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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처럼 사랑하기 (마 5:43)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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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처럼 사랑하기   (마 5:43)

성경을 읽으시는 여러분의 표정이 밝지를 않습니다. 아마 마음에 굉장히 부담스럽게 이 말씀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지 30년 가까이 되는데, 처음에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고 가르칠 때에는 구원이라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배우기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구원이 무엇인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공식화시켜서 전도하고 또 가르치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성경을 더 깊이 보게 되고, 과거에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도전 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구원이라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자꾸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단순히 '믿고 천국 간다.'는 공식으로 설명이 다 되지 않는 엄청난 차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좀더 학문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또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서 실현되는 어떤 현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점점 변해가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라고 해석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꾸 깨닫자 한편으로는 굉장한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대단하게 보시는구나.' 저를 향해서 자기처럼 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 '야, 내가 그렇게 대단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보면 그것이 어떤 때는 기쁨도 되고 하나님 앞에 감사도 됩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기대치에는 너무나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꾸 느끼면서 얼마나 그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 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자기처럼 되라고 명료하게 말씀하시는 사례가 성경에 또 있습니까? 이것만큼 명료하게 이 사실을 가르쳐주는 본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보면 바로 알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그가 우리를 향해서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가를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부터 완벽주의를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까? 막연히 악인을 사랑하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악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란의 후세인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악인은 내게 직접 피해를 입힌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악인 중에도 네 원수'라고 합니다. '너를 핍박하는 자'라고 합니다. 내가 직접 피해를 보았습니다. 엄청난 원한이 지금 내 가슴 속에 쌓여 있습니다. 그런 대상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요구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자기를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처럼 되야 한다. 세상 사람 보기에는 조그마한 집에서 살고 네 이름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무명의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너를 엄청나게 생각한다. 너는 내 자녀가 아니냐? 나를 닮아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한다면 너도 사랑해야 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는 누구나 다 부담을 느끼기 마련인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구약에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바꿨습니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고, '그렇구나. 그래야지.' 하고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깎아 내려서 가르쳤단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 가르친 내용을 예수님이 오늘 43절에 인용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소리를 너희들이 하고 있지 않느냐?'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보면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말 하나를 빼 버리고 가르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네 몸과 같이'를 빼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네 이웃을 사랑해라.'만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하면 쉽죠? 그리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빼 버리고 대신에 무엇이라고 가르쳤습니까? '네 원수는 미워해도 괜찮다.' 이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말씀을 각색해 놓았습니까? 매우 인간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왜 이렇게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각색하는 것, 더하고 빼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취지와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받아야 됩니다. 가감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넓고 너무 높고 너무 큽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인과 악인을 구태여 구분하지 않습니다. 선인도 사랑하고 악인도 사랑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참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45절 중간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우리 생각에는 아침에 참 따뜻한 태양이 떠오를 때에 저 이북에 있는 김정일 집은 비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거기도 따뜻하게 햇살이 비쳐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녀의 가정에도 따뜻한 햇살을 비쳐 줍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폭정을 하는 나라에는 아예 몇 년이 가도 비가 안 왔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때가 되면 거기에도 비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백성들이 사는 한국에도 비를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악인과 선인을 구태여 구분하지를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46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을 받을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능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내가 낳은 자식, 내 부모, 내 형제는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끼리끼리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악명 높은 세리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도 다 하는 사랑입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우리보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구나 다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를 믿어도 하는 것이고 안 믿어도 하는 것이고, 도둑놈도 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존경 받는 사람도 하는 것이고, 얼굴이 검은 사람도 하는 사랑이고 하얀 사람도 하는 사랑이 아닌가? 그런 사랑이 아니다. 내가 하는 사랑을 너희들이 해라.'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해 준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시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무조건 사랑해주신 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요, 아가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요, 아가페는 자기를 희생하고 행동에 옮기는 사랑이요, 아가페는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하는 사랑이요, 아가페는 열번 백번 똑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불쌍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그 십자가 앞에 나가기만 하면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 말입니다. 원수 까지도 사랑한 사랑 말입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이 흘러내리는 그 사랑을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 앞으로 나가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비는 다 자식이 자기를 닮기를 원합니다. 좋은 점은 배우기를 원합니다. 부모 치고 자식이 자기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지 않고 마음대로 되기를 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부모의 좋은 점을 본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가문을 빛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루에 열번 백번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나처럼 해야 된다. 내가 아가페의 사랑을 너희에게 주었다. 너희도 나를 닮으려면 나와 같이 해야 된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성경을 보십시오. 45절입니다. '하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자, 보십시오. 여기서 '아들이 되리니' 하는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되리니' '아버지를 닮는 자가 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면 하나님 아버지처럼 됩니다. 아버지처럼 된다는 이 말을 또 한번 바꾸어서 48절에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합니다. 이 온전하라는 말이 또 따라나옵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 하나님의 아들처럼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온전한 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온전하다는 이 말은 텔레이오스라고 하는 헬라 말인데 이 말의 명사형이 텔로스입니다. 텔로스는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목표, 목적, 끝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텔로스라는 말을 형용사로 바꾸면 목적에 일치하는 것, 목표에 이른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처럼 온전하라고 하신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에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목적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어떤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까?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본래 의도는 자기와 똑같이 닮은 존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런데 그 몹쓸 마귀가 와서 유혹해 가지고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갖추어 주시려고 하던 형상을 거의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인간의 모습은 마귀의 형상이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교육을 많이 시켜도 하나님의 형상보다 마귀의 형상을 더 닮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잘 살고 아무리 부유하고 명예를 누려도 가만히 보면 마귀의 형상들입니다. 거짓말하는 꼴을 보십시오. 마귀의 형상입니다. 하고 다니는 꼴을 보십시오. 자기 밖에 모르는 꼴을 보십시오. 모두가 마귀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정 없이 무너지고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너무 안타까우셔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시면서 '너희들이 나를 믿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거룩한 백성,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온전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바로 이 세상에 살 때부터 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원수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도 우리를 핍박하는 자는 없습니다.

