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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思慮)하는 존재! (롬 7:19-25)

by 【고동엽】 2022. 1. 22.

사려(思慮)하는 존재! (롬 7:19-25)

 


오늘 설교 제목을 "사려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늘 생각하고, 근심하고, 염려가 많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입니다. 사람들은 그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품을 통해서 바로 자기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몇 분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분은 젊은이인데 그 젊은이에게서는 아주 고민스러워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큰 뜻을 품고 어느 회사에 갓 입사한 청년이었는데 꿈을 가지고 회사에 들아가 보니까 이것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더라는 것입니다. 현실 세계가 너무나 부도덕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고민입니까? 청운의 꿈을 가지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가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진한 청년의 마음에 현실이 주는 괴리감이나 갈등이나 고민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그래서 그 청년과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그의 얼굴을 연민의 정을 가지고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젊은이가 저렇게 때묻지 않은 깨끗한 마음과 가슴을 가진 채 세상을 살아가야 정상인데, 오늘 이 현실은 얼마나 저 젊은이를 더럽힐 것이고, 무디게 만들 것이고, 또 고민하게 만들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입시생의 부모였습니다. 그분은 지금 아들이 3수를 하고 있는데 살기가 이렇게 고달플 수가 없다고 탄식을 합니다. 한 마디로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말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입시를 앞에 두고서 괴로워 하고, 고민을 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밤낮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닌데 하고 느낀 것은 비록 그분만은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과연 사람은 이렇게 고민하고, 안타까워 하고, 후회하면서 살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디를 가나 한숨이 있고, 고민하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 소리가 들리고 그럽니다.

본문을 보면 거기에도 사도 바울의 고뇌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고뇌는 또 다른 차원의 고뇌입니다. 이 고뇌는 아주 근본적인 고뇌이고,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영적인 아픔이고 탄식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19절을 보면 "내가 원하는 바 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하고 탄식을 합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왜 자꾸만 악을 행하려는 마음이 내속에서 솟아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나는 선을 행하고 싶고, 의를 행하려고 하는데 왜 자꾸만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내 마음과는 반대로 죄를 짓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갈등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결론지어 10-21절에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느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고뇌에 찬 탄식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일생을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적어도 사람은 먹고 배부르다고 해서 그냥 살아지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분명 고민하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고민이 있고, 노인은 노인대로 고민이 있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고민이 있고,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모두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영육을 함께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특수한 존재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 머리는 하늘을 향하도록 창조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정신과 육체가 함께 만족을 얻으려고 하다 보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불균형 때문에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동물처럼 육신만 있다든지, 천사처럼 영만 있다고 하면 고민 없이 살 수 있을텐지만 우리는 육신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을 함께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도 아주 육신적인 사람은 또 고민이 없습니다. 어차피 육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고민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루 하루 먹고, 배부르고, 욕망만 채워지면 그런 대로 불만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플라톤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허리 이하의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짐승은 고민도 없고, 위궤양이나 소화 불량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아예 성자라고 하면 또 고민이 없을 것입니다. 성자는 세상과 아주 등지고 살기 때문에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쩌면 세상을 가장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성자도 산속의 성자는 성자 생활하기가 쉽습니다. 얼마 전에 불교의 지도자인 성철이라는 분이 돌아가셨을 때 언론에서 떠들썩했었습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과 격리되어서 등지고 살고, 처자식 잊어버리고, 혼자 산속에서 살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속의 성자는 쉬운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 속에서 살자니까 고민이 많은 법입니다. 우리들은 매일 같이 세속 한복판에서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냄새 맡으면서 살아가니까 어려운 것이고, 거기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니까 더 고민이 많고, 갈등이 이만 저만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대화를 나눴던 그 청년이 산속에서 산다면 그렇게 고민스러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은 아직 때가 묻지 않아서 깨끗한데 세상이 깨끗지 못하니까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몇 년 있으면 그런 고민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때가 묻고, 현실에 길들여지고 나면 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고민이기도 한 문제입니다.

