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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의 신앙! (살전 5:19-24)

by 【고동엽】 2022. 1. 22.

삼불의 신앙! (살전 5:19-24)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는 신앙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6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삼행의 신앙이고 삼불의 신앙입니다.
이미 삼행의 신앙에 대해서는 말씀드렸습니다. 삼행의 신앙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기본이고, 본질이고, 원리입니다. 이를테면 이 삼행의 신앙은 "하라"는 적극적인 신앙의 형태를 제시해 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은 삼불의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 해서는 안 되는 것 즉, 이번에는 "말라"는 신앙 형태의 제시입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들의 삶에 임재하셔서 감동하시고, 감화하시고, 직.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십니다. 신앙인은 이 성령의 인도에 순응하고, 따르고, 용납하고, 지배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소멸"이라는 말은 헬라말로 스벤뉘테입니다. 이 말은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민하게 접근을 했습니다. 아주 무절제했고, 혼잡했고, 은사 중심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광신적인 교회였고, 영적으로 교만해서 결국에는 영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도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감동은 있고, 열정은 있는데 그 대신 의지력이 없습니다. 매사가 감정적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도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순간 뜨거워지고, 순간 식어지고 해서 자기 조절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깊이 있는 신앙으로 발전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각종 은사도 많았지만 문제도 많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너무 성령의 활동을 배제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이 냉랭했고, 이론적이었고, 매우 논리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뿌리는 있고, 뼈대는 있어서 좋은데, 대신 그 신앙은 힘이 없고, 용기가 없습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형태에서 이 두 가지는 극과 극입니다. 이것은 둘 다 좋지 않은 형태입니다. 지나친 은사 중심 신앙도 좋은 것이 아니고, 지나치게 이론적인 신앙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성적이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야 합니다.
사실 성령은 그렇게 요란하게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에게 뜨겁게 임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성과 이성에 변화를 주시는 것으로 임하시고, 소리 없이 조용하게 영향을 미쳐서 속에서부터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이 감각에 예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감동을 의식하게 되고, 느끼게 되고, 그 감동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이 이 감성에 둔하면 무감각해집니다. 전혀 느낌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감화를 받는 신앙 생활은 할 수가 없습니 .
엘리와 사무엘은 한집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지만 똑같은 시간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사무엘은 듣고 벌떡 일어났는데 엘리는 둔감해서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잠을 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신앙인으로서는 불해애집니다. 그 결과 엘리는 끝내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너무 집착해서 살게 되면 이렇게 영성이 무더지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이 와도 무감각해집니다. 느낌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집니다. 순 인간적인 말만 나오게 되고, 인간적인 행동만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인으로서는 실격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기를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분부하시는 "말라"는 신앙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에 의한 판단보다도 인간적인, 이성적 판단을 우선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예언도 무시하게 되고, 나중에는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이렇게 예언을 멸시하게 되면 나중에는 예수의 재림 교리까지도 흐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이미 생명을 상실하고, 내용을 모두 버린 껍데기 신앙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자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예언은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그 계획 속에는 경고가 들어 있고,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을 무시하게 되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인간 자신입니다. 성경 중에서 예언서를 보십시오. 그 예언 속에는 모두 장래에 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미래를 잃게 됩니다. 이렇게 예언을 멸시하고 무시하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제2차 대전 때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비행기로 경고 전단을 뿌렸습니다. "1945년 8월 6일 낮 12시에 히로시마시에 원자탄을 투하하니 시민들은 모두 50㎞ 밖으로 대피하라"고 일주일 전부터 경고 전단을 살포했습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이를테면 이것이 예언이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될 일을 미리 알리는 선포입니다.
그 경고의 글 속에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살 길에 대한 안내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결국 자신들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손해뿐만이 아니고 죽습니다. 이보다 더 절박한 메시지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은 마땅히 이 네시지를 믿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보다 더 중요한 예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단을 받아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예언을 무시했습니다. 비웃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믿지 못하고 반신 반의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 메시지를 읽고 나사 그대로 믿고 대피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메시지를 믿었던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1945년 8월 6일 정오, 약속대로 예언대로 원자탄이 히로시마시에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뻔쩍 하면서 단 3초 동안에 3천도의 열을 동반한 원자탄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히로시마시의 30만 인구 가운데 20만 명이 순간적으로 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두 핵방사능 때문에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언을 멸시치 마라.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이 없다고 하나, 보라,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이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라." 언잰가는 예언 그대로 주님은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예언의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반신 반의하거나 비웃거나 무시하면, 어느 날 히로시마시에 원자탄이 터져서 모두가 멸망했듯이 그렇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선해지는 것보다 악해지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사람이 선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하고,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악해지는 데는 수고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악해집니다.
