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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의 어둠을 넘어, 용서의 빛으로 (눅17:1~4)

by 고동엽 2026. 4. 17.

 

실족의 어둠을 넘어, 용서의 빛으로 (눅17:1~4)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보다 깊고, 우리의 감정보다 높으며, 우리의 자기의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절에서 4절의 말씀은 짧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뒤흔들고, 공동체의 숨결을 살피게 하며, 우리 안에 감추어진 차가운 죄성과 아직도 십자가 아래 완전히 녹지 않은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 앞에 서면 우리는 먼저 안심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떨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여기서 세상을 향해 먼저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가 아니라,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 말씀을 꺼내 드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바깥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 교회 안의 문제를 다룹니다. 남의 악함을 지적하기 전에 우리의 언어, 우리의 태도, 우리의 영향력, 우리의 상처 주는 습관, 우리의 굳은 심령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시는 길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바리새인의 외식을 꾸짖으셨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의 더러움을 드러내셨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영원의 뒤바뀜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뜬금없이 툭 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앞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외식은 사람을 실족시킵니다. 탐욕은 사람을 실족시킵니다. 은혜 없는 종교는 사람을 실족시킵니다. 회개 없는 지식은 사람을 실족시킵니다. 그리고 그 실족의 폐허 위에 미움과 단절이 쌓이면 공동체는 피를 흘리듯 무너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족을 경고하시고, 책망을 명하시며, 용서를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거룩한 흐름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상처가 생기고, 상처가 생기면 진실한 책망이 필요하며, 책망 뒤에 회개가 있으면 반드시 용서가 흘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호흡입니다.

주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여기서 “실족하게 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σκάνδαλα(스칸달라) 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기분 나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덫의 방아쇠,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 영혼을 죄로 끌어당기는 장애물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실족은 단순한 감정의 상함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믿음을 흔들고 하나님께로 가는 발걸음을 비틀어 버리는 일입니다. 사람을 죄로 유도하는 것, 은혜를 오해하게 만드는 것,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드는 것, 작은 믿음을 짓밟는 것, 약한 양심을 무너뜨리는 것, 이것이 바로 실족입니다.

