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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온유 (시37: 9-15,마11:28-30)
오늘은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인 '온유'(溫柔)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온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라우스'로 사물의 "부드러운", 짐승들의 "유순한", 사람들의 "온화한", 징계와 관련하여 "관대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는 잘못 이해하면 약하고 비겁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가령 사나운 개를 잘 훈련시켜서 유순하게 되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개가 유순하게 된 것은 결코 약하여진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인에게 복종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던 인간들이 변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에 갖는 마음의 자세가 바로 온유함입니다. '온유'가 성령의 열매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습니다. 결국 '온유'란 제멋대로 날뛰던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서 그 욕망을 조절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되며 낮아진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변하기 전에 비하면 대단히 부드럽고 관대하며 잘 참아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나약함으로, 줏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았기 때문에 강한 자요, 자유로운 자입니다. 그 인격의 특성으로 1) 외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내적으로는 강하고, 2) 확고한 생의 목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선적이 아니며, 3) 줏대가 없어 보이면서도 그 나름대로 확고한 생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며, 4) 언제나 내적 자유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온유한 자'는 '아나윔'으로, 우리말로는 '가난한 자' 혹은 '겸손한 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에 보면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나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고 하였는데 여기에 가난한 자로 번역된 말이 아니윔'이란 단어입니다. 또 스바냐서 2장 3절에 보면 "주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사람들아, 너희는 주를 찾아라"고 하였는데 여기 겸손한 자들로 번역된 말이 역시 '아나윔'이란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니윔'이란 한 말이 가난한 자, 겸손한 자, 그리고 온유한 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 말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처음에 이 말은 순전히 '가난'이란 뜻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과 권력 있는 자들에게 눌려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 이것이 예언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거기서 점차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다 제하여 버리시고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남겨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룩하여 가신다는 사상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과 같이 교만한 자들과 대조적인 말로 쓰여집니다. '온유'의 반대말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자란 자기가 가진 조그마한 재물이나 권력을 과시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못하며, 자기보다 약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입니다. 온유한 자란 꼭 이와 반대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온유한 자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요, 그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자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래서 온유를 말할 때 겸손과 관용이란 말이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 보통입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에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 했고,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오늘 읽어 드린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온유한 자가 어떠한 자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한 자요, 온전히 그에게 의지하는 자이며,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자기를 자랑치 않으며 관용을 베풀며, 억울함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온유한 자가 어떠한 자인지 시편 37편을 통해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시편 37편은 악인과 그들에게 고난 당하는 의인들을 대조시키면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한 때는 잘 되는 것 같으나 결국 땅을 차지할 사람들은 의인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의인들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야훼를 기대하는 자' '온유한 자' '가난하고 궁핍한 자' '정직한 자' '완전한 자' '화평한 자' '주의 복을 받는 자' '성도' 등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교만한 자들, 불의를 행하는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에 의하여 억압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에서 온유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편 37편을 한 절로 요약하면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자들이란 첫째로 야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 시에서 여러 가지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의뢰한다, 기뻐한다, 기대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란 이 세상에 재물이 없거나 있어도 그 재물에 의지하려하지 않는 자입니다. 온유한 자란 이 세상의 어떤 연줄을 자랑하려 하거나 그것을 의지하려 하지 않는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그만을 기대하는 자입니다. 야훼께서 그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무조건 순종하며 나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확신은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며, 그의 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시며, 그의 손을 붙들러 주시어 아주 엎드러지지 않게 하시며, 마침내 땅을 차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는 그런 시대에 살면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온유한 자가 불평하지 아니하며 참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로서 온유는 또 다른 열매인 오래 참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억울함이나 고난을 당하면서 화내지 않고 참아내는 힘이 바로 온유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유한 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는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셨고 그에게 순종하셨으며, 그가 낙심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가지신 확신은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세력을 꺾고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들을 자라게 하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온유하고 친절했던 이의 표본으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적도 많았습니다.