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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설교 3,276편 】◑/인생 설교 25편

인생의 지우개는 없습니다 (계 22:10-15)

by 【고동엽】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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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지우개는 없습니다 (계 22:10-15)

어느 도시 어귀에 동상이 하나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상을 일컬어 행복한 왕자로 명명했습니다. 어느 날 제비 한 마리가 그 행복한 왕자 동상 어깨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제비가 동상을 올려다 본 순간 동상이 울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제비는 묻습니다.
“왕자님! 사람들은 왕자님을 행복한 왕자라고 하는데 왜 울고 있나요?”
“내가 왕궁에 살아 있을 때에는 굶주린 자, 헐벗는 자, 병든 자, 고난받는 자들의 아픔을 몰랐는데 이제 내가 죽어 동상이 되어 여기서 살펴보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하고 있음을 본단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슬프구나”
그러면서 왕자는 제비에게 부탁을 합니다.
“제비야, 여기서 얼마쯤 가면 가난한 가정에 산모가 냉방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나의 한쪽 눈 사파이어를 뽑아 그에게 전해 줄 수 있겠니?”
제비는 그렇게 심부름을 했습니다. 돌아온 제비에게 왕자는 다시 부탁을 합니다.
“나의 한 쪽 눈 사파이어를 뽑아 어느 지점에 가면 길거리에서 추워 떨고 잇는 성냥팔이 소녀가 있는데 그에게 전해 주고 오렴.”
그렇게 제비는 행복한 왕자의 말대로 동상 여러 곳에 박혀 있는 보석들을 뽑아 가난하고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서 지내다가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갈 기회를 잃고 지쳐서 어느 날 행복한 왕자 동상 앞에 떨어져 얼어 죽었습니다. 제비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것은  보석이 다 뽑혀진 납으로 만든 행복한 왕자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였습니다.

이것은 ‘행복한 왕자’라는 제목의 오스칼 와일드의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심에 질문을 던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

노트에 필기를 하다가 잘못 쓰면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지울 수 있는 지우개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일생이라 하고 이생이라 하지 않습니다. 인생이 이생이면 다음 생애에서 다시 한번 잘 살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인생은 일생이기 때문에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지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잘 살면 잘 사는 대로 못 살면 못 산대로 기록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12절)
어떤 행함입니까? 11절 말씀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11절)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인의 행위, 웃시야의 행위, 삼손의 행위, 사울 왕의 행위, 유다의 행위, 발람의 행위, 고라의 행위, 아합의 행위,..............
누가 이들의 더럽고 추한 행위를 지울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지울 수 없습니다. 인생은 지우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이란 다 실수를 합니다. 죄를 범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도 의인은 없습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한 가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고 살아갈지라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곧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축복된 생활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시편 49:20의 말씀입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렇습니다. 존귀에 처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존귀입니까?
가난에서 부요에 이른 존귀입니다.(고후 8:9) 질병에서 건강에 이른 존귀입니다.(벧전 2:24) 멸망에서 영생에 이른 존귀입니다.(롬 1:1-9) 저주에서 축복에 이른 존귀입니다. (갈 3:13)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보다 못하다는 교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바르고 아름답게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했습니다.(히11:24-26)

