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가인과 아벨의 신앙(예배)! (창 4:1-7)
<이솝우화> 고슴도치 한 마리가 살 곳을 찾아 헤매다가 구렁이가 살고 있는 굴을 발견하고 함께 살자고 애원을 했습니다. 구렁이는 별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불쌍히 생각하고 고슴도치의 청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고슴도치가 굴속에 함께 있으니 그 몸의 가시 때문에 구렁이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구렁이가 '고슴도치씨! 미안하지만 거처를 옮겨 주세요, 따가 와서 도저히 함께 지낼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그러자 고슴도치는 화를 내더니 '내가 싫거든 당신이 나가시오, 나는 이곳이 좋소!'하면서 막 우겨댑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사단은 우리를 유혹하여 일단 문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끝내는 우리를 자기의 종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러므로 미리 미리 틈 못 타게 우리 믿음의 양심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아멘!/
▶오늘 창4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으로 갈라지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으로 갈라지게 만듭니까? 학식이었습니까? 점수를 매겨서 60점 이상과 이하로 나눈 것일까요? 아니면 인간적인 노력을 보고 열심히 뛴 사람과 게으른 사람으로 나눈 것일까요? 아니면 얼마나 뛰어난 인간관계를 가졌나를 보고 나눈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버림받은 백성을 나누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예배'였습니다. 결국 예배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백성과 버림받는 백성의 판가름이 났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도 어디서 갈라지냐하면 바로 예배에서 갈라집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시고 열납하셔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예배에서 인생이 결정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미래, 여러분의 능력, 여러분의 축복이 어디에 달려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 하나님이 축복하는 교회, 하나님이 역사하는 나라가 되는 비결도 모두 이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 있으면 그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 있는 나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반면에 예배가 죽은 교회는 이미 망한 교회요 예배가 죽은 나라는 미래의 소망이 없는 절망 가운데 있는 나라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예배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예배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소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땀을 흘리며 수고를 해서 얻어진 것으로 가정을 이끄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인은 '얻었다'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뜻입니다. 또 얼마 후에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벨은 '비었다. 공허하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아벨의 이름을 지으면서부터 벌써 그 아들의 운명을 알았을까요? 어째든 둘째 아들은 아벨입니다.
그 후에 세월이 흐른 다음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이었으므로 땅에서 얻은 소산(농작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기 때문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웬일인지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이 드린 제물만 열납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의문을 제시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셨을까요? 이것은 굉장한 의문입니다.
당시 제사가 지금의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도 어떤 성도의 예배는 받으실 것이고, 어떤 성도의 예배는 안 받으신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기독교의 모든 축복은 예배로부터 얻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이 외면하신다면 이것은 엄청난 비극이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예배드리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조금 후에 제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본문 속에 가인은 우리가 얼른 생각해 보면 농부니까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또 아벨도 목자니까 양으로 제사를 드렸으니 둘 다 자기의 처지에서 합당한 재물을 드린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자기들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가인의 제사는 피가 없는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외면하셨고, 아벨의 제사는 피가 있는 제물이기에 열납하셨다고 말합니다. 먼저 1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밭을 갈고 수고하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여자의 후손이 오신다는 것을 믿었고, 가죽옷의 은혜로 구원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마 이들은 많이 반성하고 하나님께서 하라 하신 대로 땅을 파고 일구어서 가정을 지켜 나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결코 내가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마음대로 자녀를 낳기도 하고 지우기도 합니다. 생명은 내가 낳고 싶다고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낳는 것입니다. /믿/
'동침하매' 여기 '동침한다'는 표현은 '야다'라는 말로 '알다'는 표현입니다. 정신 적으나 육체적으로 상대방을 안다는 뜻입니다. 즉 체험해서 안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로부터'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히브리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은 사람의 힘으로 원한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믿/
그러므로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시127: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여러분 모든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기 때문에 그 주신 분의 뜻대로 키워야 합니다. /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좋은 학교를 보내고 많은 재물을 자식에게 물려준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학벌보다 재산보다 더 귀한 것은 신앙입니다. /믿/ 기도하는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순간 잘못 갔더라도 깨닫고 돌아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내 아들' 하면서 가인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습니다. 다음 2절을 읽겠습니다.