예수님은 “없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세상에는 유혹도 있고, 상처도 있고, 넘어짐도 있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자동으로 천국의 완성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들이 은혜로 부름받아 함께 걸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연약함이 있고 부딪힘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면서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결코 “그러니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이 아닙니다. 주님은 죄의 현실을 아시지만, 죄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죄를 가장 아프게 느끼시고, 죄가 연약한 영혼에게 끼치는 파괴를 가장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놀라운 경고를 주십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 말씀은 매우 무겁습니다. 듣는 귀가 떨릴 정도로 엄중합니다. 연자맷돌은 사람이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짐승이 끄는 큰 맷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무거운 돌이 목에 매인 채 바다에 던져진다는 것은 철저한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주님은 과장된 비유를 통해 무서움을 증폭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 너무 가볍게 여기는 죄의 무게를 원래의 무게로 돌려놓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함부로 다루는 종교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작은 자의 눈물을 하나님은 크게 들으십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단지 어린아이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이들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문맥상 이 표현은 믿음이 약한 자, 상처받기 쉬운 자, 아직 단단하지 않은 자, 갓 은혜의 문턱을 넘은 자, 연약한 양심을 가진 자를 넓게 가리킵니다. 주님은 강한 자의 논리가 아니라 작은 자의 눈물 편에 서십니다. 사람들은 종종 강한 자의 성공을 존경합니다. 말 잘하는 자, 아는 것이 많은 자, 영향력이 큰 자를 높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은 자 하나가 넘어지는 것을 천하보다 크게 보십니다. 이것이 예수의 심장입니다. 이것이 목자의 눈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를 실족하게 했는가. 내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을 닫게 하지는 않았는가. 내 거친 판단이 누군가를 예배에서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는가. 내 위선이 누군가로 하여금 “교회가 다 그렇지”라고 말하게 하지는 않았는가. 내 은밀한 죄가 가정의 영적 공기를 병들게 하지는 않았는가. 부모의 분노가 자녀의 믿음을 짓누르지 않았는가. 직분자의 자존심이 성도의 상처 위에 올라타지는 않았는가. 말씀을 아는 사람이 사랑을 잃어버려, 진리를 말하면서도 생명을 죽이지는 않았는가. 옳음의 칼날을 휘두르면서도 눈물의 손수건은 들지 않았는가. 우리는 자주 큰 죄만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누군가를 실족시키는 차가운 표정, 얕잡아 보는 농담, 은혜 없는 충고, 회복 없는 정죄, 사랑 없는 정통, 이것도 심판대 앞에서 가벼운 일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실족은 늘 노골적인 악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건의 외투를 입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는 진리를 지킨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의를 지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공동체의 질서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체면을 지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거룩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랑을 잃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리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왜곡된 신앙은 작은 자를 짓누릅니다. 은혜로 살려야 할 사람을 율법주의로 질식시키고, 품어야 할 사람을 비교로 찌르고, 기다려야 할 사람을 조급함으로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족을 단지 도덕적 실수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영적 범죄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공포 속에만 세워 두지 않으십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헬라어로 προσέχετε ἑαυτοῖς(프로세케테 헤아우토이스), 곧 “너희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남을 감시하라”가 아니라 “너 자신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자기 마음에는 안대를 두르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동체의 거룩은 감시의 열심으로 세워지지 않고, 자기 성찰의 눈물로 지켜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의 교만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남의 죄를 바로 다룰 수 없습니다. 자기 상처만 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 죄 앞에 무릎 꿇어보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회개를 기다려 줄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내 입술이 조심해야 하고, 내 표정이 조심해야 하고, 내 조급함이 조심해야 하고, 내 열심이 조심해야 합니다. 열심도 성령 안에 있지 않으면 폭력이 됩니다. 진실함도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 칼이 됩니다. 원칙도 은혜 안에 있지 않으면 사슬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관계가 “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자기 확신 속에서 무너졌습니까. 문제는 틀린 말만이 아니라, 옳은 말을 틀린 심장으로 한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말의 내용뿐 아니라 말의 영을 보십니다. 우리의 충고뿐 아니라 충고 뒤의 냄새를 맡으십니다. 그 냄새가 그리스도의 향기인지, 아니면 상한 자아의 연기인지 주님은 아십니다.

