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7월 25일] 끝까지 견디는 자(마 24:3~14)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H3rMcQXiI90
이 아침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24장 3절로 14절에 있는 말씀을 봉독하게 됩니다. 신약성경 41면이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이 귀한 말씀을 봉독할 때에 다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 3절 ~ 14절 봉독 내용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루실 일들을 알려주소서. 어느 때에 이루어질지 알게 하옵시며, 또 주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리라.
난리 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며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아멘.
설교 및 간증 내용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회장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신입사원 한 사람이 찾아와서 진지한 얼굴로 회장님께 질문했습니다.
"회장님은 세계에서 제일 큰 자동차 회사를 만들어 낸 분입니다. 분명히 남들과 다른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데 제게 그 성공의 비결, 그 성공의 비결을 말씀해 주십시오."
회장님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자네가 시작한 일이 있다면 그 끝을 내게. 시작한 일이 있다면 끝을 내게." 딱 한마디 일러주었습니다.
그 회장님은 바로 헨리 포드라고 하는 유명한 자동차 회사 회장이었습니다.
지금 이 우주에 유학을 가고 있을 때, 유학 가서 공부하고 있는 많은 학생들 혹은 제가 잘 아는 우리 교인들 젊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종종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공부가 너무 힘듭니다. 잘 안됩니다. 또 교수님과의 사이도 좋지 않습니다. 또 그리고 공부를 마쳐 봤자. 먼저 마친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까 취직도 안 되고 갈 길이 열리지도 않고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역이민 이후에 지금 공부를 마치고 직장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400명이 더 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그만둘까, 중단할까 하는 그런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럴 때마다 대답을 했습니다. "대답은 간단하네. 시작했으니까 끝내야 한다네. 이 끝을 내지 못하면 당신은 일생 폐인이 되고 말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정체감이 무너지니까. 질질 끄는 거야. 이유를 묻지 마라.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도 묻지 마라. 시작했으니까 그 끝을 내야 한다." 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끝을 생각하는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철학자 슈바이처는 말합니다. "신앙이란 뭐냐? 과거로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끝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이다. 에스카톤(eschaton, 종말) 그 끝으로부터 현재를 생각하는 것이 신앙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끝을 먼저 생각하고 그리고 오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을 사는 생의 저 끝은 명확히 있습니다. 끝을 먼저 생각하고 현재를 생각해야 하고 과거도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Renewal in Christ」**라고 하는 새로 나온 책이 있어서 좀 읽어 보았는데 그중에서 제가 충격받은 몇 마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대목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의학, 치유 문화에 대한 회의론이 있어요." 치유 문화의 회의론이 온 의사들이 병을 고친다고 하지만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죠. 많은 애를 써서 고쳐 놓아도 결국은 얼마 안 있다가 이 세상을 떠나요. 한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처음에 병들었을 때 그냥 죽었으면 훨씬 좋았을 거예요. 괜히 고친다고 치료한다고 병원 들락날락하면서 그 많은 동안
돈 들이고 힘 빼고 많은 사람 고생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치유 문화의 회의론! 도대체 몸을 고쳐서 뭘 병원이 뭐 하고 있는 거냐는 거죠.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제가 다니는 병원의 외과 의사 과장님을 만났습니다. 언젠가 보니까 아주 기분이 다운되어 있어요. 아주 지쳐 있어요. "아, 무슨 걱정이 있냐"고 물었더니 "아, 이거 참. 이 병원을 경영하고 외과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의사를 보충하기가 힘들대요. 좋은 의사, 수술을 잘하는 의사 하나 만드는 데 10년 걸린대요. 공부하고 훈련하고 해서 한 사람 만들어 내니까 얼마 안 있다가 사표 내고 나가 버린대요. 이직을 해버린다는 거예요. 의사 그만둔다는 것, 아니면 다른 직장으로 가버리고 이렇게 자꾸 이직을 하기 때문에 의사를 보충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면서 외과 과장이 아주 근심을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간단합니다. 의사는 치료합니다. 치료했는데 병이 나았습니다. 나아서 구원받았다고 고쳤다고 하는데 의사는 압니다. "저거 며칠 있다 죽을 거다." 환자는 고쳤다고 하는데요. 의사는 오히려 며칠이 끝날 건데. 아니나 다를까 열심히 치료하고 돌아보며 며칠 있다 보면 다 요한 시대로 가 있어요. 다 그리로 가는 거예요.
의사가 회의에 빠지는 거예요.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차라리 처음 병들었을 때 그냥 죽었으면 훨씬 좋았을걸. 병원에서 고친다고 고친다고 하면서 의사도 고생하고 병원도 고생하고 환자는 더 고생을 하는 거예요. 많은 시간 고생을 할 일이 도대체 뭐냐는 거예요." 이래서 의사들이 자꾸 이직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외과 의사 하신 말씀이 "참 병원 경영하기 힘듭니다."
