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차 케리그마신학세미나 프로토콜
10. 고독
“고독”(고립, 격리)은 신학을 위협하는 외적인 요소로, 그것은 신학이 모든 사람들의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인정과 참여를 통해 지지를 얻고 모든 사람들과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작업이 아님을 의미한다.
신학적 인식, 신학적인 사고, 신학적인 언표는 결코 보편적인 인식, 사고, 언표가 아니요, 보편적인 것이 신학적인 것도 될 수 없다. 신학은 타학문들과의 관계에서 그것의 특수성과 고독 때문에 아무리 큰 고통을 느낀다 해도 감수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신학을 고독하게 만드는 신학의 특수성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신학자를 신학자답게 하는 뒤흔들어 놓는 충격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인 신앙-하나님의 말씀을 긍정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유의 사용-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경험은 모든 다른 인간의 경험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특수한 신학적 사고의 위탁을 받았는데, 이는 독특한 성격을 띤 ‘신앙의 지성’(intellectus fidei)으로서 항상 고독한 길을 걷는다.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동기 지워진 질문과 대답이 아니라 인간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동기 지워진 질문과 대답이기 때문이다.
셋째, 신학의 중심테마는 새로운 우주 속에서의 새로운 인간이기 때문에 그 책임에 있어서 비판적이고 항상 혁명적인 일을 수행한다. 따라서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의 사고와 언어에 있어서 실천적 영역의 현장에 직면하여 다른 사람들과 상충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11. 의심
신학을 위협하는 두 번째 형태는 신학자체 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더 위협적인데, 이것은 “의심”(der zweifel)이다. 의심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로 신학을 위협한다.
첫 번째 측면은 신학활동 전체의 본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의심은 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나타난 계시의 내용을 묻고, 이 화해의 행동을 통해서 성취된 신적인 언표를 항상 새롭게 탐구하며, 이 언표의 진리성과 현실성을 항상 새롭게 발견하는 신학의 진리물음에 관련하여 일어난다.
두 번째 측면은 신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이 의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성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로고스의 탐구로써 신학을 기초시키며 요구하는 하나님의 현존과 행동을 의심하며, 신학적인 자유를 의심한다. 이런 의심을 하는 인간의 사고는 인간의 근원과 목적으로부터 소외된 병든 사고로 치유의 능력을 힘입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신학을 내부로부터 위협하고, 파괴하며, 분열시키는 의심의 세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세들과 권력들의 무시무시한 힘이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항할 때이며, 둘째는 신학자에게 알려진 교회의 연약성, 불일치, 부패된 모습 및 부패된 설교에도 그 원인이 있을 수 있으며, 셋째는 신학자의 사생활의 구조가 지닌 결점에 있을 수 있는데 신학자가 두 왕국의 체계에 빠져 신학의 대상 곧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신학적 사고, 언어, 행동 이외에 자의적인 혹은 저 대상과 무관한 사고, 언어 및 행동을 스스로에게 허용하거나 신학적인 과다한 편중과 지나친 강조로 신학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여 창조의 세계에 무관심한 신의 운명적 역할을 하게 됨으로 조만간 과격한 회의에 빠지게 된다.
12. 시험
“시험”은 위로부터 오는 위협이다. 시험의 위협은 그 어떤 위협보다도 신학자에게 가장 강력한 위협인데, 그 이유는 이 시험의 주체가 곧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신학적 작업들, 신학자의 연구와 수고, 목사들의 설교, 선교 등 각종 하나님을 위한 일들이 하나님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모든 신학자들의 일련의 작업들은 헛된 것이며, 무익한 것이다. 오직 신학은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고 유용할 수 있다. 이것이 가시화되고 정당화되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불에 노출되어 통과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시험이다. 또한 이 시험은 신학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엄격한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시험은 도피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시험을 참고 견디고 통과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신학은 기쁨에 찬 학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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