이제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여기서 “경고하라” 혹은 “책망하라”에 해당하는 말은 ἐπιτίμησον(에피티메손) 입니다. 이것은 차갑게 망신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불러 주되, 그 영혼을 버리지 않는 사랑의 권면입니다. 복음은 죄를 축소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덮어두고 모른 척하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갈등이 싫어서 죄를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결국 형제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상처를 두려워하여 수술을 포기하면 병은 깊어집니다. 참된 사랑은 죄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죄를 무시하는 힘이 아니라, 죄를 정직하게 드러내고도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 책망은 복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동안 참았는데 이제 말하겠다”는 식의 폭발은 성경적 책망이 아닙니다. 성경적 책망은 상대를 이기려는 욕망이 아니라 상대를 회복시키려는 눈물에서 나옵니다. 책망의 목적은 창피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공개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책망하기 전에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의를 깨뜨려야 합니다. 내 안에 “저 사람을 바로잡겠다”는 교만이 아니라 “주님, 저도 저럴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책망이 정죄가 아니라 회복의 문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여기서 “회개하다”는 말은 μετανοήσῃ(메타노에세) 로,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용서하라”는 말은 ἀφήσεις(아페세이스) 혹은 어근 ἀφίημι(아피에미) 에서 왔는데, 놓아 보내다, 풀어주다, 빚을 탕감하다,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기억상실이 아닙니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죄의 현실을 분명히 보면서도 그 죄를 붙들고 상대를 영원한 감옥에 가두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는 죄를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수의 권리를 끝까지 움켜쥐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루에 일곱 번입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단지 숫자 계산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인내가 바닥나는 지점까지라도 용서를 거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한두 번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상처 앞에서는 가슴이 닫힙니다. “또야?” “이번에도?” “언제까지?” 이 말이 입술 끝까지 올라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자리를 찌르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피로한 사랑, 조건부 은혜, 계산하는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실까요.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너무 과해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 아래서 보면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하루에 몇 번 죄를 짓습니까. 몇 번 마음으로 범하고, 몇 번 생각으로 무너지고, 몇 번 입술로 어기고, 몇 번 무심함으로 거역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반복해서 넘어갑니다. 같은 죄, 같은 약함, 같은 어리석음으로 다시 찾아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다. 너는 늘 그렇다. 더는 못 믿겠다”고 하셨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가 하나님의 반복적 자비입니다. 매일 아침 새로우신 긍휼, 또다시 십자가로 부르시는 은혜, 또다시 씻기시는 보혈, 또다시 문을 열어 주시는 사랑, 그것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그러므로 용서 명령은 우리를 짓누르는 율법적 요구가 아니라, 먼저 용서받은 자의 존재 방식을 가르치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개혁주의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는 스스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지 않으면 은혜를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도덕적 수양 강좌가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 되십시오”가 아닙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 없이 너희는 이런 공동체를 결코 만들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실족시키지 않는 입술도, 진실하게 책망하는 용기도, 진심으로 용서하는 심장도,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오직 십자가 아래에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를 가장 철저히 드러내면서도 죄인을 가장 완전하게 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는 죄가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에서는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그 끔찍한 죄인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로 선포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책망하면서도 죄인을 사랑하는 일, 회개를 요구하면서도 용서를 거부하지 않는 일, 이 양면의 긴장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 주는 곳이 바로 갈보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참된 “작은 자”들을 품으신 분이셨습니다. 세리가 가까이 왔고, 죄인들이 곁에 앉았고, 상한 갈대 같은 인생들이 주님 앞에 몰려왔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죄를 덮어둔 것이 아니라, 회개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를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돌을 던질 수 있는 자리에서도 주님은 손을 내밀어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지 윤리 규정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는 창문입니다. 주님은 거룩을 사랑하시기에 실족을 미워하시고, 사랑을 사랑하시기에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균형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를 말하면서 죄를 흐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를 말하면서 용서를 잃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둘 다 놓치지 않으십니다. “죄를 범하거든 책망하라.” 이것은 진리입니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이것은 은혜입니다. 진리 없는 은혜는 값싼 위로가 되고, 은혜 없는 진리는 차가운 폭력이 됩니다. 복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진리와 은혜가 입맞추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영원히 죄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거룩을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 앞에서 문을 닫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눈물로 권면해야 하고, 열린 팔로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족시키는 죄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강단에서만 있는 것도 아니고, 큰 사건에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방의 날선 말 속에 있고, 부부의 무시 속에 있고, 부모의 과도한 기대 속에 있고, 형제의 경쟁 속에 있고, 직분자의 냉소 속에 있고, 오래된 상처를 붙잡은 침묵 속에 있습니다. “나는 말 안 했으니 괜찮다”가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이 더 깊은 실족이 됩니다. 누군가 죄로 무너져 가는데도 사랑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 것, 누군가 눈물로 도움을 청하는데도 귀찮아서 돌아서는 것, 누군가 회개하고 돌아오는데도 이미 꼬리표를 붙여 놓고 끝내 받아주지 않는 것, 이것도 작은 자를 넘어뜨리는 일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냐, 아니면 조용히 무너뜨리는 사람이냐.

