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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시 13:1-6)

by 【고동엽】 2022. 1. 21.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시 13:1-6)

 

 

성도에게 임한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시편 13편1-2절에서 “어느 때까지?” 라는 질문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시나이까?
어느 때까지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숨기시겠나이까?
어느 때까지 근심하여야 하나이까?
어느 때까지 원수가 자랑하게 내 버려두시나이까?
“어느 때까지?”를 설교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오늘 제목에 동감하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계신다고 하여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 있는 성도는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필독서라고 추천받은 책이 일본인 엔도우 슈사쿠의 소설「침묵」이었습니다. 17세기 도꾸가와 봉건통치 시대에 자행된 기독교에 대한 극렬한 박해를 다룬 역사 소설입니다. 내용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인 두 농부가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 위에 세워진 나무 십자가에 묶여집니다. 그 두 농부는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언덕 위에 숨어서 보고 있던 선교하러 왔던 포르투갈인 신부는 너무나 괴로워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한단 말인가? 존재하신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 도대체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그가 붙잡혔을 때, 배교하지 않으면 기독교인들을 죽일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배교합니다. 예수님께서 배교하라고 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이 나 자신에게도 일어날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2007년 4월 18일 터키에서 세 아이의 아버지인 독일 선교사 틸만과 두 명의 터키인 그리스도인 네자티 목사와 우구르 형제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슬람 단체의 회원들이 거짓으로 신자가 되겠다고 성경공부를 하다가 세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녹화까지 하면서, 세 시간 동안이나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틸만은 156번이나 칼에 찔렸고, 네자티는 99번 그리고 우구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찔렸습니다. 상세한 설명을 못할 정도입니다. 신체의 부분들을 파괴하였습니다. 심한 것은 다른 형제가 당하는 그러한 고통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2007년 7월에는 아프카니스탄에서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청년이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하나님은 왜 가만 계시는 것일까요? 때로 하나님께 분노하게 됩니다.

