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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많은 역사와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또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출생과 생애, 그리고 그들의 신앙 상태와 죽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말씀에서 각자 나름대로 느끼고 또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바가 있겠습니다마는 특별히 제 개인적으로 늘 마음에 걸리는 두 가지 죽음의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들은 언제나 제게 경종(警鍾)이 되고 신앙 생활에 다시 한번 각성(覺醒)을 주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의 본문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고, 또하나는 구약성경에 있는 모세의 죽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처럼 40년 동안 많은 수난 속에서 그 백성을 인도해 내는 철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해도 모세만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세는 비스가산 언덕에서 저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죽었습니다. 정말 섭섭한 일입니다. 모세같이 위대한 지도자가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생을 끝내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로서는 정말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입니다. 어찌 이렇게까지 무섭게 죽었어야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부는 불과 세 시간 간격으로 둘 다 죽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가 이토록 큰 것이었나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5장에 있는 그 당시의 교회의 사정은 오순절 이후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표적과 기사가 충만하고 유무 상통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알아서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행 2:43-46). 그리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현재적으로 실감하면서 모여진 거룩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아름다운 교회에 어떻게 옥에 티와 같은 이 같은 사건이 있을 수 있었나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살인죄나 간음죄 또는 도둑질과 같은 유형의 죄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을 내어 헌금을 했고 봉사를 했으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섬긴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바치다가 죽었습니다. 봉사하지 않은 사람도 많은데 이들은 봉사하다가 죽게 되었단 말입니다. 정말 난처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바치지 않았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인데 괜히 바치겠다고 나섰다가 웬 봉변입니까? 요새 말로 업적주의, 결과주의로 보면 그만큼이라도 바쳤으면 고마운데,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여기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는 물량적으로 평가할 문제가 아닙니다. 업적과 결과에 의해서 말할 것도 아닙니다. 양보다 질이 문제요 내용이 문제이며 그 목적이 문제인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서 십일조만 바쳐도 되는데, 가령 절반만을 바쳤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것도 많이 바친 것인데 어찌 그것이 죽을죄가 되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벌을 내린다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서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 것 같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정말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라고 하는 이름은 여호와의 은총이라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은총이 없었습니다. 또한 삽비라라는 이름은 즐거움이라고 하는 보석의 이름으로 아름답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둘 다 그들의 이름에 역행하는 불행한 삶을 살고 갔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계시적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처음 세워지면서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오순절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어서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표본적으로 교훈적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교회에는 유무상통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성령도 있고 믿음도 있으며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표본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모양의 죄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즉 모든 죄인들이 다 나와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라도 나오는 것을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그뿐입니까? 교회는 영적 병원입니다. 여러분, 병원에 가서 보면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온통 환자 투성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교회는 신령한 병원이므로 영적으로 병든 여러 모양의 사람들이 나와서 통회 자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이것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악은 제하라는 무서운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5장의 이야기는 앞에 있는 4장의 마지막 절과 연결해서 읽어야 쉽게 이해되는 내용입니다. 4장 마지막 절은 "바나바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는 교회에서 존경을 받는 분으로 여유가 좀 있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갖다 맡기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되어지는 이야기는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은 바나바를 높이 존경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귀중한 땅을 팔아 모두 바쳤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하고 훌륭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높이 칭송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속에서는 종교적 허영심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그런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사실 남에게 존경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밭 한 마지기 팔아서 존경받을 수 있다면 해야 되겠다고 간단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특수한 죄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도둑질이나 살인죄, 또는 우상숭배 같은 일반적인 죄가 아닙니다. 또한 죄를 강요당한 것도 아닙니다. 장발장처럼 배가 고파서, 정말 어려운 상황 아래서 빵 하나를 훔친 그런 종류의 죄도 아닙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들의 죄는 사치스런 죄입니다. 평범한 죄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들의 죄를 좀더 구체적으로 깊이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저는 이들의 죄를 세 가지로 명명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자유인의 죄입니다. 이들은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불가피성이란 전혀 없는 자유로운 상황하에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행 5:4)고, 모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에서 바칠 수도 있었고 안 바칠 수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 했어야 했느냐, 즉 왜 마귀의 시험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가운데서 자유를 그릇되게 이용한 자유 남용죄입니다. 둘째는 지성인의 죄입니다. 지성인은 본래 남들이 뭐라고 하는가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씁니다. 어느 지성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 집에 살면서 서로 별거를 하고 삽니다. 그러나 초대를 받은 경우에 한해서는 아주 정다운 부부의 행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이 부부를 잉꼬 부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집에 1년을 넘도록 다니는 파출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생각에는 이 부부가 왜 함께 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는 완전히 남남으로, 아니, 오히려 더 냉랭하게 살면서 가끔 초대받았을 때는 다정한 부부로 돌아가니 남보기에는 멀쩡한 부부였습니다. 속으로는 썩어 들어가는데 남들의 평판이 무서워 진실을 외면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고 싶어서 이것 때문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종교인의 죄입니다. 경건한 행위, 즉 선행 안에 깊이 침투된 악입니다.