▶2절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벨의 뜻은 '허무하다, 공허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가인을 키워 본 경험에 의해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나 봅니다. 가인을 낳고 보니 너무 좋아서 '아! 기쁘다. 훌륭하다. 희망적이다.'하고 큰 기대를 걸었는데 막상 가인을 키우면서보니 역시 아담 자기를 닮았습니다.
여기서 아담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믿음대로 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자녀들은 아무리 귀해 보여도 아담의 원죄 성을 유전으로 받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정말 귀엽고 순진하고, 천사 같은 아이라 할지라도 역시 아담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기도를 등한시합니다. 우리는 자식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유아 세례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세례는 원래 죽었다. 다시 사는 표를 받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어린아이들에게는 판단력과 바른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없으므로 부모가 대신 '이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소망이 없으니 이 아이를 예수 믿도록 키우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부모가 서약을 하고 기도하며 길러야 합니다,
유아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 아이가 천사 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의미입니다. '이 아이를 예수 믿도록 잘 키우겠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로 키우겠다는 약속으로 유아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아담이 가인을 길러보니 '인간은 별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순진해 보여도 욕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는 아무 소용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아예 아벨 '허무하다. 공허하다'로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가인은 큰 실망을 남겨 주었고,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아벨은 훌륭한 신앙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한 말이 틀림없습니다.
본문은 아벨이 '양치는 자'라고 했는데 그때는 양고기를 먹지 않는 때입니다. 동물의 고기는 홍수가 난 후부터입니다. 홍수 이전은 채소와 곡식과 과일을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육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채식을 주식으로 했을 때 인간의 생명이 오래 살았는데 육식을 먹고 난 다음부터 수명이 짧아졌습니다. 아벨이 양을 쳤다는 것은 양털로 옷을 지어 입었고, 우유를 먹었겠지만 더 귀한 의미로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의 재물을 드리기 위해서 양을 길렀다고 추측합니다. /할/
한 마디로 아벨의 삶 전체가 신앙 중심으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수 있을까?'만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신앙적인 양심입니까? 그런데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라고 했습니다.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물론 잘못은 아닙니다.
▶3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세월이 지난 후에' 문학적 의미는 '날들의 마지막에,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학자는 '수확할 때가 되어'로 해석을 했습니다.
'소산'은 '과실, 열매'란 뜻으로 땅에 씨를 뿌려 거둬들인 알곡의 '수확물'을 의미합니다. 여기 '제물'은 히브리적인 음으론 '마나'인데 '선물로 삼다'에서 파생된 말로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감사와 충성을 상징하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풀어보면 곧 추수기가 와서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가지고 있는 향유 옥합을 드렸고, 사르밧 과부는 기름 한 방울과 밀가루 한 움큼을 드렸으며, 어린아이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덩어리를 받쳤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드릴 때 하나님의 축복은 임하게 됩니다. /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가인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인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하시는가? 제사의 목적이 뭐겠습니까?
▶여러분! 구약에서 제사의 목적을 3가지만 기억합시다.
①알현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알현은 신하가 왕 앞에 자기의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은혜 중에 이렇게 잘 지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날이 되면 부모님을 찾아가 뵙습니다. 왜?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해하시는 그 분들 앞에 제가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 모습을 보여 드림으로써 그 분의 마음을 안심케 하고 그것이 그분들에게 최고의 예의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알현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어디 있는지 무엇 하는지 우리 형편이 어떤지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알고 계시지만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나와서 '하나님 은혜로 제가 이렇게 잘 지냅니다'하고 내 마음을 드리는 것이 제사(예배)의 목적이고 알현의 개념입니다. /할/
②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왕을 알현하려면 절대 빈손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황금을 가지고 알현했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죄인이 그냥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③교제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과 막힌 담이 헐어지고 참다운 교제 속에서 감사와 감격이 있고 축복을 받고 그 은혜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예배)의 목적이요 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입니다.