 

둘째 사람은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뭔가를 위해서 행동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고민이 따르고, 고뇌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행동 강령을 제사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 주신 행동의 대강령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언제 고뇌하게 되고, 후회하게 됩니까? 그것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사람은 절대로 고민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 한 것을 하지 않으면 또 고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대로 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둘러보시면 지금 한창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지금 왜 고민을 하고 있는가를 한번 알아보십시오. 그러면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했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이 세상의 탄식은 대부분 그렇게 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이 괴로운 것이고, 불화한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반대로, 해야 되는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분도 있습니다. 사람은 의를 행하고 살아야 그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 의를 행하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 강령을 어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괴뇌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 안에 살면서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면 먼저 마음이 괴롭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또한 큰 일입니다.
사람은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힘이 있고, 평안하고, 자신감이 있고, 마음이 좋을 때는 바로 "할 일을 마땅히 했을 때"입니다. 사람이 떳떳하게 행동하지 못했을 때는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은 욕구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싶고, 입고 싶고, 우월하고 싶고, 나타내고 싶은 욕구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 욕구는 갓난 아이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배가 고프면 웁니다. 그리고 먹어서 배가 부르면 아무 소리 않고 잠을 잡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은 "사람은 욕구가 충족되면 좋아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불평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욕구 중에서도 가장 큰 욕구는 삶에 대한 욕구라고 합니다. 여러분, 중병을 앓는 분들을 보십시오. 삶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강합니까? 그래서 평소에 점잖던 분들도 그 지경에 이르게 되면 민망할 정도로 하루라도 더 살려고 하는 욕망에 집착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 고뇌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서 사형장으로 가는 사형수들도 가는 길에 흙탕물이 있으면 발에 물을 묻히지 않으려고 비켜 간다고 합니다. 어떤 여인은 실연을 당해서 비관을 하다가 강에 빠져 죽으려고 가는데 바람이 하도 차가워서 감기 들까 봐서 다시 집에 가서 목도리를 하고 가서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또 사람은 소유하려는 욕구도 대단합니다. 가진 사람은 더 가지려고 하는 욕구에 시달리게 됩니다. 누리고 있는 사람은 더 누리려고 하는 욕구에 시달리게 됩니다. 다스리는 사람은 더 많은 힘을 가지려는 욕구에 시달리게 됩니다. 높아진 사람은 더 높아지려고 하는 욕구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고, 고뇌하게 만들고, 때로는 후회하게 만들고, 그것이 또 올무가 되어서 고난을 겪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불화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때로 밤잠을 설치게도 만듭니다. 또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욕망 때문에 때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이 욕망이 크면 클수록 내 마음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싸움이 더 치열해집니다. 어떤 이는 욕망과 싸우느라고 탄식하고, 어떤 이는 야망과 싸우느라고 탄식하고, 또 어떤 이는 자기와 싸우느라고 고민하고, 사도 바울 같은 이는 이성이 죄성과 싸우느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고민하고, 고뇌하는 것입니다.

 

넷째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관계를 통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될 때 가장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 사이에 이 짝에 대한 웃지 못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삭개오가 이웃과 함께 관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웃들이 한결같이 외면을 합니다. 말을 걸지 않습니다. 비웃습니다. 업신여깁니다. 그래서 언제나 혼자입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대화의 상대가 없습니다.
억만금이 있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집이 대궐같이 크면 무얼 합니까? 높은 지위에 있으면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되어 있으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되면 죽음조차도 두려운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한때 법석을 떨었는데 이 관계가 불안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관계만 잘 되어 있으면 내일 세상에 종말이 온다 한들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칼빈이라는 신학자는 임종할 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한 말씀을 암송하면서 태연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어 있으니까 그 가는 길이 그렇게 편안한 것입니다. 이 관계가 잘되어 있으면 종말의 시간도 이렇게 편안하고, 이 관계가 좋지 않으면 별수없이 두려움 속에서 그 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기는 가야 하는데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이제 불가불 하나님 앞에 서기는 해야 되겠는데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종말의 순간을 맞이한 그 사람의 고뇌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욥기 22:21을 보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관계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고뇌하고, 근심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아픈 부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용 있는 삶을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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