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강) 천사의 얼굴, 스데반! (행 6:8-15)
초대교회가 크게 성장함에 따라 일곱 집사를 세우고, 교역자와 평신도간에 사역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했고, 일곱 집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직분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흔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그 몸의 지체로 일컬어집니다(요15참조). 각 지체는 유기적인 조직을 통하여 몸과 연결되듯, 성도는 개개인의 직분을 가지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직분은 누가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고전12:4-11절은 '은사장'입니다. 11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그 뜻대로(분량대로) 하나님이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인간관계, 재능, 학벌 등의 인간 중심적 기준에 따라 사람을 일정한 직위를 주지만 교회의 직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그 믿음의 분량대로 직분을 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분을 주십니까?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①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②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③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모든 영적 은사를 활용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는 사명입니다.
▶교회의 3대 사역이 있습니다.
①게리그마(말씀 선포): 예배 전도 교육을 포함합니다.
②디아코니아(봉사): 교회를 가꾸고 또 구제를 하며, 신앙의 덕을 세우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③코이노니아(교제): 성도간의 화목, 친교,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에게 지옥의 모습을 한번 보여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를 데리고 지옥으로 갔습니다. 마침 그때가 점심시간이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식탁에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습니다. 지옥 사람들의 손에는 모두 1미터가 넘는 긴 젓가락이 들려 있었고 그들은 그것으로 음식을 집어 자신의 입에 넣으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으로 간신히 잡은 음식은 자신의 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지옥은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천국에 와보니 그곳에서도 똑같은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천국 사람들의 손에도 1미터가 넘는 긴 젓가락이 들려 있었으나 천국 사람들은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천국 사람들은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상대방에게 먼저 먹여주고 있었습니다. 지옥은 남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곳이고 천국은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곳이랍니다. 아름다운 교제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로 선택받은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했고, 지혜가 충만했고, 뭇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믿음이 충만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 자들에게 붙잡혀 공회에 끌려간 사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제목소개!▶
먼저 '스데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스데반은 이방 지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귀향한 유대인으로서 스데반도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는 주후 30년 경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의 박해가 가장 극심할 때,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으로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였으며 성경해석에도 능통하여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동반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장본인들'이라고 외치면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회개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이 흥분하여 돌을 던져 잔인하게 죽였지만 그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는 진정한 신앙을 소유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이며 그의 이름의 뜻은 '면류관'입니다. 결국 스데반이 순교를 통하여 세계 선교가 열리게 됩니다. ▶본문 이하 7장까지는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사가 나오는데 그를 통해서 모든 성도들이 곳곳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 8장의 내용입니다.
행8:1절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또 4절에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그러니까 스데반의 죽음이 선교의 기폭제가 된 것입니다.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로서 빌립과 함께 베드로와 바울의 이방선교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해준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이름의 뜻이 '왕관, 면류관'인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집사였습니다. 5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이라고 했고, 10절에서는 '지혜와 성령의 사람'이라고 했으며, 7:55절에서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성령 충만, 지혜 충만, 권능 충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우리 안에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스데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하나님이 충만하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어떤 자에게 부어집니까?
⑴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깨끗하게 하는 자에게 부어집니다. 딤후2:21-22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⑵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사모하는 자에게 부어집니다.
⑶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올바르게 사용하려는 목적이 있는 자에게 부어집니다(행8:18-21).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히4: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 앞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는 '예배 중심, 성전 중심'의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신앙의 사람이요, 영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요, 지혜와 권능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위의 것만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곳에는 기적이 동반됩니다. /믿/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단순히 공궤 행위의 봉사로 끝난 자가 아니라 은혜 받고 능력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었습니다.
여기 '큰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이 행한 병 고침의 은사요, 귀신을 묶는 은사로 보고 있습니다.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스데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 힘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주님의 힘이요 권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 능력 주심을 믿습니다. 막16: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할/
▶우리 모두 스데반 집사의 신앙을 탐내십시다. 그는 ①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②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자요, ③공동체 생활에도 충성한 자요, ④교회 성장에 크게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딤후4: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스데반은 교회 밖에서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사와 표적을 행하여 그들을 믿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제사장도, 선지자도, 장로도,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중요한 위치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예루살렘교회의 집사였고 교회 안에서 구제하는 일을 시중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시오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즉 예수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들도 스데반 집사와 같이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멘!/
▶9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 새"
이들은 다 이방에서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들인데 이들이 스데반과 변론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핍박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약 45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각 회장마다 지방의 방언에 따라 자기들의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기도하고, 찬양하며,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을 배운다고 합니다.
