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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메시지는 성경을 통해 오고,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십자가의 위대한 사건이다/ G.메이첸

by 【고동엽】 2014. 8. 10.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메시지의 두 거대한 전제에 대해- 살아 계신 하나님, 그리고 죄의 현실- 눈이 멀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신론과 인간론은 기독교적 관점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기독교 메시지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메시지를 담은 이 책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독교적 견해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오는 계시의 기록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 주어진 계시들을 성경이 확증하고 놀랍도록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이 말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확증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은 양심에 의해 입증된 것을 확증해 준다. 성경은 또한 전적으로 세로운 계시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 새로운 계시란 죄 있는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 길은 하나님에 의해서 열렸다. 곧, 1900년 전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영원한 아들이 사람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구약성경 전체가 이 하나의 위대한 사건을 바라보았고, 신약성경 전체의 중심과 핵심이 바로 이 위대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구원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성경의 유일성이 있다. 기독교의 모든 관념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될 수 있지만, 그 다른 종교 속에 기독교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관념들의 종합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대한 서술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견해에 의하면, 그 사건이 없다면 세계는 암흑이며 인류는 죄책 아래에서 잃어버린 바 된다.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죄 때문에, 영원한 진리가 오직 절망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내어 주셨을 때 이루신 놀라운 일 덕분에 새로운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성경의 내용에 대한 이 견해는 반대에 부딪히곤 했다. 그 반대는 다음과 같다. 그렇게도 오래 전에 기록된 것을 의존해야 하는가? 구원을 위해서 곰팡내 나는 기록을 조사해야 하는가? 그 당시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노련한 연구자가 오늘날의 사제가 되며, 이 사제들의 은혜로운 개입이 없다면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인가? 그것 대신 역사에 의존하지 않는 구원, 곧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는 것에만 의존하는 구원을 찾을 수는 없는가?

 

이 반대는 복음 기록의 진리성에 대한 일차적인 증거들 중 하나를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적 경험 속에서 발견되는 증거로, 구원은 오래 전에 발생한 사건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 사건은 오늘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고 말한다. 이것은 과거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그 기록을 시험할 수 있고, 시험을 통해서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신약성경은 오래 전 어느 날 아침에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고 말한다. 역시 과거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시험할 수 있고, 시험을 통해서 예수가 정말로 오늘날 살아 있는 구주임을 발견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치명적 오류가 숨어 있다. 그것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근본 오류들 중의 하나다. 우리가 방금 말한 기독교인의 경험은 복음 메시지를 확증해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러나 그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오직 그 경험이면 된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한다. 마음속으로 지금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있다면,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관해 역사가 말하는 것과 무관하게 우리는 그 경험을 견지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성경 비평의 결과와 전적으로 무관할 수 있지 않은가? 나사렛 예수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역사가 말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의 죽음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혹은 그가 부활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역사가 무엇이라 말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여전히 영혼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렇게 유지되는 경험이 기독교의 경험이 아니라는 데 있다. 종교적 경험일 수는 있지만 기독교의 경험은 분명히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경험은 어떤 사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왔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이루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복음 메시지를 들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구속의 일을 완성함으로, 내가 성취할려고 노력하던 것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배웠다. 만약 그 일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내가 그 성취에 대한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나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내가 아직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기독교적 삶은 신약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기독교적 경험은 문서의 증거를 확증할 때 정당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로 문서의 증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복음 이야기가 등장하는 문서의 이른 연대, 저자에 관한 증거, 복음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내적인 증거, 거짓말이나 신화에 근거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 등에 의해서 복음 이야기가 시실임을 안다. 이 증거는 현재의 경험에 의해 영광스럽게 확증된다. 이 경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건져 주는, 놀랍도록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확신을 문서의 증거에 덧붙여 준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기독교 경험이 확신시켜 줄 때에 기독교 경험은 정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발생했든지 아니든지, 경험 자체가 우리를 기독교인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경험은 예쁜 꽃이며, 하나님의 선물로 대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꽃을 뿌리인 복된 책에서 끊어 내면 곧 시들어서 죽고 만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에 포함되어 있는 계시는 영원한 진리를 재확증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이 멀어 진리가 모호해졌으므로 재확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행동의 의미를 보여주는 계시이기도 하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112-116

 

출처 : 청 교 도 의 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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