다윗을 보십시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범죄했지만 자신의 허물과 죄를 뉘우치고 침상이 썩도록 회개함으로 성군이 되고 위대한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가 탄생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히브리인이요, 베냐민의 지퍄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요, 율법으로 흠이 없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로마의 시민권까지 갖고 있으면서 당시의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지난 날 자신의 모든 행위가 죄악된 것임을 깨달아 다메섹 도상의 회심 이후 일평생을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았기에 역사 이래 바울 같은 신앙인도 신학자도 없을 정도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죄악의 유혹을 거절하는 결단이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말년에 이방 여인을 거절하는 결단이 없어 그의 말년을 가슴 아프게 마무리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나실인으로 사명을 잘하다가 말년에 들릴라의 유혹을 거절하는 결단을 하지 못해 두 눈을 뽑히고 소처럼 맷돌을 돌리다가 다곤 신상과 함께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생애를 마무리했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선지자로서 모압 왕의 재물로 범죄케 하는 유혹을 거절하는 결단을 하지 못하여 유다서에 기록되는 저주받은 세 사람 중의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웃시야도 왕으로서 훌륭한 통치를 하다가 말년에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의 유혹을  거절하는 결단을 하지 못해서 그의 말년을 문둥병자로 별궁에 거하면서 비참한 생애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죄의 유혹을 거절하는 결단의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인생은 지우개가 없음을 바르게 인지(認知)하고 확신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2. 새 생활을 위한 어제의 누더기적 삶을 벗어버리는 결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 :17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하여 어제의 옳지 못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인생을 아름답게 기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그처럼 귀히 여기고 추구했던 온갖 부귀와 학문과 영광과 명예와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는 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다고 고백한 바울에게서 인생이 지우개 없음을 깨달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 가문과 명예와 학문과 권력과 재물과 같은 모든 것들은 한갓 누더기에 불과한 것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알고 난 후에는 그 무엇도 예수보다 좋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기에 그는 모든 것을 분토처럼 버릴 수 있었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제의 누더기는 무엇입니까? 보다 더 나은 것을 얻는 일에 방해되는 것은 누더기입니다. 그것을 과감히 벗어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말이 더 좋은 것이면 거짓말은 누더기입니다.
사랑함이 좋다면 미움은 누더기입니다.
성실함이 좋다면 게으름은 누더기입니다.
감사함이 좋다면 불평은 누더기입니다.
효도함이 좋다면 불효는 누더기입니다.
이타적이 좋다면 이기적인 것은 누더기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예배 생활을 방해하는 누더기는 무엇입니까?
헌금생활을 방해하는 누더기는 무엇입니까?
전도생활을 방해하는 누더기는 무엇입니까?
봉사생활을 방해하는 누더기는 무엇입니까?
그런 것들을 깨달아 과감히 벗어버리는 삶을 살아갈 때 그의 인생은 아름답게 기록될 것이며 그 아름다운 삶을 지울 수 있는 지우개 또한 없을 것입니다.

3. 섬기는 삶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 있는 축복이며 행복된 삶임을 깨닫고 결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섬긴다는 것은 비굴이 아닙니다. 성공적인 삶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가 섬김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삶이 섬기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 교훈하셨습니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이 한 말씀 안에 예수님의 섬김의 교훈이 가득 차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직접 잡히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의 도를 실천하시고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12의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누가복음 6:38의 말씀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사도행전 20:35의 말씀입니다.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이렇게 주는 것이 복이 있고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그런데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주는 것보다는 받기를 더 원하고 나누는 아름다운 생활에 인색합니다.

4.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인생도 마지막 날이 있음을 깨닫고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은 간경화로 생명을 잃기 쉽고, 담배를 많이 피운 사람은 폐암에 걸리기 쉽고, 고스톱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돈의 노예가 되고 게으른 자가 되어 멸망하게 되며,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육신도 정신도 병자가 됩니다.

그러나 절약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며, 땀을 많이 흘린 사람은 그만큼의 행복이 있으며, 성실로 음식을 삼은 사람은 행복의 날을 노래합니다. 인간사에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 또한 있습니다.

미국의 법률학자 잉거솔이 말했습니다.
“현재는 필연적인 과거의 산물이며, 현재는 필연적인 미래의 원인이다”
그렇습니다. 현재는 필연적인 미래의 원인입니다. 내일의 행복한 날을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칭찬받는 내일을 위하여 오늘 우리는 어떤 원인을 만들어가는 삶인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남편 다섯을 두었던 이유로 사람들의 낯을 피하여 정오에 물을 길러 왔지만 거기서 예수를 만나는 두 번째 원인 때문에 물동이를 던지고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치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남은 생애를 당당하고 감사함으로 살았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주먹을 쓰는 평양의 강패가 되었지만 예수를 믿은 제 2의 원인 때문에 위대한  한국의 목사가 되셨습니다.

고재봉 씨는 도끼로 일가족을 죽인 원인으로 살인마가 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예수를 믿은 제 2의 원인으로 옥중에서 전도를 1.800명이나 하고 아름다운 생애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원인을 만들면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아름답지 못한 원인을 만들면 슬프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축복과 생명의 길로 만드는 것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나의 죄를 대속한 구주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삶의 원인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내일의 삶을 축복과 영생으로 결과를 맞게 됩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인생의 지우개 없음을 깨달아 아름다운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의 내일은 주님 안에서 날마다 감사함으로 기쁨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박청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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