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스탠톤(Stant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문 지상을 통해 링컨을 '교활한 어릿광대'라고 욕하였는가 하면, 공중 석상의 연설에서 링컨을 '오리지널 고릴라'라고 조롱하면서 '여러분은 고릴라를 보러 아프리카까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멋진 고릴라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라고 까지 비꼬았습니다. 그런데 후일 링컨이 내각의 각료를 임명할 때 놀랍게도 그를 국방장관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는 사람들에게 링컨은 조용히 '그 자리에는 그 사람이 적임자'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링컨이 암살되어 그의 시체 앞에 선 스탠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꿇어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았던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누워 있노라"
이런 의미에서 온유한 자는 결코 나약하거나 무기력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나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한 변함 없는 믿음을 가진 이상 그 누구보다도 강한 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의미에서 누구나 온유한 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는 온유한 자일 수 없습니다. 그는 결국 불의를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악을 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함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여 권력을 얻고자함도 아니오, 돈 많은 기업인을 예수 믿게 하여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고자함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뻐하며 그만을 의지하여 이 땅 위에 진리를 세우고자 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란 결국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린 자요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12:3)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에 설명한대로 모세가 영광의 자리인 바로궁의 왕자의 자리를 거절하였고, 일시적인 죄의 향락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으며, 그리스도가 받은 것과 같은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란 이 세상의 어떤 영광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귀하게 여기는 자입니다.
¶둘째로, 온유한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면서 선을 행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불의한 자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선을 행하며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불의에 휩쓸리고 악과 타협하게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아무리 악으로 기울어진다고 하여도 온유한 자는 그들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따라 진리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살면서 쉽게 선행을 단념하여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 어두워지고 더욱 모순된 일이 생기고 불의와 악이 활보를 합니다. 온유한 자는 어떤 상황에서나 선을 행하기를 힘쓰며, 공의를 말하며, 마음에 간직한 하나님의 법을 따라 행함으로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는 자입니다. 길들여진 개가 오직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는 것처럼,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그 말씀만을 따라 살아갑니다.
온유한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 계시에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서는 닫혀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대하여만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자로 취급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고귀한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든 상관치 않으시고 진리의 길을 행하여 가신 일을 생각할 때 그는 온유한 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신실' '충성'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끝으로, 온유한 자는 은혜를 베풀고 남에게 항상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면서 살아가니, 그의 자손은 큰 복을 받는다"(26절)고 하였습니다.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욕망이 없기에 언제나 적은 소유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으로 남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리라 믿고 살아갑니다.
이런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 불의한 자들을 끊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풀과 같이 속히 베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연기와 같이 사라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이 온 땅을 다 차지할 것처럼 무성해도 하나님이 곧 그들을 베어버리신다고 하였습니다.
악인의 큰 세력을 내가 보니, 본고장에서 자란 나무가 그 무성 잎을 뽐내듯 하지만, 한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흔적조차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그 모습 찾아볼 길 없더라 35절
그러므로 자연히 온유한 자들만이 남아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주의 법도를 지켜라. 주께서 너를 높여 주시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니, 악인들이 뿌리채 뽑히는 꼴을 네가 보게 될 것이다. 34절
온유한 자들은 악인들이 심판 받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짧은 역사 속에서 여러 번 이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한 자만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시편 37편에는 땅을 차지한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틀림없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악착같이 부와 권력을 갖고자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 땅에서 밀려나고, 나누어주면서 산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결국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니 결국 그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나라로서 부하고 교만한 자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그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없고, 오직 온유한 자, 겸손한 자, 가난한 자만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제는 '우리가 이 악한 세대에서 불의에 휩쓸리지 않고 어떻게 온유한 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느냐'입니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따라 그에게 나아가 우리가 지고 있던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때 가능합니다.