저는 신학교 때 약간 잘못 배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것,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서만 가능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그리고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핑계하기 좋지 않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데. 사람은 죄 짓는 것이 전문이고 하나님은 용서해 주는 것이 전문 아닌가? 그러므로 날마다 그저 잘못하면 회개하고 용서 받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태연하게 생각하고 천당 들어갈 꿈만 꾸고 살았단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인줄 알았단 말입니다. 또 그런 식으로 가르쳤단 말입니다. 그랬으니 오늘날 한국 교회의 꼴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닮아가는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놀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면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세상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했습니까?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가 굶주리는 것을 보면 먹을 것 갖다 줘야 하고 그가 목마른 것을 보면 마실 물을 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원수 갚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동하기를 기다리면 안됩니다. 명령에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움직여야 됩니다. 원수를 자연스럽게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사랑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처럼 사랑하라고 그러셨으니 나도 실천해야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적어도 하나님 하시는 것을 흉내라도 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원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런 처지에 있다는 것이 너무 분명한대도 참 실제로는 까마득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내일 모레 일본 컨벤션에 참석합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매년 있었던 모임이기 때문에 저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동경 옆에 있는 하꼬네라고 유명한 관광지에 호텔을 잡고 많이 모이면 오백 명 이상, 적게 모이면 삼백 명 정도 모이는 집회인데 초교파 적으로 모이는 집회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랑의교회가 일본 교회 제자훈련을 위해서 십여 년 투자하면서 거둔 하나의 열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집회를 갈 때마다 마음에 느끼는 것은 사랑이 안 간다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 하면 아직도 감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십여 년 동안 이 나라가 일본 식민지로서 착취를 당할 때 얼마나 우리가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까? 지금도 그 잔재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정신, 정치, 경제에 미친 영향, 심지어 우리나라 문화에 끼친 영향들을 보면 아직도 그 당시의 그 무서운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의 근성이 아직도 식민지 근성입니다. 자주 독립을 성취한 백성답지 못합니다. 아직도 왜 교통 법규를 어기면서 그것을 잘난 체 합니까? 그것이 식민지 근성입니다. 왜 길을 가면서 침을 함부로 뱉고 담배 꽁초를 함부로 내버리면서도 부끄러운지 모릅니까? 식민지 근성입니다. 벌써 이 나라가 독립한지 일 세대가 지나고 이 세대가 지나가는 마당인데도 아직도 식민지 근성이 이 땅에서 씻겨 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애국 지사를 무섭게 고문하고 죽인 사례가 한두 건입니까? 일본 천황이 신이 아니라고 반대하다가 소리 없이 죽은 성직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고통한 자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나라는 학생들에게 자기들의 야만 행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을 6백만이나 가스실에서 죽인 그 마귀와 같은 독일 사람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전 세계 앞에 용서 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판국에 일본은 아직도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독종들인지 모릅니다. 적어도 역사는 진실하게 말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대도 그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저 백성들에게 사랑이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컨벤션에 갈 때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왜 사랑하지 못할까?' 이런 말씀을 보면서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아직도 저는 일본말을 절대로 안 배웁니다. '아리가도 고자이마스' 외에는 안 배웁니다. 그것은 예의상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한 십년 정도 배웠으면 꽤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 배웁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에 사랑이 안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변재창 선교사님은 일본에서 이십년 가까이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을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기로 결심했는데 그 때 이런 기도를 했다죠? "하나님, 좋습니다. 선교사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꼭 한가지만 들어 주십시오. 어디를 보내도 좋습니다. 단 일본만 제외해 주십시오. 그랬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끌어다가 일본에다 집어 넣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일본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일본을 위해서 저는 날마다 기도합니다. 특별히 일본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잘 알면서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모순된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을 참 신중하게 받아 들이고 순종하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정말 하나님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한 사람을 한 사람만 꼽아 보라고 한다면 저는 두말 하지 않고 우리 나라의 손양원 목사님을 꼽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다 뒤져봐도, 세계 어디를 가도 이처럼 위대하고 감동적인 원수 사랑의 사례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야 말로 한국 교회의 영광이요 자랑이요 면류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입만 가지고 원수 사랑을 아무리 떠들어대도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듣기 전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그 손양원 목사님의 딸인 손동희 권사님이 쓰신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고 하는 제목입니다. 한번 꼭 사서 읽어 보십시오. 이 손동희 권사님은 당시 중학생이었습니다. 중학생 때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그 당시에 그 상황을 정확하게 목격한 사람 치고 생존자는 아마 이 사람 밖에 없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어요.