그리고 이 본문은 상처받은 사람에게도 말씀합니다. 혹시 누군가의 죄 때문에 오래 아파한 분이 있습니까. 누군가의 무책임 때문에, 누군가의 거짓 때문에, 누군가의 냉정함 때문에, 교회가 싫어지고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진 분이 있습니까. 주님은 당신의 상처를 가볍게 보지 않으십니다. “그쯤은 참아”라고 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실족하게 한 자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상처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당신의 눈물은 하늘에서 무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의 편에 서십니다. 그러니 당신은 억울함 속에서도 정의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은 당신에게도 십자가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회개가 찾아올 때, 십자가에서 받은 은혜로 용서할 힘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사실상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필요로 합니다.

본문 바로 다음 절에서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외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벅찼으면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실족시키지 않고 살기 어렵습니다. 사랑으로 책망하기 어렵습니다. 반복해서 용서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니 “주여, 내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강한 사람의 기술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상처를 신분처럼 입고 삽니다. 믿음이 없으면 과거의 죄가 현재의 관계를 영원히 지배하게 둡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न्याय와 하나님의 자비를 함께 붙듭니다. 믿음이 있으면, 내 심장의 응어리를 십자가 아래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한 실화를 떠올려 봅니다. 코리 텐 붐은 나치 수용소의 참혹한 시간을 겪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유대인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수용소에서 그녀의 사랑하는 언니는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녀는 여러 곳을 다니며 하나님의 용서를 전했습니다. 어느 날 집회가 끝난 후,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이 있던 수용소의 간수였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도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당신의 용서도 받고 싶습니다”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코리 텐 붐의 마음은 얼어붙었습니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굶주림, 모욕, 죽음의 냄새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순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속으로 짧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손만이라도 움직이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내밀었을 때, 차갑게 굳었던 마음에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적입니다. 용서는 상처가 없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보다 큰 십자가가 임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상처가 즉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상처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실 때, 우리는 복수 대신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서는 망각이 아닙니다. 용서는 죄를 미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지혜를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 없는 악을 무조건 신뢰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본문은 분명히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값싼 화해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가 없는 자리에서 상처 입은 자에게만 일방적 침묵과 인내를 요구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가 찾아오고, 죄가 인정되고, 돌이키는 마음이 드러날 때에도 끝까지 문을 닫아 버린다면 그것 역시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신 문을 인간의 상처가 닫아 버리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혜롭게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움의 왕좌를 계속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을 썩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질문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너는 사람을 넘어뜨리는 사람인가, 세우는 사람인가. 너는 죄를 보고도 사랑 없이 덮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권면하는 사람인가. 너는 회개하는 자를 계속 죄수처럼 붙들어 두는 사람인가, 아니면 십자가 때문에 놓아 주는 사람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가난해집니다. 누구 하나 스스로 의롭다고 설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순간에는 실족시키는 자였고, 어떤 순간에는 죄를 방치한 자였고, 어떤 순간에는 용서를 인색하게 한 자였습니다. 그러니 이 본문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릎 꿇게 만듭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남을 넘어뜨리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수없이 누군가의 영혼에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입니다. 나는 죄를 미워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죄에는 관대했습니다. 나는 용서를 말하면서도, 내 상처는 우상처럼 붙들고 있었습니다. 주여, 나를 새롭게 하소서.”

이제 더 깊이 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흐릅니다. 왜냐하면 인류를 실족하게 한 근원적 문제는 죄이고, 그 죄의 짐을 해결하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서로를 넘어뜨립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덫을 놓습니다. 율법은 우리 죄를 비추지만,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누가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습니까. 누가 실족의 사슬을 끊고 용서의 강을 열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버린 돌이셨으나 구원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 앞에서 걸려 넘어졌지만, 믿는 자에게는 생명의 반석이 되셨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친히 “화”를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돌아올 심판의 무게, 죄를 지은 자가 받아야 할 저주, 용서하지 않는 자의 닫힌 심장이 마땅히 받을 어두움, 그 모든 무게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화를 그분이 받으셨기에, 우리가 용서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죄 사함의 법적 근거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지입니다. 원수를 품을 수 없던 사람들이 원수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는 곳, 상처 때문에 얼어붙은 심장이 다시 피를 돌리기 시작하는 곳,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면서도 죄인에게 돌아올 길을 열어 두는 곳,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죄를 모른 척한 기도가 아닙니다. 죄의 가장 잔혹한 현장에서 드린 기도였습니다. 못 박는 손들 앞에서, 조롱하는 입술들 앞에서, 침 뱉는 무리들 앞에서 흘러나온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상처를 모른 체하는 순진함이 아니라, 상처의 중심에서 십자가를 붙드는 신앙입니다.