▶롬12;1-2절에서 ▶신약의 예배의 유익을 세 가지로 바울 사도는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①마음이 새로워집니다.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혀를 깨물어도 안됩니다. 영적인 새로움(거듭남)이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살아있는 예배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②변화를 받습니다. 새로워진 증거입니다. 삶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환경이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 그런데 나는 예배를 오래 드렸는데 날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 다녔는데 왜 안 변했을까? 이유는 명백합니다. 가인처럼 예배를 드리면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혈기부리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누구는 권사세우고 왜 나는 안 세워! 내가 권사 감이 안 된다고 웃기네' 그러면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할/
③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뭐다. 내가 주 앞에서 해야 할 일이 뭐다. 생의 목적'을 바로 세웁니다 그리고 그 복된 길로 걸아 가게 해줍니다. 이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할/
요즘 말로 말하면 가인은 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물을 드리고 예배당에 와서 앉아는 있었으나 제물보다 귀중한 자기 자신(지정의의 인격)을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믿/
그러나 아벨은 제물 뿐 아니라 아벨 자신도 드렸습니다. 이것은 중심문제입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기뻐하실까?' 찾고 구별하고 생각하여 성심 성의를 다해서 구별된 것으로 제일 좋은 것, 제일 처음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도 자신은 드리지 않았고, 정성이 없는 제사였습니다. 그 제사에 자신을 담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생각대로 드렸지 '하나님을 생각함이나, 하나님 경외함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4-5절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오늘 본문 속에서 가장 생각해 보아야 할 구절입니다. 여기 '첫 새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벨이 거둔 첫 소산이란 점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받쳤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출13:2). 또 하나는 '희생제물이란 점에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산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 것'이라 귀합니다. 창3:21절에 나오는 '가죽 옷'은 원 복음입니다.
여기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드렸다고 강조합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낳자마자 '이것은 하나님께 받치자'고 마음먹고 그 양을 키우는데 온갖 정성과 사랑을 드려서 바치기까지 잘 관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의 소산으로 드렸다고 말했을 뿐 그의 소산의 첫 것, 혹은 잘 익은 것으로 드렸다는 말이 나와 있지를 않습니다. 한마다로 정성이 없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물은 정성으로 드려야 합니다. /아멘!/
'그 기름으로' 여기 '기름'이란 '살찌다'란 단어에서 파생된 말로 '기름진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아벨은 양의 첫 새끼 중에서도 모든 양들 가운데 가장 살찐 기름진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고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는 최상급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 '열납하였으나'에서 '열납'은 '주목하다. 존경하다'라는 뜻으로, 즉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재물이므로 기쁘게 받아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아벨은 형보다 나은 제물을 드린 사람입니다. 히11: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칭찬해 주시는데 형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이런 칭찬을 하신 것입니까! '그 예물을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라는 말씀대로 예물을 보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무슨 말인가? 처다 보지도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 재물에 대해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아니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인생도 실패합니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은 결국 살인자가 됩니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기쁨이 사라지고 근심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속이 편치 않다는 말입니다. 기쁨이 없는 삶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아벨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이 분노는 아벨에 대한 질투 때문입니다. 가인은 믿음도 없이 정성도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껍데기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껍데기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본문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가인처럼 드리지 말고 아벨처럼 드리라는 교훈입니다. 지금 가인은 자기분수는 깨닫지 못하고 질투하고 있습니다. 질투는 비교의식에서 생깁니다. 질투는 무섭습니다.
▶어떤 수도사가 혼자 광야 길을 걸어가고 있었답니다. 그는 너무도 인격이 훌륭하고 경건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는 살아있는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그 날도 홀로 걸어가는 그 뒤를 따라서 마귀가 그를 시험했습니다. 예쁜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동행하면서 유혹하기도 했고 명예와 돈을 많이 주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말에 개의치 않고 의연히 자기의 갈 길만을 걸어갔습니다.