본문의 '리버디노'란 말은 일찍이 로마 때 포로로 잡혀갔다가 그 후에 자유인이 된 유대인들과 그들의 후손을 말합니다. '구레네'는 리비아 북부 해안에 있는 수도입니다. 이곳은 구레네 시몬의 고향이기도 합니다(눅23:26 참조).
'알렉산드리아'는 애굽 북부에 있는 도시로서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의 5분의 2가 유대인이었다고 합니다. '길리기아'는 소아시아 지방인데 다소가 그 수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울이 어디 출신입니까? 바로 다소 출신입니다. 틀림없이 바울은 이 회당에서 스데반을 만났을 것이고 그것은 나중에 그 자신의 생애는 물론이고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배경은 그 당시 각 이방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말을 통하고, 문화를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회당에서 성경공부 하는데 스데반이 그곳에서 성경 공부를 가르친 것입니다.
"변론할 새" '함께 찾다, 조사하다, 논쟁하다, 토론하다'는 뜻으로 자신의 생각과 주장과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한 토론 적인 논쟁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이 그곳에서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바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주제로 변론한 것 같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스데반은 헬라어와 아람어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 회당이나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선포했고, 이제 구약의 제사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단 한 번에 온전한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어린양 예수님을 선포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 사함 받고 구원받고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스데반은 돌로 쳐죽일 때 두 가지 죄목을 가지고 집행을 했습니다. 첫째는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과 둘째는 율법을 고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9절을 간단하게 설명해보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각기 자신들의 소속의 회당을 가졌는데 그 중에서 '리버디노'회당에서, '구레네인'회당에서,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스데반과 더불어 변론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헬라파 유대인들은 당시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변론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의 변론을 당해낼 자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요, 영적인 지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구약 말씀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서를 주로 설명한 것 같습니다(사53장 참조).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지혜로 풀어주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성령께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말로 그 입에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도를 보내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10:19-20절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한 마디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 약속은 스데반에게 주셨고, 우리에게도 주신 줄 믿습니다. /아멘!/
본문 속에 스데반은 유대인들과 변론할 때, 그들이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의 음성이 커서도 아니요, 논리가 정연하거나 화술이 능해서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말의 분량이 많아서도 아니요 오직 그가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누구십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고전2:7/요14:17).
스데반은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사람들과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진리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지혜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성령의 능력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지혜와 성령으로 하는 말은 결코 헬라적 궤변과 같지 않습니다. 또 바리세적 낡은 교권의 조문도 아닙니다. 스데반이 전한 복음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힘있는 말씀입니다.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여러분, 사도행전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바로 성령 충만의 역사로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5장에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예루살렘 거리에서 말씀을 전하자 그것을 시기한 관원들이 그들을 불러다가 협박을 합니다. '예수를 전하지도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관원들의 서슬 퍼런 명령이지만 겁쟁이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들을 향하여 담대히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자 그들은 다시 경고하고 채찍질한 후에 그들을 내어 보내었습니다.
채찍에 맞고 풀려나는 그들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오만상을 찌푸렸을까요? 아닙니다. 5:41절에 보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럴 때 바로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타는 풀무불 앞에서도 '그리 아니 하실 지라도'의 신앙으로 기뻐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바로 성령충만한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11절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사람들은 가르쳐 말시키되"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지혜의 말을 당해내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모욕했다는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주면서 한 거짓 증거와 같습니다.
마26:59-61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내가 그 말을 들었다고 증거 하도록 거짓 증인을 세운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할 때마다 이 수단을 썼습니다. 왕상21장에 보면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왕은 아합인데 그의 집과 가까운 곳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합이 집 앞에서 내려다보니 나봇의 포도원이 정말로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포도원이 탐이 났습니다. 그는 나봇에게 가서 '자네 저 포도원을 나에게 팔라! 값은 부르는 데로 주겠네! 만약 자네가 그 포도원을 팔기가 싫다면 내가 더 좋은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겠네! 내가 이 밭을 잘 가꾸어 정원생활을 하고 싶네!'