혹시 지금 마음속에 어떤 이름이 떠오릅니까. 나를 아프게 한 이름, 나를 무너뜨린 사건, 아직 입에 담기도 싫은 기억이 떠오릅니까. 주님은 당신의 고통을 억지로 밀어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영원한 주인 자리에 두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앞으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주님, 이 사람 때문에 내 마음이 이렇게 찢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기에, 나도 이 사람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주님, 정의는 당신이 이루시고, 내 심장은 미움의 감옥에서 건져 주옵소서.” 이것이 용서의 기도입니다. 용서는 한 번의 감정이 아닐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반복되는 순종입니다. 다시 떠오를 때마다 십자가 아래로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그 반복된 순종이 결국 영혼의 자유가 됩니다.

또한 누군가를 책망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로서, 목회자로서, 교사로서, 믿음의 선배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의 방식을 배우십시오. 먼저 자기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기도로 마음을 씻으십시오. 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욕망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죄를 분명히 말하되, 돌아올 길을 함께 제시하십시오. “네가 틀렸다”에서 멈추지 말고,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아직 너를 향해 열려 있다”까지 가십시오. 복음적 책망은 죄를 밝히는 손과 은혜를 가리키는 손이 동시에 움직입니다. 그럴 때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본문은 “일곱 번이라도 다시 오면”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반복하여 넘어지는 자에게 주시는 소망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같은 죄로 무너집니다. 그래서 부끄러워서 다시는 주님께 못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실한 회개로 돌아오는 자를 밀어내지 않으십니다. 교회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지만, 회개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눈물로 돌아오는 자를 끝까지 의심만 하는 공동체는 복음의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는 사람을 우리가 영원히 과거에 묶어 둘 권리는 없습니다. 보혈은 과거보다 강합니다. 은혜는 낙인보다 깊습니다. 성령은 폐허 속에서도 다시 싹을 틔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족하지 않게 하는 공동체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정직하게 다루고,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며, 회개를 환영하고, 용서를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을지 몰라도, 이런 공동체는 하늘의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죄보다 회복이 있고, 체면보다 진실이 있고, 경쟁보다 돌봄이 있고, 계산보다 긍휼이 있습니다. 세상은 강한 자가 이기는 곳이지만, 교회는 용서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곳입니다. 세상은 기억하여 복수하지만, 복음은 기억하면서도 그 기억 위에 은혜를 덮어 새 길을 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가정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실족시키는 말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율법으로 눌러 넘어뜨리지 말고, 복음으로 세워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연약함을 조롱으로 다루지 말고, 공경 속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새신자를 평가의 눈으로 보지 말고, 작은 자를 품으시는 예수의 마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오래 신앙생활한 사람은 자신이 기준이 되려 하지 말고, 십자가가 기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직분은 권위의 휘장이 아니라 섬김의 수건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기도 속에서, 회의 속에서, 가정 예배 속에서, 이 본문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는 예수님 앞에 홀로 서야 합니다. 실족하게 한 죄를 회개하십시오. 오래 붙들고 있는 미움을 회개하십시오. 사랑 없는 책망을 회개하십시오. 진실 없는 침묵을 회개하십시오. 반복되는 죄로 인해 낙심한 마음도 주님께 가져오십시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입술을 부드럽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눈물 있게 하시고, 우리의 손을 화해의 손으로 바꾸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돌 같은 심장이 살처럼 부드러워집니다. 원망의 언어가 중보의 언어로 바뀝니다. 심판하려던 시선이 품으려는 시선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이 십자가 앞에서 녹아내리는 데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면, 그 고백을 숨기지 마십시오. 주님께 그대로 가져오십시오. “주님, 저는 못합니다”라고 울어도 됩니다. 사실 그 고백이 시작입니다. 