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행의 신앙! (살전 5:16-18)
본문은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애송하고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본서의 요절과 같은 말씀이고,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이 말씀은 해석하기가 어려운 말씀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이 말씀은 간단하고 쉬운 말씀같이 보이지만 막상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하면 그리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설교를 하면서도 이 말씀은 현실 생활과는 많은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본문에서는 세 가지를 분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흔히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삼행의 삶이라고 하고, 삼행(三行)의 신앙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말씀은 간단한 말씀 같지만 깊이 음미해 보면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냥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라고 했으면 경우에 따라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면 될 것인데, 말씀 앞에 한결같이 어려운 조건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는 것과, 기도하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과,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라는 아주 어려운 조건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승천 후 24년이 지난 뒤에 쓰여진 말씀입니다. 그때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많이 받았던 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수난을 당하고, 동물들에게 찢겨 죽임을 당하고 무자비하게 순교를 당하던 그런 때입니다. 이렇게 박해를 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 말씀으로 격려를 했습니다.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고, 수모를 당할지라도 기쁨을 잃지 말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항상 기뻐하라는 분부입니다.
여기 보면 "항상"이라는 부사에 악센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기뻐하되 "항상, 언제나"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즉 기쁠 때만 기뻐하지 말고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기뻐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그리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격이 덜된 사람일수록 어려운 생활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좋을 때만 기뻐합니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입니다. 어른도 덜 성숙한 사람은 이것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어른이지만 어린 아이처럼 울고, 웃고 그럽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아직 미숙해서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신앙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좋을 때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이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일 때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날 밤에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눕니다. 내일 새벽이면 예수님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자기를 팔 제자 가룟 유다가 그곳에 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감정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지금 심정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만찬을 마치고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올라가십니다. 그 길은 결코 유쾌한 길이 아닙니다. 기분이 좋은 그런 등산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마26:30)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찬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찬미와 그 기뻐함이 바로 종교적인 힘이고, 신비한 능력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찬미했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도했고, 스데반 같은 이는 순교를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종교적인 삶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분부입니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고 동시에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순간마다 숨쉬면서 목숨을 이어가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지금 이 시각 삶을 이어가는 소중한 호흡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기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어떤 특정한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새벽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산에 가서만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정해진 시간에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기도는 그 시간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나 버릴 수 있습니다. 조지 뮬러는 "아멘 후의 15분이 기도의 시금석"이라고 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만 하는 기도는 아멘으로 기도를 마치고 15분이면 그 마음이 그만 흐려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일정한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계속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긴장을 풀지 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느 순간 긴장이 풀리면 그 순간 방심하게 되고 허점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사탄이 틈을 타게 됩니다.
역사를 보면 전쟁이 일어나는 그 시점이 바로 이같이 허점이 있을 때입니다. 6,25가 발발한 그 시간도 일요일 새벽 시간입니다. 모두가 허리띠를 풀고, 긴장을 풀고 늦잠을 자는 그런 시간입니다.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그런 시간에 허를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수 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생으로 말하자면 이 시간은 중년의 시기입니다. 중년의 시기는 방심의 때입니다. 이때는 고생도 끝나고, 사회적으로 지위도 중견의 자리에 올라 있고, 경제적인 여유와 시간적인 여유가 주어진 때입니다. 그래서 방심도 하고, 탈선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년 신입 사원들은 방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긴장된 생활이 연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중년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도 중년의 때가 되면 제2의 사춘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고 허탈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젊었을 때는 아이들이 어리니까 키우고, 뒷바라지하고, 입시와 집 장만하는 일에 골똘해 있어서 초긴장을 하면서 살아가는 때입니다. 그때는 잡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년이 되면 아이들이 다 자랍니다.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삶에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면 이때부터는 잡념에 시달리게 됩니다. 거울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늙어 버린 모습을 발견하는 때가 이때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누구 때문에 살고 있는가"라는 자탄에 빠지게 됩니다. 그 잡념이 사람으로 하여금 우울증에, 허탈감에 빠져 버리게 만듭니다.