초조해진 마귀는 수도사 맞은편에서 말 타고 달려오는 신부로 변장을 해서 마침내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수도사님 당신의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그렇게 평안하고 초연했던 수도사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질투가 끓어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성자의 마음속에도 질투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일의 영적 지도자인 '바실레아 실링크'는 '질투란 인간 속에 있는 가장 보편적인 감정이며 가장 깊은 죄의 배후 세력이며 그러므로 이것을 빼버리지 않고는 참다운 평화와 기쁨을 결코 맛볼 수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인과 아벨은 제단을 쌓고 그곳에 재물을 올려 드리는 예배의식을 베풀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드리면 불이 내려와 그 재물을 확 사르시면 열납이 된 것이고, 불이 내려와 사르지 아니하면 열납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제물에는 불이 내려와 열납했는데 가인이 드린 제물은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의 예배를 보시고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아니하시는 예배가 있다는 사실에 꼭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①먼저 제사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⑴하나님과 직통으로 대면할 때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기 이전에 입니다. 이때는 제사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에덴에서 추방당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뵈올 레야 뵈올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⑵가인과 아벨 이후에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8:20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⑶모세 이후에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출25장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 짓는 법을 세밀하게 가르쳐 주시고 이제 그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해서 제사장들과 만나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 이후 성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 주셨습니다.
⑷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행2장은 오순절 이후부터 교회에서 하나님과 예배를 통해 교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②제사에는 두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⑴인간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죄 사함을 얻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죄 사함을 얻기 위한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시34: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⑵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속죄해 주신)에 대한 응답의 표현입니다. 속죄를 위한 제사는 의무적인데 반해 응답으로써의 제사는 감사와 감격으로 자발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③그렇다면 예배의 바른 이해는 무엇인가?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은 철저히 예배자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순례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다가 저 천국에서는 영원한 예배를 드리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순간까지도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⑴경배입니다. 시138:2절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할/ 예배의 뜻을 영어 성경에는 '가치를 돌린다. 숭배한다. 인정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숭배하고 존경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로 경배를 드리며 그 모든 이름 위에 높으신 성호를 경배한다고 고백합니다. 시29:1-2절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아멘!/
⑵섬김입니다. 마4:10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섬기라 하였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유일하신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한마디로 예배란 우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만 왕의 왕으로 섬기는 행위를 뜻합니다. /믿/
⑶드림입니다. 이 드림은 헌신이 요구됩니다. 히11: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예배는 먼저 기본적으로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주로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마음의 중심을 드려야 합니다. 세리처럼 회개하는 마음을 드려야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고 사랑하는 마음, 충성하는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마22:3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가장 승화된 감정의 발로이며 예배의 예술적 표현입니다. /할/ 엡5:19절에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할/
㈂몸을 드려야 합니다. 롬12: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러분 여기서 몸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육체로 할 수 있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 직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적 봉사환경이 다 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재물도 드려야 합니다. 레22:20절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예배에 있어서 헌금은 은혜의 보답입니다. 또 감사와 헌신과 희생의 표시이고 충성심의 외적 상징으로서 예배 가운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느니라' /할/
㈄순종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삼상15:22절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믿/할/
오늘 본문의 아벨은 예배의 원리대로 예배의 뜻대로 드렸기에 하나님이 기쁘시게 열납하셨고, 가인은 이 원리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에 응답 받지 못한 것입니다.
④아벨의 제사를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⑴하나님은 먼저 아벨의 인격을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보다는 먼저 제사를 드리는 아벨의 마음을 열납하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마음 없이 드려지는 형식적이요, 요식적인 예배행위는 가인의 제사가 됩니다.