아주 철학적인 얘기예요.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묻고 있는 거예요. 마지막이 무엇이냐? 어차피 마지막은 죽음이에요. 그러므로 중요한 건 죽음과 죽음 다음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것이지, "지금 조금 더 살고 덜 늙고 병이 낫고 안 낫고"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는 거죠. 쉽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어느 때에 이루어질 일들이 있습니까? 세상 끝에는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때의 징조는 무엇이겠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세상 끝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끝에 가본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세상 끝에 말씀하십니다.
종말론적 통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할 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유토피아니즘'**입니다. 아주 낙관론입니다. 뭐 좀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거라고. 과학이 발전하니까 점점 점점 좋은 세상이 있을 거라고. 교육이 발전하니까 점점 좋은 사람들이 될 거라고. 의학이 발전하니까 모든 병을 고쳐서 안 죽게 될는지도 몰라요, 생각합니다. 과학 발전, 교육의 발전, 이상의 모든 되어지는 일을 생각하면서 좋은 세상이 좀 더 연장되고 이어질 거라고, 영원할 거라고 기대해 봅니다. 유토피아니즘, 낙관론입니다. 예, 유토피아니즘의 사상 속에서 이 세상 좋은 세상. 그러나 그 좋은 세상은 오지 않아요.
좋은 세상은 올 것 같지도 않아요. 점점 더 어려워지고만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페시미즘'(Pessimism)이란 염세주의입니다. "모두가 끝난다. 염세적이다. 필요 없다. 무상하다. 인간 무상, 금방 지나가는 헛되다 헛되다. 다 헛된 데 속했다." 그러한 염세주의 두 가닥 줄입니다. 낙천론이냐 염세주의냐. 유토피아니즘이냐 아니면 페시미즘이냐.
그런데 복음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주의입니다. 유토피아니즘도 아니고 페시미즘도 아닙니다. 'Evangelical Insight' 복음주의, 복음주의적 통찰력.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말하는 아주 확실하고 운명적인, 신학적으로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세상 끝이 온다. 세상이 점점 좀 좋아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끝이 난다.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언젠가 세상이 끝난다. 끝, 에스카톤 엔드(end)를 말하고 있습니다. 끝을 말하고 있는 세상은 끝난다. 그런가 하면 끝이 끝이 아닙니다. 그 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예수님의 재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끝이라고 하는 염세적인 제기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하는 낙관적인 제기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놀라지 마라. 있을 일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주 깔끔하게 세상이 끝나는 그런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있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끝은 아직 아니다."
아, 우리 스스로 "내가 좀 어려운데 이것이 끝이다." 이 세상이 어려워질 때 "이것 끝인가 보다." 아니요. 끝은 아직 아니요. 오히려 이것은 재난의 시작이다. 지금 우리가 큰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 재난은 이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예언하는, 예고하는 재난의 끝이 아니라 재난의 시작입니다. 이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재난의 끝이 아니고 재난의 시작이다.
그러면서 이 재난의 시작을 앞두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 도덕적으로 타락해 갈 것이다. 서로 잡아 주게 될 것이다.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다. 큰 재난을 예고합니다. 경제적이건, 사회적이건, 자연적이건 아니야, 도덕적인, 심지어는 종교적인 큰 재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있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재난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놀라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끝은 그 다음에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14절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 예수님의 역사관입니다. 재난도 있고, 재난 앞으로 환난도 있고, 세상의 끝이 오겠습니다. 많은 고난이, 상상할 수 없는 큰 고난이 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도 타락해서 서로 잡아주고 사랑이 식어지고 그런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환난을 통해서, 모든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복음 전파다.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이 역사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환난과 복음 전파
환난과 재난은 복음 전파의 절대적 요건입니다.
예수님 너무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5천 명이 모였고 수천 명이 모여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했습니다. 많은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갔고 예수님의 마음에 가장 합당하다는 사람이 누군지? 그 전부 환자입니다. 문둥병 환자, 앉은뱅이, 나병환자, 많은 사람, 모든 환난 당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찾았고 예수를 만났고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까?
저기 말하는 편안하고 잘 살고 당시의 상류층으로 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니고데모 같은 사람도 예수를 영접하는 것 같으나 은밀적입니다. 당당하게 예수를 따르지 못했어요. 왜? 그가 평안하고 부유했기 때문에. 이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환난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보아도 환난을 통해서 복음은 전해집니다. 역사는 연구하고 결론을 말합니다. "전쟁을 통하지 않고 선교가 성공한 역사가 없다." 그렇습니다. 많은 선교사를 보내서 애쓰지마는 진정한 선교는 성공하기가 힘듭니다. 선교 자체 전략 자체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 소용없어요. 오직 환난, 오직 고난, 절절한 고난을 통해서 복음은 전해집니다.