"수고하여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런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유함 안에 거할 때 세상으로 향하던 우리의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고 온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욕망을 모두 버린 가난한 마음에 겸손과 온유가 깃들게 되기에 그곳에 안식과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집착하며 소유하려던 모든 것,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온유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용기가 없으면 갖기 어려운 덕목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유경재목사님 설교자료중에서
오늘은 성령의 여덟 번째 열매인 '온유'(溫柔)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온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라우스'로 사물의 "부드러운", 짐승들의 "유순한", 사람들의 "온화한", 징계와 관련하여 "관대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는 잘못 이해하면 약하고 비겁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가령 사나운 개를 잘 훈련시켜서 유순하게 되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개가 유순하게 된 것은 결코 약하여진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인에게 복종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던 인간들이 변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에 갖는 마음의 자세가 바로 온유함입니다. '온유'가 성령의 열매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습니다. 결국 '온유'란 제멋대로 날뛰던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서 그 욕망을 조절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되며 낮아진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변하기 전에 비하면 대단히 부드럽고 관대하며 잘 참아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나약함으로, 줏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았기 때문에 강한 자요, 자유로운 자입니다. 그 인격의 특성으로 1) 외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내적으로는 강하고, 2) 확고한 생의 목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선적이 아니며, 3) 줏대가 없어 보이면서도 그 나름대로 확고한 생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며, 4) 언제나 내적 자유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온유한 자'는 '아나윔'으로, 우리말로는 '가난한 자' 혹은 '겸손한 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에 보면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나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고 하였는데 여기에 가난한 자로 번역된 말이 아니윔'이란 단어입니다. 또 스바냐서 2장 3절에 보면 "주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사람들아, 너희는 주를 찾아라"고 하였는데 여기 겸손한 자들로 번역된 말이 역시 '아나윔'이란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니윔'이란 한 말이 가난한 자, 겸손한 자, 그리고 온유한 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 말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처음에 이 말은 순전히 '가난'이란 뜻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과 권력 있는 자들에게 눌려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 이것이 예언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거기서 점차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다 제하여 버리시고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남겨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룩하여 가신다는 사상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과 같이 교만한 자들과 대조적인 말로 쓰여집니다. '온유'의 반대말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자란 자기가 가진 조그마한 재물이나 권력을 과시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못하며, 자기보다 약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입니다. 온유한 자란 꼭 이와 반대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온유한 자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요, 그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자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래서 온유를 말할 때 겸손과 관용이란 말이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 보통입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에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 했고,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오늘 읽어 드린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온유한 자가 어떠한 자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한 자요, 온전히 그에게 의지하는 자이며,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자기를 자랑치 않으며 관용을 베풀며, 억울함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온유한 자가 어떠한 자인지 시편 37편을 통해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시편 37편은 악인과 그들에게 고난 당하는 의인들을 대조시키면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한 때는 잘 되는 것 같으나 결국 땅을 차지할 사람들은 의인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의인들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야훼를 기대하는 자' '온유한 자' '가난하고 궁핍한 자' '정직한 자' '완전한 자' '화평한 자' '주의 복을 받는 자' '성도' 등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교만한 자들, 불의를 행하는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에 의하여 억압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에서 온유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편 37편을 한 절로 요약하면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자들이란 첫째로 야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 시에서 여러 가지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의뢰한다, 기뻐한다, 기대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란 이 세상에 재물이 없거나 있어도 그 재물에 의지하려하지 않는 자입니다. 온유한 자란 이 세상의 어떤 연줄을 자랑하려 하거나 그것을 의지하려 하지 않는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그만을 기대하는 자입니다. 야훼께서 그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무조건 순종하며 나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확신은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며, 그의 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시며, 그의 손을 붙들러 주시어 아주 엎드러지지 않게 하시며, 마침내 땅을 차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는 그런 시대에 살면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온유한 자가 불평하지 아니하며 참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로서 온유는 또 다른 열매인 오래 참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억울함이나 고난을 당하면서 화내지 않고 참아내는 힘이 바로 온유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유한 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는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셨고 그에게 순종하셨으며, 그가 낙심하지 아니하며 끝까지 가지신 확신은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세력을 꺾고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들을 자라게 하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온유하고 친절했던 이의 표본으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적도 많았습니다.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스탠톤(Stant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문 지상을 통해 링컨을 '교활한 어릿광대'라고 욕하였는가 하면, 공중 석상의 연설에서 링컨을 '오리지널 고릴라'라고 조롱하면서 '여러분은 고릴라를 보러 아프리카까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멋진 고릴라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라고 까지 비꼬았습니다. 그런데 후일 링컨이 내각의 각료를 임명할 때 놀랍게도 그를 국방장관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는 사람들에게 링컨은 조용히 '그 자리에는 그 사람이 적임자'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링컨이 암살되어 그의 시체 앞에 선 스탠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꿇어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았던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누워 있노라"