1980년 광주항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어갈 때, 연세대학교 채플에서 한 김흥겸이라 신학생이 대표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하나님 이제는 당신이 회개하셔야 할 때입니다’라는 충격적인 말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못해 먹겠습니다. 우리 보고 회개하라고요? 우리가 죄인이라고요? 정말 울며불며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이요, 죄인 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 보고 하라 말고 당신이 한번 이 땅에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그래요.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해요. 그런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독재자가 백주 대낮에 수천 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당신이 선택했다는 우리도 아무 것도 못했지만 당신은 또 무엇을 했는가요? 우리를 시키지 말고 당신이 직접 해보라니까요. 정말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의 실패작인 우리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당신, 바로 당신 야훼 하느님입니다. ...불쌍한 하느님, 우리 같은 것을 앞세워 하느님 나라를 만들겠다는 하느님, 당신이 그래도 절 사랑한다면 이 길을 가다가 변절하기 직전에 죽여주소서. 그렇게 사랑하셔서 당신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런 절망의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윗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3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자신이 하나님을 잊고 부인하고 죽어버릴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울 것 같아서 또 두려워합니다.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하던 다윗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3절에서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그렇습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보게 되면 어떤 절망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집사의 순교 장면을 봅니다. 스데반집사는 믿음 좋고 성령충만하고 칭찬듣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일찍 죽은 것이, 그것도 돌에 맞아 순교한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인 스데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순교의 순간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눈이 열려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행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나니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는 것으로 너무나 감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문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 그리고 그 영광까지 다 받아 누리고 내가 준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져야 할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그 십자가를 어찌 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훗 날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오? 그런고로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역경에 처해있는 분이 있으십니까? 너무도 오랜 기간 동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믿을 수 없어!” 탄식하며,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조차도 포기하려고 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아니라 할지라도 앞으로 그런 상황을 만날 때, 준비되셨나요?
눈이 열리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영생의 소망을 바라보십시오.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절망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십니다. 찬송하게 해 주십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국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이나 능력이나 복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반드시 실망하고 무너집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고 어두운 시절이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기도 응답이 지연되고 악이 세력을 얻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 조차 가리워지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베드로는 성령충만 후 죽을 위기에서도 살아났고 그가 설교하니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역시 동일하게 성령충만하였으나, 그가 설교하니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능력, 복만 믿는 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늘 함께 하심을 알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기꾼이 아니다,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소망이 없고 좌절이 와도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함께 하시니까요! 모든 것이 설명될 때, 나는 내 믿음이 신원될 것을 확신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으로 드러나실 것입니다.” “주님, 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언젠가 이 모든 것이 설명될 날이 올 것을 확신합니다. 그 때까지 저는 주님 편에만 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상황들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우리는 그 어둠 가운데 무너지지 않고 주님과 함께 어려움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위기가 지난 후 우리 영혼은 주를 향해 더 강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죄로 풀무불에 던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자기를 죽이려하는 느브갓네살 왕 앞에서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단 3:17-18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을 진정 믿는 자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번 코스타에 오신 목사님 중에 인기절정의 가수 시절 대마초를 피웠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갔던 분이 계셨습니다. 이종용목사입니다. 전 교인을 큐티하게 하며 교회를 훌륭하게 이끄시는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가수 시절에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뮤지컬에서 예수님 역을 했는데, 250회 공연을 했으니 연습까지 포함하여 1,000번도 더 예수님 역할을 했답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느껴보려고 사 복음서를 수없이 읽고, 매 순간 예수님처럼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던 어느 순간, 삶이 달리 보이고, 사람이 달리 보이고, 찬양을 하면 눈물이 흐르고 좋아하는 것이 달라지더랍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임을 고백하고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저는 영성일기를 쓰면서 제일 먼저 감사할 것부터 고백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감사할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감사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영성일기를 쓰면서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 코스타에 가면서 비행기에서 멀린 케로더스 목사님의 [걸으면서 뛰면서 감사찬송]이란 책을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인디아나 주에서 목회하시다가 하나님께서 강권하여 캘리포니아로 임지를 옮기면서, 한달 동안 휴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사짐을 트레일러에 싣고 온 가족이 차를 타고 휴가를 떠났는데, 도중에 큰 교통사고를 당하여 차도 짐도 다 잃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이 없이 그날 밤 근처 조그마한 호텔 방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캐로더스 목사님은 늘하던대로 교통사고가 난 것을 감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모든 일에 감사합시다, 찬송합시다 하는 메세지로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그 때 함께 하던 아들이 화를 내었습니다. “솔직히 나는 우리 식구들이 바보같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고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다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쓰레기더미로 변했어요. 우리 자동차는 날아가 버렸고 휴가도 망쳤고 이젠 우린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을 찬양하신다구요? 나는 그것이 진심인지 믿을 수 없어요!” 그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주님은 역사하셨습니다. 모든 차량과 짐에 대하여 보험금이 나왔습니다. 그 사고로 인하여 전도의 열매가 일어나고 죽어가는 자가 살고, 그 마을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은 멋있는 휴가 여행도 경험하였습니다.

코스타에서 가장 큰 은혜, LA 노진준목사님은 생후 8개월에 소아마비 장애가 생겼고, 고1 때 목사가 되기로 서원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될 겁니다. 다리 좀 고쳐주옵소서. 믿음으로 기도하면 고쳐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기도를 들어주실까? 신유집회마다 참석했고, 미국 어느 교회 신유집회에 참석해 간절히 기도해 주는 목사에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설교 때 시험이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낫는다.” 분노하여 상담을 했습니다. 정말이예요? 무슨 병이든지? 화가 나서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낫지 않았잖아요? 하고 질문하려니,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지?” 하더랍니다. 응답받았습니까? 고침받았다!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달라고 세 번 기도했을 때 응답받았다. “네가 받은 계시가 너무 커서” 그 응답 후 육체의 가시를 거두어 달라고 또 기도했을까? 고침받은 것이다. 주님의 나라,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서 유익한 것이라면 축복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노진준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고백하였습니다. “그 날 나도 고침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하다면? 정말 그랬습니다. 그의 장애가 영광으로 보였습니다. 그의 메시지에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터키에서 순교한 세 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장례식은 정말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수천의 터키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알려지면 다음 공격의 대상이 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장례식에 참석하여습니다.
얼마 후 터키의 주요 신문의 전면에는 틸만 선교사 사모님이 텔레비전 회견에서 용서를 선포하는 장면을 내보냈습니다. "그래도 T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남편을 죽인 터키인들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기자들에게 말했습니다.“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어떤 칼럼니스트는“천명의 선교사들이 천년 동안 할 수 없었던 것을 그 한마디로 말했다.”라고 썼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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