손양원 목사님은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서른 일곱 살 때에 전라도 여수에 있는 나병 환자들의 교회인 여수 애향원 교회를 담임하기 시작했습니다. 환자들을 위한 사역입니다. 거기서 한 1년 사역하시는데 일제가 갑자기 신사참배를 강조했습니다. 천황을 신이라고 인정하고 신사 앞에서 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양심상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우상 앞에서 절합니까? 그것을 거부하다가 결국은 끌려 들어가서 해방이 되던 그 해까지 5년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리고는 출옥한 다음에 다시 여수 애양원으로 돌아와서 그 나병 환자들을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섬기면서 목회를 했는데 불과 3년이 가기 전에 저 유명한 여수 반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나서 하루 아침에 많은 중학교 고등학교 그 다음에 청년들이 공산당원으로 돌변해 버린 것입니다. 고등학교 학생 하나가 평소에 예수 믿는다고 아니꼽게 생각하던 차제에 손양원 목사님의 큰 아들 동인이와 중학교 다니는 동신이를 여수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끌고 갔습니다. 끌고 가서 구타를 하고 고문을 하고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놓아 주지만 예수 믿겠다고 하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손 목사님 두 아들이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자 끌고 가서 총살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둘이 순교를 했습니다. 천여 명의 성도들과 함께 교회 마당에서 두 아들의 장례식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때 손양원 목사님이 나와서 저 유명한 열 가지 감사를 이야기했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아들의 시체를 앞에 놓고 그가 한 열가지 감사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했으니 감사합니다.

두번째로 많은 성도 가운데 이런 귀한 보배 같은 아들들을 나에게 맡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삼남삼녀 중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을 바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이 순교를 했으니 감사합니다.

예수 믿다가 병들어 죽는 것도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가 순교 당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미국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큰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일으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두 아들이 순교함으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겨날 것을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있는 믿음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이런 과분한 큰 복을 내려주신 것은 부모님이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실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 자매들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알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이렇게 열 가지 감사를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아들을 장례하는 그 시간에 이미 원수를 용서하고 양아들을 삼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장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이 손동희라고 하는 자기 딸을 불렀습니다. 불러 앉혀 놓고 목사님은 자기 심정을 이제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리 원수지만 내가 그 원수를 꼭 내 양아들로 삼아야 되겠다 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일제 시대 5년간이나 가족을 고생 시켜가면서 감옥 생활을 견딘 것도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제 1,2 계명을 어기지 않으려고 한 일이었는데 이제 원수를 놓고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된다고 딸을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희야 제1,2 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 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어느 것은 순종하면서 어느 것은 순종치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 있겠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순종치 않으면 과거 5년 동안 감옥 생활 한 것이 모두 헛수고요, 너희들을 고생 시킨 것도 헛고생시킨 꼴이 되고 만다. 나는 여기에서 넘어질 수가 없어. 두 오빠는 천국 갔으나 그들을 죽인 자는 지옥 갈 것이 분명한데 전도하는 목사로서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을 어떻게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다니는 딸이 이해하겠습니까? 아버지 옷을 잡고 반 미친 것처럼 원수는 갚아야 된다고, 왜 아버지는 예수를 믿어도 그렇게 별난 예수를 믿느냐고 막 통곡하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 딸을 또 달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였어. 용서만 가지고는 안돼. 그 학생을 살려 주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내 아들로 삼아야 해. 너 이거 꼭 기억해야 해. 아비의 뜻을 따라주어."

