믿음의 열매를 포함하는 총체적 평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 문맥상 이 심판의 엄중함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단번의 제사의 필요성을 더 선명하게 합니다.
원어 주석
구약(히브리어) 핵심 어휘(주제 연결)
- מָוֶת (māvet, 죽음): 단순한 생물학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 이해에 자주 연결됩니다.
- מִשְׁפָּט (mishpāṭ, 심판/판결/정의):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과 통치를 가리키며, 인간의 변명보다 하나님의 의를 전면에 둡니다.
- דִּין (dîn, 재판하다/판단): 하나님이 사건의 최종 판단자이심을 나타내는 어근으로, 최후의 판결 개념을 떠받칩니다.
신약(헬라어) 히브리서 9:27 관련 어휘
- ἀπόκειται (apokeitai, “정해져 있다/예정되어 놓여 있다”): 단순 가능성이 아니라, ‘놓여 있는 필연’의 뉘앙스를 줍니다. 인간이 피하거나 흥정할 수 없는 현실로 제시됩니다.
- ἅπαξ (hapax, “단번에/한 번”): 본문에서 인간의 죽음이 단번임을 말하며, 이어 9:28에서 그리스도의 제사도 ἅπαξ로 표현되어 대조와 연결이 강해집니다(인간의 단번 죽음 ↔ 그리스도의 단번 제사).
- ἀποθανεῖν (apothanein, “죽다”): 죽음의 행위를 지칭하되, 히브리서 문맥에서는 제사·피·속죄 논의와 맞물려 존재론적 무게를 갖습니다.
- κρίσις (krisis, “심판/판결”): 단순 의견 평가가 아니라 법정적 판결의 의미가 강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실질적으로 집행됨을 함의합니다.
금언
- “죽음을 잊는 신앙은 은혜를 가볍게 만들고, 심판을 잊는 신앙은 십자가를 장식으로 만든다.”
- “심판이 두려운 이유는 하나님이 멀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분 앞에서 진실하지 못해서이다.”
- “그리스도의 단번의 피는 반복되는 내 결심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근거다.”
- “은혜는 죄를 무시하지 않고 죄값을 치르며, 공의를 꺾지 않고 공의를 만족시킨다.”
신학적 정리
-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 심판 교리는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과 통치를 전제합니다.
- 인간의 전적 타락: 인간은 스스로 의를 성취하여 심판을 피할 능력이 없습니다.
- 그리스도의 대속과 단번성: 심판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공의를 만족시켜 구원을 성립시킵니다.
- 칭의와 성화의 질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 전가로; 성화는 필연적 열매로 나타나며 공로가 아닙니다.
- 은혜의 수단: 말씀과 성례와 기도는 성령께서 성도를 붙드시는 통로로 기능합니다.
주제별 정리
- 죽음: 피할 수 없는 현실이자 영원의 무게를 현재로 끌어오는 경종.
- 심판: 하나님의 공의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자리. 악의 종착과 의의 완성.
- 복음: 심판을 피하는 길이 ‘도망’이 아니라 ‘대속’임을 선포.
- 회개와 믿음: 공포의 반응이 아니라 은혜의 초청에 대한 응답.
목회적 정리
- 불안한 성도에게: 심판의 엄중함이 곧 절망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는 흔들리는 마음을 붙드는 확실한 근거입니다.
- 무감각한 성도에게: 미루는 습관은 영혼을 둔하게 합니다. 오늘 회개는 내일의 후회를 줄입니다.
- 상처 입은 성도에게: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관이시며, 억울함과 눈물은 결코 허공에 흩어지지 않습니다.
- 성화를 고민하는 성도에게: 거룩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의 열매이며,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자랍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 하루를 “정해진 죽음과 심판” 앞에 정직하게 세워 보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 나의 의지처를 점검하여, 자기 의의 은밀한 성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겠습니다.
- 은혜를 값싸게 여기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에 더 성실히 나아가겠습니다.
- 관계 속에서 정죄보다 긍휼을 택하고, 비교 대신 중보의 마음으로 이웃을 품겠습니다.
- 죽음을 기억하되 절망하지 않고, 심판을 기억하되 공포에 갇히지 않으며, 복음 안에서 경외와 평안을 함께 누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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