이런 의미에서 온유한 자는 결코 나약하거나 무기력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나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한 변함 없는 믿음을 가진 이상 그 누구보다도 강한 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의미에서 누구나 온유한 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는 온유한 자일 수 없습니다. 그는 결국 불의를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악을 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함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여 권력을 얻고자함도 아니오, 돈 많은 기업인을 예수 믿게 하여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고자함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뻐하며 그만을 의지하여 이 땅 위에 진리를 세우고자 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한 자란 결국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린 자요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12:3)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에 설명한대로 모세가 영광의 자리인 바로궁의 왕자의 자리를 거절하였고, 일시적인 죄의 향락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으며, 그리스도가 받은 것과 같은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란 이 세상의 어떤 영광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귀하게 여기는 자입니다.
¶둘째로, 온유한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면서 선을 행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불의한 자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선을 행하며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불의에 휩쓸리고 악과 타협하게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아무리 악으로 기울어진다고 하여도 온유한 자는 그들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따라 진리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살면서 쉽게 선행을 단념하여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 어두워지고 더욱 모순된 일이 생기고 불의와 악이 활보를 합니다. 온유한 자는 어떤 상황에서나 선을 행하기를 힘쓰며, 공의를 말하며, 마음에 간직한 하나님의 법을 따라 행함으로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는 자입니다. 길들여진 개가 오직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는 것처럼,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그 말씀만을 따라 살아갑니다.
온유한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 계시에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서는 닫혀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대하여만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자로 취급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고귀한 자로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든 상관치 않으시고 진리의 길을 행하여 가신 일을 생각할 때 그는 온유한 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신실' '충성'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끝으로, 온유한 자는 은혜를 베풀고 남에게 항상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면서 살아가니, 그의 자손은 큰 복을 받는다"(26절)고 하였습니다.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욕망이 없기에 언제나 적은 소유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으로 남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리라 믿고 살아갑니다.
이런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 불의한 자들을 끊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풀과 같이 속히 베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연기와 같이 사라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들이 온 땅을 다 차지할 것처럼 무성해도 하나님이 곧 그들을 베어버리신다고 하였습니다.
악인의 큰 세력을 내가 보니, 본고장에서 자란 나무가 그 무성 잎을 뽐내듯 하지만, 한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흔적조차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그 모습 찾아볼 길 없더라 35절
그러므로 자연히 온유한 자들만이 남아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주의 법도를 지켜라. 주께서 너를 높여 주시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니, 악인들이 뿌리채 뽑히는 꼴을 네가 보게 될 것이다. 34절
온유한 자들은 악인들이 심판 받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짧은 역사 속에서 여러 번 이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한 자만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시편 37편에는 땅을 차지한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틀림없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악착같이 부와 권력을 갖고자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 땅에서 밀려나고, 나누어주면서 산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결국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니 결국 그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나라로서 부하고 교만한 자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그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없고, 오직 온유한 자, 겸손한 자, 가난한 자만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제는 '우리가 이 악한 세대에서 불의에 휩쓸리지 않고 어떻게 온유한 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느냐'입니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따라 그에게 나아가 우리가 지고 있던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때 가능합니다.
"수고하여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런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유함 안에 거할 때 세상으로 향하던 우리의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고 온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욕망을 모두 버린 가난한 마음에 겸손과 온유가 깃들게 되기에 그곳에 안식과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집착하며 소유하려던 모든 것,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온유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용기가 없으면 갖기 어려운 덕목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유경재목사님 설교자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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