이렇게 눈물로 간절히 딸을 설득하자 나중에는 딸이 그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약속하고는 범인이 지금 처형당할 직전에 놓여 있는 그 순간에 그 형장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딸이 달려가서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간절하게 눈물로 호소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지휘관이 감동을 받아서 그 범인을 형장에서 빼 내 가지고 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손 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 목사님이 집회 다닐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 아들을 잃고 나서 양아들을 삼고 집회를 다니는데 2년이 안 되어서 6.25가 터졌지 않습니까? 6.25가 터져서 공산당이 전라도까지 휩쓸고 내려갔습니다. 손양원 목사가 잡혔습니다. 목사라니까 여지없습니다. 끌어다가 과수원에 가서 총살을 시켰는데 그 전날 밤에 그런 말을 옆에 있는 사람한테 했다고 합니다. 자기 교회 집사도 끌려 왔는데 그 사람은 나중에 살았습니다.

"내가 지난 밤에 보니 내 아들 동인, 동신이가 내 눈에 나타났어. 아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려나 보다."

그러더니 그 다음날 순교를 했습니다. 양아들이 된 그 사람은 나중에 새사람이 되었지만 2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아파트 수위로 일하다가 결국은 세상을 떠났는데 떠나기 직전에 이 손동희 권사, 손 목사님의 딸을 찾아와 가지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동희야, 나는 곧 하나님 나라로 간다. 내가 죽어서 천당에 가면 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련다." 이 말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위대한 원수 사랑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돼. 나는 하나님처럼 되어야 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이 원수로 사랑하라고 했어' 하는 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어 인간의 어떤 감정을 극복하고 이런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마음 속으로 '아니야. 그래도 이상일 뿐이야. 독특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나 같은 사람은 안돼. 내가 낳은 자식도 비위 상하면 일년 삼백육십오일 미워하고 사는 판국인데 원수 사랑이 어디 있냐?' 이렇게 계속 생각하고 그런 음성이 들린다면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사탄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자가 되기를 원하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돼.'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가?' 자꾸 이렇게 말하는 마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여러분은 신앙 생활을 크게 잘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를 닮은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기본적인 작업은 다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자마자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씨, 생명의 씨를 내 안에 심어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씨가 지금 우리 안에 자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씨앗은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씨앗이 아닙니다. 생명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자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말씀을 듣는 이 시간도 그 말씀을 들으면서 이 생명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씨앗이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는 누구를 닮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를 닮은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옛사람은 못박게 하시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살고 있다면 하나님 자녀처럼 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이 내 안에 살고 계시기에 나도 예수님처럼 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정과 욕심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자녀요 온전한 자가 되는 거룩한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알아도 그것을 신중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여러분, 이 말씀이 매우 이상적인 말씀 같지만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나를 사랑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내 형제라서 사랑한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런 본능적이고 끼리끼리의 사랑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저 그 수준에서만 사랑한다면 한번 물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증거가 어디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까? 세리도 다 하는 사랑, 도둑놈도 다 하는 사랑,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도 다 하는 사랑을 하면서 그 이상 우리가 발전하지 못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무엇으로 증명해야 합니까? 성경 찬송 들고 다니는 것으로 증명합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본능적인 사랑, 끼리끼리의 사랑을 뛰어넘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도대체 예수 안 믿는 사람하고 우리하고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러므로 하나님처럼 사랑해야 돼. 나는 예수처럼 예수님처럼 닮아가야 돼.'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날마다 '주여, 도와주세요. 순종할 수 있도록 은혜 주세요. 주님이 은혜 주시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여, 두 손 들고 주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오니 나에게 하나님처럼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십시오.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설혹 원수가 생겨도 그 원수에 대해서 증오심을 갖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 주십니다. 반드시 도와 주십니다. 손양원 목사님만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한다면 우리를 통해서 동토와 같이 얼어붙은 이 세상, 정말 자기 하나 밖에 모르는 마귀의 화신들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에 나가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녹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땅을 녹일 수 있습니다. 병든 이 사회를 고칠 수 있습니다. 내 가정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는 작은 예수들이 살고 있는 가정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으로 양이 차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오늘도 빚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목적을 이루실 때까지 하나님은 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이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세상에 있을 때부터 이 목적을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빚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꼭 명심하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한시도 잊지 맙시다. 비록 가슴 속에 증오가 일어나고 감정이 복받치는 순간이 있다 할 지라도 '아니야, 아니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이래서는 안돼.' 하고 말하면서 자기를 추스르고 성령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나중에 놀랍게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마음에 원수는 고사하고 가족 식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여전히 마음에 원한을 갖고 있는 그런 나쁜 감정이 가슴에 있다면 성령께서 그 모든 감정을 깨끗이 눈 녹듯이 녹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밖을 보십시오. 날씨가 조금 더워지니까 눈이 다 녹아 내리지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시면 내 안에 있는 모든 잘못된 감정들이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는 원수를 보아도 원수처럼 보이지 아니할 만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반드시 주십니다. 그런 은혜를 받고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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