용서는 할 수 있는 사람의 자신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할 수 없는 사람이 성령을 붙들 때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는 너무 많은 사람을 실족하게 했다”고 무너지는 분이 있다면, 그 절망도 주님께 가져오십시오. 베드로도 넘어졌고, 바울도 과거에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무너진 자를 다시 세우시는 주님이십니다. 회개한 자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당신의 실패가 마지막 문장이 아닙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언제나 새로운 문장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것은 두려움의 말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를 보호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는 자를 다시 세우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당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실족을 미워하고, 회개를 기다리며, 용서를 흘려보내는 삶, 이것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으로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마음을 굳게 닫아 두지 마십시오. 미루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지금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실 때, 그 소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용기를 내십시오. 먼저 회개해야 할 죄가 있다면 숨기지 마십시오. 먼저 품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팔을 펴십시오. 먼저 책망해야 할 형제가 있다면 사랑으로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예수께 가십시오. 사람에게 하기 전에 하나님께 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 바르게 설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낮아지지 않는 사람은 형제를 세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와 가정과 심령 가운데 이런 은혜를 허락하시기를 원합니다. 누군가를 실족시키던 우리의 무딘 발걸음이 멈추게 하시고, 누군가의 죄를 사랑 없이 대하던 우리의 거친 손길이 부드러워지게 하시고,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던 우리의 완고함이 성령의 불길 앞에 녹아내리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정죄의 공동체”가 아니라 “회개와 용서의 공동체”가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상한 자가 살아나고, 넘어진 자가 다시 일어나고, 부끄러운 자가 보혈로 씻김 받고, 지친 자가 안식을 얻고, 작은 자가 보호받고, 큰 자는 더 낮아지는 은혜가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용서는 우리의 감정이 완벽해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충분하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실족시키지 않는 삶도, 사랑으로 책망하는 삶도, 반복해서 용서하는 삶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상처보다 큰 사랑으로 부르시고, 죄보다 깊은 은혜로 감싸시며, 넘어짐보다 강한 손으로 붙드십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서는 무너진 관계에도 다시 봄이 올 수 있습니다. 굳어진 마음에도 다시 강물이 흐를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영혼에게는 언제나 돌아올 문이 있고, 십자가를 붙드는 공동체에는 언제나 다시 일어설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실족의 어둠 앞에 머물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리는 용서의 빛으로 걸어가십시오. 그 빛은 오늘도 꺼지지 않았고, 그 은혜는 아직도 당신과 우리 모두를 새롭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묵상 포인트

이 본문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경고와, 회개하는 형제를 끝내 밀어내지 말라는 명령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실족은 단순한 서운함이 아니라 타인의 믿음과 영혼을 흔드는 영적 범죄이며, 용서는 단순한 감정 정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받은 은혜의 열매입니다. 본문을 묵상할 때 “나는 누구를 넘어뜨렸는가, 나는 누구를 사랑으로 권면해야 하는가, 나는 누구를 아직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가”를 깊이 물어야 합니다.

강해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 안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실족을 경계하라는 것, 죄를 책망하라는 것,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실족이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외부의 충격이라면, 책망은 무너짐을 방치하지 않는 내적 치료이며, 용서는 회개한 자를 다시 공동체 안으로 살려내는 복음적 회복입니다. 본문은 진리와 은혜, 거룩과 자비를 함께 붙드는 교회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주석

“작은 자”는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 상처받기 쉬운 자, 공동체 안의 약한 자를 포함합니다. “연자맷돌”의 이미지는 실족시키는 죄에 대한 심판의 무게를 극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하루에 일곱 번”은 문자적 횟수의 계산보다 완전성과 반복성을 나타내며, 회개하는 자를 인내로 받아들이라는 명령입니다. 본문은 죄를 덮어두는 침묵도, 회개를 거부하는 완고함도 모두 경계합니다.

