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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4:7-19)

by 【고동엽】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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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4:7-19)


오늘 성경본문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랑은 본래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며 사랑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또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사랑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같이 거룩한 사랑의 성품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온 인류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5:8)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불같은 사랑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틴 루터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축소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이 "만일 성경이 전부 갑자기 없어지고 요한복음 3장 16절만 남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문학가로 잘 알려진 최효섭 목사는 이 짧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는 최고(greatest)들만이 등장하고 있다며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이다.(greatest lover) <참조:최고의 사랑의 주체가 되신다는 의미.>

"세상을"...최고의 숫자이다.(greatest number) 시대와 인종을 초월한 모든 악인, 모든 선인을 포함하여 사랑하신다.

"이처럼 사랑하사"...사랑의 최고 수준이다.(greatest degree) 불가능한 상대를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랑하신 그 깊이와 그 넓이가 한량없는 수준이다. <참조: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대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시는 그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을 말한다.>

"독생자를"...최고의 선물이다.(greatest gift)<참조:인류에게 내리신 최대 최고의 선물이다.>

"주셨으니"...최고의 행위이다.(greatest act) 하나님이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놓수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행위이다.

"누구든지"...최고의 초청이다.(greatest invitation)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인도 이 하나님 사랑의 초청에 포함된다.

"저를 믿는 자마다"...최고의 단순함이다.(greatest simplicity) 믿는다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없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믿는 것처럼 하면 된다. <참조:이같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을 얻는데는 단순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

"멸망하지 않고"...최고의 해방이다.(greatest deliverance) 죽어야 할 죄수가 석방되는 것 같다. <참조:하나님의 사랑은 사형수일지라도 용서하시고 해방하신다.>

"영생을 얻으리라"...최고의 소유이다.(greatest possession) 그 이상의 재산, 그 이상의 소유는 없다. <참조: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죄의 용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주신다.>이 위대한 성구, 요한복음 3장 16절에 표시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최효섭,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숱한 죄를 짓고 사는 인생들에게, 땅에서 난 썩어질 사랑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원한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를 두고 오늘 본문 성경 10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씻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그냥 내버려두고서는 사랑이 그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한 것처럼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지은 죄가 어떻하든 영원히 용서함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의 방해를 받거나 그래서 중단되거나 하지 않는, 그 누구,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하나님의 참되고 거룩하며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장군 동무와 타냐와의 대화 장면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질문합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에 타냐는 "혁명의 와중이고 거리는 불이 나고 복잡해서 그저 도망치는 중에....."라고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때 장군이 "헤어진 정말 이유는 무엇이지?" 하고 다그치자 타냐는 입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실토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 때 장군은 타냐에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을 가르쳐 주마. 코마로프는 네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너의 아버지는 바로 닥터 지바고야. 만일 그가 네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거리에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이라도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았을거야." 진짜 아버지와 가짜 아버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짜 아버지는 결코 딸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차이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육신의 어미는 자식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를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자식이 아버지가 싫어 손을 놓아버릴지언정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식일지라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이같은 사랑을 예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도 그 받은 바 사랑이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 기독교인 아닙니다.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더글라스 메도 목사의 말대로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아니고, 피아노가 집에 있다고 해서 피아니스트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집에 바이올린이 있다고 해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든, 바이올린이 있든 있는 그 악기를 가지고 목적한 음악을 소리를 통해 나타낼 수 있어야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등 음악가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생활을 통해 나타나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안에 거하는 생활, 다시 말해 사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져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 처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나타내시는 사랑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바람이 하는 일을 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전기를 볼 수는 없지만 그 전기가 어떤 힘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궁극적으로 나타내시고 계시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참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완전하고 참된 사랑을 예수 십자가에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참된 성도의 모습,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한다해도 그것은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선 요한 1서 3장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6-18)

일본의 정신박약아 시설인 시요학원들은 후꾸이 목사가 창설하고 약 30명의 직원 전원이 크리스천으로 구성된 시설이라고 합니다. 어느 목사가 이 학원을 방문하여 한 여선생에게 어떤 일이 가장 힘드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을 목욕시키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너무 힘들어 처음에는 사표를 낼까 하였으나 "저 아이들이 예수님이다."고 격려하시는 후꾸이 원장님의 말씀을 들으며 1년을 견디었더니 이제는 정말 그 고된 일이 즐겁고 가볍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 다."(마 25:46)고 말씀하심으로서 이웃 사랑이 곧 진정한 예수 믿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전국 교도소에 문서선교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도소 수감자가 문서선교지 <숲속의 사과나무>를 보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내용은 70가까운 노모가 장생포에 살고 계시는데 누가 돌볼 사람이 없으니 자기가 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탄원서를 법무부 장관과 교도소장앞으로 제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형편을 살펴보기 위해 여러분께서 매주 마다 내주시는 <사랑의 성미>와 여선교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가지고 장생포 주소를 들고 찾아가보았습니다. 편지 내용대로 장생포 골짜기 달동네같은 지역에서 전기세, 수도세 등을 내지 않아서 단전, 단수되어 저녁이 되면 촛불을 켜놓고 지내는 형편이었습니다. 만나뵙고자 했던 할머니는 안계시고 방문은 열쇠로 잠궈져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이웃에 계시는가 해서 이웃을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아랫 집에 어느 젊은 아주머니 하나가, 우리가 할머니를 도우러 교회에서 온 줄을 어떻게 알고 투덜투덜거리며 우릴 보고 미쳤냐고 소리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처음 생각에는 이 집 아들이 동네에서 아주 몹쓸 짓을 하다가 교도소에 가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기를 작은 아들이 아무리 동네에서 몹쓸짓을 하다가 교도소에 갔다해도 큰 아들은 가출한지 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자신을 돌보던 아들마저 교도소에 갇혀 있으니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단전 단수마저 되어 생계가 그토록 힘든데 7순 노인에 대한 동네 인심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여선교회원들이 다시 찾아가 할머니를 만났는데 방에 들어가보니 듣던대로 생활이 형편없고 아들들을 위해 윗방에 천신(天神)숭배단을 만들어놓고 지성을 드리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편견을 가지거나 하지 말고, 이웃 집에서 무슨 욕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말고 내 어머니처럼 여기고 월동에 필요한 것을 정성껏 마련해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애타게 어머니 걱정하며 지내는 0 0 0 형제에게 걱정하지 말고 빨리 출소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건강하게 지내도록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들이 아무리 죄질이 나쁜 죄수라해서, 할머니가 우상숭배한다해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우리 속에 거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죄일지라도 용서하시고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 미쳤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우상숭배하는 사람에게도,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에게도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죄의 질을 구별하여 차별된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널리 증거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의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동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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