그러자 나봇은 '임금님 미안합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옛 지계석은 옮기지 말라고 하셨으니 조상의 지계석을 옮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며 거절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한 것'인데 그는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결단에서 거절할 것'입니다. 아합은 그 포도원이 욕심이 나서 병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때 간악한 왕비 이세벨이 자꾸 사연을 묻자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은데 팔지도 않겠다, 바꾸지도 않겠다 하니 답답해서 그렇소?'하고 그의 심중을 말하자 그 이세벨은 '답답한 양반 같으니 어서 일어나 밥이나 먹고 정신 차리시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하고는 나봇의 마을의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를 '저 나봇이 왕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을 보았다'고 거짓말을 꾸미고 거짓 증인 두 사람을 세우고 그래서 나봇이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의 '말시키되'란 말은 거짓말과 거짓 증인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스데반을 음모하려고 거짓 증인을 세웠는데 그 거짓 음모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여러분 스데반이 모세를 모독하고 하나님을 모독했습니까? 아닙니다. 스데반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지키라고 했는데 스데반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을 다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율법 613가지를 지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 자시요,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율법을 지킨 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
그러니까 예수가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또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 말 역시 성전을 모독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을 모독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전에서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에 속죄양이 되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전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씌운 것입니다. 스데반의 죄목은 신성모독과 성전 모독 죄로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신13:6-10)입니다.
▶12절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9절에 나왔던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인' 이런 사람들이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에게 가서 '신성 모독 죄와 성전 모독 죄'를 범한 스데반을 가만둘 것인가 하고 충돌 질을 했습니다.
그러잖아도 눈에 가시처럼 보이던 예수의 제자들이었는데 신고가 들어오니 '을사 좋다'하고 스데반을 잡아 공회에 넘겼습니다. 이 공회는 산헤드린 최고법정으로 베드로가 재판 받던 곳입니다.
▶13절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여러분 법정은 절대로 거짓 증인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거짓 증인을 세웠다고 합니다. 당시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의가 사라진 증거입니다.
재판을 억울한 사람의 허물을 벗겨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때 재판소는 의인을 죄인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모함하는 가장 악랄한 방법 중에 하나가 '거짓 증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거짓 증인들은 스데반을 악한 말로 모함하여 거침없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거짓 증인들은 성전을 이스라엘 민족의 예배의 구심점이며 가장 신성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스데반이 유대 전통에 도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거룩한 곳'은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스데반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봐야 소용없다고 했다고 분개했습니다.
▶14절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두 개의 죄목이 있습니다. ①나사렛 예수가 이 성전을 짓겠다고 한 것과 ②모세가 전해 준 율법을 고치겠다는 것을 약점으로 들고 나왔습니다.
첫 번째 말은 요2: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율법을 고치겠다고 하였다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므로 율법을 고치겠다는 말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을 거짓말로 뒤집어 씌어 성도를 괴롭힙니다.
지금 스데반을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스데반의 태도는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15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요즈음 한참 불경기라고 하지만 성형수술을 하는 병원이나 살 빼는 장사는 결코 불황이 없다고 합니다. 신문 광고 중에 빠지지 않는 광고가 살 빼는 광고입니다.
지난 병원 파업 때에도 성형수술을 하는 병원들은 대부분 파업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환자들이 많았답니다.
자녀가 태어날 때부터 쌍꺼풀이 되어 있으면 돈 벌었다고 합니다. 성형미인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외모는 타고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외모도 돈 따라 결정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형 수술을 하고 화장을 한다고 진정 매력 있는 얼굴이 될 수 있을까요? 진정한 내면의 얼굴은 외모를 뜯어고친다고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그 사람 외모의 됨됨이가 아니라 그 사람 얼굴에 드러나는 인격의 분위기나 인격의 빛깔입니다.