원어 주석 (히브리어-구약 / 헬라어-신약)

구약의 배경으로는 מִכְשׁוֹל(미크숄) 이라는 히브리어를 떠올릴 수 있는데, “걸림돌, 넘어지게 하는 것”의 뜻을 가집니다. 이는 타인의 발 앞에 장애물을 두는 영적 의미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용서와 관련해서는 סָלַח(살라흐) 가 중요한데,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자비의 행동을 가리킬 때 자주 쓰입니다.

신약의 핵심어는 σκάνδαλα(스칸달라) 로, 덫, 걸림돌, 죄에 빠뜨리는 유혹을 뜻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προσέχετε ἑαυτοῖς(프로세케테 헤아우토이스) 로, 자기 성찰과 영적 경계를 요구하는 강한 명령입니다. “책망하라”는 ἐπιτίμησον(에피티메손) 으로, 파괴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엄중한 권면입니다. “회개하거든”은 μετανοήσῃ(메타노에세), 마음의 방향 전환을 뜻하며, “용서하라”는 ἀφήσεις / ἀφίημι(아페세이스 / 아피에미) 로, 죄의 빚을 놓아 보내고 붙들어 매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금언

실족은 한순간의 말로도 시작되지만, 용서는 십자가를 오래 바라본 눈에서 시작됩니다.
죄를 말하지 않는 침묵은 사랑이 아닐 수 있고, 용서하지 않는 정의감은 복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회개를 환영하지 않는 공동체는 거룩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작은 자를 품는 태도가 곧 예수님의 심장을 닮아 가는 길입니다.

신학적 정리

이 본문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동시에 은혜로 세워지는 공동체의 윤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인을 실족시키고, 반복되는 상처 앞에서 용서를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단순한 도덕 명령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역사 안에서만 가능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요청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용서의 근거를 마련하셨고, 교회는 그 용서를 역사 속에서 구현하는 공동체로 부름받았습니다.

주제별 정리

거룩은 죄를 죄라고 말하는 데서 드러나고, 은혜는 회개하는 자를 다시 품는 데서 드러납니다. 실족 방지는 공동체의 보호 사역이며, 책망은 회복 사역이고, 용서는 복음의 열매입니다. 이 세 가지가 분리되면 공동체는 율법주의나 방임주의로 기울어집니다. 세 가지가 함께 살아 있을 때 공동체는 복음적 균형을 유지합니다.

목회적 정리

교회는 약한 자를 평가하기보다 보호해야 하며, 죄를 방치하기보다 사랑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직분자는 영향력이 큰 만큼 더욱 자기 자신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언어와 태도가 자녀에게 실족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상처 입은 성도에게는 정의와 위로를 함께 선포해야 하며, 회개하는 성도에게는 낙인 대신 회복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오늘 나는 누군가를 실족하게 한 말과 태도를 회개하겠습니다.
죄를 덮어두는 비겁한 침묵이 아니라, 사랑으로 권면하는 용기를 구하겠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을 과거에 가두지 않고, 십자가 때문에 다시 받아들이는 마음을 구하겠습니다.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감정을 믿기보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겠습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가 정죄의 분위기보다 회개와 용서의 공기를 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𝕱𝖚𝖑𝖑𝕾𝖔𝖚𝖗𝖈𝖊 : 𝕬𝖗𝖙𝖎𝖋𝖎𝖈𝖎𝖆𝖑 𝕴𝖓𝖙𝖊𝖑𝖑𝖎𝖌𝖊𝖓𝖈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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