처음부터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가혹하게 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선한 행위를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 하는 사람들 속에 끼어 있으면 내 마음도 함께 좋은 일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도 바나바가 땅을 팔아 헌금을 하니 자기들도 팔아서 좋은 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동기는 일단 좋았다고 보고,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땅을 팔아서 목돈을 한꺼번에 손에 들고 보니 생각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 많은 돈을 다 바칠 필요가 있겠느냐는 갈등이 생겼단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땅값 얼마를 감추었다는 것이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누가 본다고 감추었습니까? 사실 감추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 거짓말을 했느냐 말입니다. 베드로가 땅값이 이것뿐이냐고 물었을 때, 반이면 반이다 또는 십분의 일이다 라고 정직하게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얼마를 감추어 놓고 그것이 모두인 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소유욕과 인색함과 갈등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욕 위에 플러스 알파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소유욕이 경건을 넘어섰고 허영이 진실을 이기는 그런 순간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이 다냐고 물었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있는 그대로 땅값의 일부라고 진실을 대답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이 한마디를 하지 못함으로 죽어 갔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이 남의 이야기로만 들립니까? 왜 필요 없는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나 자신을 한번 뒤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보석 가게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 도둑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금덩어리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이것들을 슬쩍 집어서 가게 문 밖을 나섰습니다. 처음부터 수상하게 보고 있던 주인은 그를 붙잡아서 물었습니다. 도둑질을 하려면 사람이 없는 데서 해야지 이렇게 사람들이 보는 데서 어떻게 훔쳐 가느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도둑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주인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금덩어리를 가만히 보고 있는 동안에는 금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도둑이 금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금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둑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 순간만은 양심도 안 보이고 족보도 안 보이고 자식도 안 보이고 하나님도 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돈 이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에는 경건을 수단으로 삼은 신학적인 큰 죄가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5에 보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우선 동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동기의 변질도 있습니다.
자주 있는 일입니다만 선한 일에도 비난이 따릅니다. 가령 누군가가 헌금을 좀 넉넉하게 내 면, 돈이 얼마나 있다고 저렇게 내느냐는 빈정거림이 있습니다. 또한 고아원 등에 봉사를 하러 다니면, 제 살림도 못 챙기는 주제에 남의 일 보러 다닌다고 핀잔을 받게 되는 것이 우리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한 일에 비난은 왜 있는 것입니까? 진정 누구를 위한 일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동기를 진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비난을 들으면서 온유한 마음으로 극복하게 되면 정말로 동기가 아름다웠던 것이 되고, 만일에 비난이 섭섭하다든지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 당장 그 일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이 나면 그 동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일은 죽도록 수고하고도 누명을 쓰고 마지막에는 순교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교란 죽은 다음에 영광이지 죽을 때까지는 가장 부끄러운 바보스러운 죽음입니다. 순교사(殉敎史)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위대한 순교일수록 죽도록 수고하고 누명쓰고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할 때에 모세가 산에서 소식이 없자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송아지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것이 이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불신앙적 행위를 가장 신앙적 행위로 위장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성령을 속인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집단적인 죄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마음을 합친 것입니다. 죄를 짓는 데 서로 궁합이 맞았다는 말입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렸으면 이런 비극이 방지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두 사람의 생각이 어쩌면 꼭 같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된 것 같으나 거짓이며 화목한 것 같으나 악입니다. 여러분, 무턱대고 하나됨을 강조하여 하나되기만 하면 그만입니까? 하나되기 이전에 먼저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내용은 허영뿐이었고 화목의 모양은 있었으나 내용은 거짓이었습니다. 이들은 남의 경건을 모방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랍비가 아주 경건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한 불량배가 자기도 랍비처럼 살아 보자고 생각하여 랍비에게 가서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서 집으로 돌아온 불량배는 랍비처럼 우선 턱수염을 길렀습니다. 랍비들의 특징이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랍비는 "염소가 수염을 기른다고 랍비가 되나?"라고 의미 있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형식적인 모방이 무슨 소용입니까? 문제는 형식 안에 있는 내용입니다. 어느 거짓말쟁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딱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될지 그 방법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좀 어렵지만 한번 해 보겠느냐 하시면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에 거짓말을 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다니면서 그 때 한 말은 다 거짓이었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기 이전에는 거짓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으므로 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입니다. 어제 한 말이 거짓이라고 고백하기 전에는 내일 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실을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실업가가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자식들을 모두 모아놓고 유언하기를 "나는 실패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식들은 깜짝 놀라며, 아버지는 사업도 성공하셨고 사회 사업도 많이 하셨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는데, 실패하셨다니 무슨 말씀이냐고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동안 돈을 버느라고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며, 명예를 얻느라고 얼마나 많이 거짓되었으며, 그 위치를 지켜 나가느라고 그리스도까지 잃었단다. 이제 나는 믿음도 진실도 그리스도도 잃어버렸으니 아무 것도 없다. 완전한 실패자일 뿐이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참으로 불행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중생 없는 그리스도인이 문제입니다.
중생 없는 가정, 중생 없는 화목, 중생 없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참으로 불행한 부부입니다. 사랑과 화목과 경건이 있는 것 같았으나 허영과 거짓과 위선과 불 신앙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동기와 믿음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믿음과 진실만 추구했더라면 그들은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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