사람이 긴장을 하면서 살고, 열심히 살아갈 때는 이런 생각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때는 그럴 만한 여유, 그런 사치스런 생각에 사로잡힐 여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삶에 여유가 생기고, 긴장이 풀리고 나면 별별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를 "제2의 사춘기"라고 하고 또 "사추기"라고도 말합니다.
다윗이 중년, 바로 이 시기에 실수를 하고, 탈선을 하고, 위기를 맞습니다. 솔로몬도 중년에 실수를 합니다. 솔로몬은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 일천 번제를 드릴 만큼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참신했고, 경건했고, 건전한 정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중년에 접어 들면서 나라가 안정이 되고, 국력이 신장되고, 명성이 널리 펴지면서 방심하기 시작합니다. 환락에 침륜하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솔로몬은 왕비만도 700명이나 되었고, 비빈이 300명, 후궁은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온전했겠습니까? 결국 그 나라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항상 영적으로 긴장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6:18을 보면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되 박해의 시기에는 박해 시대대로 기도하는 생활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세속의 시대를 살 때는 세속의 시대대로 기도하는 생활이 됫받침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셋째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분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범사"란 말이 묘한 말씀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모든 경우에, 어떤 경우든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익이 주어졌을 때는 물론이고, 손해를 보았을 때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미에 가서는 꼭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좋은 소식을 들어도 "감사합니다" 했고, 나쁜 소식을 들어도 "감사합니다."하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감사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밤 예배를 드릴 때 불자동차가 요란하게 지나갑니다. 그때 이 할머니는 누구 집에 불이 났구만 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 동네 한가운데서 불타고 있는 집을 살펴보니까 그 집이 바로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집이 불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이 할머니는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말해야 할텐데 그만 그 자라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나무 아미타불"했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그래서 어려운 말입니다. 그것은 연습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흉내내서 되는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 속에 살아가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같이 공부한 어느 목사님의 고백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분에게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딸 아이가 고1 때 간경화증에 걸려서 않다가 고3이 되었을 때는 병세가 악화되어서 전신 마비가 되어 눈만 깜박일 뿐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여고 3년생". 이 얼마나 소망 있는 시절입니까? 그런데도 이 딸은 소생이 불가능한 채 누워만 있습니다.
아버지는 세 딸을 모아 놓고 밤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이 딸을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하루는 자신의 삶이 너무나 한스러워서 막내딸에게 물었습니다. "너에게 감사한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 그랬더니 "나에게는 감사한 이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둘째 딸에게 물어 보아도 "우리 집은 불행한 일만 있다"고 대답을 합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감사함보다는 불행한 일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큰딸에게는 차마 "네게도 감사한 일이 있느냐"하고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감사한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인생이 저주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기도 할 말이 있다고 눈을 껌벅거립니다. 이 아이가 의사 표시를 하는 방법은 오직 눈을 껌벅거리는 것뿐입니다. 동생이 재빨리 "가나다라마바사...." 하면 큰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가서 눈을 껌벅거립니다. 그래서 그 말들을 이어 놓으면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어 놓은 말이 "하나님, 나에게 믿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기만 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그때 이 아버지는 감격스럽기도 하고, 그 아이가 불쌍하기도 해서 아이를 얼싸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 얼마 못 가서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죽은 후 장례를 치루고 묘비를 만들어 세워 주었는데, 그 묘비에 그 글을 써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믿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이렇게 위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신아은 비참한 지경을 오히려 이렇게 감사함으로 이겨 나가게 하는 위대한 힘을 줍니다.
믿음이 없이 살고, 신앙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짐승과 같습니다. 이런 은혜와 은사 그리고 축복이 약속되어 있어서 믿기만 하면 준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거부하고 산다면 그것은 짐승입니다. 이 얼마나 인간을 위대하게 하고, 능력있게 만들어 주고, 품위 있게 만들어 주는 삶의 요소입니까?
오늘 같은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삼행의 신앙 즉, 삶의 절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하는 삶이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그런 생활 속에 성령의 감화가 있고, 그 감화 속에서 승리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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