잠15:8절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할/ 하나님은 재물을 받으실 때, 재물의 종류와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 드리는 자의 마음 자세를 보십니다. 또 하나님은 속성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를 따르지 않은 재물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5:23-24절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우리가 먼저 갖추어야 할 자세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저와 여러분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아멘!/
육신은 의식주 세 가지가 중요하지만 영혼의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는 사람이 사는 방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인간의 목적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는 방법보다 사는 목적이 더 중요합니다. '육신보다는 영혼이, 물질보다는 생명이, 이 세상보다는 영원한 저 하늘나라 저 천국이 더 중요'합니다. /믿/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행복한 성도들은 다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대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마7: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또 마18장에서는 형제의 죄를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⑵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히11: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은 믿음을 굉장히 중히 여기십니다. 히11:6절에서 '믿음을 가장 기쁘시게' 여기셨고 롬14:23절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⑶아벨은 첫 것을 정성껏 드렸습니다. 여기 첫 것은 으뜸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첫째 되고 가장 최선의 것을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의 예배를 보십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드리는 제사를 흠향하십니다. 예배드리는데 졸기나 하고 세상 생각이나 잔뜩 하다가 가면 정성 없는 가인의 제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⑷아벨은 피 흘리는 재물을 드렸습니다. 레17: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벌써부터 아벨은 이 땅의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바라보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귀한 예배의 정신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예수 믿고 구원받았고, 신약의 성도들은 오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
⑸아벨은 마지막에는 자기의 생명과 피를 순교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축복입니다. 형과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지 않고 형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면서 형의 손에 맞아서 순교자처럼 죽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마치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처럼 또는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처럼 아벨은 형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 보이면서 고귀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는 하나님께 상달된 피 제사가 되었습니다. /할/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기 전에는 제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고 난 뒤에 짐승을 잡아서 죽이시고 그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범죄한 인생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로 인생을 구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양이나 소의 피로 구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로 인생을 구원하신다는 이 구속의 역사에 대한 깨달음을 이미 아담에서부터 주신 것입니다.
가인은 종교적인 행위를 한 사람이요, 아벨은 하나님의 구속을 안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제사문제에는 단호하십니다. 히9장에서 '피 흘리심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아벨은 양을 잡아 피를 부리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스스로 양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아담을 입히신 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도 제사는 반드시 양을 잡아서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구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속 이후에는 제사가 폐하여진 것입니다. /할/
⑤가인의 제사는 왜 안 받으셨을까요?
한마디로 믿음이 없고 의가 없고 정성이 없는 인간행위적인 제사를 드렸기에 그렇습니다. 또 그의 인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가인의 인격은 어떠했는가? 요한일서3:12절에 가인의 인격에 대하여 말하기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인의 '행위'라는 말입니다.
이 제사는 바로 그의 인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거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가증한 제사를 드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가인이 깨닫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자신을 돌아보고 새롭게 변화를 입어야 하는데 오히려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 차서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행위요, 바로 그의 인격입니다. 그 인격을 한번 보겠습니다.
▶6-7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에덴의 동쪽 끝까지 하나님은 죄인을 찾아 오셔서 물으십니다. '가인아! 네 얼굴이 왜 그렇지 지금. 왜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느뇨?' 하나님이 몰라서 묻습니까? '그 이유는 내가 알지 않느냐? 너한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더냐? 네가 바르고 진실한 제사를 드렸다면 내가 받지 아니하였겠느냐?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으면 '하나님 죄송합니다.' 그러고 또 드리면 되는 것이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으면 아벨이 왜 영접되었는가를 보고 그렇게 따라 가면 되는 것이지 '왜 저놈은 없어져야 된다'고 이를 갈고 있는 것이냐? 네 마음속에 죄가 있구나? 지금 죄가 짐승처럼 너에게 달려들려고 네 앞에 웅크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 죄를 다스려라 그렇지 않으면 큰 죄짓겠다'고 하나님이 경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경고를 받았으면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는커녕 동생을 투기하고 오히려 분을 냈습니다. 이 분은 아벨에게도 해당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분을 냈으니 그 제사가 열납이 되겠습니까?
'선을 행치 아니하면' 이 말은 '잘못을 뉘우치고 선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더 완악한 마음을 갖는다면'이라는 뜻입니다. 방귀뀐 놈이 성내는 이치입니다. 또 여기 '엎드리느니라'는 말은 '잠복하다, 꾸부리라'라는 뜻으로 '먹이를 단숨에 낚아채기 위해 웅크리고 있는 짐승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로,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말을 사단이 인간의 마음에 곧 심령에 침입하여 악으로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호시 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이 말은 '죄짓고 안 짓고는 네 마음대로나'란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벧전5:8-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은 '너는 죄에게 지지말고, 죄에게 삼킴을 당하지 말고, 도리어 죄를 지배하고 정복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멘!/
여러분!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능력은 예배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옵니다. 빌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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