사람이 악하게 변하는 데는 환경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와 자주 어울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주위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맹모 삼천지교라고 했고, 맹모 단기지게라고 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묘지 근처로 이사를 했더니 아이가 날마다 장사지내는 흉내를 내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더니 아이가 매일 장사하는 흉내만 내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서당 근방으로 이사를 했더니 비로소 공부하는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악해지는 데는 이 환경이 주는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또 사람이 악해지는 데는 무감각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괴롭기도 하고 번뇌스럽기도 하지만 조금 있으면 그것도 무뎌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다 주일에 예배를 한 번 빠져 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괴롭습니까? 금방 벌을 받을 것 같고, 불안하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두 번 빠지고 세 번 빠져 보십시오. 그런 대로 익숙해집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만 주일 빼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늘 불안해 보십시오. 주일 예배에 어쩌다 한 번 빠져도 자꾸만 빠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처음에 연애를 할 때는 마음이 짜릿하고, 스릴도 있고, 황홀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또 마음이 달아오르기도 하고, 얼굴이 흐끈거리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헤메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보십시오. 얼마나 짜릿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손을 두 번 잡고 세 번 잡다 보면 그게 없어집니다. 덤덤해집니다. 그리고 매일 손을 잡다 보면 나중에는 무감각해집니다. 그렇게 몇 년을 함께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밋밋해집니다. 그때는 잡으나 마나입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사람이 악해지는 경로가 그렇습니다. 처음에 죄를 짓게 되면 겁이 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두근두근거립니다. 잠이 오질 않습니다. 머리가 복잡한 생각으로 번뇌스럽습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덤덤해집니다. 무감각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또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날이 갈수록 더 큰 죄를 짓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을 죽이는 사고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집어 넣으면 순간 펄쩍 튀어나옵니다. 왜냐하면 자극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개구리를 아무 저항 없이 고스란히 삶아 내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솥에다 찬물을 붓고 그곳에 개구리를 넣으면 가만히 있습니다. 그때 솥 밑에다 불을 서서히 지피면 물이 조금씩 데워집니다. 그러면 이 개구리들이 따뜻한 물에서 기분 좋게 헤엄치고 다닙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 개구리들이 따뜻한 물 속에서 기분 좋게 놀고 있는 동안 무감각해진다는 것입니다. 물이 뜨거워져도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 개구리들이 아무 저항 없이 고스란히 삶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악을 버리라"하는 식의 직접 화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는 한은 악은 저지르지 않습니다. 개구리가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수간 튀어나오듯이 사람들에게도 죄가 분명하게 다가오면 순간 뒤로 물러섭니다. 그것은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다 무서운 것은 사람을 저항 없이 죄로 물들게 하는 주위의 환경입니다. 그 환경은 사람들을 소리 없이 점령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악은 선보다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이 선해지기보다는 선한 사람이 악해지기 더 쉬운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선한 행동은 배우지 않고 나쁜 버릇은 아주 쉽게, 힘들이지 않고 배웁니다. 왜냐하면 선보다 악이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앵무새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 앵무새가 욕을 잘했습니다. 주인이 이 못된 버릇을 고쳐 보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윗집의 앵무새는 노래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이 주인이 욕을 잘하는 앵무새를 가지고 이웃 집에 가서 주인에게 노래 잘하는 앵무새와 하루만니라도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욕하는 앵무새도 노래를 배우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욕 잘하는 앵무새가 노래 잘하는 앵무새와 하룻밤을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그렇게 노래를 잘하던 앵무새도 욕을 하더라고 합니다. 악은 이렇게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이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삼불의 생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령을 소멸해서는 안 됩니다. 순간마다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화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언을 멸시치 말아야 합니다. 예언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경륜이 들어 있습니다.
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참고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모양은 결국 사람을 물들게 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이 탈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특히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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