"모든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재난 때문에 시달리고 있게 될 것이다. 이건 재난의 시작이다. 놀라지 마라. 이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단 한 말씀 귀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 한 말씀에 깊은 뜻.
제가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 요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러분 이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국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재난이 옵니다. 질병이 옵니다. 유행병이 옵니다. 모든 환난 왜 있어요?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놀랄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있어야 할 것이지 그리함으로 믿음이 순수하게 되고, 그리함으로 주님 앞에 가까이 가게 되고, 이 환란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거룩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60년 동안 목회하면서 많이 보았습니다. 잘 나간다는 사람 계속 믿음으로 잘 나갔으면 좋겠는데 꼭 중간에 문제가 되더라고요. 아, 이 문제가 돼요. 잘 나가는 데 문제가 있어요. 그렇죠.
이 천국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아, 병들고 실패하고 가난하고 어렵고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절박한 현실 그것이 아니고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요. 죄송하지만 목회하면서 이렇게 보면, 아, 전에 안 나오던 사람이 새벽기도 나왔어요. 번들번들하고 교만한 사람이 새벽기도라는 건 꿈도 안 꾸던 사람이 새벽기도 나와 가지고 저기 앉아서 울고 있어요. 나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다 알아요. "고난이 터졌구나. 꼼짝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사건은 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여, 이 실패를 통해, 이 배신 당하는 일을 통해, 이 고독한 일을 통해, 아니 이 질병을 통해 주님 앞에 나아오게 하시고 거하고 온전한 믿음의 길로 가는 것을 볼 때 이 성경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복음이 전파되고 환난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 주님의 역사관입니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 누구라도 그렇습니다. 이 교인들 어떤 데 보면 사업하다가 잘 돼 가지고 "목사님 성공했습니다. 아, 사업 잘 돼 가지고 돈 벌었습니다." 할 때 저는 축하하고 싶지 않아요. "걱정이다. 저거 또 며칠 동안 가려나? 얼마나 근심 걱정할까?" 그렇습니다. 아시는 대로 그 많은 잘 나가는 사람도 어디 가 있습니다. 나오는 사람들 특별히 제가 새벽기도 올 때 보면 새벽기도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남다른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요, 형통하고 병 안 걸린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것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고, 고난을 통해 인도하시고, 재난을 통해 주님은 역사하고 계시다. 이걸 믿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란 말이야.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십자가를 참고, 그 어려운 고난도 참아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었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 안 지도록 되어진다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면서, 지시면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 환난 속에서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환난 속에서 참 믿음을, 참 소망을 확인합니다. 쓸데없는 세상, 부질없는 세상에 대한 소망 다 저버리고 천국에 대한 소망, 주님과 함께 하는 소망,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해 가서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하여 너희와 함께 살리라." 그 소망, 영생을 향한 소망. 이 복음의 빛은 바로 많은 환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낙심할 것 없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이미 말씀하셨고 또 우리가 생활 속에서 다 벌써 경험하고 있는 것이죠. 조금씩 경험하고 있습니다.
결론
그런고로 **복음적 역사관, 복음적 인생관, 복음적 현실관, 'Evangelical Insight'(복음주의적 통찰력)**를 가지고 오늘의 세대를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많은 재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꼼짝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실수하고 계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입니까? 아니올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재난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병이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이 있습니다. 왜? 그 고통을 통해서 내가 못하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게 내가 할 수 있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내가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다 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이렇게 하게 하십니다. 넉넉히 이겨 하십니다. 자기 부인을 하게 하시고, 가치관을 바꾸어 주시고, 세계관을 바꾸어 주시니 그리 미워하던 사람도 사랑하게 하시고, 그렇게 차가웠던 것을 깨끗이 잊어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게 뭡니까? 끝까지 믿음을 가집니다. 환난과 전쟁과 재난을 통해서도 놀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 말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에 살아 합니다. 그 사랑이 식어지지 않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사랑이 구체화됩니다. 사랑이 더 뜨거워집니다.
오직 예수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세상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십니다. 거기에다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마음입니다.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담담하게 오늘 이 모든 일들을 신앙적으로 잘 소화하고 극복하고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좀 더 온전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야 하십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도 저희들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아니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한 채 가정에서 온라인을 통해서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더 가까이 만나 주시고, 말씀을 들려주시고, 말씀의 능력을 주시고, 주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고, 하늘이 열리는 주의 영광을 보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재난을 통해 영광을 보게 하시고, 환난을 통해서 더 복음에 가까이 가게 하시고, 많은 어려운 역경을 통해서 주께서 주시는 영광을 보며 주를 찬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고 늘 믿음으로 사랑으로 소망으로 승리,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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