▶예쁜 여자를 만나면 삼 년이 행복하고 착한 여자를 만나면 삼십 년이 행복하고,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면 삼대가 행복하다고 합니다. 잘 생긴 남자를 만나면 결혼식 세시간 동안의 행복이 보장되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통장 세 개의 행복이 보장되고, 가슴이 따뜻한 남자를 만나면 평생의 행복이 보장된다고 합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나타내는 거울과도 같은 것입니다. 얼굴의 빛깔은 마음과 생각을 나타내며 얼굴의 표정은 마음의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마음에 품은 것을 결국 얼굴로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그 마음에 무엇을 품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얼굴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격으로 만들어진 얼굴의 빛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으로 빚어진 얼굴의 빛깔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을 보세요. 천사의 얼굴 빛깔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아 들고 하산하던 모세의 얼굴의 영광을 연상케 합니다. 출34:29절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또 이 광경은 마치 변화 산에서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고 얼굴이 해같이 빛나던 주님의 변화를 연상케 합니다. 마17:2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왕관, 면류관'이란 이름과도 같이 멋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얼굴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어떤 거룩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잡혀 온 사람이지만 무엇인가 말로 잘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모습이 보여져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네 부류의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남을 심판하고 지적하고 몰아세우는 율법적인 삶 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얼굴은 한 마디로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것입니다.
⑴스데반의 얼굴이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신앙의 인격을 잘 나타낸 것입니다.
천사란 원어로 '앙겔로스'입니다. 직역하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 '사자'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천사(앙겔로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천상의 사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천사가 많이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집 앞에 앉아 있다가 방문하는 천사를 만났습니다. 신약에서는, 요셉의 꿈에 천사들이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천사가 헤롯왕의 칼을 피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하는 하나님의 전령 자이고 사자를 가르깁니다.
천사의 얼굴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의 얼굴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릅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수학자, 물리학자, 그리고 믿음의 사람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은 한 개의 갈대다. 자연 중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사처럼 될 수도 있고 짐승처럼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살고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얼굴의 모양이 달라집니다. 미국에서 사는 사람은 미국 사람과 같이 되어갑니다. 이민 2-3세가 되면 얼굴 모습이 달라져 간다고 합니다. 기후, 음식, 관습 등에 따라 표정과 얼굴이 달라져 갑니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한국에 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기독교서회 창설, 성서번역위원회, YMCA 조직, 등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후손, 언더우드 3-4세의 얼굴을 보면 낯선 외국인 같지 않고 아주 친근한 한국사람 같았다고 합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의 얼굴은 믿음의 얼굴이 됩니다. 세상에서 돈에 욕심이 너무 많아 욕심에 찌들어 살면 탐욕의 얼굴이 됩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 지혜와 셩령'으로 충만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든든한 믿음의 얼굴이 되어져 갑니다. 예배와 말씀과 삶 속에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은 은혜의 얼굴로 변화됩니다. 여러분의 내면의 얼굴이 믿음의 삶으로 아름답게 가꾸어지기를 바랍니다.
⑵천사의 얼굴이란 그 사람의 삶과 인격이 나타나는 얼굴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자기의 얼굴을 수십 번 볼 수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자신의 얼굴은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얼굴을 만드셨을 때 타인이 볼 수 있도록 만 만드셨습니다.
진짜 내 얼굴은 자신이 보는 얼굴이 아니라 남이 나를 보는 얼굴이 진짜 내 모습입니다. 메이크업 한 얼굴, 성형 수술한 얼굴, 일부러 웃음 지으며 순간적으로 만든 얼굴, 등등은 진짜 내 얼굴이 아니고 내 모습이 아닙니다.
진짜 얼굴은 하루하루 우리 자신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천천히 만들어져 가는 얼굴입니다. 그래서 링컨은 '사람 나이 40이 넘어서면 자신의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지라'고 했습니다. 우리 얼굴은 남이 나를 보라고 만든 대표적이고 중요한 기관입니다.
교회가 깨어 있으면 이 나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교회 교육이 다시 살아나면 우리에게는 행복한 얼굴이 보장됩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시대의 어두움을 밝히는 천사의 얼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바로 이런 스데반의 모습은 ①그가 '믿음 충만,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지혜 충만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과, ②진실과 경건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③그것은 바로 저 높은 것을 바라보고 만족하는 소망과 평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④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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